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연재기사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는 주로 '인권'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어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의 행태가 중심이었다 


그런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했던 청소년들이다. 가난은 단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때로 그 청소년의 가정을 통째로 부숴버리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잔인함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동·청소년 가운데 최저 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층은 7.8%였고 상대빈곤층은 11.5%였다. 전체 청소년의 87%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반해, 빈곤 아동·청소년 가운데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됐다.

당연히 그들 중 많은 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그들은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 있지만,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빈곤 청소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흉터 가득한 두 팔…"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따져보고 싶었어요"

스물한 살 지은(가명, 21)이의 양 팔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가득했다. 사는 것이 힘에 겨울 때마다 스스로 만든 상처였다. 지은이는 양 팔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그 흉터들을 보여주며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또 언제 나를 버릴까. 내가 또 버려지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초조할 때면 자살 시도를 했어요."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지은이는 마음의 아픔을 잊었다고 털어놨다. 살기 위해 지은이는 스스로의 몸에 손을 댔던 셈이다. 그때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세상을 정말 많이 원망"하면서. 지은이의 그런 몸부림은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아빠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에게 하나하나 따져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나 이런 핍박을 받고 자라나게 했는지. 나는 왜 저런 부모 밑에 태어나지 못한 건지. 엄마한테도 '이렇게 괴롭힐 거면 나를 왜 낳았냐'고 독한 말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얘기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학대했던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서 엄마한테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엄마는 늘 '미안하다'고만 했지만."

그러면서 지은은 웃었다. 지은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가진 맑은 웃음을 비로소 되찾은 것은 부모로부터 떨어진 후였다. 아니 정확히는 열네 살에 집을 나와 열여섯에 공동체가정, 그룹 홈(group home)을 만나면서 웃을 줄 알게 되었다.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친구들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어느덧 3학년 최고참이다. 50~60대의 나이 많은 '반 친구'들에게는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기도 하다. 지은이 곧잘 "명자 씨, 옥순 씨"하고 부른다는 '늙은' 반 친구들은 부탁하지도 않은 '대출(대리출석)'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공동체가정을 통해 배우고 싶던 것들도 많이 배웠고, 요즘은 대안학교 하자센터 내의 사회적 기업이 지원하는 '영 셰프 요리학교'도 다니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반짝이고, 좋아했던 사람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촉촉해지는 것은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사람에게 받았던, 미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상처는 여전히 지은을 괴롭히고 있다.


▲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연관 없습니다) ⓒ연합뉴스

"아빠와 양오빠의 폭력…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다니던 학교를 뛰쳐나온 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물론 속해 있던 필드하키팀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하지만 결정적 계기는 아빠였단다.

"그날 학교를 안 갔는데 친구들이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난 거예요. '너희 아빠 때문에 선생님이 오열하고 난리가 났다'면서. 아빠가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하고 교장 선생님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대요. 필드하키부 없어지고 나서였어요. 선생님들한테 '너희가 뭔 상관이냐'고 막 소리쳤다대요. 다음날 학교 가니까 소문이 쫙 퍼졌더라고요. '쟤네 아빠 조폭이라더라. 새 아빠라더라.' 하루 사이에 걷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지은은 그날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왔다. 자궁암에 걸린 엄마의 치료비와 약값 때문에 어차피 돈도 벌어야했다. 이미 그 전부터 학교가 끝난 4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지은은 '알바 전선'에 뛰어들었다. 핸드폰 고리를 만드는 공장 등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라면 거의 전국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지은이 어릴 때부터 수시로 가정 폭력을 행사했다. 엄마 뿐 아니라 어린 지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생활비도 벌어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지은은 "아빠는 돈을 벌어도 늘 자기 혼자 썼지 집에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심지어 자궁암 진단을 받은 엄마의 수술비도 아빠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니, 엄마에게 돈을 오히려 달라고 하고 "돈 없다"고 하면 또 때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빠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긴 엄마나 지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은은 "엄마에게도 애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자라서 더 그런지도 몰라요. 어릴 때 엄마 젖을 빨아 본 적이 없어요. 만져본 적도 없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셨지만 눈치도 보이고 늘 외롭게 자랐죠. 유일한 친구가 외갓집에서 키운 삽살개였어요."

"기숙사에 살기 위해 들어간 필드하키부"

복잡한 집안 사정 탓에 지은에게는 큰 아버지의 아들이 호적상 오빠로 올라 있다. 지은은 "엄마는 걔를 키우느라고 사실상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딸을 낳고 돌아온 며느리를 마당에서 걷어찼대요. 그래서 엄마가 더 걔한테 집착했는지도 모르죠. 엄마가 얼마나 나한테 관심이 없었냐면 내가 자해하는 것도 몰랐어요, 엄마는."

지은의 학교 준비물은 돈이 없다며 안 사줬던 엄마는 '오빠'의 생일날 친구들을 불러 피자치킨을 한 상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지은에게 '아빠'와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걔는 너무 싫어요. 어떻게 보면 나랑 엄마를 매일 때리고 학대했던 아빠보다 더요. 아빠 엄마가 집에 없으면 걔가 나를 때렸거든요. 걔가 컴퓨터 중독인데 게임하다가 자기 캐릭터가 죽거나 그러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한테 와서 나를 발로 차고 때려요. 화장실 변기에 내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고."

지은의 자리는 그 집안에 없었다. 지은은 "네 식구 가운데 아빠도 나를 때리고, 엄마는 아빠한테 맞은 화풀이를 나한테 하고, 오빠란 사람도 나를 때렸다. 이 집안에서 나는 살 수가 없었다"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즈음에 지은이 필드하키라는 여자에게는 힘겨운 운동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면서 기숙사에서 살거든요. 집에 갈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했어요. 아, 또 하나 있다. 필드하키를 하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고기가 먹고 싶어서 들어간 것도 있어요. 이런 얘기는 창피해서 처음 하는 거예요."

물론 필드하키부 역시 쉬운 곳은 아니었다. '군기'라는 이름으로 선배들도 코치도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곳이 지은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랬던 필드하키부는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해체됐다. 지원을 받기 힘든 비인기종목인 탓이 컸다.

지은에게는 부상으로 십자인대가 파열된 다리만 남았다. 다친 무릎은 "돈이 없어" 고치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 병원비 대기도 힘들었는데 내 다리를 어떻게 고치냐"며 지은은 여전히 불편한 무릎을 만졌다. 지금 있는 공동체가정에 들어온 뒤에야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아 4년 만에 무릎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어 원래의 다리로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했다. 한때 하키 채를 들고 몸싸움을 하던 지은은 지금 전혀 뛰지 못한다.

87세 외할머니와 사는 은서네 수입은 한 달에 50만 원

하늘이 '평범한' 가정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은서(가명, 17)도 마찬가지다. 은서는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외할머니와 살았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은서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와는 네 살 때 헤어졌다. 그 후로 은서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 은서가 중학생일 때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은서는 "돌아보면 내 인생이 너무 드라마 여주인공 같다"고 했다.

길지 않은 세상에서의 삶이 "현실과 드라마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막막하고 잔인했다"는 은서는 부모의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은서에게 말로 못할 소중한 존재인 할머니는 올해로 여든 일곱. 은서가 태어났을 때도 할머니는 70세 노인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어디도 없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두 사람은 매달 나오는 50만 원으로 먹고 살아야했다. 은서의 학비야 국가 보조가 됐다지만, 50만 원은 넉넉한 생활비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모들과 가까이 살기 위해 부산에서 남양주이사를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은서와 할머니의 집은 월세 10만 원 짜리 방 한 칸이다. 겨울에는 전기세를 포함해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든다. 은서는 "그 돈으로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그땐 내가 벌어야죠."

"고등학교 그만둔 이유? 어차피 대학을 못 가니까요"

가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는 이모들도 자기 삶이 녹록지 않긴 마찬가지다. 은서가 태어날 때 즈음 치암으로 수술을 받아야했던 할머니는 고혈압, 관절염 등 지금도 수많은 약을 달고 사신다. 고등학교 1학년 말, 은서가 자퇴하기까지 가장 걸림돌이 됐던 것도 생활비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서도 잘릴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그건 아니라 하더라고요. (웃음) 물론 내가 스무살이 되면 결국 끊기겠지만요. 내가 스무살이 됐다고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닌데도 나이가 찼으니 그냥 자르는 거예요. 어찌 보면 사회가 손 쉽게 외면해 버리는 거죠. 만약에 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한테는 한 달에 20만 원밖에 안 나오겠죠. 아무리 혼자여도, 사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요?"

고등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묻자 은서는 "어차피 대학에 못 간다는 걸 알아서"라고 했다.

"돈이 없으니까요.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대학을 다니고 싶지는 않았어요. 빚 지는 것도 두렵고. 대학도 못 갈 텐데, 학교에는 내가 왜 다니는 걸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단지 어쩔 수 없어서 다니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스무 살이 되면 결국 혼자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

은서는 그런 두려움 대신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만두기 전에는 다 무너져 내려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되진 않을까 싶어 너무 불안했다"지만 지금은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며 탐색기를 보내고 있다. 물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말이다.


빈곤과 학업중단은 '밀접한' 상관관계…실업계 학업중단율 2배

지은이나 은서와 같은 청소년이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지난 2008년 한해 동안 학업을 중단한 고등학생의 숫자는 3만3000명 정도다. 전체 학생 가운데 약 0.02%가 학교의 울타리를 밖으로 나온 것이다.

구체적인 사유는 다양하다. 질병이나 가정사정, 학교 부적응 등으로 스스로 그만둔 경우도 있고, 강제로 학교에서 쫓겨난 경우도 있다.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와 같은 특목고에서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일부러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고 조기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끝까지 학업을 이어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빈곤임은 분명하다. 지난 2009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내놓은 '학업중단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전체 고교생의 학업중단율보다 실업계 학생의 학업중단율이 2배나 높음을 알 수 있다. 실업계생과 특목고생을 비교하면 그 격차는 2008년 4.3배, 2007년에는 3배나 된다.

2008년만 놓고 봤을 때, 학생 1000명을 기준으로 특목고는 9명, 전체 고교에서는 15명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실업계는 30명이 자의로 타의로 학교를 그만뒀다. 특히 실업계의 학업중단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실업계 학생 1000명 가운데 25명이 중간에 학교를 떠났지만, 그 비중은 30명(2007년), 34명(2008년)으로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


▲ ⓒ프레시안

집단에 속한 학생들의 부모 소득 수준과 이 통계를 겹쳐 놓고 보면 이런 확연한 차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직업이 상위직인 학생의 비중이 특목고는 33.6%인데 반해, 실업계고는 3.7%에 그쳐 특목고가 9배나 높다. 반면 아버지 직업이 하위직인 비중은 특목고가 12%, 실업계고는 32.3%였고, 무직인 아버지를 둔 학생의 비중은 특목고는 0.7%, 실업계고는 7.8%였다. 실업계 학생일수록,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실업계 학생들이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할 확률 또한 월등히 높은 셈이다.

저소득층 자녀 급식비 지원액과 고등학교 자퇴학생수 사이의 회귀 분석과 국민기초생활수급권수와 실업계고 학생수 간의 회귀 분석을 종합해 봐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온다. 이들 사이의 밀접도를 보여주는 다중상관계수는 각각 2008년 기준 0.694와 0.71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이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해가 지나면서 자퇴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해도 꿈 크게 가지라'는데 그럴 수 없다"

똑같이 공교육에서 뛰쳐나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음 길은 달라진다. 은서는 자신과 같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을 종종 만난다. 교육공동체 등 탈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는 각종 활동을 하면서다.

"자퇴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안학교를 가요. 사실 내가 처음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안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담임 선생님이 대안학교를 알아보라고 했었어요. 하지만 갈 생각은 못 했죠. 이미 모집 기간이 끝나기도 했고, 돈도 없고. 게다가 대안학교는 더 이상 '대안'학교가 아니다 싶거든요. 인가 받은 학교는 일제고사도 보고 시험도 봐요."

미인가 대안학교의 학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부의 지원 대신 학부모의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교육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인가 대안학교는 모두 94곳. 이들 학교의 연간 학비는 수업료와 기숙사비 등을 포함해 최고 2200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입학할 때 예치금 성격의 '예탁금'을 내는데 이 돈 역시 150만~700만 원(2007년 교육부 <대안교육백서>)에 달한다.


▲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연합뉴스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빈곤 청소년이 고용과 소득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의 배경내 상임활동가는 "집안 형편이 괜찮은 청소년은 대안학교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경제력을 이용해 자영업 등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있지만, 가족 해체나 저소득층에 속한 청소년이 학교를 그만두면 당장 생존을 위해 날품팔이 형태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꾸는 꿈 역시 빈곤이라는 현실의 벽에 매번 부딪힌다. 꿈 얘기를 묻자 지은은 "사람들은 꿈이라고 하면 의사나 선생님 같은 직업을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꿈이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꿈은 "항상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꿈이야 그렇다지만, 어린 시절 지은이도 되고 싶었던 직업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요리사 뿐 아니라 특수분장사, 가수, 헤어디자이너, 스포츠마사지사,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까지…. 누구라도 어린 시절 꿈이 한결 같았겠냐 마는, 지은의 꿈이 바뀐 이유는 남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 꿈이 매번 바뀐 것은 가정형편 때문이었어요. 왜냐면 다 안 되니까요. '엄마, 나 이거 배우고 싶어'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거든요. '우리 형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라는. 사람들이 소년소녀 가장이라도 꿈은 크게 가지라고, 꿈은 크게 가져도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빈곤 청소년은 급격한 무력감에 빠진다. '교육공동체 나다'의 변중용 선생은 "빈곤 청소년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무기력증"이라고 말했다. 아직 부족하긴 하나, 이들을 보듬어 안는 유일한 곳인 "청소년보호기관의 대부분은 이런 빈곤 청소년이 사고 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만 집중할 뿐이어서 결국 빈곤 청소년은 무기력한 빈곤 어른으로 재생산되고 만다"고 변 선생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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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연재를 옮겨와 본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한국의 워킹푸어] 5명 중 1명이 '노동'하는 청소년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는 주로 '인권'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어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의 행태가 중심이었다.

그런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했던 청소년들이다. 가난은 단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때로 그 청소년의 가정을 통째로 부숴버리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잔인함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동·청소년 가운데 최저 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층은 7.8%였고 상대빈곤층은 11.5%였다. 전체 청소년의 87%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반해, 빈곤 아동·청소년 가운데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됐다.

당연히 그들 중 많은 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그들은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 있지만,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빈곤 청소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다른 사람은 놓치지 않는 것들을 가난하면 놓칠 수밖에"

가고 싶은 곳이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것은 또래와 다를 리가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이 때로는 넷북이나 아이폰, 해외여행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가 입는 5만 원짜리 티셔츠 대신 만 원짜리 티셔츠 5장"이 되기도 한다. 87세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나오는 월 50만 원이 수입의 전부인 은서(가명, 17)는 "다른 사람은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가난하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말로 그 둘이 사실 같음을 설명했다.

가난해서 불편했던 기억을 물어보자 은서는 고등학교를 자퇴할 때 얘기를 꺼냈다.

"자퇴하기로 결정하고 다 얘기가 끝났는데 학비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내가 기초생활보호대상자여서 학비를 국고에서 지원을 받거든요. 근데 3분기 수업료가 내내 안 들어와서 이상하다 생각만 하고 못 내고 있었는데 자퇴할 때 보니 그 돈이 할머니 통장으로 들어가 있었던 거죠. 할머니는 당연히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이미 다 써버렸고. 학교를 다니고 있으면 상관이 없는데 그만두려니 학비를 다 정산하지 않으면 자퇴 처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은서의 '자퇴 결심'의 마지막 걸림돌이 됐던 3분기 학비는 20만 원이다. 결국 은서는 자신 앞으로 나오는 그달 생활비를 몽땅 학교에 갖다 주고야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은서는 "그러고 나니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그때 '알바(아르바이트)'를 미친 듯이 했다"며 웃었다.

공동체 가정, 그룹 홈(group home)에서 사는 지은(가명, 21)은 그나마 나은 편인지 모른다. 지은과 함께 사는 6명의 동생들에게 나오는 수급비를 모아 2명의 선생님들이 샴푸도 사고, 먹을 것도 사고, 매달 차비도 지원해주면서 가계부를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물론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이들이 받는 돈은 거의 대부분 생활비에 들고 핸드폰 요금 등 다른 비용은 모두 지은이 감당해야 한다. 1년에 30만 원 정도 드는 방송통신고등학교 학비도 지은이 모아서 낸다. 일반 고등학교였다면 국가로부터 학비 지원까지 받았겠지만, 방통고는 보조교육기관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입원 역시 아르바이트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을 때 번 돈을 조금씩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 쓴다"는 지은은 "사실 나는 돈 관리 하나는 자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넌 가난한 집 애 같지 않다'고 해요. 가난하면 꼬질꼬질하게 입고 다니고 못 배워서 무식하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런 생각이 편견인데 그걸 모르고. 사실 내가 은근히 꼼꼼하고 깔끔하거든요. 나도 유행 따라가는 거 아주 좋아하고요. 발품을 많이 팔아서 싸게 모든 것을 해결하죠."

▲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이들이 받는 돈은 거의 대부분 생활비에 들고 핸드폰 요금 등 다른 비용은 모두 지은이 감당해야 한다. 물론 그 수입원 역시 아르바이트다.ⓒ연합뉴스

지은의 머리는 옅은 갈색으로 염색돼 있었다. 지은은 "이 머리가 얼마짜리로 보이냐"고 물었다.

"머리 염색도 가지가지예요. 10만 원, 12만 원 주고 할 수도 있고 6만 원, 아님 3만5000원 짜리도 있고요. 내 머리? 4900원이예요. 사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12만 원 짜리 염색약에 들어간 성분이 뭔지도 알 수 있고, 발품을 팔면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염색약 중에 같은 성분의 약도 찾아낼 수 있죠. 지금 이 옷도 마찬가지고요.(웃음)"

"돈이 없어 재능을 버려야하는 아픔, 아세요?"

그 뿐 아니다. 공동체가정에 들어온 뒤 지은은 한 달에 10~20만 원씩 엄마에게 보내준다. 자궁암 수술을 받았던 엄마가 최근 재발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전부터도 호르몬제 등 다달이 들어가는 약값에 보태라고 보내주는 돈이다. "솔직히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은에게도 가난은 너무 자주 자존심을 건드린다.

학교에 다닐 때가 제일 심했단다. 학기 초, 교실 환경미화를 할 때부터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 형편이 괜찮은 아이를 불러 "교실에 커튼 좀 달게 엄마한테 얘기 좀 해 줄래" 묻던 선생님은 가난한 집 아이에게는 "너희는 그냥 청소나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많아요. 내가 왜 준비물을 못 챙겨왔는지 뻔히 알면서 애들 앞에서 '너는 왜 매일 준비물을 안 사 오냐'고 구박을 하고요. 급식비도 늘 문제죠.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해도 급식비 지원이 잘 안 되던 때였거든요. 한 번은 전교에 교내 방송으로 급식비 밀린 애들 명단을 부르면서 일으켜 세운 적도 있었어요."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가난은 지은과 은서의 삶 제일 가까이 있다. "배우는 것에 대한 욕심이 워낙 많다"는 지은은 그룹 홈에 들어온 뒤에 많은 것을 배웠다. 웃음치료사 자격증, 레크레이션 자격증도 땄고 미술치료, 목공예, 양초공예, 천연비누 만드는 법 등도 배웠다. 어떤 것은 기관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수업을 들었고, 또 어떤 것은 사정을 얘기하고 어깨 너머로 눈치로 배우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통기타다.

"비 오는 날 집에 불 다 꺼놓고 통기타 쳐 봤어요? 장난 아니게 좋아요. 기타 치는 법도 어깨 너머로 배웠는데 기타 살 돈이 없어서 요즘은 다 까먹었죠. 남들은 '나중에 다 기억날 거야'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너무 속상해요. 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모른다니까요. 10만 원짜리 기타 하나 살 돈이 없어서 내가 어렵게 얻은 재능을 잃어버려야하는 아픔 말예요. 그럴 땐 참 원망스러워요."

요즘 지은이 제일 하고 싶은 건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이다. 정식으로 학원에서 배우려면 75만~100만 원 가량 든다. 지은은 "싸게 딸 수도 있다고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운전만큼은 제대로 배우고 싶은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 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이 늘 하는 말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은 많아"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지은이 대안학교 하자센터에서 운영하는 '영 셰프 요리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올해부터는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수업이 있는 요리학교에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가야 하고, 일요일은 고등학교 수업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은 토요일과 월요일 뿐인데 지은은 "내 처지에 딱 맞는, 그런 알바는 세상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하는 날 조절? 사장들이 그런 걸 왜 해줘요.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 많아.' 늘 듣는 얘기예요."

지은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당구장, 전단지 돌리기, 주유소, 핸드폰 부품 납땜 공장, 스크린 경마장, 고깃집, 만두집, 편의점, 카페, 녹취 풀기. 종류만 나열해 봐도 이렇다. 제일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열네 살 때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 평균 40만 원을 벌었다.


미술에 소질이 있는 은서는 혼자 포토샵을 배워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한다. 인터넷 사이트도 만들어주고, 홍보물도 만들어준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많아야 10~15만 원.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요청하는 것은 무료로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서도 "여름부터는 디자인 알바 말고 본격적으로 알바를 구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비로는 87세 외할머니와 도저히 생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단순한 사회 경험이 아니다. 은서가 너무 갖고 싶다는 "아이폰이나 넷북" 등을 사기 위한 부차적인 수입도 아니다. 아직 정식으로 취직할 수 있는 나이가 못 된 빈곤 청소년에게 아르바이트는 먹고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5명 가운데 1명은 '노동'하는 청소년

일하는 청소년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지난해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만 15~19세의 청소년 329만4000명 가운데 일하는 청소년은 6.5%인 21만3000명에 달한다.

이 조사는 조사 시점에 아르바이트 등 일을 갖고 있는 청소년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 번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비중은 이 조사보다 크게는 4배 가까이 난다. 지난 2007년 국가청소년위원회 조사에서는 21%가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2009 아동청소년 백서'에서는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1년 내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청소년이 19.3%에 달했다. 청소년 5명 가운데 1명은 '노동'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서 취업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48.0%는 "학업·학원수강·직업훈련·취업준비 등을 병행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라는 답도 14.3%나 됐다.

이들은 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세한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점, 까페, 음식점, 편의점, PC방, 주유소 등이 그 예다. 통계청 조사에서 일하는 청소년 가운데 44.9%는 숙박음식점 등 개인서비스업에서, 26.6%는 도소매 등 유통서비스업에서 일을 했다.

사업장 규모를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이 45%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5~9인 사업장은 23%, 10~29인 사업장은 13%였다. 10인 미만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청소년이 전체의 78%나 되는 셈이다.

주유소 과장의 성희롱에 사장은 "니들이 조심했어야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든, '추가 용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든 이들은 처음으로 경험한 노동의 현장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뿐 아니라 약자일수록 약자에게 더 잔인한" 세상을 만난다. 힘없는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묻자 지은은 생각할 틈도 없이 "성희롱 당했을 때"라고 털어놨다.

"주유소에서 일할 때였어요. 거기 과장이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뒤에서 껴안더라고요. 그 과장이 그때 36살이었고 내가 15살이었으니 스무 살 차이도 더 나는 거죠. 사장한테 말을 했더니 오히려 '니들이 조심해야 한다'며 '그냥 잊어버리고 조용히 하라'고 하던데요? 문제가 커지는 게 싫었나보죠."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지은은 바로 그 주유소를 그만둘 수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돈이 필요해서." 사장은 잊으라 했지만, 지은은 잊을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은서도 비슷한 얘기를 털어놨다. 자신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은서는 아르바이트 삼아 10대 여성의 아르바이트 경험을 증언한 녹음 파일을 문서로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별별 사례를 다 봤다.

"한 청소년은 고깃집에서 일할 때 자기가 하녀인 줄 알았다고 했어요. 고기 굽는 것 뿐 아니라 아저씨들이 자꾸 '술 한 번 따라봐라'고 그런다고. 팔을 잡고 안 놔주는 사람도 많대요. 나 같으면 물수건이라도 던졌을 꺼야. '정신 차려' 이러면서.(웃음)"

"최저임금 어겨도, 근로기준법 어겨도, 공무원과 사장은 '사바사바'"


▲ 몇몇 "정신 나간" 아저씨들의 일상적인 폭력 외에도 청소년 노동은 사회가 용인해주는 '노동 착취'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 법정 최저임금은 의미가 없다. ⓒ연합뉴스
몇몇 "정신 나간" 아저씨들의 일상적인 폭력 외에도 청소년 노동은 사회가 용인해주는 '노동 착취'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 법정 최저임금은 의미가 없다. 야간 노동을 할 때 줘야하는 수당은 18세 미만의 야간 노동이 금지된 현행 근로기준법 때문에 달라는 말도 차마 못 한다. 식대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하나"라도 주면 다행이다.

"법 안 지키는 곳이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요. 최저임금이 3770원일 때도, 처음 들어가면 무조건 3000원부터 시작했어요. 최저임금 얘길 꺼내면 점점 올려준다고만 하죠. 그러면 나는 한 시간 일할 때마다 770원을 못 받는 건데. 10시간이면 7000원, 7000원이면 담배가 3갑이잖아요?(웃음) 편의점에서 일할 땐 음식물 쓰레기가 돼야 할 걸 나보고 점심으로 먹으라고 줘요. 삼각김밥 하나로 배가 채워지지도 않지만, 내가 무슨 개, 돼지도 아니고."

지은은 말했다. 성남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친구들과 작정하고 노동부에 신고도 해 봤다. 물론 달라지지 않았다.

"만두집이었는데, 최저임금을 안 줘서 신고한 거거든요. 그랬더니 노동부 사람 말이 '거기 원래 그래요. 또 그랬어요?' 이러대요. 그리곤 사장님 바꾸라고. 어른들끼리 통화하더니 유야무야 끝났죠. 어른들끼리는 '사바사바'가 되잖아요. 청소년은 싼 맛에 쓴다고 생각들 하니까요."

"법대로 하자"고 따지면 당연히 잘린다. 지은은 "거기서 잘리면 나는 돈 벌 곳이 없는데 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2008년부터 방통고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일을 할 수 없어지자 지은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친구들은 성년이라고 호프집에서도 일하는데 나는 미성년자니까 갈 곳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참아야죠. 날씬하고 예쁜 애들은 호프집에서 짧은 치마 입혀 놓고 시급 6000원도 줘요. 그 친구가 한 달에 120만 원씩 벌 때 나는 편의점에서 주 5일, 9시간씩 일하고 37만~42만 원 벌었거든요. 그 조건에 나를 써 주는 곳이 거기밖에 없는데 거기다 대고 시급 작다고, 왜 식대 안 주냐고 대들어 봤자죠. 어차피 질 것도 뻔하고."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 노동부는 1.3% vs 통계청은 63.7%


▲지난해 8월 이영희 전 노동부 장관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을 만난 자리의 모습. ⓒ연합뉴스
지은과 은서가 자신들이 경험했던 최악을 토대로 '과장'된 얘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경험이 '알바생' 대다수의 경험과 비슷함은 각종 실태조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지난해 11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청소년 10명 중 3명은 아르바이트 중 폭언·폭행·성폭력 등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폭력이 21.6%로 가장 많았고, 폭행(4.2%)이나 성희롱·성폭력(2.7%)도 적지 않았다. 가해자는 사업주, 상사, 고객으로 다양했다.

하루 평균 6시간 넘게 일하는 청소년이 44.3%에 달했지만, 휴식 시간이 따로 없는 경우도 62%나 됐다. 근무 중 식사 문제에 대한 조사에서는 13.6%가 "팔고 남은 재료로 밥을 먹는다"고 답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식대 대신 준다"는 답도 1.4%였다.

2009년 시간당 4000원이었던 법정 최저임금 미만의 시급을 받는 청소년은 무려 34%나 됐다. 3500~4000원이 15%, 3000~3500원이 13%, 3000원 미만도 5%였다. 지난해 8월의 통계청 조사는 그 비율이 더 높게 나온다. 당시 법정 최저임금 4000원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이 12만3000명, 무려 63.7%로 나타났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노동부는 청소년 고용 사업장 807개를 대상으로 벌인 근로감독 결과,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한 사례는 1.3%, 28건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런 차이에 대해 배경내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상임활동가는 노동부의 근로감독이 형식적으로 벌어지는 데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배 활동가는 "노동부는 서류가 갖춰져 있는, 즉 감독하기 편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피상적 법 위반 정도만 감독하며 사업주 얘기만 들을 뿐 청소년의 말은 반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3월 노동부 장관과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청소년 노동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며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를 위해 관계 법령 및 정책을 개선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노동부에는 "근로감독행정 강화를 위한 조치 강구"를, 교과부에는 "노동인권교육을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다.
 

아버지와 오빠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지은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가정다운 가정이 되어 주었던 그룹 홈도 올해가 지나면 떠나야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은 적어 대기자가 많은 만큼 성인이 되면 떠나야하는 것이 그룹 홈이다. 지은은 20세가 넘었음에도 방통고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다. 내년 2월이면 방통고도 졸업이니 "자립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자립은 지은의 삶에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당연히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지은은 "요즘 밤에 한숨을 쉬면서 깨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고민이 됐어요. '나중 일이야'가 안 되는 거예요. 엊그제가 1월이었는데 벌써 4월이잖아요. 자립 고민을 많이 하면서 같은 집에 사는 동생들에게 잔소리도 늘었어요. '언니 봐라, 시간 진짜 빨리 간다'는 잔소리요. 애들은 아직 모르죠. 14살 막내한테 '애니메이션은 조금만 보고 30분이라도 영어 공부 좀 해' 그러면, '얘가 뭐라는 거야'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봐요.(웃음)"

역시 방통고를 다니는 학생이란 이유로 스무 살이 넘도록 받고 있는 한 달에 30만 원 가까운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수급비도 끊길 것이다. 내년 3월이면 지은은 정말로 오롯이 혼자 힘으로 다시 살아가야 한다. 서울 이 비싼 땅 덩어리에서 혼자 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라도 가야하는데 학비는 또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은 태산이지만, 그래도 지은은 "남들보다 비록 조금 늦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함께 당당하게 살 길 찾고 싶다"

은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당당함이지만, 나는 가난한 사람도 당당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옷을 사러 가도 가난한 사람은 가격표를 먼저 본대요. 돈 많은 사람은 가격표 상관없이 우선 '이거 입어봐도 되요?'라고 말하고. 음식점에 가도 가난한 사람은 싼 음식만 찾지만, 부자들을 질을 따진다죠. 그런데 나는 잘 웃고 (가난한) 티도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해요."

은서의 꿈은 "가난으로 무기력해진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힘없는 소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요. 특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 청소년들요. 사실 남성보다 여성이 소수자고 그 중에서도 가난한 여성은 더 소수자고 가난한 여성 중에서도 나이 어린 청소년이 더 약자잖아요.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배고픈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날라리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하는 지은의 꿈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세상은 그들에게 별로 해 준 것이 없는데, 그 팍팍한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것마저 자신처럼 고통 받는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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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삼성과 관련된 기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나 퍼왔다. 

 

삼성해체가 답인가. 

김상봉 교수의 글을 반박한다.

 김상봉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를 읽었다. 김 교수는 이 칼럼에서 국가기구마저 사유화하고 있는 삼성을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삼성 독재, 자본 독재를 끝장 내기 위해 삼성을 해체해야 하며 그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에 삼성 문제가 있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김 교수의 칼럼 안에는 꽤 많은 오류들이 담겨 있으며 이 같은 오류들이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김 교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기업'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김 교수는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장경제 질서 아래 존재하는 기업 일반 및 기업들의 이윤 창출 행위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극히 부정적이다. 기업들이 이윤 창출만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식의 김 교수의 인식은, 자본이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취하기 위해 임노동자를 고용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제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경영을 하고 고용을 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들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기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인 듯 싶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자신이 쓴 칼럼 안에서 갑자기 기업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바꾼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라고 쓴 것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분명치 않거니와 김 교수의 논리대로 하자면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이더라도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 안에 있는 한 '인간'이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일텐데 그런 기업을 '사랑'하겠다는 표현을 어떻게 김 교수가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김 교수가 생각하는 사랑받는 기업상(像)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는 자제한 채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인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시장경제 질서 아래에 있는 기업들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를 자제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윤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윤 창출이라는 결과를 통해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한다. 고용, 투자, 기술 및 경영기법 개발 등의 기업활동이 모두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독과점을 형성하지 않는 한, 지대추구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기업들의 이윤 추구 행위는 권장해 마땅하다.


▲ 삼성그룹 사옥. ⓒ프레시안

또한 김 교수는 삼성과 이건희 일가 및 이건희 일가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가신그룹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삼성 문제의 본질은 이건희 일가가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 순환출자 등을 통해 시가총액 200조 원짜리 그룹을 사유물로 삼았고, 계열사들을 동원해 이건희 일가만을 위한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 비자금으로 국가기관들을 매수해 제 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온갖 불법과 탈법과 위법 행위들은 이같은 삼성문제의 본질에서서 파생된 사건이다. 물론 이학수와 김인주 등의 가신그룹은 이건희의 의중을 받들어 비자금 조성 및 사용, 경영권 불법승계 등을 설계하고 집행했다. 김 교수가 삼성 특권 혹은 독재의 사례로 든 태안 기름 유출사건, 삼성생명보험의 행태 같은 경우도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독단과 전횡 탓일 가능성이 높다.

즉 김 교수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까지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삼성 문제의 실체는 삼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다. 물론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삼성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 전체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은 사실판단의 측면에서도, 전술적 차원에서도 옳지 않다. 김 교수가 삼성 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라는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도 삼성문제를 진단하면서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데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김 교수는 삼성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를, '삼성 해체'를 실현할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소비자불매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국가가 삼성 문제를 해결할 힘은 가지고 있으되 의지가 없으므로 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성을 해체해야 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구매를 거부하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의 문제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저지른 김 교수는 삼성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엉뚱하게 제시하고 있다.

기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른 행위들은 법치주의와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그러나 금감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시장감시기구와 사법기관(검찰 및 법원)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거나 적어도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르고 있는 패악질의 본질은 '법치주의'의 실종에 연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문제의 해법은 법치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국가의 구성에 있는 것이지 삼성그룹 해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삼성 문제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조직해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에게 제 몫을 찾아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 등을 통해 글로벌 기업이 된 삼성을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의 문제로 해체하자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 이상의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김상봉 교수의 지적처럼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다스리는 삼성이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삼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삼성 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김 교수의 칼럼에는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사실적, 논리적 오류들이 적지 않다.
 

  

 

 

 

 

 

 

 


김 교수가 그와 같은 오류를 저지른 이유 중의 하나가 구좌파적 상상력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삼성 문제 해결에 기업 및 자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는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분리하는 사고, 법치주의를 철저히 구현하고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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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19특집 기사가 나오는가. 

한국일보에서 퍼왔다. 

 4·19는 조선 말부터 꿈틀대던 민주주의의 정치 패턴을 만든 사건"
[4·19 50년을 말하다] <7>김우창-최장집 대담 '4·19의 현재적 의미'

'이승만 독재'는 사회 배경 고려해 재연구 필요
김승옥 소설·김수영 詩는 4·19 문학의 업적
자유와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을 폭넓게 다뤄
5·16은 민주주의 주체인 시민이 탄생할 기회 뺏어
4·19 엘리트들이 체제에 순응… 386세대서 되풀이
민주정부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 개선에 공 들여야


한국일보의 4ㆍ19혁명 50주년 특별기획 시리즈 '4ㆍ19 50년을 말한다'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 '4ㆍ19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최장집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김 교수는 한국 사회의 겉과 속을 두루 살피는 섬세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최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통찰을 통해 4ㆍ19의 기원과 성격, 정치사회적 파급력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문학과지성사와 공동 주최로 열린 이번 대담의 진행은 문학평론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가 맡았다.

내가 겪은 4ㆍ19

▦김우창= 4ㆍ19가 일어났을 때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에서 유학 중이어서 4ㆍ19를 직접 겪진 않았다. 하지만 그 파장을 실감할 일이 있었는데, 그곳 지역 신문에서 한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다루고자 나를 인터뷰해서 1면에 기사를 게재했다. 워낙 작은 동네여서 내가 거의 유일한 한국인 거주자였다. 

▦최장집= 나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대학생이 아니었으니 엄밀히 따져 4ㆍ19 중심 세대는 아니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최연소 4ㆍ19세대'랄까. 물론 데모에는 참여했고 도심에서 경찰 발포가 있을 때도 현장에 있었다. 개인적으론 물리학과에 진학하려다가 4ㆍ19를 거치면서 정치학과로 진로를 정한 터라 의미 깊은 사건이다.

▦김= 대학생을 비롯, 고교생들에게 4ㆍ19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시위 참여를 종용하는 사람은 없었나. 현장에 없었던 터라 궁금하다.

▦최= 외부인이 데모 참여를 강제하진 않았다. 당시 중앙고, 보성고, 서울고 등 서울 시내 고3 학생회장들끼리 정치적 문제의식을 교환하는 서클이 있었고, 나도 거기에 소속돼 있었다. 4ㆍ19 당시 이 서클을 통해 학생 조직 방안 등을 논의하고, 일부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과격한 고교생들은 평소 공적(公敵)으로 여겨지던 임화수, 이정재 같은 정치깡패들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며 밤길을 나서기도 했다.

▦김= 우리 세대는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에 다닐 때도 데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6ㆍ25전쟁 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 광주에서 일본인이 연루돼 발생한 어떤 사건을 놓고 한ㆍ일 정부 간에 협의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일본과 타협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간단히 데모를 했던 것이다. 아직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던 50년대 초에도 민족 문제만큼은 공적인 현안이 됐다.

▦최= 4ㆍ19를 촉발한 것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였다. 특히 3ㆍ15 부정선거, 뒤이은 김주열 사망 사건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갈수록 남북 문제와 민족 문제, 요즘 말로 하면 세계적 냉전과 결부된 분단 문제로 초점이 옮아갔다. 김 선생님 말씀대로 당시부터 일본 제국주의 반대 등 민족주의가 굉장히 강했고, 나 역시 그랬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

▦김= 손세일 전 의원이 쓴 <이승만과 김구>(2008)를 읽어보면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의 정치적 문제들이 나와 있는데, 그 중 이승만이 민주정치 체제를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컨대 임시정부 구성ㆍ운영 문제에 있어서 이승만은 민주주의 입장에서 가장 선진적인 관점을 보여줬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4ㆍ19를 통해 독재자라는 누명을 쓰고 타도 대상이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최= 우선 이승만 주도로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의 정당성, 도덕성이 취약했다. 1950년 6ㆍ25전쟁으로 권력 기반이 튼튼해지기 전까지, 이승만 정부는 극심했던 좌우 이념 투쟁의 여진 속에 놓여 있었다. 또 이승만 정부가 민주주의 제도 운영에 있어 독단적이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당초 이승만은 김성수 등이 주도한 한민당과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고도 집권 후 인사, 권력을 독점했다. 권력의 유지, 연장을 위해 비정상적 개헌을 거듭했고, 선거 때마다 행정 관료를 대거 동원해 부정선거를 치렀다.

▦김= 개인적 책임과 집단적 책임을 분명히 가를 수는 없지만 부정선거에 있어 이승만이 사전에 알고 지지한 증거가 있는지, 아니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권 확보 등을 위해 획책했는지를 따져보는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주목할 것은 이승만이 4ㆍ19가 일어나자 비교적 순탄하게 정권을 내놨다는 점이다. 정권을 확실히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 하지 않았다. 그가 절대권력을 갖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나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최= 이승만 하야로 4ㆍ19로 인한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을 향한 비판에 과도한 측면이 있을 것도 같다. 아무래도 분단ㆍ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좌파 민족해방(NL) 계열이 80년대 운동권 중심 세력이었고, 이들로부터 이승만은 충분한 합의 없이 분단 정부를 구성한 인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아왔다.

▦김= 다들 '일본놈은 모두 죽일 놈이다'라고 성토하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도 이승만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구분 지어 생각했다. 그처럼 선구적 측면이 있던 사람이 이후 어떻게 독재자가 됐는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보태고 싶은 말은 개인은 시대가 가진 여러 가능성 속에서 움직이며, 개인적 동기를 넘어 어떤 사건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최= 이승만 정부가 권위주의로 흐른 이유를 알려면 이승만 개인의 리더십,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분단 정부가 만들어졌던 정황부터 살펴야 한다. 거의 내란 직전에 건국된 탓에 남한 정부는 국가 체제 구축뿐 아니라 북한에 맞서 군대, 경찰 등을 강화해야 했다.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 제도의 구색은 갖췄지만, 실제 그 제도를 움직일 만한 조건은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 견제가 없다보니 자연히 권위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봐도 민주주의 제도가 이식됐지만 작동이 잘 안되고 있다. 이들 나라를 보면서 한국의 해방기를 생각하게 된다.

▦김= 4ㆍ19 때 희생자가 생긴 것은 말할 수 없이 비극적이지만, 이승만이 하야해 하와이에서 숨을 거둔 것도 비극적인 것 같다. 우스개로 얘기해 보면 학교 다닐 때 북악산 길로 통학하면서 중앙청(지금의 청와대) 앞을 맘대로 지나다녔다. 대통령 집무실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웃음)

▦최= 그렇다. 한때 청와대에 매일 드나들었는데 정문 통과할 때마다 얼굴을 보여줘야 했다. 권위주의가 체제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유신체제라고 생각한다. 강한 정보부가 있었고, 잘 짜여진 제도로서 독재가 시행됐던 것이다. '이승만 독재'는 독재할 국가 체제 자체가 엉성한 상황이었던 것만큼 구별해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김= 최근 한 일본 기자가 "한국에는 왕당파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왕조 정치의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식민지 치하 때 왕정 복귀를 꾀하는 정치 파벌이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19세기 말부터 이 땅의 민중 사이에선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것이 독립협회 등을 통해 표출됐다고 본다. 그런 희망이 대중적 표현으로 드러난 것이 4ㆍ19다. 4ㆍ19가 국가 발전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최= 나 역시 4ㆍ19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패턴을 만든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 규모와 중요성은 한국을 도시 사회로 탈바꿈시킨 산업화에 비견될 만하다. 특이한 점은 한국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제도보다는 가치로서 수용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가치들이 죄다 몰락한 가운데 모든 대안적, 이상적인 것을 민주주의라는 말에 투영했기 때문인데, 그렇다보니 대의민주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것까지 민주주의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측면이 있다. 4ㆍ19는 그런 환상을 축소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김= 4ㆍ19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영웅적 인간인 동시에 비극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윤봉길 의사는 독립을 향한 의기(意氣)를 발휘해 독립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그가 젊은 날에 죽었다는 것은 비극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왜 이런 얘길 하냐면, 희생자의 비극을 기억하지 않을 경우 4ㆍ19와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이 전부 실현된다는 착각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 예를 들면 어떤 집단에겐 테러리즘도 영웅적 사건으로만 기억된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영웅적 행위에선 그 비극을 무시하면 안된다. 영웅적 사건이 없는 시대가 가장 좋은 것이다.

▦최= 한국 현대사가 압축적 근대화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부터 민주화까지 반세기도 안돼서 한 국가가 겪을 수 있는 모든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서양 역사를 보면 17~18세기에 걸쳐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이 도래하고, 19세기에 산업화가 일어나는 등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단계적 변화를 보인다. 헤겔이 말한 '시대정신'도 이런 장기적 변화에서 추출된 개념이다. 반면 한국에선 가치가 합의될 만한 수준에서 전개되기 힘들다. 역사가 각 부문별로, 짧은 간격으로 변화하다보니 전체 역사의 인식틀이 없고, 한 시대의 중심 그룹과 그들의 가치가 뒷세대와 충돌하면서 극심한 이념 갈등을 빚고 있다.

새로운 문학의 탄생

▦김= 4ㆍ19 이후 문학에선 김승옥 소설, 김수영 시 등을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눈여겨볼 것은 4ㆍ19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들이 이후의 문학보다 이념적 측면에서 훨씬 폭이 넓은 것 같다는 점이다. 자유,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 등 특정 이념에 묶이지 않는 주제들이 4ㆍ19 문학에서 다뤄졌다. 이는 4ㆍ19가 사회적 혁명의 의미가 약했고, 당시 사회의 소망을 반영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전쟁 소재의 문학보다 4ㆍ19 이후 막 나온 김승옥, 김수영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특히 대학 때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을 읽으면서 느낀 감동은 굉장했다. 우리 세대 전체에게 세례를 준 작품이다.

▦김= 우리 세대는 서기원, 하근찬의 소설이나 <청록집> 같은 시집을 읽었다. 김현 등 4ㆍ19세대 평론가들이 동세대 문학을 적극 옹호하면서, 50년대 문학이 다소 뒤떨어지는 듯한 인식이 형성된 측면이 있는데 꼭 그렇진 않다. 예컨대 50년대 작가들이 종군 작가로 활동하며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는 지적이 있는데, 염상섭 조지훈 모윤숙 등이 그렇듯 사상보다는 생계를 위해 종군 작가로 일한 측면이 크다.

4ㆍ19가 남긴 것

▦최= 4ㆍ19는 당대 엘리트 집단이던 학생을 비롯한 민간 세력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5ㆍ16으로 인해 좌절됐다. 당시 군은 사회 계층상 엘리트 축에 못 끼는 하급 집단이었는데, 군사정부가 국가주의, 발전주의의 기치를 걸고 추진한 산업화에 4ㆍ19혁명 엘리트들이 산업 역군으로 통합돼 부수적 역할을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시대에 맞서 정치적 행위를 일으킨 집단이 다시 체제에 순응되는 패턴이 이때부터 만들어져 386세대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김= 4ㆍ19의 이념을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옮길 만한 정치적 지도자가 없었다. 군사정권은 정치적 동원의 기제로 민족주의를 내세웠는데, 민족이란 구호가 막강한 것이 누구도 "민족, 그까짓 게 뭐냐"고 감히 무시할 수가 없다. 물론 민족주의가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고 중요한 과업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면 좋겠지만, 이것이 단지 정치적 동원을 위한 구호로만 쓰일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민족이란 구호의 이중성을 잘 살펴야 한다.

▦최= 4ㆍ19와 87년 민주화운동 모두 대학생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학생은 아직 생계를 전담하지 않는 가운데 높은 자율성과 자유를 누리는 집단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의 급진성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접맥되지 않는, '중산층 급진주의'라고 부를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 정당체제가 사회경제적 문제보다는 추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 동의한다. 세종시 문제만 해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할 정책 과제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접근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현상이다. 토목이라는 것은 일종의 독재 정치다. 몇 사람이 그린 도안에 맞춰 국민 세금을 들여 사람이 버젓이 살고 있는 땅을 뜯어고친다는 발상이 그렇다. 정치나 정책은 구체적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최= 선생님 말씀에 덧붙이면 4ㆍ19부터 87년 민주화까지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념과 가치로 추구돼 왔는데, 막상 그런 기반 위에 선 민주 정부가 보통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하는 것보다 되레 그것을 뒤흔드는 거대 토목 공사를 벌이는 것은 매우 역설적 현상이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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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7) 월터 미뇰로

월터 미뇰로(1947~)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 고등연구원(Ecoles des Hautes Etudes)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듀크대 교수이다. 기호학을 전공했으나 점차 연구 영역을 넓혀 문학이론, 문화인류학, 문화연구 등을 넘나들었다. 전 지구적 식민성, 지식의 지정학, 경계사유, 탈식민주의 등이 주요 관심사로, 대표적인 저술로는 <르네상스의 어두운 측면>(1995), <지역의 역사/전 지구적 설계>(1999), <라틴아메리카, 그 이름 뒤에 감춰진 현실>(2005) 등이 있다. 마지막 책은 번역 작업이 끝나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며, 이에 맞춰 내한하여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미뇰로는 직접적인 식민통치 시대는 갔지만 지식의 지정학을 통한 식민지배는 오히려 강화됐다고 본다. 최근 탈식민주의 담론이 주목받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배태한 서구 중심 지식이 결국은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 월터 미뇰로
 



나는 무식하다. 그래서 들뢰즈, 네그리, 하트, 라캉, 지젝 등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이미 ‘포스트-’가 붙은 이론들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던 터에,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유학 시절 페루, 스페인, 칠레, 아르헨티나 등으로 떠돌아다니던 내게 위험을 경고한 이가 있었는데도 깨닫지 못했으니 다 내 불찰이다. 그 사람은 그저 며칠 미국에 들렀을 때 만난 교포 택시기사였다. 그는 내게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중남미에서 뭐 배울 게 있느냐고.

나는 정말 몰랐다. 지식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줄을. 중심에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듣고, 또 믿는다. 하지만 변방에서 이야기하면 시큰둥하다. 중심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표절이라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 한다. 아니 보통은 듣지도 않는다. 세계사회포럼이 파국을 그렇게 경고했건만 사람들은 오직 다보스포럼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국제 금융위기였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스위스만 바라보며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지식에서 왕후장상의 씨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직 ‘어디서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지식의 진실 여부보다 발화 위치가 더 중요한 셈이다. 그래서 지식은 지정학적이다. 지식도 지정학적 요충지가 있는 것이다.

월터 미뇰로는 이런 현실을 단호히 거부한다. 지식의 영역에서 식민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뇰로는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대세였던 제국주의 시대는 갔지만, 지식의 지정학을 통한 식민통치는 오히려 강화되어 정치나 경제 등의 영역에서 실효적인 식민통치를 뒷받침하고 작동시킨다고 본다. 미뇰로가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식민성, 즉 직접적인 지배 없는 식민통치를 타파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는 서구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을 해부, 비판했다는 점에서 미뇰로는 사이드의 식민성 비판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미뇰로가 보기에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옥시덴탈리즘이다. 서구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거니 하면서, 비서구를 기술하고 개념화하고 서열화해도 되는 특권이 있다는 인식인 옥시덴탈리즘이 있었기에 오리엔탈리즘도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이드 예찬론자들은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미뇰로에게 옥시덴탈리즘은 모든 사유의 범주와 세계를 분류하는 지정학적 담론인 반면, 오리엔탈리즘은 그 결과 파생된 하나의 연구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미뇰로는 사이드의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대신 포스트옥시덴탈리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아가 탈식민주의(decolonialism)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포스트-’가 ‘후기’인지 ‘탈’(脫)인지는 논란거리겠지만 아무튼 포스트식민주의보다 더 완벽한 식민성 극복이 탈식민주의의 꿈이다. 1990년대 엔리케 두셀, 아니발 키하노, 월터 미뇰로 등이 탈식민주의 논의에 중요한 구실을 했고, 이로부터 근대성/식민성/탈식민성 연구 그룹이 탄생되었다. 미뇰로는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포함하는 국제적인 탈식민주의 네트워크 구축에 힘쓰면서 그룹의 좌장 구실을 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이 그룹의 비판은 그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월러스틴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기원이 1450~1640년이며, 이때부터 작동한 체제를 근대 세계체제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이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작동원리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지식(월러스틴은 이를 지문화 geoculture라고 부른다)이 18세기 프랑스혁명 즈음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대성/식민성/탈식민성 연구 그룹은 1450년이라는 기점, 지문화의 18세기 정립론,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 등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월러스틴을 비판한다.  


 

 

 

 

이 그룹이 보기에 근대 세계체제의 1450년 태동론은 근대성이 서구 고유의 것이라는 서구 중심적 시각의 산물이다. 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근대성 자생론은 서구가 만든 신화일 뿐이며, 사실은 복수의 근대성이 소통하는(trans) 전 지구적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문화의 18세기 정립론에 대해서도 두셀은 2단계 근대성론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아메리카 정복으로 1단계 근대성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등으로 18세기에 2단계 근대성이 발현되었다는 것이 요지이다. 월러스틴의 18세기론을 배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 지식의 우월함만 부각시키고, 그 지식이 원주민 수탈을 정당화시켰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뇰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톨릭, 서적, 판화, 지도 등이 어떻게 인종 차별과 정복 등을 정당화시키는 지식을 구축했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식이 오늘날까지도 작동함으로써 식민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에 대한 비판에는 사회학자 키하노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메리카 정복을 서구 근대성의 기원으로 본다. 이를 계기로 인종차별에 입각한 국제적인 노동분업 시스템, 즉 오늘날과 같은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잉태되고 가동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특별히 수탈 구조를 부각시키는 것은 근대성의 뒤에 감추어진 식민성을 직시하라는 주문이다. 키하노가 보기에 근대성과 식민성은 동시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양자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은 식민성을 누락시킴으로써 진실을 호도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이에 키하노는 근대/식민 세계체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에서 연구 그룹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중심의 발전과 주변의 저발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을 비유하기 위해 종속이론가인 군더 프랑크가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연구 그룹은 페루의 마르크스주의자 마리아테기, 프란츠 파농, 종속이론, 해방철학 등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유를 계승하고 있다. 실제로 두셀은 해방철학의 대표적 학자이고, 키하노도 저명한 종속이론가였다. 1980년대의 경제위기와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이념의 시대가 갔을 때 학계의 중심에서 당연히 밀려났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건재,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두셀과 키하노가 과거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유연한 연구물을 산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문제의식이 옳다고 믿는 이들을 다시 증가시킨 현실 때문이다. 몇 년 전 <고삐 풀린 현대성>이라는 책이 번역된 적이 있다.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볼 것을 주문한 대목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재작년 탈식민주의 그룹이 다수 참여한 <고삐 풀린 식민성>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세계화가 사실은 식민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물론 필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이다. 신자유주의를 배태한 서구 지식이 결국은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만 오늘날의 현실에서 식민성이 고삐가 풀려 미쳐 날뛰고 있다는 진단은 설득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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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페루 가톨릭대에서 석사, 스페인 콤플루텐세대에서 중남미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잉카 IN 안데스>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를 말하다>(공역),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마술적 사실주의>(공역) 등이 있다.



Walter Mign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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