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강철구 교수의 세계사 다시 읽기가 다신 연재된다.

무단 전재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밝혔으니 문제는 안되겠지

계몽사상은 이성의 빛을 의미한다
  
  계몽사상은 18세기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발전한 것으로 서양 근대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계몽사상가들로는 계몽사상가의 왕으로 불린 볼테르를 비롯해 몽테스키외, 루소, 흄, 디드로, 달랑베르, 칸트 등 많은 사람을 들 수 있다.
  

▲ 계몽사상의 왕으로 불리운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 1694~1778)


  이들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고 학교에서 매일 가르치는 서양의 유명한 근대 사상가들이다. 그러니 계몽사상이 서양의 사상사적 발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과정에서도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사상을 영어로는 Enlightenment, 독일어로는 Aufklärung, 불어로는 Lumières라고 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밝게 만듬'이나 '빛'을 의미하는 낱말들이다. 즉 깨게 하는 것,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인 '이성의 빛'이 무지몽매함과 미신, 종교적 광신, 불합리한 관습이나 전통 같은 어두움으로부터 사람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빛이 지식과 인간의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계몽이라는 빛은 '편견이나 다른 사람의 지도에 의한 왜곡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미성숙으로부터 해방'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을 불어로는 philosophes라고 쓰므로 철학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전문적인 철학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문필가, 교사, 교수, 저널리스트, 예술가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계몽사상이란 철학보다는 훨씬 폭이 넓은 대중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대학이 아니라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나 귀족, 지식인들이 모여든 살롱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몽사상의 특징은 보통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말해진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인간세계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가운데 합리성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부터 유럽에서 천문학이나 수학 등 자연과학이 발전하며 사람들이 우주와 자연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뉴턴의 종합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하나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생각됨으로써 이제 인간사회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런 만치 또 합리적인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서양이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상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계몽사상이 르네상스와 함께 서양 근대문화의 발전에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계몽사상의 해석
  
  계몽사상을 이렇게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보는 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생각만큼 오래 되지는 않았다. 1932년에 독일 철학자인 에른스트 카시러가 <계몽의 철학>이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해석의 틀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와 그의 저서 <계몽의 철학>


  유대인 출신으로 1918년에 함부르크 대학 교수가 된 그는 당시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10권짜리 칸트 전집을 편집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헌신적인 민주주의자로서 독일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9년에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을 열렬히 옹호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당시 독일에서 급격히 힘을 키우고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즘의 비합리주의와 폭력성을 계몽사상이 갖고 있다고 믿은 합리주의에 의해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는 1933년에 나치당이 집권하자 영국으로, 나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문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책은 독일보다는 미국에서 더 환영을 받았다. 1951년에 영역되어 미국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고 그 후 계몽사상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계속 팔리고 연구되는 드문 책이다. 그것은 그의 책이 계몽사상을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진지하게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몽사상 시대를 라이프니츠(1646-1716)와 칸트(1724-1804)에 의해 경계가 지어지는 시기로 정의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활동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체에 이르는 시기이다.
  
  카시러에 의하면 계몽사상이란 인간행위가 신념이나 미신, 계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는 열망을 대변한다. 즉 관습이나 자의적인 권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인간 이성의 힘을 믿는 사상체계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종교나 전통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점차 유효해진 세계관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구는 제자인 피터 게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게이도 역시 어릴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이다. 나중에 대학교수가 되기는 했으나 그 전에는 오랫동안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하며 <바이마르 문화> 같은 대중적인 책들을 써서 유명해졌다.
  

▲ 피터 게이(Peter Gay, 1923~ )


  게이는 1967년과 1969년에 <계몽사상>이라는 두 권짜리 책을 출간했는데 그 두 책의 부제인 '근대 이교주의의 흥기'와 '자유의 과학'은 이 책이 어떤 방향에서 씌어졌는가를 잘 암시해준다. 계몽사상을 세속화와 함께, 합리성의 발전에 따른 인간 자유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계몽사상의 본질을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이성을 비판적으로 사용하여 인간과 그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와 '진보'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 후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틀이 되었다. 지금도 대체로는 그렇다.
  
  그렇다고 계몽사상이 서양에서 아예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중시하고 추상적인 생각에 의존함으로써 천박하며 인간행위에서 역사성이나 종교성을 경시한다고 비판했다.
  
  2차대전 후에는 독일 철학자들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홀로코스트를 계몽사상의 탓으로 돌리며 강하게 비판했다. 인류가 현대에 들어와 이런 야만적 행위에 빠진 이유는 이성과 합리성의 강조가 기술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와 함께 해야 할 윤리성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윤리와 분리된,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이성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적 힘의 지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1903~1969)(우)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좌)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철학자 미셀 푸코도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도 계몽사상이 합리적인 기준을 지나치게 내세움으로써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기준에 의해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유럽사회에 억압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계몽사상은 최근에 들어와 전반적인 재검토를 받으며 과거와 같이 단순하며,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특히 계몽사상에 내재해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는 큰 문제이다.
  
  18세기에 비유럽에 대한 우월한 존재로서의 근대 유럽인들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계몽사상의 바른 이해는 근대 서양인들의, 보편성을 강조하기는 하나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사고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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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고전역학
  
  모든 자연현상은 그 현상의 실체인 물질의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생긴다고 했습니다. 간단한 예로 공을 던졌을 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도 자연현상입니다. 공이라는 구성원과 지구라는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 곧 중력에 의해 어떻게 날아갈지 운동이 정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딱딱하고 어떤 것은 물렁물렁하고 어떤 것은 빨갛고 혹은 파랗고 어떤 것은 반짝이고 등 물건의 성질도 모두 자연현상입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그 물건의 구성원, 즉 분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분자들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는지, 빛을 쬐었을 때 빛알과 분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면 왜 어떤 것은 딱딱하고 어떤 것은 빨간지 등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공을 던졌을 때 어떻게 운동하는지와 왜 파란색을 띠는지는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역학
  
  일반적으로 주어진 대상―계(界; system)라고 부르는 ―의 구성원들이 상호작용 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가 자연현상의 이해에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품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물리학의 방법을 역학(mechanics), 또는 강조해서 동역학(dynamics)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운동(motion)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어떤 주어진 대상에서 구성원 사이에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원의 상태가 결정되는 것을 흔히 어떤 운동을 하느냐 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운동을 보편이론 체계에서 기술하는 방법이 (동)역학이지요.
  
  동역학은 물론 고전역학에서 출발했는데, 고전역학 체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갈릴레이지만, 결국 17세기에 뉴턴이 고전역학을 창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대상의 운동을 기술하는 데 놀랄 만큼 성공적이었습니다. 공을 던졌을 때 어떻게 날아가는지, 누가 맞는지를 정확하게 기술했고, 지구나 행성, 천체들의 운동도 놀랄 만큼 정확하게 기술합니다. 그래서 혜성이 몇 년 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 몇 초에 어느 하늘에 나타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놀랍고 성공적인 이론 체계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오면 고전역학 체계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이 생기게 됐습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변칙 또는 비정상성이 쌓이면서 20세기 초에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 체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상대성이론의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은 푸앵카레(J. Henri Poincaré)와 로렌츠(Hendrik A. Lorentz)이고 잘 알다시피 아인슈타인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도 수학적으로 중요하게 공헌했지요.
  

▲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체계의 효시는 플랑크(Max K. Planck)와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였고 보어(Niels Bohr)를 거쳐서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두 사람이 이론의 완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보른(Max Born)과 파울리(Wolfgang E. Pauli), 디랙 같은 사람이 완성에 공헌했지요.
  
  고전역학은 일상세계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이론이었는데 반면에 양자역학은 작은 미시(microscopic)세계의 기술에 성공적이었습니다. 미시세계란 한 마디로 원자나 기본입자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런 작은 세계에서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타당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체계로 대체돼야 하는데 그것이 양자역학입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만 적용되고 일상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이 고전역학보다 더 좋은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더 일반적이고 적용범위가 더 넓다는 것입니다. 미시세계뿐만 아니라 일상세계에서도 성립하고 적용할 수 있지만, 일상세계에 양자역학을 적용하면 고전역학과 똑같은 결과가 됩니다. 그러니까 고전역학에 비해서 양자역학이 적용범위가 더 넓습니다. 보편성의 관점에서 볼 때 더 좋은 이론인 것입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 개념을 바꾸었으며 양자역학과 함께 현대물리학의 두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상대론이라 줄여서 말하며, 이에 따른 동역학 체계를 상대론적 역학(relativistic mechanics)이라고 부릅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기술에 적절한 데 비해서 상대론적 역학의 적용범위는 빠른 세계입니다. 대상이 아주 빠르게 움직일 때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역시 타당성을 잃고 상대론적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빠른가의 기준은 빛의 빠르기, 대략 3×108 m/s, 그러니까 1초에 30만 km이지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속력은 이보다 훨씬 작습니다. 예컨대 빠른 전투기도 3000 km/s를 넘지 않으니 빛 빠르기의 1/100 수준이지요. 이러한 경우에는 상대론적 수정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습니다. 그리고 빠른 세계뿐 아니라 아주 거대한 세계에서도 상대론적 고찰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거대하다는 것은 우주에서 다루는 크기로서 중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빠른 세계의 기술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데 비해서 거대한 세계의 경우에는 중력이론이라 할 일반상대성이론이 필요하지요.
  
  상대론도 빠른 세계나 거대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세계에서 적용이 됩니다. 그러나 일상세계에 적용하면 뉴턴의 고전역학과 똑같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세계에서는 상대론적 수정이 무시할 만큼 작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일상세계를 기술하려면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충분하지만, 원자나 분자 등 작은 세계의 기술에는 양자역학, 빛의 빠르기에 비해 너무 늦지 않은 빠른 세계나 우주 등 거대한 세계를 기술하는 경우에는 상대성이론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작고 빠른 세계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를 들어 양성자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경우이지요. 작은 것을 기술하는 양자역학과 빠른 것을 기술하는 특수상대성이론, 두 가지를 합쳐야 하겠네요. 이에 따라 이른바 상대론적 양자역학(relativistic quantum mechanics)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합쳐야 할 경우가 있을까요?
  
  학생: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은 정반대 경우 아닌가요?
  
  좋아요. 양자역학은 작은 세계, 일반상대론은 거대한 세계에 적용되니까 서로 배치되고 따라서 합쳐야 하는 경우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일반상대론은 중력을 기술하는 이론이므로 작지만 중력이 중요한 세계를 기술하려면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을 합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게이지입자로서 중력알이나 검은구멍이 대표적 경우인데 양자중력이라 부르는 이러한 이론 체계는 앞 강의에서 지적했듯이 아직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관련된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하고, 이제 일상을 원자, 분자 세계와 대비하여 큰 세계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일상세계는 느리고 큰 세계입니다. 반면에 작고 느린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크고 빠른 세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드물지만 어떤 일상적 물체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경우지요. 마지막으로 작고 빠른 세계가 있습니다. 전체를 이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이 중에서 일상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바로 뉴턴의 고전역학입니다. 느리거나 빠르거나에 상관없이 큰 세계에 적용되는 것이 상대론적 고전역학이고, 반면에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느린 세계를 다루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작고 느린 세계와 크고 느린 일상세계를 포함하지요. 마지막으로 모든 세계를 다룰 수 있는 것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입니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이론이고, 보편성 관점에서 가장 좋은 이론입니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작고 느린 세계에 적용하면 보통 양자역학이 되고, 크고 빠른 세계에 적용하면 상대론적 고전역학이 되며, 일상세계에 적용하면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환원되는 거지요.
  
  가끔 양자역학이 나오게 되면서 고전역학은 틀렸고 잘못됐으니 버려야 한다고 이해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론적 양자역학만 남기고 양자역학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고전역학은 지금도 대단히 훌륭한 이론입니다. 다만 적용범위가 양자역학만큼 넓지 않은 것뿐입니다. 보편성 면에서는 양자역학이 더 좋은 이론이지만 좋은 이론의 관점이라는 것이 보편성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다른 요소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고전역학이 양자역학보다 오히려 더 좋은 이론입니다.
  
  공을 던졌을 때 어디로 떨어질지를 계산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물리를 조금 배운 학생들은 포물선을 생각하겠지요. 이는 뉴턴의 운동 법칙 에서부터 얻어진 결과입니다. 즉 고전역학을 가지고 푸는 것입니다. 나라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고, 양자역학을 써서 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여기서 양자역학을 쓴다면 지능이 모자라거나 또는 자기학대 환자(masochist)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모자라는 사람이 양자역학을 알기는 어렵겠고, 사실 물리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자기학대 환자가 많습니다. 일단 교수가 되면 "학생의 괴로움은 교수의 즐거움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타인학대 환자(sadist)가 되지요.
  
  분필을 던지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고전역학에서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필을 던지면 어디로 날아가는지는 분필과 지구를 각각 하나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하고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분필과 지구는 충분히 큰 세계이기 때문에 고전역학으로 잘 해석할 수 있지요.
  
  그런데 분필이 왜 하얀지를 설명하려면 분필의 분자 하나하나를 생각해야 하고, 분자와 빛알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자 수준의 작은 세계를 다루어야 하고 따라서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양자역학을 적용해야 합니다. 양자역학이 작은 세계를 설명하니까 일상생활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분필이 하얀 것은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이를 설명하려면 양자역학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즐겨 쓰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같은 것도 다 양자역학 덕분에 가능한 것이고, 양자역학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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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글이다. 설득력있다. .

구별짓기와 ‘나도주의’로 상류 가치를 지향하는 키치 왕국의 주민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2006년 사망한 미국 여성운동가 베티 프리단은 1963년에 출간한 <여성의 신비>에서 안락한 미국 중산층 가정을 ‘포로수용소’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현대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여성의 신비’라고 규정하면서 그런 주장을 폈는데, ‘포로수용소’ 개념은 좀 다른 의미에서 한국의 중산층에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산층이 무너졌다! 지난 대선을 지배한 정치 구호다. ‘중산층 복원’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2007년 11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10년 전 41%에서 28%로 감소했다. “국민의 70%를 중산층으로 만들겠다”는 게 노무현의 대선 공약이었는데, 턱도 없는 헛소리를 한 셈이다.

 



△ 중산층의 꿈은 105㎡(32평) 아파트 등으로 상징된다. 아파트 값이 오르는 것과 반비례해 최근 자신이 중산층에 속한다고 응답하는 국민의 비율이 줄고 있다.


히피와 386, 도전에 실패하다

‘중산층 몰락론’은 허구라는 주장도 있다. 유팔무·김원동·박경숙은 <중산층의 몰락과 계급양극화>(소화 펴냄)에서 중산층 몰락론은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이들과 같아지는 것을 우려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대책에만 열중하는” 정치적인 편파성을 가진 논리라고 비판했다.

 

 

 

 


사실 정치인들의 ‘중산층 포섭 전략’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정치를 보수화하는 주범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선거에서 ‘빈곤 문제의 정치 쟁점화’는 금기사항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빈곤층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을 가진 중산층 유권자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 중산층에 팽배하던 물질 만능주의와 순응주의에 깊은 회의를 느낀 중산층 젊은이들이 저항의 길을 택한 건 1950년대였다. 이른바 ‘히피’의 출현이다. 한국에서 1980년대에 출현한 ‘386’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광주학살의 토대 위에 선 군사독재 정권에 순응하면서 물질적 삶에 안주하는 중산층 가치에 정면 도전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두 저항세력 모두 종국엔 몰락하고 말았지만, 이는 중산층 가치에의 도전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중산층은 경제·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적 개념이다. 중산층의 꿈은 105㎡(32평) 아파트와 중형차의 소유, 주말여행, 골프와 스키 등으로 상징된다고는 하지만, 각 항목 내에서도 다양한 차별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중산층의 실체를 종잡기가 어렵다.
아니 뜬구름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가 나오기 6개월 전에 발표된 삼성경제연구소-성균관대 리서치센터 설문조사에선 자신이 중산층에 속한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74%였다. 6개월 만에 74%에서 28%로 급락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는 게 바로 한국의 중산층이다.
2007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중산층을 ① 예비 부유층(월소득 420만~499만원) ② 전형적 중산층(350만~419만원) ③ 무관심형 중산층(270만~349만원) ④ 생계형 중산층(200만~269만원) 등 4개 그룹으로 세분화했다. 연구소는 “중산층을 획일적인 시장이 아닌 다양한 특성을 지닌 세분화된 시장들의 집합체로 봐야 한다”며 “각각의 세분화된 시장을 타깃으로 기업 마케팅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4가지 분류에 따라 기업 마케팅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면, 어떻게 바뀔 것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광고를 지겹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광고주의 숨은 뜻까지 파악하려는 시도를 해보면, 광고는 우리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마케팅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범주화 전략이다. 특히 한국 광고에서 많이 사용되는 전략이다. “너 이거 있어?” “너 여기 살고 싶지?” “쉿! 아무 말 하지 마. 브랜드가 널 말해주는 거야!” 한국 광고의 특성은 이런 메시지가 비교적 직설적으로 표현돼도 소비자의 저항이 없거나 약하다는 점이다.

400만원대는 5.1%, 100만원 미만은 61%

범주화 전략의 묘미는 불안을 부추기는 데 유리하다는 것에 있다. 과거 고교 시절에 ‘우열반’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게다. 불안은 중산층의 본원적 속성이지만, 한국 중산층의 불안은 유별나다.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해외 의존도가 높은 탓도 있지만, 사회문화적 비교 의식이 지나칠 정도로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회문화적 동질성과 거주 밀집성으로 인해 이웃을 의식하지 않고선 한시도 살 수 없는 묘한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웃과의 비교는 처절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필사적이다. 물질적으로 잘살게 될수록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이웃으로 두게 되는 결과만 초래해 불행해지는 역설마저 가능해진다.
2006년 11월 동아대 교수 장세훈은 제9회 비판사회학대회에서 “이제 집값이 비싼 서울 강남이나 수도권 일부 지역 같은 곳에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만 중산층이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심리적으론 강남에 살아도 자신보다 더 잘사는 이웃을 두면 비강남 거주자보다 더 위축될 수도 있다.
실제로 2006년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선 월소득이 500만원대인 사람 중 26.6%가 자신이 하위 계층이라고 답한 반면, 400만원대인 소득계층에선 그 비율이 5.1%에 불과했으며, 100만원 미만 소득계층에선 61%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평가했고, 36.5%만이 하위 계층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감은 이웃과의 비교로 결정된다는 이른바 ‘이웃 효과’는 한국인 삶의 전 국면을 지배하고 있으며, 특히 상층지향성이 높은 동시에 하층으로의 전락을 두려워하는 중산층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전염 효과와 쏠림 현상이 자주 극단을 치닫곤 하는 이유다. 교육·부동산 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들이 순수한 정책적 고려만으로 풀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산층 행태의 본질은 ‘키치’다. 키치란 19세기 말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로 생겨난 중산층이 귀족의 예술적 취향을 흉내낸 데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정통 예술가들은 키치를 경멸하지만, 키치엔 사회적 이동에 따른 평등의 욕망이 강하게 내재돼 있다. “너희만 즐기냐? 너희만 잘났냐? 어디 나도 좀 맛보자!”라는 오기가 키치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키치를 대신할 우리말 순화어로 ‘눈길끌기’를 선정한 건 바로 그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예술을 스스로 즐길 만한 감식안이 없기 때문에 예술을 남들의 눈길을 끄는 용도로 소비하는 것이다.



△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와인, 고급예술 열풍은 중산층으로까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사회 초년생들이 테이블매너를 익히는 행사에 참석해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호텔을 이용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중산층

실제 삶에서 대상의 본래적 가치 이외에 다른 덧붙여진 가치들을 소비하려는 존재를 가리켜 ‘키치 인간’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 ‘키치 인간’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정신에 가장 충실한 계층은 단연 중산층이다. 중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구조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가리키는 ‘프랙털’ 개념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계층을 떠나 국가와 개인도 중간에 속할 경우 아래와는 구별되고 싶고 위를 닮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치기 마련이다.
키치는 압축성장, 사회변동, 역동성에 친화적이다. 한국에서 키치를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일 수 있다. 매우 이른 시간에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이룩한 한국 사회의 많은 부문이 서구적 원형을 흉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키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키치는 한국인에게 숙명이며 한국은 ‘키치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주요 명품 소비국은 선진국이 아니라 한국과 같은 ‘중간층’ 국가들이며, 한국 내에서 명품의 주요 소비층도 상류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다. 호텔의 주요 소비층도 상류층인 것 같지만 실은 중산층이다. <도시의 창, 고급호텔>(후마니타스 펴냄)을 쓰기 위해 서울 시내 15개 ‘특1급’ 호텔들을 취재한 발레리 줄레조에 따르면, 숙박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의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전체 매출액에서는 상류층 고급 사교문화를 향유하려는 중산층의 소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상층지향성이 강한 중산층의 키치 문화가 명품 열풍, 골프 열풍, 해외여행 열풍을 넘어서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최근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와인 열풍과 고급예술 열풍이다. 경제력을 갖춘 신중산층 사이에 불고 있는 클래식 음악 열풍, 와인 열풍, 미술품 구매 열풍을 합쳐 부르는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신조어마저 생겨났다. 다 좋고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남과의 ‘구별짓기’를 위한 속물근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종 열풍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포로가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 와인 전문가 박찬일은 서양에서는 와인 인구의 0.001%나 될까 말까 한 와인감정사에게나 필요한 시음법이 한국 중산층에게 필수 교양으로 통용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뭔가 우리는 외래문화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국 대통령도 안 지키는 예절을 우리가 수수한 대중식당에서조차 지키고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라고 했다.
그런데 와인만 그런 게 아니다. 무엇이건 유행만 했다 하면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스스로 즐기기보다는 남과의 ‘구별짓기’가 우선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와인·고급예술 열풍은 웃어넘길 수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나도주의’(me-tooism)로 인해 가족의 삶 자체가 피폐해지는 경우다.
대표적인 게 상류층에서 시작돼 중산층으로까지 열병처럼 번진 조기유학 바람이다. 물론 자녀의 조기유학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적응하기 위해 내린 비장한 결단이겠지만, ‘이웃 효과’에 따른 불안 심리가 증폭돼 나타난 현상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가족 차원에선 아무리 진지하고 심각해도 사회적 차원에선 ‘포로수용소’가 연상되는 걸 어이하랴. “중산층이 무너졌다”는 소리도 높지만, 그전에 중산층 스스로 만든 ‘포로수용소’를 무너뜨리는 게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첩경은 아닐까?

서울대 개혁론이 실패하는 이유

대학도 중산층 포로수용소로 변해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서울대는 점점 더 부잣집 아이들의 대학으로 변해가고 있고, 이에 질세라 명문 사립대학들은 어떻게 해서든 부잣집 아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대학교수진도 그 추세를 따르고 있다. 박노자는 “지금 같으면 시간강사 몇 년 않고는 교수 할 수 없는 분위기인데, 시간강사 하는 것이 생계를 해결 못할 직업이에요. 박사과정 들어가는 사람들 보면 가난뱅이 출신들 별로 없어요. 십중팔구 중산층 그 이상 출신인데, 그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불만조차 없지요”라고 개탄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보다는 상류층에 편입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전 인구의 한 자릿수밖에 안 되는 상류층의 이해관계가 다수결의 원리로 관철되는 희한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마치 서울대를 개혁하자고 하면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중산층 학부모가 자기 자식 서울대 보낼 생각에 서울대 개혁론에 반대하거나 시큰둥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 또한 중산층을 가둔 ‘포로수용소’라 할 수 있다.
중산층은 진보정치 세력의 딜레마다. 영합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양심적인 중산층’이나 ‘문화적 감수성이나 지향하는 가치가 진보적인 중산층’이다. 그러나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랴. 그렇다고 중산층의 상층지향성과 속물근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죽을 맛이다.
진보정치 세력이 이런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해선 기업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중산층 세분화를 해 맞춤형 설득을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전략’이 필요하다. 실용주의 노선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한국형 실용주의엔 워낙 때가 많이 묻었으니 실사구시라는 말을 쓰기로 하자. 그런데 문제는 무슨 말을 쓰건 진보 진영이 실사구시에 비교적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을 대변하는 논객들의 글을 읽어보시라. 구구절절이 옳고 아름답다. 그런데 대부분 거대담론이다. 비분강개다. 비진보·반진보 세력의 양심 없음, 어리석음, 파렴치함을 공격하는 걸로 진보 진영에 표를 주는 유권자가 늘 거라고 믿는 방식이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중산층을 구해내야 할 이들마저 스스로 만든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으니, 무슨 변화가 가능하랴. 다양성은 진보파의 미덕이기도 하다. 옳고 아름다운 거대담론과 더불어 생활밀착형 담론도 꽃을 피우면 좋겠다. 포로수용소에서의 탈출을 꿈꾸지만 아무런 길이 없다고 자포자기한 중산층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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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전자기파와 빛알
  
  물질의 기본 구성에 대해서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욱 흥미로운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기본입자라는 문제인데, 먼저 빛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빛의 정체가 뭘까요? 빛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정보를 얻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게 빛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데 청각이나 후각, 미각을 통해서도 얻지만 시각을 통해서 얻는 정보가 월등히 많습니다. 보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잖아요. 음악을 틀어놓고 공부하는 사람은 있지만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공부한다는 건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지요. 공부하지 않겠단 얘기입니다. 우리 두뇌에서 정보를 처리할 때 청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공부하면서 얻는 정보와 같이 처리할 수 있지만 시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워낙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걸 처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여튼 빛이 매우 중요한데, 빛의 정체, 본질을 고등학교 물리에서 어느 정도 배웠겠지요. 아마 파동이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빛이 파동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논의되었지요. 17세기에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가 빛이 에돌이(diffraction)―한자어로는 회절―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도중에 장애물이 있으면 에돌아간다는 거지요. 에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송강 정철의 가사에 나오는데, 산이 있으면 물이 에돌아간다,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에돌이는 일반적으로 파동의 특성입니다. 가장 낯익은 파동이라 할 소리는 에돌아감을 모두 압니다. 담벼락 뒤에 숨어서 얘기해도 들리지요. 물론 장애물을 진동시켜서, 곧 직접 통해서도 나갈 수 있지만 대부분 경우에 소리는 장애물을 에돌아갑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소리의 그림자는 없지요.
  
  소리와 달리 빛이 에돌아간다는 사실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빛이 잘 에돌아가면 그림자가 없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림자가 있지요. 그림자가 있다는 건 빛이 직진, 곧 똑바로 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빛도 에돌이를 하는데 소리와 달리 워낙 약하기 때문에 보기가 어려운 겁니다. 일반적으로 파길이(파장; wavelength)가 긴 파동이 잘 에돌아갑니다. 소리는 파 길이가 수십 센티미터에서 수십 미터에 이를 수 있으나 빛은 마이크로미터보다도 짧아서 에돌이가 매우 약합니다. 그러나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것의 그림자를 잘 보세요. 그림자가 아주 선명하진 않습니다. 그게 에돌이의 증거입니다.
  
  에돌이에 더해서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영(Thomas Young)이라는 사람이 빛이 간섭(interference)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간섭이란 말 그대로 서로 간섭한다는 건데, 두 줄기의 파동이 와서 만나면 강해질 것 같지만 때로는 약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물결파, 곧 파도가 한 줄기 오고 또 다른 줄기가 와서 만나는데 수면이 가장 높은 마루와 마루, 가장 낮은 골과 골이 만나면 파도가 커집니다. 그러나 서로 엇갈리게 마루와 골이 만나면 서로 상쇄시켜서 없어져 버리지요. 이같이 둘이 만날 때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 현상이 간섭입니다. 파동이 아니면 이렇게 될 수 없지요. 이러한 간섭 현상은 파동의 특징입니다.
  

▲ 빛의 간섭 실험


  영은 소리와 마찬가지로 빛도 간섭을 한다는 것을 겹실틈 실험(double-slit experiment)을 통해 보였습니다. 그림 3에서 왼쪽에서 빛을 쬐어서 실틈 S0를 거쳐서 두 줄기 빛이 각각 실틈 S1과 S2를 지나가게 합니다. 빛은 각 실틈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서 스크린에 도달합니다. [물결파처럼 생각하면 되겠으나 실제로 3차원 공간에서는 원이 아니라 공 모양으로 퍼져나가지요.] 그러면 스크린에서 위치에 따라 두 줄기 빛이 B에서처럼 마루와 마루끼리 (그리고 골과 골끼리) 만날 수 있고, 또는 D에서처럼 마루와 골이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B에서는 빛이 강해져서 밝아지고 D에서는 약해지므로 어두워집니다. 결과적으로 그림 왼쪽에 보인대로 빛이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이른바 간섭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실험을 통해 빛이 파동임을 확증하였지요.
  
  파동이란 무엇인가가 진동하는 겁니다. 파동에 해당하는 물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물질의 진동이 퍼져나가는 걸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소리는 무엇이 진동을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공기가 진동하는 거지요. 공기 자체가 퍼져나가는 것은 아니고 그 진동이 퍼져나가는 겁니다. 공기가 퍼져나가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바람입니다. 바람이 없어도 소리는 퍼져나가지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죠? 파문이 일지요. 그 물결파도 역시 물이 움직여오는 게 아닙니다. 물이 오는 거라면 호수 가운데는 물이 얕아지고 가장자리는 넘쳐나야 되겠네요. 실제로 물은 제자리에서 진동할 뿐이고 그 진동이 퍼져나가는 게 물결파입니다. 결국 공기가 진동하는 게 소리고 물이 진동하는 게 물결파지요. 그런데 빛이 파동이라면, 빛은 무엇이 진동하는 것일까요? 전자기마당입니다. 빛은 전기마당과 자기마당이 진동하면서 퍼져나가는 이른바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라는 겁니다. 이를 이론적으로 규명한 사람이 맥스웰이지요.
  
  물리학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업적을 이룬 사람을 몇 꼽는다면 뉴턴, 맥스웰, 볼츠만, 아인슈타인일 터이고, 아마도 슈뢰딩거 정도 더 넣을 수 있을 듯합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 이론을 완성해서 이론적으로 빛의 실체를 밝혔습니다. 19세기 후반에 헤르츠(Heinrich R. Hertz)가 이를 실험적으로 검증했지요. 곧, 맥스웰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전자기파를 실제로 만들어내었고, 그것이 다름 아닌 빛이라는 걸 밝혔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초에 진동하는 회수, 곧 진동수(frequency)의 단위를 헤르츠(Hz)로 씁니다.
  


 

 

 

  전자기파, 곧 빛은 파길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빛(visible light) - 한자어로는 가시광선 - 에는 '빨주노초파남보'라고 외우는 무지개 빛깔이 있는데 빛깔마다 파길이가 다릅니다. 빨강하고 보라 중에 어느 쪽이 파가 더 긴 거죠? 빨강이 더 깁니다. 그래도 1 μm 보다도 짧지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빨강보다 더 긴 빛도 있는데 토박이말로 넘빨강살(infrared)이라 부르지요. 빨강 넘어서 있다는 뜻입니다. 한자어로는 적외선이라고 합니다. 비슷하게 보라 넘어서 파길이가 더 짧아 보이지 않는 빛이 넘보라살(자외선; ultraviolet)이고, 넘보라살보다 더 짧게 10-10 m 정도 되는 녀석이 엑스선(X-ray)이지요. 그보다도 짧은 게 바로 감마선입니다. 한편, 넘빨강살보다 파길이가 더 긴 전자기파에 마이크로파(microwave)가 있습니다. 집에서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마이크로파를 이용하여 음식을 뜨겁게 하지요. 파 길이가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로 긴 녀석은 보통 전파(radio wave)라고 부릅니다. 파길이에 따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에 씁니다.
  
  일반적으로 파동은 한번 진동할 때 파길이 만큼 나아가므로 파동의 빠르기는 진동수와 파길이의 곱으로 주어집니다. 전자기파, 곧 빛의 경우 빠르기는 30만 km/s로 일정하므로 진동수와 파길이는 반비례하게 됩니다. 예컨대 파길이가 600 nm인 빛은 진동수가 500 THz나 되지요. 에프엠(FM) 방송에서 쓰는 범위인 진동수 100 MHz의 전자기파는 파길이가 훨씬 길어서 3 m입니다.
  

▲ 제임스 맥스웰(1831-1879 James Clerk Maxwell)

  이같이 19세기 후반에 빛은 파동이라고 확증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빛전자효과(광전효과; photoelectric effect)라고, 쇠붙이에 빛을 쬐면 전자가 나오는 현상을 관측했는데, 쬐어 주는 빛을 바꾸면서 전자가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조사해 보았지요. 예컨대 빛의 세기나 파길이를 바꿔 봤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빛은 파동이 아니라 어떤 알갱이들처럼 거동하는 듯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컴프턴 효과(Compton Effect)라는 더 직접적인 현상이 관측되었습니다. 빛을 전자에다 쏘아 봤더니 놀랍게도 빛과 전자가 마치 당구공이 부딪힌 것처럼 움직이더란 겁니다. 당구가 사실 물리 공부에서 중요하지요. 당구공이 서로 충돌하면 고전역학에 입각해서 흩어집니다. 아무튼 이는 빛이 운동량을 가지고 에너지도 가지는 알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겁니다. 그래서 빛이 알갱이들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빛알(photon)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한자어로는 광자(光子)라고 합니다.
  
  앞에서 대칭성에 대해 이미 소개했지요. 비로소 대칭성을 제대로 논의할 때가 되었습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로서 먼저 원자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자가 기본이 아니고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런데 원자핵도 기본이 아니라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졌다는 걸 알게 되고, 따라서 기본입자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것은 물질을 구성하는 알갱이니까 물질입자라고 부릅니다. 이와 달리 빛은 전자기파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알갱이로서 빛알이 있다고 볼 수 있게 된 거지요. 결국 기본입자에는 물질입자들과 빛알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련은 대칭성을 이용해서 분석하면 편리합니다. 아무렇게 마구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직적으로 이해해보자는 거지요.
  
  학생이 많을 때 아무렇게나 놔두는 것보다 잘 분류해보면 편리하잖아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예컨대 안경을 꼈는지, 성이 뭔지, 키가 어느 정도인지, 여자인지 등 어떤 성질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게 편하겠지요. 아니면 어느 학과냐, 이런 식으로요. 마찬가지로 이른바 기본입자들이 많이 얻어졌는데, 어떠한 성질에 맞춰서 구분하는 게 편리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대칭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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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 점점 전문적인 세부 분야로 들어가는데 좀 헷갈린다. 벌써 늙었나 ㅡㅡ

 

원자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이른바 원자 사상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라는 사람 들어 봤죠? 못 들어 봤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 알지요? 일반적으로 자연철학자라고 부르지요. 아낙사고라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이 연속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소 단위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한 사람이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입니다. 들어 봤죠? 그는 물질이 연속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고 물질의 최소 단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최소 단위를 원자라고 불렀지요. 원자란 말 자체가 더는 쪼갤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데모크리토스는 아무런 근거 없이 순전히 사변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근대적 의미에서 원자를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누구죠? 근대란 의미는 실험적 근거가 있다, 곧 검증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레이를 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근대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에 돌턴(John Dalton)이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원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을까요? 돌턴은 화학자라 할 수 있는데, 화학반응을 연구했지요. 물질은 화학반응을 통해서 다른 물질로 바뀝니다. 화학반응에서 관여하는 화합물을 분석해 보고 화합물의 성분이 일정한 비율로 주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컨대 물은 수소와 산소로 돼있는데 아무렇게나 결합돼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2 대 1로 결합돼 있지요. 이같이 성분이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비유하자면 설탕을 타서 커피를 마시는데 설탕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고 싶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네요. 커피 잔이 여러 개 있는데, 설탕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분석해 봤더니 어떤 것은 설탕이 12 g 들어 있었고, 다른 것들에는 6 g, 9 g, 15 g 있었습니다. 분석 결과 모든 잔에 들어 있는 설탕의 양은 언제나 3 g의 배수였습니다. 이는 설탕을 넣을 때 가루설탕이 아니라 각설탕을 넣었고, 각설탕 하나가 3 g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고 합리적입니다.
  
  화학반응이 일정한 성분비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설탕의 양이 일정한 양, 곧 각설탕의 정수배로 주어지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지요. 이에 따라 각설탕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각설탕을 원자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원자라는 기본단위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원자 가설이라고 말하는데, 이른바 가설을 세운 겁니다. 앞에서 이론의 구조를 잠깐 공부했는데, 적절한 가설 또는 기본원리를 세워서 전제하고 시작하지요. 가설연역(hypothetico-deductive) 체계라고 부르는데 가설―이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에서 출발해서 정합성을 유지하며 논리 전개를 하고 얻어진 결론을 실제 세계와 맞춰 봐야 합니다. 이른바 실험적 검증을 하는 겁니다. 실험적으로 검증해서 일치하면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일치하지 않으면 버리고 새로운 가설을 세워야 합니다.
  
  돌턴이 처음에 원자라는 가설을 채택하자 여러 가지 화학반응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답을 아니까 당연한 것 같지만 원자라는 걸 생각하지 않으면 화학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가 만나서 물이 되는 반응을 생각해 보지요. 언제나 수소와 산소가 2 대 1로 반응해서 물이 되는데, 왜 반드시 2 대 1일까요? 물질의 기본 단위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편리하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요. 물질의 특성을 지닌 기본 단위는 분자로서 수소나 산소는 각각 원자 둘이 모여서 분자를 이룹니다. 이들이 만나서 물이 되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냅니다.
  
  2H2 + O2 → 2H2O
  
  수소분자(H2) 2개와 산소분자(O2) 1개가 만나서 물 분자(H2O) 2개가 생기는 것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보여주지요.
  
  세상에 물질이 모두 몇 가지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른다가 답입니다. 워낙 많고 갈수록 점점 많아지죠. 계속 인공적으로 합성하니까요. 그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을 원자 가설에 의하면 불과 수십 가지의 원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래서 원자 가설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원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학생 있어요? 감각기관으로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지만 수많은 간접 근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돌턴도 화학반응과 물질의 다양성 면에서 원자 가설을 세웠지만, 원자의 실재성을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사고의 방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정도의 실재성을 부여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세기 후반의 볼츠만(Ludwig Boltzmann)입니다. 통계역학을 창안해낸 사람인데, 처음으로 엄밀한 의미의 원자를 정립하였습니다. 업적의 중요성과 과학 발전에 미친 영향을 볼 때 아인슈타인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 때문에 일찍 불행하게 죽었다고 할 수 있지요.

 

 

 


  
  원자의 구성 입자
  
  그리고 원자란 말 자체가 더는 쪼갤 수 없다는 뜻을 지녔지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원자도 더 기본적인 것들로 구성돼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원자보다 더 기본적인 알갱이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톰슨(Joseph J. Thomson)입니다. 유리로 만든 밀폐된 용기 안의 양쪽에 전극을 집어넣고 공기를 웬만큼 빼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전극 사이에 전압을 걸어줍니다. 전기이음줄을 통해서 외부 전지를 전극에 연결한 거지요. 전압을 충분히 올려주면 두 전극 중에 전지의 (-)단자에 연결된 음극에서 뭔가 나오는 것 같단 말이에요. 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를 음극선(cathode ray)이라 불렀습니다. 1897년의 일이지요.

  뭔가 나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용기 안에 공기 같은 기체가 조금 있으면 빛이 납니다. 여기에 어떤 기체를 채우느냐에 따라 특정한 빛을 냅니다. 이를 이용한 것이 바로 네온사인(neon sign)이지요. 꼭 네온을 채우는 것은 아니고 수은, 질소, 아르곤 따위를 채우는데, 이에 따라 나오는 빛깔이 청록, 주황, 빨강 등으로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밤거리에는 유달리 네온사인이 많지요. 외국에는 환락가에만 네온사인이 찬란하지 주거지역은 물론 일반 상업지역도 네온사인은 드뭅니다. 유난히 십자가 네온사인이 많죠? 외국인들은 공동묘지가 많은 줄로 오해한다고 하지요. 의원 네온사인도 많은데 응급실 표시가 아니고 밤에 열지도 않지만 광고하기 위해 켜놓는 듯합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걸 광고한다니 좀 이상하지요. 성형외과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용기 안에 장애물을 넣으면 그 뒤에 그림자가 진다는 사실도 관측했습니다. 이는 눈에는 안 보이지만 뭔가 나와서 직진하기 때문에 장애물 뒤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뿐만 아니라 바람개비를 갖다 놓으면 돌아가는 것도 봤습니다. 무엇인가 나온 것이 바람개비에 부딪쳐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또한 외부에 전극을 내부전극과 수직으로 배치하거나 자석을 놓으면 굽은 길로 움직인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결국 음극에서 무엇인가 나온다고 결론지을 수 있고, 이를 음극선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음극선은 여러 가지 성질로 미루어봐서 어떤 작은 알갱이들이 흘러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뭔가 와서 부딪히고 압력을 줘서 바람개비가 돌아가니까 운동량을 가지고 있고, 이는 질량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질량을 지닌 알갱이들의 흐름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전기나 자기를 걸면 가는 길이 굽어지는 걸로 봐서 전기를 띤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그 전기가 음(-)전기라고 정해진 거죠. 따라서 음극선은 질량과 음전기를 지닌 어떤 알갱이들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알갱이를 전기를 띠고 있다는 뜻에서 전자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주 가벼워서, 질량이 원자 중에서 가장 가벼운 수소원자에 비해도 1836분의 1 밖에 안 되지요.
  
  이것으로 보아 원자가 존재하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원자 안에는 전자가 있고 그 전자가 (-)전기를 띠는데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어딘가 나머지 부분은 양(+)전기를 띠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전체적으로 중성이 되니까요. 그리고 전자가 아주 가벼운 것으로 미뤄봐서 전자를 뺀 나머지가 원자 질량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원자에는 (-)전기를 띤 전자가 있고 전자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전기를 띠면서 원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톰슨은 원자는 찐빵처럼 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찐빵이 어떻게 생겼어요? 안에 아무 것도 없는 빵은 맛이 좀 없으니까, 빵 안에 팥 앙금 같은 소를 넣지요. 소 대신에 건포도를 빵 전체에 퍼져 있도록 고르게 넣었다고 합시다. 이러한 원자의 찐빵모형(pudding model)에서 건포도가 (-)전기를 띤 전자에 해당하고 나머지 부분에 (+)전기가 고르게 퍼져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중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이 타당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20세기 초에 톰슨의 제자였던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는 알파선(α-ray)을 흩뜨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알파선은 방사성 원소가 붕괴할 때 나오는데 흔히 베타선(β-ray), 감마선(γ-ray)과 함께 나옵니다. 알파선은 에너지가 약해서 큰 문제가 없지만 감마선은 위험하니까 쬐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핵반응로(nuclear reactor)에서 - 부정확하게 원자로라고 부르지요 - 많이 나옵니다.
  

▲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


  알파선 흩뜨림 실험을 하기 위해 금으로 만든 얇은 막에 알파선을 쏘아 보냈습니다. 알파선을 이루는 알갱이는 사실 헬륨의 원자핵입니다. 양성자와 중성자 각각 2개로 이루어져 있어서 양전기를 띠고 있지요. 알파 알갱이들로 금 원자를 두들기니까 대부분은 그냥 쓱 지나갔지만 어떤 것은 가다가 방향이 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녀석은 가다가 거의 되돌아온 녀석도 있었습니다. 이는 밀치는 힘을 받았기 때문인데 알파 알갱이가 양전기를 띠고 있으니까 금 원자가 어딘가 역시 양전기를 띤 부분이 있어서 전기력에 의해 밀어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찐빵모형에 의하면 금 원자가 바깥에서 볼 땐 완벽한 중성이니까 전기력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는 알파선이 흩뜨려지는 것으로 봐서 금 원자는 양전기, 음전기가 고르게 섞여서 중성이 아니라 어딘가 양전기만 지닌 부분이 따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러더포드의 결론은 찐빵모형과 달리 원자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음전기를 띤 전자에 더해서 양전기를 띤 부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지요. 양전기를 띤 부분을 원자핵(atomic nucleus)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자에는 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결국 원자는 양전기를 지닌 핵과 음전기를 띤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문제가 생기는데, 양전기와 음전기는 서로 당길 터인데 핵과 전자가 어떻게 붙어버리지 않고 따로 있을 수 있냐는 거지요. 이 문제를 마치 해와 지구가 서로 당기는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당기니까 우리가 (지구에서) 볼 때에는 해가 지구로 떨어져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도 안 떨어지고 있어서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서로 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서로 당기니까 가속도가 생기는데 돌고 있으니까 가속도는 도는 방향을 계속 바꿔주어서 원운동하도록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핵과 전자가 서로 당기지만 전자가 핵 주위를 돌고 있으므로 붙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마치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돌듯이. 이 러더포드 모형은 스승이던 톰슨의 찐빵모형보다 원자를 훨씬 잘 설명해줍니다. 뒤에 논의하겠지만 이보다 더 좋은 원자 모형이 보어(Niels Bohr)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보어는 러더포드의 제자였지요. 이들 모두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 보어(Niels Bohr)


  러더포드는 원자핵이 양전기를 띠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채드윅(James Chadwick)은 원자핵이 전기를 띠지 않은 중성자라는 알갱이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핵은 전체적으로는 양전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중성인 녀석이 있는 걸로 봐서 핵 안에는 양전기를 띠고 있는 녀석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걸 양성자라고 이름 붙였고, 따라서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원자의 구조는 가운데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핵이 있고 주위에 전자가 있다고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 사람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 채드윅(James Chadw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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