<혐오는 무엇을 하는가>-루인-
시스플레인은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퀴어에게 행사할 수 있는 이원 젠더화된 권력 행동 중 하나다.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는 (이원)젠더 정치에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정치적 약자이며 권력이 없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물로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기술이다. 트랜스젠더퀴어와 비트랜스젠더를 함께 사유할 때, 비트랜스여성은 mtf/트랜스여성에 비해 어떤 형태로건 이원 젠더 권력을 실천하고 있다. 때로는 mtf/트랜스여성을 향해 이원 젠더 권력과 폭력을 실천하며 자신으의 권력과 규범성을 확인하다. 그렇다면 비트랜스 여성이야말로 mtf/트랜스여성이 살며 겪는 어려움, 고단함, 폭력을 전혀 모르는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훈계할 수 있다는 권력감. 그리고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의 진위를 가질 수 있고 진위를 가려줘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할수 있다는 권력 행위가 문제의 핵심이다. 계속해서 타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확인하는 태도, 그리고 이 태도로 구축되고 이태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논의의 핵심이다. p214
*mtf:male to female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이행
*시스플레인*
맨스플레인은 레베카 솔닛 들이 사용하며 알려진 단어로 '남성(man)'과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것이다. '오빠가 설명해줄게'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 여성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이슈에서 남성이 여성을 무시하며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지칭한다. 시스플레인은 맨스플레인을 변형한 것으로 '시스젠더(cisgender,비트랜스젠더의 다른 표현)'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것이다. (...)시스젠더 혹은 비트랜스젠더는 언제나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진짜 젠더의 삶'을 알려주겠다며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맨스플레인의 변종으로 시스플레인을 사용하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맨스플에인에서 남성은 여성의 젠더 범주를 강하게 확증하는데, 상대 여성이 여성 젠더일 때만, 맨스플레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맨스플레인은 상대방을 여성으로 만드는 행위며 성역할의 반복이자 재확인이다. 시스플레인에서 비트랜스젠더는 트랜스 젠더퀴어가 자신의 젠더 범주를 환상이나 착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범주 인식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 시스플레이니 자체는 상대가 트랜스젠더퀴어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몸직이지만, 그 과정은 트랜스젠더퀴어 범주를 지속적으로 의심한다. 정확하게 이런 이유로 시스플레인은 이원 젠더 규범을 가오하하고 단속하고 자연화할 뿐 아니라 성역할 반복을 요구하고 재확인 한다.
<남성성과 젠더>,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인의 글들은 뭐냐 이건...하며 자꾸만 생각하게 만든다.
책에서 찾아 읽지 않았다면, 단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꺼다.
내가 여성이라는 젠더를 트랜스젠더퀴어들에게 권력으로 사용했거나 하거나 할지도 모른다는것.
다시말해, 나와 다른 젠더 또는 다른 소수자들에게 나도 모르게 폭력적이었거나 이거나 일수도 있다는것.....
정희진 신간이 알리미덕에 알게된 책이다. 다른 저자들의 글도 좋았지만, 내겐 역시 정희진씨 글이 단연 백미.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필사와 같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표시해둔 부분들을 옮겨 적으면서 다시 한번 읽고 생각하게 되는거 같다.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정희진-
인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1)남성과 여성은 실제로 존재하며 2)인간은 양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3)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되고 4)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조화를 파괴하는 사람은 페미니스트이며 5)양성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통념 중 사실은 한 가지도 없다. 진실도 현실도 아니다. 일단, '과학'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수천 권의 책이 있으니 이글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성차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누적된 실천이 그것을 사실인 양 만들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남녀 차이보다 크다. 그러므로 남녀 이분법, 즉 양성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p98-99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정치학이다.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위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뿐이다. 스테판 에셀의 유명한 구정에서 보듯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는 "닭장 속의 여우가 제먹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주지 하다시피 표현의 자유는 근대 인권 사상의 핵심이며, 대표적으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말한다. 표현의 자유는 태생적으로 보편적이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편파적인'권리였다. 국가권력에 비해 약자인 개인의 목소리를 보장하기 위한,'균현이 깨진' 권리였다. 표현의 자유가 모든 이에게 똑같이 보장된다는 인식 자체가 표현의 자유의 정신에 어긋난다.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보편성을 향한 권리다. p104-105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p106-107
페미니즘은 시각이지 하나의 분과 학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시각이 철학, 경제학, 지리학, 미학, 심리학, 정치학, 문학에 녹아 있듯이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자기소개를 '여성학 강사'에서 '녹생당 당원', '지역차별 연구자','평화학 연구자'로 바꾸었다고 해서 '변절'한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나의 경우를 넘어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페미니즘은 가치관, 방법론, 인식론, 세계관이지 특정 분야에 국한된, 여러 학문 중 하나가 아니다. 더구나 젠더는 언제나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사 모든 문제가 젠더 문제라고 하 수는 없다. 젠더와 관련해서 '맥락이 있다'는 것은 젠더라는 산소가 다른 사회적 모순과 결합될 때만 '화재가 발생한다'(=젠더 현상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젠더든 계급이든 민족 모순이든 홀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 의미의 탄생 자체가 이미 상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젠더가 먼저냐 계습이 더 중요하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p109
나는 소수자도 아니고 그 대표는 더더욱 아니다. 소수자 문제? 소수자 분야? 그런것은 없다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는 폭력과 그 폭력에 편승한 권력이 있을 뿐이다.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당연히 다수라고 생각하거나 소수와 다수를 구분하는 '창조주'로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권리인가? 언어는 자기 탐구에서 시작된 행위다, 앎/삶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탐구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 전부다. p113
젠더를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 성별은 인류가 만든 위계와 불평등 중 가장 오래된 제도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 때문에 제도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문화, 무의식, 인간 몸의 일부로 체화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차별적 제도, 인간의 모든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모델이 된 것이다. 계급, 연령, 인종적 소수자, 환자,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억압, 착취, 혐오는 남성이 여성에게 한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배운'것이다.
자기 경험과 기존 인식(상식,지식,진리,과학,통념,지배 이데올로기…)이 일치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질문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삶은 편할지 모른다. 의문을 각는다 해도 자기 변화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반면 사회적 약자, 비주류(인구상으로는 절대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상과 기존 세계관이 불일치 혹은 격렬하게 불일치하기 때문에, 의문을 갖기 쉬운 조건에 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그 역사성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보인다. 이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일취월장의 성장과 변화를 맞을 수 있다. 자신이 여성임을 자각하는 것은 성별 권력 관계의 역사성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양성평등을 주장하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진 목적과 방식을 먼저 알게 된다. 이는 권력의 역사와 세계사의 반을 알게 된다는 이다. (...) 나 역시 개인적으로 '남성'과 싸운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복잡한 조직된 무지, 합의된 비윤리, 페르소나를 던져버린 뻔뻔한 얼굴들,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남긴 폐허 위에서 당항하고 있다, '을'의 위치를 기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성실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같은 삶이기를 바란다.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