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기고한 김상희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장의 칼럼이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개념이 바로 지속가능성이다. 이 논리는 잘못 사용되면 우파들의 경제발전 논리로 이용될 수도 있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개념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지속가능성은 앞으로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국가 패러다임이 달라진다.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이 3일 국회를 통과해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 국가의 경제성장 중심 정책이 사회통합과 환경보전을 조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되는 의미를 갖는 법이다.
이런 전환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합의를 바탕으로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 동안 국제사회는 경제성장과 물질중심의 패러다임이 초래한 인류의 위협과 지구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특히 1992년과 2002년 세계정상회의에서는 지구환경문제, 에너지와 자원의 고갈, 빈곤과 차별, 기아와 질병 등 당면한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지속가능 발전은 경제와 사회, 환경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평등하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 받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제도적으로 지속가능 발전을 국정원리로 채택해 운영하는 추세다. 프랑스와 스위스는 헌법에 이를 명시하고 있으며 벨기에, 캐나다 퀘벡은 법률을 제정해 국정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최근 출범한 새 정부가 지속가능 발전을 국가의 핵심의제로 선정, 부처를 통합하는 등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나아가 유럽연합(EU)은 우리나라와의 FTA 협상에서 지속가능 발전을 핵심 의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는 상황이다.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이 시행되면, 우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에너지, 교통, 농업, 건강, 교육, 물, 산림 등 경제 사회 환경분야를 종합적으로 고려, 국가와 지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속가능발전 기본전략(20년 단위)을 수립하고, 구체적 실행방안을 담은 이행계획(5년 단위)을 수립·추진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개발 위주, 혹은 눈앞의 성과를 내기 위한 단기간의 개별정책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제도적으로 환경과 사회분야를 함께 고려하고, 미래세대의 권익까지 반영하는 통합적 정책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아울러 이렇게 수립된 전략과 이행계획은 2년마다 추진상황을 평가, 국민들에게 공표하도록 함으로써 정책의 투명성과 집행의 실효성이 담보될 것이다.
다음으로 정부가 주요 법령을 제·개정하거나 중ㆍ장기 행정계획을 수립하거나 변경할 때는 반드시 지속가능성을 고려해서 추진하여야 한다. 시민사회·산업계·정부 등으로 구성되는 거버넌스 기구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대상 법령과 행정계획의 지속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다.
정부정책의 추진 근거가 되는 주요 법령이 공론화를 거쳐 지속가능 발전의 철학과 내용을 반영하게 된다면 법령제정 이후의 정책추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갈등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는 국가지속가능발전 비전을 선언(2005년)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지속가능발전 전략과 이행계획을 수립(2006년)하는 등 정부정책의 전환을 위해 노력해 왔다. 올해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을 제정함으로써 국가와 지방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추진기반을 사실상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완성된 추진기반을 바탕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 산업계 등 사회구성원 모두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다 함께 힘을 모아 실천에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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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는 일이라서 퍼왔다. 한겨레 7월 23일자  사설이다.

한국 개신교, 정복주의적 선교 버려야

위험지역 선교활동을 자제하자는 개신교 단체들의 목소리가 잇따른다. 선교활동에 신중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물론 그동안 적극적이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정부의 권고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샘물교회도 사과문을 냈다. 정부의 경고를 거듭 무시하고 파송을 강행해 왔던 걸 생각하면 유감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탈레반의 요구 중엔 ‘아프간에서의 선교활동 금지’가 포함돼 있다. 이슬람권의 호감을 사려는 것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슬람 나라에서 선교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쿠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으로부터 구별되리라”고 말한다. 이슬람권은 이에 따라 다른 종교를 믿는 행위는 막지 않지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는 처벌한다. 카자흐스탄에선 이슬람 교리의 적극적인 전파도 처벌한다고 한다.

 

 

 

 

 

우리 개신교는 현지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정서를 일쑤 무시했다.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다. 아프간의 헤리트 지역에선 2004년 한국인 선교사들이 성경을 배포하고, 집집마다 전도를 다니다가 총격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는 1300여 개신교도들이 체육·문화 행사를 표방하고 선교 이벤트를 벌이려다가 추방당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주관했던 선교사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아프간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는 무너져 내릴지어다”라고 썼다. 중국에선 수천명의 선교사들이 ‘암약’하다가 중국 정부에 검거돼 외교 문제가 되곤 했다. 중국에서도 적극적인 선교는 종교 강요로 간주된다.

한국 개신교의 이런 극성은 파송 선교사의 규모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말 현재 175국에 1만6천여명을 파송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파송 국가엔 이슬람권 분쟁지역 등 40여 위험국이 포함돼 있다. 게다가 수십 곳의 선교단체나 교회가 경쟁적으로 내보내 최소한의 통제도 하기 어려웠다. 위험지역 선교는, 교계에서 헌신성을 인정받고 교회 내부의 결속을 꾀하는 데 유용하다. 주도권은 덤이다.

더 큰 문제는 선교 행태다. 한국 개신교는 다른 종교인을 가르치고, 구원해 주겠다는 자세로 나선다.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다. 제국주의 때나 통하던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공존하고 조화를 추구해야 할 때다. 그 속에선 선교도 개종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관계 증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 또 하나 신기섭 논설 위원의 글도 퍼왔다. 음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은 어떨 때는 무서운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한국인 20여명 납치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이다. 아프간 사태와 관련 없는 민간인들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의 볼모가 된 사태는 감당하기 버겁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당사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할까.

이번 일을 보면서 한국인도 중동 사람들에게 점점 ‘저쪽 편’으로 자리잡아 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라크와 아프간에 이어 레바논의 분쟁에까지 얽혀 들어갈 상황이기 때문이다. 파병을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국제 노력에 동참하는 걸로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명분은 역시 국익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나 냉정하고 타산적이어서 섬뜩하다. 아프간을 비롯한 중동의 민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국익’만 챙기면 된다는 소리 아닌가.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세적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비판하는 소리도 높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곳곳에 보내는 선교사 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여름철이면 신자들의 단기 활동도 잦다. 게다가 위험하고 험한 나라일수록 선교나 봉사의 여지가 많기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여론은 국익을 내세운 파병과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서로 충돌하는 걸로 보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없을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비슷한 심리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있는 쪽’에 속한다는 의식,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없는 쪽’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선하든 악하든 ‘외세’와 싸우는 이들이 아니라 외세 편을 들면서 국익을 이야기하는 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통과 혼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겠다는 사명감이 커져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생각에만 빠지면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바라느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는 세계를 보는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진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이익 또는 믿음에 따라 보고 싶은 세상을 보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레바논에까지 군대를 보내겠다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태평할 수 없다. 또 진짜 아프간의 현실을 볼 노력을 했다면, 봉사 활동을 하러 가겠다는 젊은이들을 그렇게 순순히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 세상만을 보기로는 미국만 한 나라가 없다. 캐나다 정치학자 콜린 레이스나 영국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 같은 이들은,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은 우리가 행동하는 데 따라 만들어진다’거나 ‘우리가 믿는 모습이 진짜 현실이다’는 미국 지배층의 생각 속에 ‘진짜 중동 사람’이 들어갈 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태도는 인권운동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위험 지역을 찾아다니는 미국 의사 제니퍼 리닝은 어떤 지역에 가기 전에 우선 “그 지역이 어떤 모습일지 마음속에 시각적 지형을 그린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다녀온 사람과 대화하는 등 감각을 갖추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상 밖의 비극을 막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한국의 선택이 어느 쪽이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이번 기회에 이라크·아프간·레바논의 배고픔과 두려움에 떠는 진짜 사람들만이라도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그러고도 ‘국익’이라는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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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본주의 시대, 근대의 기획은 성공할 것일까.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실패와 위험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에 난 진보의 역설에 대한 서평이다.

 

 

 

 

 

'진보의 역설' 현대인은 왜 불행한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ㆍ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발행ㆍ415쪽ㆍ1만8,000원

현대인의 생활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고 풍족해졌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19세기의 노동자는 1주일에 평균 66시간을 일했지만 지금은 42시간만 일하면 된다. 당시 인류를 괴롭혔던 소아마비 천연두 홍역 같은 질병들은 거의 퇴치됐으며, 평균수명은 41세에서 77세로 2배 가까이 연장됐다. 소수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도 많이 사라졌다. 삶의 외형적인 모습만 따지자면 현대인들은 ‘진보’ 의 명백한 수혜자인 셈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일례로 일상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50년 전보다 10배나 늘었다. 브루킹스연구소 경제학분야 연구원인 그레그 이스터브룩은 <진보의 역설>에서 인류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이 왜 마음의 행복을 느끼지는 못하는지를 묻고 있다. 저자는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의 다양한 이론들을 끌여들여 그 이유를 탐색한다.
현대인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데는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과 외부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대부분의 상황이 바람직하더라도 부정적인 시각, 불평하는 태도를 취하려는 본성을 숨기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자기만족을 예방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최근 그 부작용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외적인 변수도 무시할 수 없는데 특히 불안을 과장하는 현대 대중매체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은 이동전화에 의한 뇌손상, 극도로 드문 알레르기 등 100만분의 1에 불과한 위험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팽배한 개인주의도 불행감을 부추킨다. 가족 신앙 공동체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더라도 그 이유를 외부에서 찾을 수 있었으나 가족규모도 축소되고 지역사회에 대한 유대감도 줄어든 현대에는 ‘나’ 만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 됐다. 실패할 경우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고 이는 곧잘 우울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소득 증가가 반드시 행복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회학의 ‘관계불안’ 이론도 소개한다. 소득이 증가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이 집이 우리가족에게 적당한가’ 보다는 ‘내 집이 이웃집보다 더 좋은가’ 를 생각하기 일쑤다. 아무리 물질이 풍족해도 상대적 박탈감은 생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여러 측면을 고려하건대 지은이는 현대인의 삶은 점점 윤택해지지만 행복은 증가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란? 교과서적이지만, 그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자세를 지니라고 권고한다.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는 목적이 있으며 미래세대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일부로 자신이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성과를 끌어들인 분석이 다소 난삽하고, 피부에 와닿는 대안을 내놓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모자라는 것을 채워가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이 새롭게 들릴 수도 있겠다. 당신은 행복한가? 원제 ‘The Progress Paradox’.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책들도 소개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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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에 대한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관심가는 책에 대한 서평을 오래전 것이지만 올려놓아본다. 아 언제나 진도를 팍팍 나갈 수 있을런지.

 

 

 

 

 

 

 

 

 

한국일보 03. 12. 26

모든 물질은 물과 불, 공기와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금의 네 원소의 구성비만 알면 모든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은 세상 모든것의 근원에 대한 한 믿음과, 그 근원이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리라는 또 한 믿음에서 나왔다. 그것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매혹됐던 시(詩)의 네 뿌리를 떠올리게 한다.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 시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던 바슐라르는 물과 불, 공기와 흙으로 빚어진 상상력의 시학(詩學)의 전도사 역을 맡는 데 평생을 바쳤다.철학자 이지훈(37)씨의 ‘예술과 연금술’은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 인간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중세의 연금술에서, 바슐라르의 시학(詩學)에서,저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그것이 금이든 예술이든) 만들어낼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소망을 보았다.그래서 “연금술은 비록 실패한 과학이었지만 성공한 시학(詩學)”이었다. 연금술과 바슐라르 시학 모두 고대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인 물과 불, 공기와 흙을 질료로 삼은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가 자연의 구성요소로 상정했던 것을 바슐라르는 모든 사람의 원소로 되살려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이 이것이다. 바슐라르가 본 인간 마음의 근원은 자연의근원과 같은 것이며, 시 또는 예술은 자연과 교감해서이루어지는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 점을 놓치고 다만 (바슐라르 시학의) 주관적인 상상력이나 자유로운 몽상에 초점을 맞춘 독자들도 있다”고짚는다. “바슐라르는 자연적 미감을 되살림으로써 참된 서정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 본래의 연관성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인간에게 적합한 자리를 찾아내려 했다.”숨가쁜 세상에서 저자가 내놓은 ‘깊고 느린 몽상’은 소중하다. 사이버공간의 불안한 리듬에 휘둘리는 현대인에게 저자는 인간의 마음의 뿌리가느리고 지속적인 자연의 리듬에 있음을, 그리고 그 느린 흐름 속에서 놀랍도록 번개처럼 번쩍이는 직관의 리듬이 있음을 알려준다.당연하게도, 섬광처럼 인간을 후려치는 직관은 사이버 공간의 명멸하는 가벼운 감각에 비할 바 없이 강하다. 김소월의 시와 김지하의 사상, 삼국유사의 설화와 새타령 등 우리의 사유로 빚어진 예술에서 저자는 물과 불,흙의 상상력을 길어올린다. 그 실천적 노력도 소중하다

관련 링크도 하나.

이지훈에 관한 글

이 내용들이 바슐라르와 관련을 가질 수 있는지라 바슐라르의 책들을 먼저 나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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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이라는 분이 대자보에 실은 글이다. 요즘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론 분석에 마음이 끌리고 있다. 홍기빈도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90년대 들어 냉전의 종언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구호는 온 세계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울려퍼졌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상식”의 시대였다. 자본과 군대를 앞세워 전 지구를 재구조화하기 시작한 전 세계의 지배 계층들도 자신들의 행동의 타당성을 “상식”에의 호소라고 우겨댔다.
 
100년을 내려오며 화석화되어버린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에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기대어 그 “과학성”과 정당성을 뽐내다가 소련의 몰락으로 하루 아침에 초상집 강아지 모습이 된 어제의 좌파 세력들도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슬그머니 “상식”에의 호소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서 형성되어 온 소위 “쿨(cool)한 진보 담론”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확실히 종교적인 신념 체계로 사람들의 머리를 “정리”시켜 판에 박힌 이론과 실천의 틀에 동원하기 위한 “정치 신학”으로서의 좌파 이념은 끝장이 났고 또 이는 슬퍼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과연 “상식”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90년대 이후 온 세계와 우리 나라를 휘젓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는 결코 알량한 상식이나 직관 따위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 금융, 노동과 같은 경제적 분야는 물론 환경, 보건, 연금, 교육과 같은 사회적 분야를 거쳐 통일, 안보 등의 국제적 문제 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관과 미적 감각까지 지금 세계 자본주의는 전면적인 재편을 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카니즘이 있고, 그것을 이념이 아닌 “글로벌 스탠다드”로 치장하는 사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는 지배 세력의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 계획이 있다.

이 톱니처럼 맞물려 있는 지배 세력의 총체적인 담론은 그 애매모호한 “상식” 따위로 덤벼들어봐야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을만큼 견고하고 복잡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해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 메카니즘을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정치경제학과 사회 이론, 우리의 진보적 가치를 수미일관한 철학으로 내걸 수 있도록 해줄 사상,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사람들 모두가 능동적인 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할 구체적 행동 계획과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실사구시의 연구와 구체적 현안을 놓고 오가는 알맹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이는 물론 온갖 지루한 데이터와 자료와 끝없는 토론을 뚫고 나가야 하는 땀투성이 작업이다. “진보 담론”에서 유행하는 책 몇 권만 읽으면 맘에 안드는 세상사에 대해 끝없는 비판의 언설을 쏟아낼 수 있는 “쿨”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저 정교한 신자유주의의 현실 구조와 맞붙기 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땀냄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새로운 현실에 새롭게 맞붙는 고통스런 작업을 비겁하게 회피해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낡아버린 예전의 좌파 이론으로 도망가든가 아니면 누구도 시비걸 수 없는 물에 물탄 술에 술탄 “상식적 진보 담론”으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진보 세력이라고 하면 출구도 나오지 않는 구닥다리 비판을 아직도 풀어놓는 이들이든가 그저 좋은 이야기나 풀어놓으면서 정작 사람들의 고통의 중핵을 이루는 사회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해버리는 “패셔너블한” 지식 분자이든가로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정밀한 사회 이론과 인간의 정신을 깊게 울릴 수 있는 사상과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 계획을 갖춘 진보 사상의 재건은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죽어버린 옛 이론으로든 공허한 상식으로든 도망갈 필요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그리스의 혁명가였던 스티나스(Stinas)는 파시스트들과 싸우는 한편 똑같이 폭압적이었던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대담하게 진보 운동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나가고자 했다.
 
“혁명가의 생각과 행동에는 그 어떠한 터부도 없다”.
 
지금 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 본문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330호]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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