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글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의 쾌활에 대한 생각이다.  한겨레21에서 퍼왔다.

 

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 발리, 고원, 쾌활함 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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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인물인 듯하지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 인물이었는데 .... 

 

(17)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수사학과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유대계 백인 레즈비언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논쟁적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으로 예일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젠더 트러블>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서로는 <안티고네의 주장>,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젠더 트러블>, <불확실한 삶>, <누가 민족 국가를 노래하는가> 등이 있다.

 



 

» 주디스 버틀러
 


헤겔 철학에 대한 연구로 주저를 시작한 주디스 버틀러는 다양한 이론적 배경과 현란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난해한 글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주체형성 이론, 폴 드 망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의 영향을 받았고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과 (역)담론이론을 주요한 방법론적 토대로 삼고 있다.

버틀러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주요 저작은 무엇보다도 <젠더 트러블>(1990)이다. 이 책은 기존 페미니즘이나 철학에 대해 도발적인 논쟁과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계에 트러블을 일으켰고 세계적으로 번역 출간되어 1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인기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젠더 트러블>은 버틀러의 ‘젠더 계보학’이 표면화되는 저작이다. 젠더는 불안정한 사회적 구성물이므로, 공통된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페미니즘의 주체라는 주장은 특정한 정치권력이 작용한 결과임을 밝히려는 작업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정치학에 여성이라는 주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여성 주체가 있어야 여성 해방이라는 정치학이 있다는 전제에 있어서 그 ‘여성’은 확고한 본질이 아닌 일시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성의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으로 말해진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몸을 가지고 태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학습하면서, 남녀 간의 이성애를 당연한 욕망으로 여기며 자란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계보학은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상 어떤 것의 결과임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방법론이다. 계보학은 원래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논의를 계승한 푸코의 비평적 접근방식으로서 권력 효과나 담론의 구성물을 마치 근본 원인이자 전제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배타적 실천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논의 양식이다. 공통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사실상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안정된 여성성을 확보한 것으로 전제되는 생물학적 여성을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생산하려는 특정한 정치적 작용이기 때문에, 특정한 권력의 역학 관계 속에서 조작되고 구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이 여성 주체에서 복장 전환자, 젠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자, 성적 소수자 등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젠더 계보학은 소수자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그것과의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과 맞닿아 있다.


버틀러는 9·11 사건 이후 국가가 가져온 폭력의 악순환과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됐다.


<젠더 트러블>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1993), <권력의 심리 상태>(1997), <격분하기 쉬운 말>(1997) 등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 논의를 육체, 권력, 언어의 문제로 구체화한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우연적 토대 위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를 면밀히 고찰했으며,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희랍 비극의 고전적 여성 영웅 안티고네를 친족 교란과 젠더 역전의 급진적 퀴어 주체로 재해석했다.

주목할 점은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3) 이후 <젠더 허물기>(2004), <스스로를 말하기>(2005),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2007) 등의 후기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각의 변화이다. 버틀러는 미국이 겪은 대참사였던 9·11 사건 이후 국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또다른 폭력을 동원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고 본다. 그리고 대테러 전쟁을 주창하면서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아랍인이나 유대인과 같은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되며, 특정한 삶만을 살 수 있는 삶으로 제한하고 정당화하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극복하여 또다른 폭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애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곧 가멸적 육체의 취약성과 이질성에 대해 사유하고 그 애도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생산할 수 있는 정치적·윤리적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윤리적 가능성은 나의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비나스의 ‘얼굴’처럼 재현의 한계를 드러내는 타자성이, 곧 자신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이 윤리적 재현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가야트리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에서 버틀러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불법 체류자나 난민의 관점에서는 국가 없음이 단순한 국적의 누락이 아니라 권력의 장 내부에서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하는 적극적인 방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 없음’은 한 국가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저 벗어난 상태가 아니라, 권력이 적극적으로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국가에서 추방된 사람이나 추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독일의 이주노동자,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의 사람들,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의 권리 박탈은 보편적 주체의 양상이 아니라 특정 권력이 복잡한 방식으로 개입된 역사적 상황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삶’도 사실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조건이자 주권 권력 이면의 한 양상이기보다는, 특정한 법제적 권력에 의해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의 겪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버틀러의 논의는 전기의 젠더 존재론에 대한 계보학적이고 이론적인 통찰에서, 후기의 실천적 정치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문제까지 포괄하면서 이 사회 속에서 인식 가능한, 또한 생존 가능한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로 논의를 확대하고 있는 버틀러의 타자의 윤리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조현준/경희대 객원교수·영문학

 

 

 

 

 



 

» 조현준/경희대 객원교수·영문학
 


조현준은 경희대학교 영문학과,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주디스 버틀러의 환상적 젠더 정체성과 안젤라 카터의 ‘서커스의 밤’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과 경희대 교양학부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낯선 두려움’-서사 구조, 응시, 비체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젠더 계보학과 여성 없는 페미니즘-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등이 있고, <안티고네의 주장>, <젠더 트러블>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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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페에 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이 기사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에서는 적대감이라는 요소가 중요했다. 그리고 민주적 삶의 양식을 가진 개인을 말하는데 그런 삶의 양식은 우리의 지형에서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그러나 신생 민주주의라니 ㅠㅠ

 

“민주주의의 절차적 형태를 수립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민주적 시민성, 민주적 정서를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 같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은 특히 그렇다.” 
 

 

 

 

 

   

1985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국내에는 1990년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란 제목으로 번역)이란 책으로 서구 좌파학계에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을 촉발시킨 샹탈 무페(66·사진) 영국 웨스트민스터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가 지닌 불완전성과 한계를 꼬집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펴내는 계간 <아세아연구> 가을호 특집 대담을 통해서다.

무페 교수는 곽준혁 고려대 교수(정치학)와 한 대담에서 “민주적 개인성이 있어야 규칙과 절차가 뒤따라올 수 있다”며 “민주주의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고, 한국 같은 국가들에선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돼 있어도, 시민들이 그 절차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올바른 절차가 확보된다면 어떤 사회적 대립이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합의 모델에 대한 비판인 셈인데, 민주주의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는 오늘 한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무페 교수는 대담에서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현대 사회는 ‘조화로운 전체’가 아닌, 갈등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내장한 다원성의 사회인 만큼, 불일치의 여지를 봉쇄한 채 이성적 합의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페 교수가 밝힌 자신의 이론적 목표는 “(정치·사회 구조 안에) 적대감의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페 교수는 이것을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기획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쓰던 1980년대 초와 오늘날의 상황을 비교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페 교수는 말한다. “시민적 권리들은 공격받고 사회적 권리들은 박탈당했다. 1980년대 초반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다. 퇴보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급진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특정한 자본주의 조절양식의 위기”로 파악하는 그는 ‘위기 이후’ 눈앞에 나타난 국가 역할의 재조정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시스템을 고쳐 시장을 좀더 규제하는 신자유주의 이전 형태로 상황을 되돌리는 것”이거나 “한층 평등주의적인 조절양식으로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는 상황”이다. 물론 그는 첫 번째 경우가 현실화할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대담자 곽준혁 교수는 “지금의 한국사회는 법적 절차 이외에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기제도 없는 것 같다”며 “특히 최근의 정치상황은 갈등이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에서 불가피하다는 인식,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한 심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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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니컬러스 로즈 Nikolas Rose

니컬러스 로즈(62)는 현재 영국의 런던 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생명과학, 생명의학, 생명공학과 사회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학자다. 유대계 후손으로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줄곧 사회학 분야에서 이론적 작업을 펼치고 있다. ‘영국 통치성 학파’의 좌장으로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바탕한 서구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에 진력하여 왔다. 최근에는 생정치, 다시 말해 생명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들이 생산하는 효과와 권력에 이론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통치성 개념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


니컬러스 로즈는 흔히 통치성 연구로 알려진 푸코주의적 사회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가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강의노트에 등장한 ‘통치성’이란 개념은 일종의 이론적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여졌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푸코주의적 사회이론 그룹이 만들어진다. 통치성 학파라고 알려진 이론가들은 실은 ‘현재의 역사’라는 연구자 네트워크에 참여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는 여러 저작으로 출간됐고, 이는 현재 ‘통치성 연구’라고 불리는 흐름의 바탕을 닦은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즈는 이 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로즈


 

» 니컬러스 로즈
 
는 영국에서 특히 강력했던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병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푸코 초기 저작에 영향을 받으면서 <심리학 복합체>, <영혼을 통치하기>와 같은 초기 주요 저작을 완성한다. 이는 영국의 정신병리학 기관이던 타비스톡 연구소에서 민속지적 방법을 통해 정신병리학 제도의 권력과 작용을 분석했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로즈의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푸코의 통치성에 관련된 글과 그의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제자들의 논문들이었다.

그는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그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저널 <경제와 사회>를 통해 그 성과를 소개했다. 이 시기 그의 이론적 성과를 묶은 것이 피터 밀러와의 공동 저술 논문을 묶은 <현재를 통치하기>와 그의 신조어인 ‘선진자유주의’란 개념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권력을 분석하고자 시도한 <자유의 권력들>이다. 아마 로즈의 이론적 성과를 집약하고 있을 <자유의 권력들>은 신자유주의라 알려진 정치권력을 분석한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통치성 개념을 권력 분석의 이론적 도구로 다듬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이라는 이론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철학의 주권론과 국가론 혹은 경제적 결정을 은폐하는 허구적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권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탐색 과정에서 출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왕의 목을 베기’라는 푸코의 유명한 표현은 점차 ‘국가의 통치화’에 관한 분석으로 다듬어졌고 그는 이를 자신의 작업을 망라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개념이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통치성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의 작업 역시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에게서 특기할 점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통치성 혹은 그가 선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 합리성’을 크게 세 가지의 성분으로 나눈다. 그것은 첫 번째 지식과 언어,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행사되는 대상을 구성하고 창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디까지가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고 무엇이 사적인 삶의 세계인지는 전연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경제적인 삶이라 할 때, 성장·효율·능률·합리성·진보·성과·이득 같은 것 역시 무엇을 가리키고 그것은 어떻게 판별되고 측정하며 평가해야 할지 전연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무한히 다양한 삶의 세계들은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빚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다양한 지식과 언어를 생산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테크놀로지를 들 수 있다. 권력은 단순히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도구·계산방식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성장·진보·안녕·안전·교정·개선 같은 다양한 목표를 충족하고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문적 지식들을 생산하고 그에 관련된 인물·기관·제도·자격·보상 같은 것들을 끌어들인다. 세 번째로 권력은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뤄진다. 그것은 자유주의 권력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권력은 무엇보다 자유를 동원하면서 작동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행복·안전·건강·성공 등 다양한 포부와 욕구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때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타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련된 다양한 규범과 행위의 코드에 관련을 맺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로즈는 이 세 가지의 성분으로 구성된 권력의 해부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역사적 변전을 분석한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를 크게 자유주의·복지주의·선진자유주의라는 단계로 나눈다. 자유주의란 18세기에 형성된 초기 서구 자유주의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된 특징은 권력이 초월적인 원리나 임의적인 의지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즉 그것이 행사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특히 정치경제학)을 배경으로 신중하고 또한 효과적으로 행사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더불어 권리를 행사하는 법적 주체라는 겉모습에도 실제 삶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개인들을 통치받는 대상 혹은 주체로 만들어낸다.

이런 초기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등장, 개인주의의 만연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면서 혹은 로즈가 강조하는 개념을 빌리자면 숱한 ‘문제화’를 통해 복지주의로 변이하게 된다. 복지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사회를 통한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복지주의는 무엇보다 ‘사회’를 발명하고 그를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과 주체를 전연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기술로서 사회보험사회복지를 동원한다. ‘연대’란 개념을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의무와 책임을 나눠 가지는 사회적 시민 혹은 국민으로 변형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혹은 로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진 자유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종말’이란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라는 이상 속에서 책임과 의무를 나눠 가진 사회적 시민은 이제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한 친화성과 정서적 유대에 기반한 ‘공동체’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는 위험의 관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 역시 감사, 책무성, 성과 측정과 같은 것으로 바꾼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예는 복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복지로부터 노동 연계 복지로 혹은 능동적 복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런 변화는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겨냥하고 그들의 책임 부여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분석을 위한 유용한 이론적 틀로 통치성 개념이 각광을 받으며 1990년대에 서구 학계에 일약 통치성의 이론적 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일어나고 로즈와 동료들의 작업 역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자유주의 권력에 관한 치밀한 분석에도 권력이란 개념을 특권화하면서 현실에 관한 통치를 분석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위상을 제거하고 정치를 사회학화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것은 로즈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푸코를 경유하여 정치를 사고하려 했던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서동진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푸코적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입장을 통해 한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편성을 분석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당비의생각>이란 사회비평 무크지의 기획주간을 맡고 있고, 계원디자인예술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디자인 멜랑콜리아>,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등이 있고,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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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안토니오 네그리는 1933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났다.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68혁명 이전까지 인식론, 철학, 정치학, 국가론 등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썼다. 1959년 이후 자율주의적인 좌파잡지(정치집단)에 참여했다. 1970년대에 일어난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감명을 받으면서 자율주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고,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그의 대표 저작인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가 출간됐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가타리를 비롯한 탈근대이론가들, 이탈리아 망명자들과 함께 연구와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1997년 마이클 하트와 <제국>의 집필을 끝낸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수감됐다가 2003년 자유의 몸이 됐다.

 

 

 

 

 

 

 

 

   

근대적 주권은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 새로 등장하는 ‘다중’은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다중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절대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 안토니오 네그리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이클 하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제국>(2000)과 <다중>(2004)의 저자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두 저작은 1970년대 이래로 일관된 연속성을 갖고 전개돼온 그의 오랜 작업의 결실이다. 네그리는 또 하나의 지배 장치로 변질된 공산당과 종래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곧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적 지배체제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측면에서는 노동자를 축으로 한 ‘계급’ 주체성에서 다양한 주체들의 배치로서의 ‘다중’으로 이행했다고 파악한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네그리는 <제국>에서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부연될 수 있다.

근대적 주권에서 제국적 주권으로의 이행은 우선 영토적인 국경 안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기반으로 구성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들과 그 국가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인 제국주의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제는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초국적인 자본과 그러한 자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국제기구들(유엔·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세계무역기구 등)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가 됐다. 따라서 국민국가 시대에는 국경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중요했지만, 제국적 주권하에서는 국경과 외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이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며, 모든 전쟁은 제국 안의 시민전쟁, 즉 내전이 된다.

제국의 시대에도 위계와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정밀하게 강화된다. 위계와 차별은 생물학적 차이나 가시적 차이에 의존하는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더욱 유동적이고 유연한 일상적인 체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잔인해지는 일상적인 실행체제 속에서 관철된다. 제국적 주권은 하나의 중심적인 갈등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되는 것이다.

제국의 또다른 특징은 생산의 성격 변화다. 네그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이전과 달리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거대 공장의 노동력이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이 쇠퇴하고, 비물질적이고 소통적인 노동력이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비물질적 노동이란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변화가 중요할까? 그것은 이런 노동의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곧 비물질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상호작용과 협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이 더 이상 자기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자본에 의해 가치증식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서 제국의 질서에 이미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제국 권력의 지배가 결코 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네그리의 말로 요약하자면, 제국 권력의 효율성은 폭탄에 의한 파괴에, 화폐에 의한 판결에, 소통에 의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중, 소통하는 자율적 집합주체의 등장

<제국>이 지배에 대한 분석이라면, <다중>은 부제인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의 와중에 등장하는 다중과 그에 따른 사회운동의 방향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은 무차별적인 무리로서 ‘대중’(mass)이 아니라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네그리는 이전에도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 대신에 주변층이나 실업자, 여성, 학생 등을 포괄하는 사회적 노동자 개념을 사용해 왔다. 다중은 이 개념을 좀더 확장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다중은 군중, 인민, 대중, 국민, 계급 등과 같은 종래의 정치적 주체 개념과 대비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이다. 다중은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다중은 계급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직접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도 변화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 모델은 집중제의 마지막 표현이었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네그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됐고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대의제를 넘어 절대적 민주주의로

이러한 네그리의 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이어진다. 그는 민주주의가 진전하는 데 가장 주요한 장애를 대의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대의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다중의 역능구성 과정을 통해 기존 권력을 혁신해 나가는 구성권력 전략을 사고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대표를 만들어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표화를 막으면서 다중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조직화해 나가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바로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대의제를 파괴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대안구성은 대안 제도를 만드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관련 주체들이 아래로부터 욕망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사회관계를 구성해가는 것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했던 절대적 민주주의다.

네그리의 이런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는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 세계화 운동,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분석했지만 노동을 구성(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려고 했듯이, 네그리는 제국을 분석하지만 대중을 구성(구성권력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윤수종은 서울대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자율주의) 사상을 한국에 소개해 오고 있으며,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있다. 현재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자유의 공간을 찾아서>, <다르게 사는 사람들>(편저)이 있고, 역서로 <분자 혁명>, <기계적 무의식>, <세 가지 생태학>, <카오스모제>, <성혁명>, <제국>, <야만적 별종>, <맑스를 넘어선 맑스>, <정치의 전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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