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안개 정원 퓨처클래식 5
탄 트완 엥 지음, 공경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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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후배가 읽고 감탄하며 소개한 탄 트완 엥의 소설 “해질 무렵 안개 정원”을 읽다. 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 동서양이 만나는 말레이시아 지역이 배경이다. 그 곳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원주민, 대륙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 영국 식민지 이후 남은 유럽인이 섞여 사는 열대 우림지역이다. 세계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침략하여, 거주민들은 갖은 고초를 겪는다.



주인공 윤 링은 언니 윤 홍과 수용소로 끌려가 혼자만 살아 남는다. 종전 후, 언니를 기억하기 위해 언니가 좋아하던 일본식 정원을 꾸미기 위해, 천황의 정원사였던 아리토모를 찾아가는데, 그는 그녀을 수습 제자로 삼는다. 말레이시아 지역은 종전 후, 10여년에 걸친 공산 게릴라의 테러가 이어지고. 전쟁은 계속 진행중이다.

40여년 후, 기억상실 병변으로 판사직을 사직한 윤 링은 아리토모가 남겨준 정원으로 돌아가는데,

일본에서 다쓰지라는 학자가, 아리토모를 연구하기 위해 찾아온다.



담담한 수묵화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네와 사정이 다를 것 없는 아픈 과거의 역사가 펼져치는 소설.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차, 정원, 우키요에(목판화), 호리모노(문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소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견디기 힘든 과거를 안고 살아간다. 윤 링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윤 링이 쓴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그녀가 목격한 삶, 자신을 포함한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 그 과정에서 용서와 치유가 이루어지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계속 숨죽여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말레이시아(당시는 말레야) 지역의 역사가 우리네 역사와 너무나 비슷하여 바로 감정이입이 된다. 36여년의 일제 치하를 벗어나자 마자, 남북으로 갈라져 또 다른 상흔을 겪은 우리.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자꾸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했는데. 그 선택이란게 아예 허용된지 않았던 삶이라면?

모든 창작물이 창작자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 소설처럼 과거 역사에 기반한 아픔, 기억을 동반한 작품들이 뿜어내는, 경험(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이 가져온 깊은 호소력에서 얻는 감동은 어떻게 비교할 수가 없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이 그랬고..파스칼 메르시어의 ‘ 리스본 행 야간 열차’도 그렇고..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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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p12)



전쟁 중에 그들은 날 죽이지 못했어. 또 내가 수용소에 잡혀 있을 때도 날 죽이지 못했지. 하지만 46년간 증오심을 부여안고 살았다면...그게 나를 죽였을게다. (p80)



정원은 땅과 하늘과 주변 모든 것에서 빌려오지만, 선생님은 시간에서 빌리시는 거예요. ..기억들을 차용해서 이곳에서의 삶을 덜 황량하게 만드는 거죠. (p256)



언젠가 바람 따위는 없고 깃발이 움직인게 아님을 깨달을걸세.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일 뿐이지.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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