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크리스토프 멩케 Christoph Menke


크리스토프 멩케는 독일 포츠담대 윤리학·미학 교수이자 인권중앙위 공동대표다. 통상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 철학자로 분류되며, 특히 아도르노 미학을 계승한 독보적인 비판이론가로 평가된다. 하이델베르크/콘스탄츠 대학에서 철학·독문학·예술사를 수학했고, 베를린자유대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제출했다. 박사논문인 ‘예술의 지고성’을 통해 세계적인 차세대 미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지성계에서의 학술활동뿐 아니라, 인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유일한 인권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포기해야 한다. 인권은 결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많은 특수한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설명된다…‘미학의 시대’인 현재, 심미적인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예술의 과제는 심미적인 것이 지닌 비판적인 힘을 지키는 것이다. 
 

헤겔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화해할 수 없는 실천적 갈등 상황을 형상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이성의 원리에 기초해 실천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함으로써 비극은 극복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크리스토프 멩케의 철학적 반성은 근대를 비극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곧 헤겔이 생각한 것과 달리 근대의 윤리·정치적 질서는 화해 불가능한 갈등에 빠져 있으며, 이는 본성상 이성적 반성을 통해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주의 철학자들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 역시 근대는 환원 불가능한 가치 다원성의 시대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규범 질서를 통해 이런 다원성이 규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멩케는 근대성의 규범적 질서 자체가 근원적으로 갈등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갈등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평등의 원리가 항상 구체적이고 저마다 상이한 조건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와 구체적 개인들의 고통 사이의 괴리는, 줄일 수 없는 영원한 인간적 한계일까?

멩케는 한편으로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규범적 원리를 정초하려는 비판이론의 전통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에 근거를 둔 아도르노의 통찰을 결합하여 이러한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독일에 있는 멩케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멩케의 생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최근 저작 <비극의 현재>는 매우 독창적인 비극론이다. 이 책은 비극을 서구 문화의 근본 토대로 설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행위의 보편적·근원적 구조로서 간주하는 것인가?

“둘 모두 맞다. 비극은 인간 행위의 보편적인 사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행위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아무 허물도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비극적인 것의 본래적인 구조가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인간적인 근본조건을 벗어나고자 할 때, 비로소 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서양 문화의 기본 동인(動因)을 발견한다. 서양 문화는 학문과 법(법칙)을 통해 실패 가능성을 배제하려고 한다. 비극 형식은 성공을 확실하게 하려는 이런 계획에 대한 반성으로 출현했다. 비극은 우리가 실수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기획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획이 처참하게 좌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비극은 서구 문화(계몽)의 내적인 자기모순을 펼쳐 보인다.”

-당신은 최근 인터뷰에서 인권운동이 과거와는 달리 탈정치화되는 위험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혁명적 역동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혁명적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또 인권 개념 역시 비극처럼 서구의 산물이지 않은가?

“인권 사상은 18세기 프랑스, 미국, 영국과 독일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권 사상이 서구의 산물 이상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서구의 산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자체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권의 근본이념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만일 인권이 이런 서구적 평등 이해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평등에 곧바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극으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어떤 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단순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할 수는 있다. 그 첫걸음은 유일한 인권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 이념이다. 이런 요구 위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견뎌내야 하며 모든 적대자에 반대해야만 한다. 여기에 인권 이념의 혁명적 힘이 존재한다. 이런 힘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인간을 예속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이념의 구체적인 의미는 상이한 상황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정식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권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설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념은 더는 유지될 수 없다. 이를 ‘비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권은 결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많은 특수한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수성이 결코 평등 이념의 좌초를 의미하지 않는다. 평등 이념은 이런 다수성을 전개시키라는 것을 요구한다.”

-아도르노 미학의 계승자로서, 당신은 비판이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모든 합리주의와 철학적 낙관주의를 회의(懷疑)한다는 점이다. 그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니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소크라테스적 동일화, 곧 덕과 앎의 동일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된다는 믿음, 주체의 이성이 보증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활동이 성공하고 그것이 좋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곧 주체의 이성만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는 자연과 이성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비판이론은 보여준다.”

-헤겔의 ‘예술의 종언’ 테제 이후 미래의 예술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미학의 세기’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에 철학적 미학자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예술의 종언’이라는 헤겔의 테제는 예술의 전통적 과제와 연관이 있다. 전통적 규정에 따르면, 예술이란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가 1800년 이래로 끝났다는 점에서 헤겔은 옳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도르노가 말하듯, 같은 시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타당한 이념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예술의 과제는 진리를 현시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현시와 경험의 또다른 종류이자 방식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의 (재)인식으로 정향되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적인 잠재태의 유희를 통해 규정된다. 그것을 니체와 베냐민은 ‘도취’라 불렀고 아도르노는 ‘미메시스’라 불렀다. 현재를 ‘미학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심미적 상태가 예술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회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회의 심미화는 실러에서 마르쿠제에 이르는 전통이 희망했던 혁명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미적인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종의 생산력이 되어버렸다. 소비의 본질적인 매체가 된 것이다. 예술과 비판이론의 과제는 이것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다. 예술은 사회의 심미화에 반대하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힘으로서 심미적인 것을 수호해야만 한다.” 김동규/연세대 강사


 

 

 

 

 




 

» 김동규/연세대 강사
 
김동규씨는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이 있고,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을 번역했다. 논문으로 ‘서양 이성의 멜랑콜리-칸트의 경우’, ‘하이데거의 멜랑콜리 해석-창작하는 자유인의 무거운 심정’, ‘예술가의 자기 목소리-예술가와 양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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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연재 가운데 하나이다. 강금실. 눈여겨 볼 사람인듯하여. ^^;;; 

변호사 강금실(52)과 가까운 시인(남자다!) 한 사람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도 여전히 멀쩡한 사람은 강금실이 유일해!"라고 말한 적 있다. '멀쩡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멀쩡하다는 게 멀쩡하다는 거지 무슨 뜻이 있겠냐"고 영양가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말이 '변하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라는 뜻이리라 짐작했다. 그 시인의 지인들 가운덴 넓은 의미의 정치판(다시 말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가 보기에 그들 대다수가 그 뒤 '멀쩡하지 않'게 돼 버렸나 보다.

항심(恒心)을 지녔다는 점에서 강금실은 공직 안팎에서 멀쩡했다. 내가 그녀와 가까이 어울리기 시작한 건 그녀가 법무부 장관이 되기 다섯 해쯤 전이었는데, 그 다섯 해와 그 뒤 여섯 해 동안 내게 비친 강금실은 다름이 없었다.

내가 그녀의 단점이라고 판단하는 특질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혹시 그녀와 일을 같이 해본 사람, 공적으로 얽혀있던 사람은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가 오직 '함께 노는 것'이었던, 그러니까 그녀와 사적으로만 얽혀있던 내게, 그녀는 세월과 떨어져 여일(如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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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것의 한 측면은 (정신적) 성장이나 쇠락이고, 성장이나 쇠락은 한 개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므로,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낸 지난 11년 동안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칭찬이 되는 건지 흠잡기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년이 돼서야 친구가 된 처지에서, 그녀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게 다행이었다. 강금실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예측가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를 근원적으로 옥죄고 있는 일종의 '양식(良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녀와 공적으로 얽히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법률가 강금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가 판사나 변호사로서 유능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전혀 모른다.

법무부 장관 강금실, 정치인 강금실에 대해선, 유권자로서 판단하는 바가 있지만, 그걸 떠벌리지는 않겠다. 강금실에 대한 내 사적 우정이 공인(公人) 강금실에 대한 내 판단을 오염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강금실의 (정치활동을 포함한) 공직생활에 대한 내 태도는, 여느 친구들의 '밥벌이'에 대한 내 태도와는 달랐다. 나는 강금실이 법무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했다.

그 심정은 가족이나 친구를 격투기장 위에 올려놓고 관전하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강금실이 미덥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남자나 여자보다 강금실이 그 자리에 덜 어울려 보여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우정은 나로 하여금 국무위원 강금실의 행보를 무심하게, 대범하게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에게 찬사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기뻤고, 야당에서든 언론에서든 그녀에게 말의 돌멩이가 날아들 때 나도 함께 아팠다. 그래서 그녀가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나는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강금실이 공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말려왔다. 친구에 대한 내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실은 강금실의 속마음을 알고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예측하고도, 내가 부질없는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두고 그녀가 의례적으로 의견을 물어왔을 때,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국 출마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그 정권에 대한 책임감으로 옭아맸다. 그리고 당시의 여권에서 그런 논리를 들이댔을 때, 그녀에게는 그것을 부정할 만한 뱃심이(뻔뻔함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질 줄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사람들의 도움 요청에 그녀가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녀가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물론 나는 그녀가 결국 그 선거판에 끼어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측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선에 임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본인 생각엔 그렇지 않았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제1당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출마를 하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녀에게는 민주당(이라고 부르든 열린우리당이라 부르든 통합신당이라 부르든)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지만, 그 책임감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 책임감은 권력의지가 결여된 책임감이었다. 또는 자신의 권력의지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무릅쓸 뱃심까지는 갖추지 못한 책임감이었다.

권력의지는 정치인의 첫 번째 자질이다. 그 점에서, 강금실에겐 '성공적인' 정치인의 자질이 모자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캐기 위해 온 세상의 광산을 뒤지고 다닐 미욱함(검질김?)이 그녀에게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염결하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이 그녀에겐 너무 넉넉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그녀에겐 권력의지 못지않은 정치인의 자질인 '철면피'가 결여돼 있다.

총선이 끝난 직후에 쓴 칼럼에서, 나는 강금실의 권력의지 부족을 지적하면서 그녀에게 시민사회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석에서 그 칼럼에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결국 그녀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지금도 민주당적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정치 일선에는 발을 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순전히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선의의 유권자가 내리는 판단이다.

나는 천분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다. 군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고 사업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듯, 정치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강금실은 직업정치인으로 늙어 죽을 운명은 아닌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의 자질로서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의 조화'를 꼽은 바 있다.

강금실에게는 상인의 현실감각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하겠으나, '성공적' 정치인이 되기엔 좀 모자라 보인다. 그녀는 현실정치인이 되기엔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너무 높은 이상은, 너무 높은 기대지평은, 좌절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강금실과 어울려 지낸 11년 동안 그녀가 여일했다고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 다섯 해쯤 전에 가톨릭에 입교한 것이다. 그 전에 그녀는, 딱히 무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아무런 종교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속세의 일에 너무 바빠 세상 너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그녀에게는 어떤 종교적 심성 같은 것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얘길 나누다가,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외경 같은 것을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신자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같은 것을 '양서(良書)'라고 판단하는 나는 강금실의 회심(回心)이 그리 기껍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이 행성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지닌 종교에 내 친구도 한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금실의 가톨릭은 그저 스타일이나 패션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코스튬으로 삼는 게 아니라, 제 피와 살로 삼을 기세(였)다. 다시 말해, 세월과 더불어 그녀의 믿음은 점점 굳건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달리기 선수들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걸 겪듯, 내 친구도 문득문득 '빌리버스 하이'(believer's high)라고 부를 만한 것을 느끼는 듯하다. 그것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이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유물론자니까.

얼마 전, 나는 강금실의 사무실 근처엘 가 그녀와 낮술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믿음' 얘기가 나왔다. 나는, 비웃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러니까 신자들이란 결국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 아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소위 '신자'들의 나약함과 이기주의를 타박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내 친구의 대답은 진지했다. "물론이지,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있을까?"

친구의 '순순한' 대답에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내 알량한 이성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강한가? 정말, 세상의 이 모든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 비참을 통해 역사하는 초월적 존재가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닐까? 내 무신론은 내 교만의 그림자가 아닐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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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잊고 지냈던 고종석의 연재를 옮겨 본다.  

 

고종석의 여자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이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1~1952)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기여한 바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녀가 혁명 러시아(나 그 뒤의 소련)에서 맡았던 정치적 역할도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러시아혁명 또는 혁명 러시아와 관련해 가장 널리 거론되는 여성 가운데 하나다. 이름이 실체를 넘어선 경우라 할 수 있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콜론타이는, 혁명 러시아나 소련의 권력 핵심부에선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 여성으로선 독특한 이력을 걸었다. 우선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재(在)외국 공관에 여성을 파견한 나라는 있었겠지만, 그 수장으로서는 아니었다.

콜론타이는 노르웨이와 멕시코에서 소련 공사를 지냈고, 스웨덴에서 소련 공사와 대사를 지냈다. 혁명정부의 첫 사회복지 인민위원을 지냈고 1919년에는 세계 최초로 여성부를 창설해 이끌었지만, 1920년대 이후 그녀의 일터는 거의 외국이었다.

그녀 시대에 사람들은 외교를 남자의 일로 여겼다. 그것은 정치를 남자의 일로 여긴 것과 비슷하다. 외교는 국경을 넘어선 정치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정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의 비속함과 잔혹함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외교는 번잡한 프로토콜 속에, 화사한 연미복 속에, 강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국가의지를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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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속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꿈꿨던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


 

그런 외교의 일선에 여성이 나섰으니, 세상의 눈길을 끌 만했다. 아버지가 제정러시아의 장군이었고 어머니가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딸이었던 덕에, 콜론타이는 훌륭한 교육(좌파들이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경멸하는)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교육은 그녀의 외교관 생활에 도움이 됐을 게 분명하다.

콜론타이는 또 혁명 초기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따라서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담한 당내 좌파 '노동자의 반대'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 레닌이 '노동자의 반대' 그룹을 해산한 뒤, 콜론타이는 권력핵심에서 더 멀리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핵심부의 독선에 대한 비판을 콜론타이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1930년대 '모스크바 재판' 때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피고인 명단에서 빠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녀를 박해하지 않은 스탈린의 심사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 외교관이라는 점, 국내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따위가 고려됐는지 모른다. 사연이 어찌 됐든, 콜론타이는 당 지도부의 정책에 투덜거렸으면서도 고종명한, 드문 스탈린 시대 관료였다.

콜론타이라는 이름을 소련 안팎에 결정적으로 알린 것은 그녀의 소설과 논문에 담긴 전투적 페미니즘일 것이다. 혁명 이후에 러시아인들은 이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일부일처제를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은 혁명 러시아에서도 국가를 이루는 기본 단위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일처제와 마찬가지로, 혁명 러시아의 일부일처제도, 실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였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완전한'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한, 배타적이고 동등한 성애를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소련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완전한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콜론타이의 견해는 적극적이었다. 혁명은 종국적으로 국가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해체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결혼이나 전통적 가족관계는 소유권에 바탕을 둔,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과거의 유물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콜론타이에 따르면, 남성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했다.

또 타인의 마음은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지적 사랑이어야 했다. 이 사랑은 그러므로 일부일처제 너머의 사랑이었다. 콜론타이는 이런 사랑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 불렀는데, 이것은 좌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소란스러운 논쟁을 낳았다.

우선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 예로 꼽았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성애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예사이니 말이다. 곧이곧대로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날개 없는 에로스'일 것이다. 그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라 해서 그것이 다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방어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남녀 불평등 때문에, 그런 섹스는 여성을 착취하고, 자녀 양육의 의무와 함께 내팽개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부른 사랑은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게 되면, 아이를 둔 여성도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돼 상호 존중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콜론타이에 따르면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소설 <붉은 사랑>의 주제가 이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소설 <삼대의 사랑>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를 한 여자를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마저 충격적으로 거부했다. 그녀의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콜론타이의 관점이 너무 낙관적이었든지 순진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 테다. 나로서는, 북유럽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현대의 '프리섹스'와 콜론타이가 주장했던 '날개 달린 에로스'를 구별하지 못하겠다.

콜론타이의 에로스관(觀)을 동료들이 곡해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그녀는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돼 퍼져나갔다. 그래서 콜론타이의 에로스 이론은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불렸다. 레닌 역시 이 '물 한 잔 이론'을 격렬히 비판했다. 혁명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콜론타이의 '자유결합'론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레닌은 위험스럽게 여겼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발걸음을 맞춰 성적 관계와 혼인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금욕적 자기 부정을 설교하는 것이 귀족적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생활의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물 한 잔 이론'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물을 마시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에로스관의 옹호자인 것은 분명했다.

콜론타이는 멘셰비키였다가 볼셰비키로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지워버릴 만한 업적(예컨대 트로츠키의 군사적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레닌과의 관계가 더 껄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콜론타이에 대한 내 견해는 어정쩡하다. 혁명 이후의 노동조합 옹호자 콜론타이, 관료주의 비판자 콜론타이를 나는 지지한다. 그러나 '자유결합' 옹호자 콜론타이, '날개 달린 에로스' 옹호자 콜론타이에는 덤덤하다.

비판적이 아니라 덤덤한 것은 그런 관점이 제 나름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나는 프리섹스주의자가 아니고, 에로스는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배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프리섹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특히 그 프리섹스가, 콜론타이의 '날개 달린 에로스'처럼, 질투와 억압이 사라진 상호평등의 사랑이라면. 에리히 프롬 이래 상투어가 된,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을 꿈꾼 콜론타이가, '시궁창의 흙탕물'이나 '가장자리가 더러워진 유리잔'을 거론한 레닌보다는 훨씬 더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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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쇳말 ④ 촛불… 대통령 당선의 결정적 계기로 시작돼 임기 내내 ‘시민 미디어’가 되고
추모의 불길로 타오른 ‘참여정치’의 상징 

5월23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촛불이 켜졌다. 생전 웃는 모습 곁에 누군가 방명록을 뒀다. 이미 시민들의 글이 빼곡하다. 떨리는 손 다잡은 흔적이 물고기처럼 펄떡댄다. ‘정신애’라는 이름이 감정에 겨운 글로 말한다. “스무 살 때 촛불 들어 지켜냈습니다. 다시 한번 촛불을 들어 이제 가시는 길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들어 올렸다 내렸으며 이제 다시 그의 곁에 모이고 있다.



시민의 촛불, 노무현의 자원이 되다

 
 


» 그때, 돼지저금통에 담긴 것은 정치자금만이 아니었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오랜 열망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거 참여를 탄생시켰다. 2002년 11월28일 경기 부평역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돼지저금통에 모은 돈을 전달받은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모든 일은 촛불에서 시작했다. 하굣길의 여중생 두 명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렸다. 2002년 6월이었다. ‘앙마’라는 네티즌이 다 같이 모여 추모하자고 제안했다. 지도부가 없어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전에는 몰랐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4만5천여 명이 모였다. 촛불.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고 여린 그것을 사람들은 품에 당겨 안았다. 사건, 무명씨의 제안, 인터넷 토론, 광장의 촛불, 기성정치를 압도하는 시민의 힘…. 이때부터 ‘촛불 정치’의 문법이 틀을 갖췄다.

“반미면 어떻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이 말했다. 1400도로 타오르는 수만 개의 촛불 앞에 섰다.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가 좀 더 자율적이어야 합니다.” 촛불이 박수를 보냈다. 대통령 후보가 ‘반미 집회’에 참여해도 되느냐고 대선 캠프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 현장을 찾았을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반미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2002년 6월 이후, ‘시민으로서의 촛불’은 결정적 국면마다 그의 자원이 됐다.

2002년12월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은 ‘효순·미선 촛불 집회로 인한 반미 정서’를 패인으로 꼽았다. 반미 정서까진 모르겠으나 촛불 집회가 이회창 후보의 패배, 노무현 후보의 승리와 밀접했던 것은 사실이다. 우파의 ‘촛불 콤플렉스’도 함께 시작됐다. 심지어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고 우파 인사들은 의심한다. 현명한 의혹은 아니다. 촛불의 작동 방식을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촛불을 움직인 게 아니라, 기성 정치 구조 전체를 불신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붙이고 끄고 또 붙였다.
  

정치는 여전히 특정 정치가 계급의 직업적 행위이고, 이에 진입하는 경로 자체를 바로 그 계급이 독점하고 있다.” <유쾌한 정치 반란, 노사모>에 노혜경이 그렇게 적었다. 같은 책에는 “정치 혐오의 진흙탕에서 피운 정치 사랑의 연꽃”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정치개혁을 꾀했던 노무현 노선에 대한 시적 개념화다. 실제로 2002년 12월19일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언론은 ‘노사모의 승리’라고 적었다. 민주당의 승리라 기록했다면 부정확한 표현이 됐을 것이다. 민주당에 앞서 자리를 차지한 ‘노사모’는 정당 질서에 복속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만 졸업한 노 전 대통령에게 최고 엘리트들이 장악한 정당·관료 조직의 장벽은 높았다. 그는 기성의 정당·관료 정치와 항상 긴장했다. 그가 싸운 것은 지역주의 이전에 ‘엘리트주의’였다. “명문가, 명문학교 출신들은 깊이 반성해봐야 합니다. 기회주의 처신으로 개인적 이익을 도모해왔고, 그 가운데 부당하게 특권을 누려왔던 과오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선 직전 출간된 <노무현의 색깔>이라는 책에서 그는 엘리트로 표상되는 기성의 권력 작동 방식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그는 ‘양김’과 단절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기성 정당의 역학구조에서 탄생했다. 두 대통령은 나란히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보수정당 또는 분파의 힘을 빌렸다. 대통령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을 거친 민자당 창당의 산물이었다. 대통령 김대중은 평생의 숙적 김종필과 손을 잡은 ‘DJP 연합’의 결실이었다. 정치권력의 상층을 어떻게 분할하고 통합할 것인지가 이들의 화두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대편을 봤다. 정치권력의 밑바닥, 정치 구조의 외곽에서 정치적 자원을 길어 올렸다.



 
 


»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5월23일 밤, 봉하마을 빈소 앞에서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


‘노사모’는 이미 2002년 대선 이전부터 주권재민과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 의지를 실현할 인물로 여겨졌다. 그들이 “자율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연대”를 구현하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과 지역 소모임 형태의 풀뿌리 조직을 갖췄을 때, 촛불의 진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2004년 3월부터 석 달에 걸친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은 그 정점이었다. 최대 13만 명이 운집했던 이 촛불은 의회의 결정을 무력화하고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사실상 압박했다. 정당의 외곽, 거리와 광장과 인터넷에 편재한 시민의 힘을 신뢰했던 노 전 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 정치인 노무현과 그가 표상하는 가치를 지켜준 것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그 가공할 위력을 우파는 일찍부터 두려워했다. 촛불을 일컫는 우파의 용어는 따로 있다.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감정을 휘어잡기 위해 마구잡이로 외쳐대는 흥행이다. 몇 가지 특징은 있다. ‘반엘리트’ ‘반지식인’ ‘부흥사적 도덕주의’ 같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이건, 대통령 지망자들이건 그런 난폭한 포퓰리즘 풍토에 흠씬 젖어 있다.”(2002년 4월6일,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비록 비난의 맥락에 담기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보수 논객은 포퓰리즘에 흠씬 젖은 대통령 지망자가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002년의 촛불 시민과 2004년의 촛불 시민은 바로 그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

촛불은 그러나 끝없이 흔들린다. 2003년 6월, 이라크 파병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2007년 3월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대통령 노무현과 소통하는 ‘시민 미디어’였다. 그 풍경은 더이상 낯설지 않았다. 다만 4년 간격을 두고 타오른 두 촛불은 ‘노무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촛불은 그의 행보에 물음표를 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촛불에 현명하게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시스템의 상부 구조로 퇴행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이뤄 바닥난 정치자원을 보충하려 했다. 직접·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고, 시민들의 촛불도 사라졌다.

100만 명이 모인 2008년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반 이명박 정부’를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오판했다. 시민들이 불신하는 것은 기성 정치 구조 전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촛불을 보고 다시 한번 노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노무현의 모든 유산’을 척결하려 했다. 그 가운데는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검찰 수사도 포함된다. 그의 죽음은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시 촛불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무엇을 지킬 것인가


계속 타오를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번질까? 지난해와 같은 대규모 촛불을 낙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정권의 탄압이 있고, 촛불이 내세울 구호도 여전히 막막하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촛불이 다시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겠지만, 추모의 물결이 얼마나 확산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5월23일 대한문 앞에 적힌 방명록의 글은 대부분 후회와 반성의 고해였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제와 그리운 게 원통하다고 적었다. ‘자혁·자현 아빠’도 글을 남겼다. “그때 차라리 그들을 막지 말 걸 그랬습니다. 당신을 탄핵한다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때는 이런 일이 생길 걸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자혁 아빠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떠났다. ‘당신’이 좋아서 때로는 미워서 촛불을 들던 사람들은 그래도 ‘당신’없는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촛불을 든 자혁 아빠는 이제 그 촛불로 무엇를 지킬지 고민해야 한다. 저기, 사람들이 간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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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쇳말 ③ 도전… 당정 분리, 언론과 선긋기, 지역주의 타파 등 새로운 시도 계속했지만
우파·족벌언론 포화에 상처만  

저는 이번 선거를 통해 낡은 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개막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2002년 대선을 이틀 앞둔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무현 시대’를 이렇게 규정했다. 하지만 1년 뒤인 2003년 11월5일 그는 원로 지식인 13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연 오찬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종이 세종의 시대 기반을 닦은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것 같고 구시대의 막차를 탄 것 같습니다.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 후배들이 다시는 흙탕물에 발딛지 않도록 하고, 다음 정부가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 맏형’이 되려고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구습은 끈질기고 뿌리 깊었다. 도전은 번번이 좌절됐다.


 
 


» 2003년 9월30일 청와대 국무회의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커피를 마시며 박호군(맨 왼쪽)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한테서 과학위성의 성공적인 교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 도중 장관들과 함께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등 권위주의를 없애려 노력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족벌 언론, “좌파” 색칠로 공격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공천권과 당직자 임명권을 통해 당에 전권을 휘두르는 ‘총재님’이던 역대 대통령과 달리 그는 그저 평당원이었다. 당정 분리를 실행한 것이다. 대가는 몹시도 썼다. 당내 굳건한 지지기반은 없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에 이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 아파트값 폭등 등으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자 급기야 탈당까지 요구받았다. “섣부른 당정 분리 때문에 국정운영이 안 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를 두고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가 되는 걸 막고 국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당정 분리는 역대 대통령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문제는 당정이 소통까지 끊어버리는 바람에 양쪽 다 고립돼 최악의 경우가 됐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국민주권·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고 하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2004년 9월5일 문화방송 대담에서 나온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구시대 청산이라는 목표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안법 폐지 뜻은 한나라당과 우파 진영의 엄청난 반발에 부닥쳤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야만의 시대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처리를 위한 임시국회도 거부했다. 우파 단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는커녕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못했다.

족벌언론과 벌인 싸움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2001년 8월1일 민주당 수원시 국정대회에서 그는 “비리·특권 신문인 <조선일보>를 그대로 두고는 이 땅의 진정한 개혁은 없으며, 당원들과 지도부가 똘똘 뭉쳐 당운과 국운을 걸고 싸우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조선일보>는 함께 몰락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대통령이 된 뒤 그는 ‘국운’을 걸고 족벌언론과 싸웠다.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의 횡포” “박해” 등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이들을 비판했다. 이들의 취재엔 응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신문시장 독과점을 규제하는 신문법도 제정했다. 오보엔 일일이 정정·반론 보도를 신청하도록 공무원을 독려했다. 족벌언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좌파 정권’이라는 색칠을 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부동산정책도 좌파 정책, 교육정책도 좌파 정책이라고 했다.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조선일보>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2006년 6월 “(임기가) 남은 1년 반, 우리끼리라도 실용적 세계화로 살아남아야 한다. 일제 36년도 견딘 우리다”라고 썼다. 증오였다. 불행히도 여론을 좌우하는 힘은 그가 아니라 이들에게 있었다. 
 

탈권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요하게 여긴 과제였다. 2003년 3월11일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리 지치지 않았다. 회의 도중 대통령이 제안한 휴식 시간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회의장 바깥 복도에 마련된 탁자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도, 장관들도 모두 손수 탄 차였다. 경직된 분위기로 진행되던 과거 국무회의에선 휴식도, 커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한 국무위원은 “그런 자리도 처음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께 접근하기가 쉬워졌다”고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헌재에 가로막혀

 
 


» 퇴임 뒤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3월 마을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 누리꾼들은 이 사진을 보고 ‘멋진 노무현’이란 뜻의 ‘노간지’라는 별명을 지었다. 사진 연합 최병길
 
 
 


노 전 대통령 스스로 권위주의의 갑옷을 내던진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에게 개방했다. 총리가 주재하던 국무회의부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수석·보좌관회의까지 직접 주재했다. 회의엔 장관뿐만 아니라 관련 실무자까지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얘기했다. 듣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행정관한테도 직접 전화를 걸었고, 맞담배도 피웠다.

거침없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통령의 언어와 서민의 언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일상과 공식 언어의 일치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서민 대통령을 지향하는 철학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는 당시 청와대 참모의 말은 되씹어볼 만하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국민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야 진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는 얘기다. 우파와 족벌언론은 이번엔 ‘경박하고 품격 없다’는 평가를 내려줬다.

지역주의 해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손을 드는 순간 그는 지역주의 해소의 상징이 됐다. 당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영남 출신 호남당 대선후보’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지역주의 해소의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지역주의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인사에선 ‘영남 패권주의’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그의 도전 과제였다. 하지만 그 전략으로 내놓은 행정수도 건설은 추진 초반부터 쉽지 않았다. 2004년 1월 공포된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그해 9월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거를 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수도 이전은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을 비롯해 수도권의 민심도 악화됐다. 규모를 줄인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꿔 다시 추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도권과 충청권으로 민심은 갈릴 대로 갈린 뒤였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정치개혁의 도착지는 제도로 운영되는 민주주의였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만큼 기록에 집착했던 것도 그런 의지였다. 그는 밤에 청와대 관저에서 사적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음 날 기록관리비서관에게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의 요지를 알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지정기록물은 37만여 건에 이른다. 앞선 대통령들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지정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다. 하지만 역시 ‘선배’들이 옳았던 것일까. 이명박 정권은 집권 여섯 달 만에 법원을 동원해 지정기록물 공개에 나섰다. 지정기록물은 쉽게 공개될 경우 현직 대통령이 후임을 의식해 주요 기록을 제대로 안 남기거나, 후임이 직전 대통령을 상대로 정치 보복을 벌일 수 있어 비공개라는 장치를 둔 제도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더해 ‘기록물 유출’ 논란까지 일으켰다. 이준한 교수는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면서까지 책임정치를 할 기반을 만든 건데, 본질과 무관한 다툼이 돼버려 안타깝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왜 끊임없이 도전하고,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어야 했을까?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구습을 끊어내고자 하는 열정은 강했지만, ‘그 다음’을 내놓지 못했다. 구시대의 관습과 지역주의 타파, 당정 관계 변화 등 중요한 화두를 던졌지만,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준비된 내용을 보여주지 못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지역 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등의 문제가 손쉽게 ‘이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설 수 있는 사안을 ‘당위’로 밀어붙이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구시대의 막내 되고자 했을까


대통령 자리를 떠난 그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가 ‘시민’이 되려 했다. ‘전빵’(구멍가게의 경상도 사투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고, 자전거에 매단 수레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마을을 달리기도 했다. 봉하마을 주민들과 오리농법을 이용해 ‘친환경 봉하 오리쌀’을 수확했다. “자유롭게 대화하되, 깊이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민공간을 만들어보자”며 개설한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선 ‘노공이산’(우직한 사람이 뜻을 이룬다는 ‘우공이산’에 ‘노’를 합친 말)이란 필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참여와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힘을 보태려는 노력이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전직 대통령 모습에 봉하마을은 관광객으로 붐볐고, 누리꾼들은 ‘노간지’(멋진 노무현이란 뜻의 합성어)라는 애정어린 별명을 붙여주며 열광했다.

검찰이 숨통을 옥죄어오자 그는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마침내 2009년 5월23일 스스로를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는 청렴해야 (된다고) 하고, (지도자에게) 결단력을 요구하지만 50년이나 100년 뒤에 보면, 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느냐가 문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하다.”(2002년 9월26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마지막 순간, ‘노공’은 혹시 ‘구시대의 막내’가 되길 바라며 이 말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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