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일이라서 퍼왔다. 한겨레 7월 23일자 사설이다.
한국 개신교, 정복주의적 선교 버려야
위험지역 선교활동을 자제하자는 개신교 단체들의 목소리가 잇따른다. 선교활동에 신중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물론 그동안 적극적이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정부의 권고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샘물교회도 사과문을 냈다. 정부의 경고를 거듭 무시하고 파송을 강행해 왔던 걸 생각하면 유감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탈레반의 요구 중엔 ‘아프간에서의 선교활동 금지’가 포함돼 있다. 이슬람권의 호감을 사려는 것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슬람 나라에서 선교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쿠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으로부터 구별되리라”고 말한다. 이슬람권은 이에 따라 다른 종교를 믿는 행위는 막지 않지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는 처벌한다. 카자흐스탄에선 이슬람 교리의 적극적인 전파도 처벌한다고 한다.



우리 개신교는 현지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정서를 일쑤 무시했다.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다. 아프간의 헤리트 지역에선 2004년 한국인 선교사들이 성경을 배포하고, 집집마다 전도를 다니다가 총격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는 1300여 개신교도들이 체육·문화 행사를 표방하고 선교 이벤트를 벌이려다가 추방당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주관했던 선교사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아프간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는 무너져 내릴지어다”라고 썼다. 중국에선 수천명의 선교사들이 ‘암약’하다가 중국 정부에 검거돼 외교 문제가 되곤 했다. 중국에서도 적극적인 선교는 종교 강요로 간주된다.
한국 개신교의 이런 극성은 파송 선교사의 규모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말 현재 175국에 1만6천여명을 파송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파송 국가엔 이슬람권 분쟁지역 등 40여 위험국이 포함돼 있다. 게다가 수십 곳의 선교단체나 교회가 경쟁적으로 내보내 최소한의 통제도 하기 어려웠다. 위험지역 선교는, 교계에서 헌신성을 인정받고 교회 내부의 결속을 꾀하는 데 유용하다. 주도권은 덤이다.
더 큰 문제는 선교 행태다. 한국 개신교는 다른 종교인을 가르치고, 구원해 주겠다는 자세로 나선다.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다. 제국주의 때나 통하던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공존하고 조화를 추구해야 할 때다. 그 속에선 선교도 개종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관계 증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 또 하나 신기섭 논설 위원의 글도 퍼왔다. 음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은 어떨 때는 무서운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한국인 20여명 납치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이다. 아프간 사태와 관련 없는 민간인들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의 볼모가 된 사태는 감당하기 버겁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당사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할까.
이번 일을 보면서 한국인도 중동 사람들에게 점점 ‘저쪽 편’으로 자리잡아 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라크와 아프간에 이어 레바논의 분쟁에까지 얽혀 들어갈 상황이기 때문이다. 파병을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국제 노력에 동참하는 걸로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명분은 역시 국익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나 냉정하고 타산적이어서 섬뜩하다. 아프간을 비롯한 중동의 민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국익’만 챙기면 된다는 소리 아닌가.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세적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비판하는 소리도 높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곳곳에 보내는 선교사 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여름철이면 신자들의 단기 활동도 잦다. 게다가 위험하고 험한 나라일수록 선교나 봉사의 여지가 많기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여론은 국익을 내세운 파병과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서로 충돌하는 걸로 보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없을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비슷한 심리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있는 쪽’에 속한다는 의식,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없는 쪽’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선하든 악하든 ‘외세’와 싸우는 이들이 아니라 외세 편을 들면서 국익을 이야기하는 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통과 혼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겠다는 사명감이 커져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생각에만 빠지면 그들이 우리의 도움을 바라느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는 세계를 보는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진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이익 또는 믿음에 따라 보고 싶은 세상을 보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레바논에까지 군대를 보내겠다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태평할 수 없다. 또 진짜 아프간의 현실을 볼 노력을 했다면, 봉사 활동을 하러 가겠다는 젊은이들을 그렇게 순순히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 세상만을 보기로는 미국만 한 나라가 없다. 캐나다 정치학자 콜린 레이스나 영국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 같은 이들은,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은 우리가 행동하는 데 따라 만들어진다’거나 ‘우리가 믿는 모습이 진짜 현실이다’는 미국 지배층의 생각 속에 ‘진짜 중동 사람’이 들어갈 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태도는 인권운동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위험 지역을 찾아다니는 미국 의사 제니퍼 리닝은 어떤 지역에 가기 전에 우선 “그 지역이 어떤 모습일지 마음속에 시각적 지형을 그린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다녀온 사람과 대화하는 등 감각을 갖추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상 밖의 비극을 막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한국의 선택이 어느 쪽이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이번 기회에 이라크·아프간·레바논의 배고픔과 두려움에 떠는 진짜 사람들만이라도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그러고도 ‘국익’이라는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