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문이야기 #gf영 #현대지성 #이길상 옮김
3월1일부터 #1일1쪽현대지성 밴드 활동으로 매일 조금씩 읽는다.
지금도 메디치가 주요인물 몇 명의 역사를 다룬 저서는 여러 권 있지만, 가문 전체를 다룬 저서는 영어권뿐 아니라 이탈리아권을 통틀어도 ˝메디치 가문 이야기˝가 유일하다.
코시모 1세 초상화(표지) 및 기마상(사진)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파괴를 면한 모든 것이 점차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사방으로 창궐한 홍수에 고립 된 채 남아 있게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니콜로 피사노와 14세기에 단테, 조토, 페트라르가가 등장하여 미와 문화에 대한 의식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그 네 사람 중 셋을 배출한 도시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재력을 겸비한 가문이 일어나...그 도시를 서방의 아테네로 만들었다.
1장, 피렌체
피렌체와 경쟁도시 베네치아를 비교하며 왜 피렌체인가에 대해 말한다. 베네치아의 기록들에는 도시 자체가 전부이며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돈을 지나치게 밝혔다. 피렌체도 돈을 사랑했지만, 그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피렌체가 큰 매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풍부한 관심 때문이다.
2장, 메디치가
메디치가의 역사는 약 350년간 이어지는데, 그중 15세기와 16세기는 역사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였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후원은 인류의 다른 어떤 군주도 메디치가를 필적하지 못했고, 16세기를 뒤흔든 종교개혁 당시 2명의 교황 레오 10와 클레멘스 7세가 메디치 가 출신이었다. 이 가문은 시민들 위에 군림한 독재자였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 받으나 다른 가문들과 비교해서 더하지는 않다.
3장. 조반니 디 비치
메디치 가문 등장 이전의
피렌체 역사 복잡하네. 투쟁의 역사.
메디치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전, 유럽의 일반적인 상황도 그야말로 혼란스럽다.
이탈리아 내에서는 밀라노가 가장 컸고, 이 무렵 피렌체에 의해 유일하게 저지를 받았고
이 시기의 교황청은 1378년의 아비뇽의 유수로 교황들간의 대 분열이 일어났다. 프랑스 교황 측과 이탈리아 교황측의 대립. 진짜 교황측에 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들..분명한 것은 유럽의 절반은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ㅋ
강력했던 교권이 무너지고, 암흑의 시대가 끝나고 (신에의 갈구가 어느때보다 강력하고 절실했는데 왜 암흑의시대일까요??ㅎㅎ)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힘이 커지는 순간, 메디치가가 지도자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르네상스 시대가 오고, 이는 근대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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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피렌체 상황 및 유럽 상황이 같이 서술되어야 해서 복잡하다.
그래서 읽는 진도도 느릴 수 밖에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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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401년. 흑사병이 다시 창궐하고, 시에서는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에 두 짝의 청동문을 제작하여 봉헌하기로 한다. 조반니 디 비치를 계약 결정권자의 일원으로 임명. 그는 17년 동안 조용히 착실하게 공무를 수행했다고.
메디치가문의 기반을 견고히 닦은 인물,
평민을 향한 도량, 관대, 친절, 관심의 원칙을 아들들에게 가르쳤고, 그 원칙이 향후 3세대를 걸쳐 이 가문의 불문률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