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퍼온다. 

한겨레 시리즈이다. 

‘제3세계 읽기의 윤리’ 지식인의 화두로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5)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C. Spivak


가야트리 차크라보 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1942년에 인도 콜카타(캘커타)에서 태어나 1959년 캘커타대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1962)와 박사학위(1967)를 받았다. 1991년부터 뉴욕의 컬럼비아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76년에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역함으로써 서구 문단에 등단했으며, 첫 번째 저서 <다른 세상에서>(1987) 이후 20여년에 걸쳐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 <분과학문의 종말>(2003), <다른 여러 아시아들>(2008)과 같은 역작들을 출간했다. 지구화에 대항하는 글로벌 남반구(global South) 운동의 일환으로서 벵골 아동 교육에 투신중이다.

 


 

 

스피박은 지식인이 탐색 대상을 전유함으로써 지배 자본의 이해관계와 공모하게 되는 결과를 끈질기게 파헤친다. 20세기 말을 지배한 각종 포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성·계급·인종적 약자들을 대변하기에 앞서 토착민의 관점에서 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식민화의 행보를 가로막는 지식인 이데올로기



 

» 가야트리 스피박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지식인들이 생산하는 이론과 사상이 과연 공평무사한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론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물음은 진보적이라는 포스트식민주의를 비롯한 각종 포스트주의들이 전 지구적 자본의 재배치와 맺는 관계라는 의제와 이어진다. 그동안 이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은 채 묵인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적 폭력구조들에서부터 비켜선 투명한 존재라는 지식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탐색자라는 지식인의 위치가 탐색 대상을 전유함으로써 지배 자본의 이해관계와 공모하게 되는 결과를 끈질기게 파헤친다. 그 태도는 자신의 이론이라고 회피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인도(India)적인 것을, 벵골적인 것을 서구 문단에 소개하는 ‘정보원’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20세기 말부터 각종 포스트 이론들에 의해 강력하게 유포된 차이·이질성·욕망·문화 담론들 대다수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따른 새로운 국제 분업 현실을 간과한다. 사실 그러한 현실 속의 제3세계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서구 문단에 제대로 들리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런데도 각종 포스트주의 이론들에서는 제3세계 주체의 주체성이 너무 손쉽게 설정된다. 그렇게 제3세계 주체에 대한 오도된 지식은 결과적으로 제1세계의 이해관계를 도와준다. 그래서 소위 ‘포스트식민’ 담론과 탈식민화 사이에는 괴리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지워버리는 (남성)포스트(식민) 담론의 맹활약 속에서 탈식민화를 지향하는 이론 작업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스피박은 이론을 생산하고 사상을 유포하는 포스트식민 시대 지식인들이 성·계급·인종적으로 하위에 있는 서발턴들(subalterns)의 차이를 그저 예찬하거나 대변하려고 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지식인들은 지구화 시대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체계적으로 ‘깨닫고 벗어나야’(unlearn) 한다. 그렇지만 북반구의 백인 및 유색 엘리트 남녀들, 남반구의 유색 엘리트 남녀들 중에서 상당히 윤리적인 이론가조차도 이미 연루되어 있기 마련인 거대한 ‘교육기계’의 자장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지식의 기술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 ‘외부’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반구건 북반구건, 성·계급·인종에 따른 개별 이론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면서 투명한 존재로서의 지식인 되기를 거부하는 자기비판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으로서 존재하기 십상이다.





포스트식민 정보원에서 토착정보원의 관점으로

전지구화 시대 지식인들이 서구 이론과 사상을 또다시 살찌우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으로 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피박에게 포스트식민 정보원은 1990년대 이후 미국 문화연구를 미국 메트로폴리탄 에스닉(ethnic) 문화연구, 급진적 메트로폴리탄 다문화주의 연구, 미국 학계의 문화적 혹은 엘리트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로 집결되게 하는 주요 형상이다. 스피박은 미국 문화연구 진영에서 말하는 ‘문화’란 발전을 위한 알리바이, 전 지구의 금융화에 유리한 알리바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원래 ‘문화적인 것이 갖는 환원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동일성에 영원히 붙잡힌 채 남아 있기보다 타자성을 환기하는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작업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불)가능이라는 이중 어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며, 토착정보원들이란 문화텍스트들에 정보를 제공하는 존재들로서, 지식의 원천이자 대상이다. 삭제되고 지워진 이들의 관점을 재각인하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글로벌 엘리트의 그럴듯한 세계시민주의와, 강제된 글로벌 하층계급의 무자비한 일상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의 지평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서발턴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담론 권력을 챙기려 드는 엘리트 포스트식민적 문화연구로 인해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초과 착취되는 남반구 토착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스피박은 바로 이 현실을 사라지지 않게 붙들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고 가르치며 행동할 때 잠정적이지만 분명히 더 나은 대안이 부상할 수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다문화주의 미국 대학에서 교육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는 스피박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읽어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교육실천에서 핵심적인 사안이다. 스피박은 토착정보원들을 여러 결들에서 미묘하게 배제하는 지배적 문화담론의 여정을 추적해 나가는 읽기의 윤리를, 또 가르치기의 윤리를 주장한다. 여기서 읽기, 가르치기란 인식론적이고 담론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윤리적인 필수사항이며 ‘비판’이다.


성·계급·인종에 민감한 독법으로 아시아 문화 읽기

스피박은 그러한 비판적 독해의 맥락에서 포스트식민 이론이 아시아 지역들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 아시아 문화들을 새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포스트식민성은 정황적인 것이라 지역·국가·대륙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띤다. 서구 중심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 경쟁에 맞서는 핵심적인 지정학적 공간으로서 아시아의 문화에 집중하는 읽기는 새로운 대륙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피박이 제안하는 아시아 문화 읽기에서 ‘아시아’는 아시아 지역들의 일방주의나 초국가적 디아스포라 헤게모니와 함께, 서구도 빗금 치는 비판적인 문화정치적 공간을 함축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란 한마디로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서발턴들의 대항집단성이 부상하는 공간이다.

스피박에게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과제는 비가시화되기 쉬운 제3세계 혹은 남반구에 속하는 아시아의 하위문화들을 주변부 범주가 아니라 일반적 범주로서 다루며 그것들이 지닌 특이한 사유·인식·가치·관점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성·계급·인종이라는 주체성 형성의 핵심요소들에 민감하고 복합적인 인식을 갖고 실행된다. 이렇게 실천되는 새로운 독해는 지금의 지구화에 대항하는 능력의 저장소를 찾아나가는 전략인 셈이다.

그러한 지평에서 아시아의 하위문화들을 비교하며 함께 읽는 작업들은 북반구에서 소비되는 영어 번역물에 내재된 영어 일방주의를 벗어나 국제적이며 다언어적인 문화 영역들을,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통한 다른 윤리를 열어줄 것이다.

지구화 시대 아시아 국가들과 지역들 사이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서발턴들은 점점 더 고립되면서 더 가혹한 착취와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들에게 지구-지역적으로(glocally) 움직여 나가는 데 필요한 초국가적이면서 비교문화적인 사유가 배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변성은 더 이상 억압의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거점이 되어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을 구현하는 창조적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 실천 가운데 출현중인 대항집단성을 읽어내기 위해 그들과 만나는 장을 만들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이며 대화를 실천하는 읽기의 윤리를 새로이 가다듬을 때다.

태혜숙/대구가톨릭대 교수·영문학



 




 

» 태혜숙/대구가톨릭대 교수·영문학
 
태혜숙은 이화여대 영문과 및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구가톨릭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구지역 행동 네트워크>의 설립위원으로도 활동중이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2004), <대항 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2008), <다인종 다문화 시대의 미국문화 읽기>(2009)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다른 세상에서>(2003),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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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프레시안의 김종배의 글을 옮겨 온다. 핵심을 찌르는 지적이다. 먼저 도덕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를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정책들과 잇슈화는 기둥 없이 지붕 얹으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노무현 명패를 달고 다시 대중의 마음을 가져보겠다는 욕심이 아니던가. 

  

 

 

 

 

1.

지난해 7월이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심포지엄에서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평가한 건 '인간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추모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좀 더 차분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본격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객석 앞줄에 앉아있던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난해 11월이었습니다. 진보매체 4개사가 합동으로 기획ㆍ방송한 '진보개혁 연대의 길' 토론회에 나온 천호선 국민참여당 최고위원에게 말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놓고 패널들과 길고 날선 토론을 벌이기에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적자를 자처하는 국민참여당 창당세력이 자발적으로 대대적인 평가토론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천호선 최고위원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계획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국민참여당이 어제 창당했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 그 당은 '노무현 정신 계승'을 내세웠습니다. 이재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으로 살아가자"고 했고, 유시민 전 장관은 "노무현, 그 분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 자리에서 새 출발을 한다"고 했습니다.

2.

국민참여당이 계승하고자 하는 '노무현 정신'은 뭘까요? 이재정 대표의 말처럼 "모두 이익을 추구할 때 홀로 올바름을 추구한" 정신일까요?

이것은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넓게 봐도,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도 이재정 대표가 언급한 '노무현 정신'은 '인간 노무현' 또는 '정치인 노무현'의 정신이지 '대통령 노무현'의 정신은 아닙니다.

유시민 전 장관이 다짐한 '노무현 부활' 또한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그가 언급한 '부활'이 단순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응당 '계승과 혁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 노무현'이 남긴 족적에서 계승해야 할 것과 혁신해야 할 것을 찾아 '노무현 가치'를 재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참여당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못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시하지 않습니다. 국민참여당을 통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거쳐야 할 '노무현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개인들'이 회고조로 내놓은 평가(더 엄밀히 말하면 소회)는 있을지언정 노무현 계승세력을 자처하는 국민참여당이 국민 앞에 공식적으로 내놓은 평가는 아직 없습니다.

3.

'진보의 미래'를 읽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진보의 가치와 노선을 새로 짜고자 했던 노력의 흔적이 기록된 책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진보의 미래'를 정독하면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초적인 문제의식은 발견했지만 대안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책은 물음표로 시작했을 뿐 느낌표는 찍지 않았습니다.

일면적인 평가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단초적인 문제의식에 체계적인 대안의 씨앗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남은 사람에게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꿀 계기를 부여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참여당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 앞서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야 할 국민참여당이 여전히 물음표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이 '뉴 민주당 플랜'이란 걸 통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노무현 정부) 정책'으로 비판한 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진보정당이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응답하지 않습니다.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 또는 개혁당에서 실험했던 정당운영원리를 내세우고, 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강령적 가치를 내세울 뿐입니다. 그래서 자초합니다.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성 질문을 자초합니다.

4.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국민참여당이 '진보의 미래'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한 그들의 창당은 온전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기둥을 세우기도 전에 지붕을 얹으려 했다고, '노무현 정신'을 리모델링하기보다는 '노무현' 문패를 닦으려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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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안에 실린 손호철 교수의 글을 옮겨와 본다. 암담한 미래를 말하고 있다. 

 

<정념과 이해(The Passions and Interests)>. 정치경제학의 세계적인 석학인 알베르트 허쉬만의 명저 중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 허쉬만은 자본주의의 성립을 정념과 이해라는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념이란 아무런 조건이 필요 없는 우리의 꿈과 욕망 같은 것이라면 이해는 특정한 상황에 따른 관심과 이해득실을 의미하는 바, 자본주의의 성립은 이해관계가 지배적이 되면서 정념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이해에 의한 정념의 좌절의 역사라는 것이다. 

 

 

 

 



세종시 문제를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허쉬만의 이 책 제목이다. 이명박 정부는 예상대로 원래 세종시에 예정되어 있던 9부2처 2청의 행정기관 이전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대신 국내최대 기업인 삼성을 비롯해 한화, 웅진, 롯데 증 유수기업들이 세종시에 투자를 하는 등 기업과 대학 등이 세종시에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는 새로운 세종시 건설안을 발표했다.

물론 행정도시와 기업도시의 경제적 혜택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엄청난 투자의 규모와 혜택 등을 고려 할 때 순수한 경제적 혜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종시의 현지민들과 충청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일지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허쉬만의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이해'라는 면에서 충청에게 유리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일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정부의 수정안 발표에 대해 충청의 민심은 여전히 싸늘하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여론조사기관 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수정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적으로는 수정안에 대한 찬성이 반대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충청권의 경우 수정안에 찬성하는 입장이 17-40%에 불과한 반면 원안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은 51-73%에 달해 수정안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직도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충남도의회의장이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충남도의회 의원, 대전시의회 의원, 충북도의회 의원 등도 다수 한나라당을 탈당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나아가 행정도시 주민보상대책위원회는 정부가 공용목적으로 토지를 수용한 뒤 당초 목적과 다르게 이를 사용하면 원래 토지소유자가 환매를 요구할 수 있다는 공공용지 취득 및 손실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소송을 제기하기로 하는 등 충청권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순수한 경제적 혜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종시의 현지민들과 충청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일지 모르는데, 다시 말해 허쉬만의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이해라는 면에서 충청에게 유리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일 수 있는데, 왜 이처럼 충청은 수정안에 반발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세종시 문제가 충청민들에게 단순한 '이해'의 문제를 넘어서 '정념'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세종시 수정문제는 충청민들에게 단순한 경제적 이해득실의 과소의 문제를 넘어서 자존심의 문제, 정부의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허쉬만이 주목한 이해에 의한 정념의 좌절과 달리 이해와 정념이 충돌하는 경우,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경우, 정념과 감성이 승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이 충청의 자존심임에도 불구하고 물량공세를 통해 행정수도를 압도하는 경제적 혜택을 주면 세종시 문제를 쉽게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계산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세종시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이다. 즉 박 의원은 이명박 정부가 처음 세종시 수정안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부터 원안 고수가 아니라 '원안 플러스 알파'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해(수정안)냐 정념(원안)이냐가 아니라 정념(원안)과 이해(플러스 알파)를 모두 잡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세종시와 충청민심에 관한 한 박의원은 질레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 의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텃밭인 영남에 이어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을 MB 덕분에 확실하게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2012년 대선이 벌써부터 암울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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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글을 퍼와보았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이었는데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10. 01. 05)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란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면 예의에 어긋날뿐더러 선물을 준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걸 뜻하기에 과도한 잔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고도 한다.

선물 교환양식이긴 하지만, 포틀래치는 선물이나 교환과 구별된다. 선물은 정의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관대한 행위이다. 반면에 교환은 반드시 뭔가를 반대급부로 기대하면서 주는 호혜적 행위이다. 포틀래치는 이 두 가지 행위의 교집합 같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한 턱을 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받는 쪽에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턱을 내야만 한다. ‘자발적 의무’를 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인류학자 모스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교환방식 속에서 뭔가 신비로운 것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핵심을 호혜적 교환 자체에서 찾았다.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상호교환의 의미라고 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까지 가세해서는 포틀래치의 핵심이 선물과 답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라고 주장했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지만 대칭적인 두 행동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누군가 선물을 받은 즉시 상대방에게 답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테니까. 모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포틀래치는 호혜적 교환처럼 비치면 안된다.

교환의 호혜성은 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또 다른 인류학자 살린스에 의하면, 교환은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며 받은 대로 되갚는 보복의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각각의 선물주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척해야 한다. 그것이 포틀래치라는 선물경제의 특징이라면, 이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화폐를 매개로 한 등가교환 말이다. 거기엔 관대함도 베풂의 호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선물이 주인의 행위이고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서울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의 부모님께 다녀오곤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 세탁소에 들렀다. 양복 상의에 떨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서였다. 세탁소 주인이 특이한 요구라는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품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꽤 고민했다. ‘무상의 호의’일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얼마예요?”라고 묻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인 듯싶었다. 결국 옷을 받아들고 엉거주춤하게 목례를 하고 나서려다가 그냥 가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품값으로 500원을 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속내를 말하진 못했다. 대신 나의 짧은 생각을 자책했고, ‘서울 인심’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런 등가교환을 통해서 그날 세탁소 주인과 나는 서로에게 노예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돈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세상은 노예들의 세상이다.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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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을 오랫만에 레디앙에서 퍼왔다. 박노자, 가끔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반MB 대동단결론, 맞는 길일까요?"
[연합논쟁-홍세화 선생께] "이명박 정권, 독재가 아닙니다"
 
 
 

최근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을 "고문만 없을 뿐, 독재와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시고 현 정권을 반대하는 일체 세력, 즉 제도권 야당(민주당)과 각종 진보 정당, 단체 등의 '대동단결'을 사실상 촉구하는 홍세화 선생님의 한 글을 보고 생각에 푹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독재인가?


   
  ▲필자.


일면으로는, 대선배인 홍세화 선생님의 주장에 선뜻 반대하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국외에서 상주하는 저와 달리 영구 귀국을 선택하신 홍세화 선생님은 저보다 현장감이 훨씬 뛰어나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4대강 죽이기'와 삼성회장 살리기, 철거민 죽이기와 건설경기 살리기 등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권력의 횡포를 매일매일 보시고 당하시는 분이 "거의 독재의 수준"이라고 진단하신다면, 귀를 기울여야 할 주장은 아닐 수 없습니다.

'체감경기'라는 것은 경제학에서 하나의 '지표'로 다루어지듯이, 특정 정권의 대한 체감도 중요시해야죠.

한데,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특히 노사관계 등이 제가 밥벌이 삼아 가르치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민주와 독재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 검토를 시도해보고 현 정권이 정말 제도권(부르주아) 야당하고라도 손잡아 반대해야 할 '독재'인지, 그리고 제도권 야당의 성격이 무엇인지 밝혀볼까 합니다. '현장'의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말씀입니다.

싱가포르 등 약간의 예외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체제에서 핵심부에 속하거나 준핵심부 나라 중에서 핵심부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로 운영됩니다. 즉, 적어도 자본계급의 이해관계를 서로 약간 다르게 표방하는 제도권 정당 2개 이상이 경쟁하는 투명 선거를 통해야 권력에 정통성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준핵심부에 진입한 1980년대 초반 이후로는 바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이와 같은 구조를 본격적으로 이식시켜놓았습니다.

재벌들에게 편한 정치 구도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요? 일면으로는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과의 손을 잡은 중산계급의 급진화된 전위(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등)의 압력도 있었지만, 더 일면으로는 대한민국 영향력 1위의 집단인 대기업들에게도 '2개의 이상 제도권 정당의 투명한 선거경쟁'이라는 구도가 나름대로 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군부 독재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발길질이나 당하고 돈 상납을 강요 받아왔는데, 이제는 그 '투명 선거 경쟁'을 벌이는 2개 이상의 제도권 정당에게 '보험금'을 다 내며 잘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정당뿐만 아니고 검찰 등 국가의 모든 주요 기관을 그들이 대체로 어떻게 '관리'하는지, 노회찬 전 의원이 발표한 X파일을 보시면 다 알 만할 것입니다.

'군바리' 시대 같았으면 그냥 요구한 대로 주었을 뿐인데, 이제는 국가의 주요기구에서 '장학생'을 포진시키는 주체적인 행위까지 할 수 있기에 민주주의란 참 좋은 세상이죠? 뭐, 재벌 출신의 대통령까지 만들 수 있기에 이게 요순시대 내지 그 이상입니다. 갖고 있는 돈, 그리고 지불한 돈 만큼 '공평하게'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시대인 셈이죠.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해서 사실 저들은 못할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처럼 '테러리스트'로 지목되는 자국의 시민들까지 영장도 없이 잡아다가 몇  년간 감옥에 썩힐 수도 있고, 아프간을 침략할 수도 있고, 이제 예멘 침략 준비까지도 할 수 있죠.

이를 비판하는 세상의 촘스키들이 물론 다소 있겠지만, 그들을 잡아 고문할 하등의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을 폭스뉴스에 열광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어차피 구조적으로 들을 수도 없고, 들었다 해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 최적의 통치 형태

체코처럼 공산당이 총선에서 13%의 표를 얻는 위기의 동유럽 '민주' 국가에서 공산당 금지법을 논할 수도 있지만, 미국처럼 반체제 세력들이 대중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그런 수고도 필요없는 것이죠. 피지배자들이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태에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있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도권 거대 정당 위주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으로서는 최적의 통치형태입니다.

피지배자들이 하나의 반체제 세력으로 뭉쳐 정말로 선거를 통해 집권해 체제를 바꾸거나 본격적으로 수정하려는 태세를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갑자기 파쇼정당들이 각광을 받거나 세상의 피노체트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지만, 이는 아직은 한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좌파 민족주의와 온건 사회주의 정당 두 개가 각각 약 4%나 1~2%의 지지를 받는 나라, 진정한 의미의 급진세력이 잘해봐야 자그마한 섹트밖에 만들 수 없는 나라에서는 각종 재벌의 장학생들이 대리 운영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적격입니다.

그러면, 이제 현 정권으로 눈을 돌립시다. 용산참사부터 아프간 재파병까지, 저 같은 사람에게 분통을 터지게끔 하는 모든 일들을 다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지만, 저들이 대한민국의 선거법 등을 어긴 일이라도 있나요? 정확하게 묻자면, 선거법을 어길 필요라도 있었나요?

답은 자명하죠. 거대여당이 지속적으로 최고의 지지를 받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진정한 주인네들에게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파괴할 필요성조차 생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의 내용을 보면, '독재'라는 수사는 자연스레 나오지만,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제한이 아주 많은) 자유민주주의는 맞습니다.

이명박은 김대중-노무현 10년의 계승자

그 절차적 자유민주주의가 철거민부터 비정규직까지, 이 사회 피지배계급의 약자그룹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다른 문제죠. 물론 동계 철거가 가능한 나라는 '가난뱅이에 대한 독재'를 실시하는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가난뱅이 중에서도 이 자본의 독재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독재라고 하자면 정치영역의 독재가 아닌 사회영역에서의 독재에 준하는 계급적 역학관계라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라고, 홍세화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정치적인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사회적인 독재 관계가 확대재생산된다고 하면, 이 퇴치방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배세력의 정치적 대리인 중에서는 지금 일시적으로 수세, 약세에 처하게 된 민주당 등을 '상위 파트너'로 삼는다고 해서 과연 경찰의 장화 밑에서 밟히는 이들의 고통은 줄어들까요?

사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운동'의 세계에서는 거의 대세였습니다. 그 뒤로는 저만 해도 평소에 민노당을 지지했다가 "그래도 차악"이라고 하며 노무현을 찍은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압니다.

즉, 여태까지 지배세력 중에서 비교적으로 '덜 나쁘게,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정파와 연합해온 역사는 꽤 깁니다. 그 결과는? 4대강 죽이기 등의 무리한 토건업 부양은 약간 새롭지만 이번 정권의 대부분의 행동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다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병이나 각종의 무리한 재개발부터 말씀입니다.

연합보다 대안적 정당 건설이 중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의 정적이지만, 경제, 사회 정책의 차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계승자에 가깝습니다. '차악'을 모색하는데에 이미 익숙해진 분들에게 아주 억울한 이야기일 순 있지만, 엄연히 현실입니다.

'계급'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돼온 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계급투쟁보다 관리자에 대한 충성 경쟁이 더 자주 보이는 나라에서는 제도권 전체를 반대할 줄 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안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일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준비일 순 있죠. 지금 세계 평균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수준의 부양책으로 경제지표들이 그럭저럭 괜찮아보이지만, '출구 정책'을 시작만 한다면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추락 일로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출구 정책을 계속 유보한다면 일본처럼 미래가 없는 과다채무국이 될 것도 뻔합니다.

생각보다 한국 지배계급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만 않기에, 저들에 대한 계급적 대안이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지지를 받을 날도 언젠가 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과거의 '비판적 지지'의 늪에 빠지는 것보다, 미래를 지향해보는 것은 낫지 않을까요? 물론 이는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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