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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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이야기  (2) #GF영  #현대지성
#이길상 옮김

4장. 국부 코시모
조반니 디 비치의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
장자인 코시모가  잇는다.
코시모 가계는 17세대를 이어가고, 이어 로렌초 가계가 이어진다.

코시모는 아버지의 장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잘 될 때는 역시!)

이 시기는, 2명의 교황으로 갈라진 대분열을 봉합하고자 몇 번의 공의회가 열린 시기였다. 피사 공의회, 콘스탄스 공의회를 통해 개혁은 실패했으나 분열은 봉합되었다. 1431년 바젤 공의회가 다시 열려 교회 개혁을 위한 세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이또한 완전히 실패한다.

코시모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을 때 메디치 가는 유럽 16개 수도에 은행을 가지고 있었다. 코시모는 1433년, 알비치 파에 의한 일반 시민 위에 군림하려고  음모를 꾸민 혐의로 추방 되었다가 1년 뒤 귀환한다.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됨. 정치. 학문 발전, 예술 장려, 구호소 지원을 위한 다양한 일을 처리한다.이후 몇 년 간 점진적으로 실질적이며 영구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고, 1439년  교황 유네기우스를  설득하여 바젤 공의회 장소를 피렌체로 옮기게 한다. 그는 이에 관련된 내방객들의 접대비를 자비로 맡는다.

피렌체 공의회로 인해 피렌체는 이른바 ‘새 지식‘에 의한 자극을 받는다. 코시모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할 생각을 굳혔고,  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피렌체 공의회는 1440년 이렇다할 개혁 없이 산회한다....(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네요. 사람들은 일방적인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행일치를 하지 못하는 성직자에게 실망하고, 인쇄술이 발명, 발달하면서 성경을 재해석하게 되고..)

이 무렵 이탈리아는 도시 간의 전쟁이 잇달았다. 1446년에 대대적인 전쟁이 발생했다. 밀라노 공작 필리포 비스콘티가 주도하는 밀라노,교황,나폴리vs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볼로나.  이 전쟁에서 코시모의 외교력에 힘입어 피렌체는 승리를 거두었고, 코시모의 외교력으로  (밀라노의 새권력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후원) 마침내 밀라노와 피렌체는 동맹국이 된다. (베네치아는 동맹국에서 적대국으로. 밀라노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 책을 읽다보면 어질어질 하다. 세계사를 공부할 때 통일 이탈리아를 원하던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막연하게 여겼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각 도시가 군대를 이끌고 싸우고,,그 도시 안에서도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고. 끊임없는 전란 속에 일반 서민들은 얼마나 살기가 팍팍했을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여러차례 도움을 요청했으나, 서방 국가들이 서로 반목을 일삼느라 예방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베네치아의 급격한 몰락을 가져왔고, 피렌체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오랫동안 간직해 온 고대 학문의 축적물이 피렌체에 안착한다.

코시모를 경제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그는 막대한 지출( 사비로 국가 경비 충당, 방문한 저명인사들에 대한 접대비, 학문과 예술 진흥을 위해 후원한 경비, 자선 )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배나 증식시켰다. 그의 사업의 특징은 은행가& 국가 수장으로서 자신의 막대한 은행 거래를 무기 삼아 다른 나라들을 (은밀히 ) 압박한 것이다.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도나텔로가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는데, 이 중 ‘도나텔로‘ 가 가장 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각가로서, 예술 세계를 예술의 참목표로 이끈 인도자.

중세에는 부조로 표현되었던 것을 도나텔로가 조각으로, 조토가 회화에 도입한 것 같은 혁명을 조각에 도입했다. 1432년 코시모를 위한 청동 다윗상이 대표( 중세 이후 최초의 고립된 나체상!). 청동 기마상. 얕은 부조 작품도 대단히 뛰어남 (스티아치아토 기법).

예술은 사실상 언어여야 한다. 내면의 표현인 외면, 정신으로 활력을 얻은 육체,  화육하는 영혼.
고전 예술은 완벽한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는데, 도나텔로는 플러스  정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

도나텔로의 후계자 미켈란젤로가 워낙 뛰어나지만, 도나텔로는 조각에 혁명을 일으키고, 뒤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의 참된 목표가 무엇인지 가르친 지도자이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던 프라 안젤리코도 있었다.그의 후기 작품들은 마사초의 작품을 면밀히 공부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들에는 최초로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등장한다. 자기 그림에 친구들의 초상을 도입하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였으며 초상화라는 예술의 또다른 노선을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이란 그림에서 친구 미켈로초를 그려넣었다. (사다리 세번째 계단의 인물) 그는 피렌체에서 9년간 활동했다.
1446년 교황 유니게우스 4세가 그를 로마로 초빙했고, 후임 교황 니콜라스5세가  예술 분야에 노력을 기울여 프라 안젤리코는 바티칸 성당 벽을 프레스코로 그린다. 이 프레스코는 바티칸의 모든 프레스코들 중 최초의 작품이고, 프라 안젤리코의 마지막 작품이다.

니콜라스 5세는 피렌체 메디치 도서관을 모방하여 바티칸에 도서관을 짓기 지작하고, 1457년, 비로소 바티칸 도서간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1458년 기베르티는 마침내 세례당에 부착할 두 번째 청동문 한 쌍을 완성했다. 백 년 뒤 미켈란젤로가 ‘낙원의 문에 적합하다‘고 경탄한 이 문들은 기베르티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이 두 번째 문을 만드는데 28년이 걸렸다. 첫 두 문짝을 스물세살에, 두 번째 문짝들은 일흔세살에 완성했다.

이 기이한 청동에 온 생애가 들어갔구나. (알렉상드르 뒤마)

1441년 마사초의 제자였던 필리포 리피는 ‘성모의 대관식‘이란 그림을 완성했다. 그는 도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고 친척아주머니가 근처 수도원에 수사로 보냈는데, 거기서 마사초를 만난다. 마사초는 그림에 재능이 있는 리피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그의 그림은 세속적 성격이 짙게 뭍어난다. (품행이 나빠서 받아들이는 수도원이 없었다고.)그럼에도 그의 성모상에는 따스함과 진지함, 어린이들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바사라는 그를 ‘마사초의 정신이 리피의 몸에 들어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마사초의 방법에 충실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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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는 1464년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그가 바라던 대로 장례식은 허세없이 치러졌고 처음에는 산 로렌초 성당 구 성구실에 묻혔다.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은 그에게 특별한 명예를 부여하고 싶었고. 그에게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그리고 산 로렌츠 성당의 대제단 정면에 묻었다. 성당 본당 회중석 바닥에 그의 묘비가 서있다. (유일하다고 함) 그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한 행위들이라는) 코시모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며, ‘지칠 줄 모르는 관대한 사려깊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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