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경쟁력의 비밀은

 

[고성국의 '박근혜論']<2> 대중성, 타이밍 감각, 화법에 대해

연예인은 대중인기를 먹고 살고 정치인은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산다. 대중의 지지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는 것이 선출직 정치인의 숙명이다. 대중의 지지는 적극적 지지, 확산성 있는 지지도 있고 소극적 지지, 확산성 없는 지지도 있다. 적극적 지지란 응집력과 충성도가 높다는 뜻이고, 확산성이란 지지자의 대중 전파력이 크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모두 갖춘 정치인은 행복하다. 충성도도 높고 확산성도 크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박근혜 경쟁력의 비밀, '대중 흡입력'

박근혜는 적극적 지지자들은 많지만 확산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 지금까지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25%~30%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의 지지자들이 웬만한 정치상황에는 꿈쩍도 않는 충성도 높은 지지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충성도 높은 25%~30%의 고정적 지지자들의 존재, 이것이 바로 박근혜 경쟁력의 핵심이고 모든 정치인들이 부러워하는 박근혜 경쟁력의 비밀이다.

정치인은 스킨십에 목숨을 건다. 한 번이라도 손을 잡은 유권자는 절반 이상 지지자가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권자의 손을 전부 잡지는 못한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절대적인 제한이 있어서다. 확산성이 중요한 이유다.

어떤 정치인이건 대중을 지지자로 만들어내는 흡입력을 갖고 있다. 대권주자반열에 오른 정치인들은 대중흡입력의 다양한 요소, 즉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박근혜의 대중 흡입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충성도 높은 지지층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중 흡입력을 매력이라 한다면 박근혜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몇 배 더한 매력을 갖고 있다 하겠다.

대중이 박근혜에게 느끼는 매력은 1차적으로 그의 외모와 행동거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5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박근혜는 단아하고 맵시 있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품위 있으면서도 겸손한 태도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스타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그는 스타킹이 '빵꾸나서' 창피했던 경험 같은 에피소드를 약간의 여성적 수줍음에 얹어 얘기하곤 하는데 이런 '소탈한' 화법은 적대적 감정을 갖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녹여버릴만큼 호소력이 강하다.


▲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시민과 악수하는 박근혜 전 대표 ⓒ뉴시스

싸울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타이밍 감각'

박근혜의 흡입력은 타이밍에 대한 특유의 감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치는 워낙 변화가 많고 유동적이라서 시의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행동, 같은 말에도 충격효과나 파급효과가 극대화되는 결정적 시점이 있다. 박근혜는 이 '결정적 시점'을 포착하는데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법 파동 때 절충안을 제시한 시점이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본회의 반대토론을 감행한 시점은 발언의 파급효과가 최고점에 도달한 때이다.

타이밍 감각이 진짜 중요한 때는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다. '지금이야말로 싸울 때'라든지 '지금은 타협할 때'와 같은 전략적 선택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기도 하는데 이 대목에서 박근혜의 감각은 김영삼, 김대중 같은 대중정치인의 감각에 근접한다.

YS가 절정의 타이밍 감각을 보여준 것은 내각제 각서 파동 때였다. 3당 합당을 하면서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이 내각제 개헌에 합의 했다는 이른바 '내각제 각서'를 민정계가 공개한 직후 YS는 일체의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 칩거 투쟁을 벌였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YS는 권력을 위해 물밑거래도 마다않는 정략 정치인으로 매도당했을 것이다. 이 마산 칩거투쟁에서 승리한 YS는 승기를 잡아 대권까지 거머쥐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일생일대의 승부처로 전환시킨 타이밍과 대세감각은 과연 YS라 할만 했다.

DJ의 타이밍감각은 영국에서 돌아와 정계은퇴선언을 번복하고 감행한 정계복귀에서 빛을 발했다. DJ는 대권 4수라는 초유의 승부수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터뜨렸다. 엄청난 비난이 빤히 예상되었음에도 DJ는 밀어붙였고 정계복귀에 성공했다. DJP연합도 DJ의 빛나는 승부감각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만전에 만전을 기한 1997년 대선에서 DJ는 선거 직전 DJP연합을 이루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DJ대세론을 확산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일각의 '안티 DJ' 분위기를 우회적 방식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박근혜도 정치 초년병 시절 이회창과 결별해 탈당했다 복당한 적이 있다. 승부호흡은 선보였으나 진검승부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셈이다. 이에 비하면 세종시 승부는 제대로 승부를 걸어 끝까지 갔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긴박한 승부호흡은 관전자들이 손에 땀을 쥐고 집중하게 만들고 때로는 응원을 넘어 함께 행동하게 만든다. 박근혜는 승부호흡을 아는 정치인이고, 승부를 할 때의 팽팽한 긴장감을 감당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이것이 박근혜가 대중의 관심을 흡입하는 또 다른 비결이다.

타이밍에는 승부를 할 때의 타이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승부를 멈출 때의 타이밍도 있다. 8.21 회동은 박근혜가 싸움을 시작할 때의 타이밍 뿐만 아니라 싸움을 멈출 때의 타이밍 감각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8.21 회동 후 전개된 계파구도의 완화와 바닥에서 불기 시작한 '박근혜 대세론', 더 나아가 친이계의 '반 박근혜 분위기 희석' 등은 박근혜가 싸움을 멈출 때의 긍정적 효과를 어떻게 정치적 성과로 수렴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근혜는 세종시 이슈에서 싸움할 때의 타이밍과 일단 싸움이 시작됐을 때 리더가 어떻게 강렬한 투쟁의지를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고 8.21 회동을 통해 싸움을 멈춰야 할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그리고 싸움을 멈춘 후 어떻게 상대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안정시켜야 하는지를 알고 있음을 또한 보여주었다.

이렇듯 타이밍 감각은 단순히 시점을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싸울 때와 멈출 때,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에 걸맞는 행보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박근혜의 타이밍 감각이 대중흡입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그에 걸맞는 행보감각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결'에 나오는 '압축적 화법'

박근혜가 발휘하는 대중 흡입력의 마지막 요소는 그의 화법이다. 박근혜의 화법은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한 쪽이고 자극적이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쪽이다. 조어를 좋아하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다. 그의 화법은 압축적이지만 일부러 압축한다기 보다는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는 방식이다.

"대전은요?"(2005년 지방선거 유세 중 커터칼에 '테러'를 당한 후 내놓은 첫 마디)
"참 나쁜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시도에 대해)

이런 말은 의식적으로 압축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홍보전문가들이 머리를 짜낸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말하는 사람이 골똘하게 생각한 끝에 무심결에 나오는 한마디다.

'무심결에'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결에 나오는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이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는 화자의 진정성이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어법이 압축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그의 말에 그의 감성과 정치적 판단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충성도 → 확산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정치는 99% 말로 이루어진다. 군사 권위주의시대에는 정치가 때로 폭력이나 정보기관의 위협과 공작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정치는 정치인들의 말에 의해 이루어진다.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대통령의 주요한 통치 수단도 말이다. 적어도 국민을 상대로 통치를 할 때 대통령은 말아닌 다른 수단에 의존하지 못한다. 공무원들이라면 인사권이라는 수단도 있고 이익집단들에게는 법이라는 수단도 있겠으나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할 때는 말아닌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다.

정치는 고도의 상징행위다. 정치인의 말은 상징행위의 직접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화법과 어법이 대중적 흡입력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말 잘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상징적 통치행위라는 정치의 본질에 잘 부합하는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과 품성이다.

소통은 진정성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대중적 흡입력이 있는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정치인은, 그리하여 말의 진정성을 느끼게 만들 줄 아는 정치인은 소통을 통해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이에 반해 아무리 노력해도 대중의 일체감을 끌어내지 못하고 겉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화법을 구사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에게 소통은 도달할 수 없는 벽처럼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최근 미니홈피, 블로그에 이어 트위터가 정치적 소통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140자 이내의 짧은 문장과 한 두컷의 사진으로 속도감 있게 소통하는 트위터의 핵심은 감성적 교감이다. 실시간 소통이라는 동시성과 현장성을 주 무기로 하는 트위터에서의 소통은 설사 그 소재하드한 정치라 하더라도 전달 방식은 소프트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는 미니홈피와 블로그, 트위터를 직접 한다. 당연히 매일 매시간 할 수는 없다. 때로 며칠 동안 못할 때도 있고 하더라도 짧은 인사말 이상을 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래도 미니홈피, 블로그, 트위터를 찾는 사람들은 기분나빠하지 않는다. 비록 짧은 인사 글이라도 박근혜가 직접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 같은 믿음과 기대를 알기 때문에 박근혜는 이 작업 즉, 대중과의 직접적 소통만은 자신이 직접 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머릿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정황이 대중으로 하여금 박근혜와 감성적으로 교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스타와 팬 사이에 형성되는 내밀한 공동체 정서 같이. 이것이 박근혜 대중성의 비밀이다. 바로 이것이 박근혜 지지자들의 높은 충성도가 확산성으로 전화할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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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기사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승리일까.

 


196㎏ 여성, 위 수술·운동 병행해 건강 찾아… "이젠 당당하게 길 물어볼 수 있어"
초고도 비만에 생명 위협까지… 사연 접한 성모병원, 무료 수술

"키 183㎝에 몸무게 196㎏인 여자로 사는 일은 암흑이었습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이정선(37)씨 얼굴에 그간의 설움이 스쳐가는 듯했다. 몸무게 97㎏으로 다시 태어난 이씨는 수십년 만에 뱃살 밑으로 처음 드러난 발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생명까지 위협받는 초고도 비만 환자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2008년 8월 이씨 사연이 한 방송을 통해 알려진 뒤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이 '위 우회술'을 해줬다. 소주잔 크기만 하게 자른 위를 소장과 연결해 음식물 섭취와 흡수를 동시에 줄이는 수술이었다.





2008년 7월 당시 196kg이었던 이정선씨. /이정선씨 제공





몸무게 97kg으로 다시 태어난 이정선씨가 활짝 웃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수술 후에는 남의 눈을 피해 공동묘지에 가서 운동을 했다. 운동으로 체중은 서서히 줄었지만 살이  처지기 시작했고, 접히는 곳마다 습진과 물집이 생겨 의자에 앉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이런 사정을 안 서울성모병원은 지난 8일 12시간 동안 배 주위 처진 살 7㎏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줬다. 수술비는 모두 병원이 부담했다.

이씨는 생선 노점을 하던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초등학교 때 덩치가 커서 중학생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몸무게가 100㎏을 넘었다. 조금만 먹어도 질병 수준으로 살이 쪘다. 1992년 고교 졸업 후 4년간 사무실 경리부터 재봉공장 보조 재봉사까지 수백번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몸으로 여기는 왜 왔느냐'는 냉랭한 눈빛만 돌아왔다. 1996년부터는 사람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텔레마케팅(전화영업)으로 보험과 책을 팔았다. 한 달에 100만~120만원을 벌었다.

이씨는 "나를 버리지 않은 엄마를 위해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며 "외모에 신경 쓸 만큼 삶이 녹록지 않았다"고 했다. '성격까지 나쁘면 아무도 상대 안 해준다'는 생각에 활달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어느새 '예스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1년 어머니 회갑 선물로 62㎡(19평) 아파트를 사드렸지만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4년 만에 날려버렸다. 어머니는 종교시설에 들어가고 이씨는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지긋지긋한 살덩어리들을 떼어 버렸다. 이씨는 "다른 사람이 나한테 신경 안 쓰고 무관심한 게 너무 좋다"며 "17년 만에 백화점에 갔는데 이젠 낯선 사람한테 길도 물어볼 수 있고 버스 타도 미안한 생각이 없어졌다"고 기뻐했다.

"75~80㎏ 정도가 최종 목표예요. 자격증도 따고 직장도 얻어 어머니와 살 집을 다시 마련해야죠. 100㎏짜리 족쇄를 벗어던져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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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고성국 기자의 연재이다. 박근혜가 궁금했다. 김종필도 그렇고,  

 

 사실상 본선으로 여겨졌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석패한지 3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여전히 3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다. 혹자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대세론은 없다"고 얘기하고, 또다른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 "현직 대통령은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특정인을 대통령이 될 수 없게 할 수는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박근혜는 2012년 대선을 향해 달리고 있는 현 정치판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다.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라 할 수 있는 6월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정치권이 빠르게 '대권모드'로 정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복잡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면서 4선 국회의원이자 이미 한번 대권에 도전했던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분석은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배경에 기반한 열광이 아니면 비난이라는 극단의 논설만 존재한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정권교체라는 사건을 두번 경험한 한국정치 현실에서 다시 주목받는 논의가 새로운 리더십리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바람직한 리더와 리더십을 논함에 있어 이론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의 논의도 중요하지만, 개별 정치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고, 이는 언론이 할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의 '박근혜論'을 연재한다. 이후 야권의 대선주자들에 대한 분석도 준비할 계획이다. 고 박사의 '박근혜論'은 주 2회, 총 10회에 걸쳐 실린다. 편집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한나라당에 역풍이 몰아닥쳤을 때부터 박근혜는 한국정치의 상수가 됐다. 그 후로 박근혜는 가장 응집력 높은 대중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탄핵역풍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지켜냈고 천막당사를 감행해 '차떼기당'의 이미지를 날려버렸다. 재보궐 선거에서 40:0이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참여정부에게 안겨준 사람도 박근혜였고 2006년 지방선거를 한나라당의 대승으로 이끈 사람도 박근혜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은 박근혜를 위한 경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는 경선을 예측불허의 초접전으로 끌고 가 경선흥행 효과와 예방백신 효과를 극대화시켰고, '아름다운 승복'을 연출해 전당대회를 한나라당의 축제로 마무리했다. 박근혜는 압도적으로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로부터 국정동반자 선언과 함께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BBK사건'으로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지도 모른다면서 출마를 강행한 이회창의 손을 끝내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이회창의 반란'을 찻잔 속의 태풍으로 가두고 이명박 압승 구도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어주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현존권력이 군림하는 상황에서도 박근혜의 파워와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정부출범 두 달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친이 직계의 거칠 것 없는 '공천학살'에 맞서 친박진영을 구축해 진지를 고수하고, '공천탈락자들의 옹색한 자구책'이라는 세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당명으로 내건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연대 출마자들을 30여명 가까이 당선시켜 '공천학살'을 무력화시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재보궐 선거와 미디어법 파동을 거치면서 박근혜는 비껴서 있되,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움직여 꼭 필요한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는 '절제의 미학'을 보였다. 그런 박근혜가 세종시 국면에서는 그간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터프한 인파이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제대로 된 연설이나 대국민담화 한 번 없이, 그 흔한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으면서도 만들어내는 박근혜의 위력적인 파워와 계측하기 어려운 영향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손학규의 부상…박근혜 '일인독주체제'에 변화 바람 부나?



▲ 지난 9월 8일 열린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출판기념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박수를 치고 있다. ⓒ뉴시스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12년 12월이다. 아직은 2년이나 남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12년이 밝아옴과 동시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2011년부터 모든 정치역학은 2012 대선구도를 중심으로 다시 짜여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정치역학의 재편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박근혜의 8.21 비밀회동 후 범여권 내에서 계파 완화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탄력을 받고 있는 양상도 그렇고, 민주당이 손학규를 내세우면서 한나라당의 김문수, 오세훈과 중원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한 양상도 그렇다. 이명박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정국이 어느 사이엔가 박근혜, 손학규, 김문수, 유시민, 오세훈 등 차기 주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최근 수직 상승하고 있는 손학규의 지지율이 일시적인 '전당대회 효과'에 그칠지 "잃어버린 600만 표"를 되찾아 올 블루칩에 대한 '지속적인 표 쏠림'으로 연결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손학규의 부상으로 박근혜 일인독주 체제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학규와 유시민, 김문수와 오세훈은 수도권과 중간층의 지지를 놓고 밀고 당기는 길항관계에 있다. 박근혜는 이 중원대결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과 중간층을 둘러싼 경쟁, 이른바 중원쟁탈전이 격화될수록 박근혜의 행보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비록 차이가 많이 나는 2위 싸움이지만 싸움이 있는 한 그 싸움터로부터 너무 주변화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도권 유권자들과 중간층은 이념지향성보다는 이슈지향성이 강하고 고정성보다는 변동성이 크다. 2007년 대선에서 530여만 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도 이들이고 그 불과 몇 달 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도 이들이다. 6.2 지방선거 때 투표장에 '몰려가' 이변을 만들어 낸 사람들도 이들이며 손학규가 틈만 나면 외치는 "잃어버린 600만 표" 또한 이들이다.

바야흐로 중원싸움이 막 시작되었다. 깃발을 먼저 올린 쪽은 민주당이다. 당연하다. 언제든 도전자가 먼저 링에 오르는 법이니까.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반박근혜'의 쟁투

박근혜는 지금의 구도를 잘 유지, 관리해가려 할 것이다. 10.1 청와대 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성공과 18대 국회의 성공을 위해 건배한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반면 여당 내 반박근혜 진영과 야당에게 2011년은 '박근혜 절대 우위 구도'를 흔들어야만 할 절대절명의 승부의 시기가 될 것이다.

만약 2012년 상반기까지도 '박근혜 절대 우위 구도'가 유지된다면 2012 대선의 승부는 사실상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지지율이 보여주고 있는 높은 응집력이 '마지막 승부'를 앞두고 갑자기 이완될 것도 아니고 2002년의 노무현처럼 들불과 같이 번져갈 휘발성과 확산성을 갖춘 새로운 후보를 또 다시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지키려는 박근혜와 흔들려는 반박근혜 세력 간 쟁투는 우리 정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다소 이른 느낌이 없지 않은 2010년 말에 2012 대선을 전망하는 평론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이렇듯 예상 밖으로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 대권 주자들의 움직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제대로 읽기 위한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프레시안>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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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반도체 공장' 피해자 열전·②] 김시녀·한혜경 모녀

"웃겨요. 믿을 수 있어요? 내가 장애인이 됐어요."

그녀가 양 주먹을 쥔다. 눈을 질끈 감는다. 경직된 듯 힘이 들어간 몸이 떨린다. 이것이 그녀의 울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뇌종양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눈물샘이 같이 잘려나갔다. 소뇌에 종양이 자리 잡았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몇 달을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우리 혜경이 그냥 내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만 있게 해주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수술을 하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에 면회 갔는데 쟤 사지가 다 묶여있는 거예요. 간호사 보고 왜 묶어놨냐니깐,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침대 하나 값이 3000만 원이래요. 그 침대가 부서질 정도로다가 난리를 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물인간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래, 부셔져도 괜찮다. 식물인간만 아니면 된다. 그땐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좋으니까."

그러나 뇌종양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수술을 하러 간 날, 혜경 씨는 자신을 위해 준비휠체어를 보고 "이걸 내가 왜 타?"라고 반문하며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혼자 걷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부축 없이는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말은 힘겹게 나온다. 복시로 인해 사물이 4개로 보이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시력도 크게 떨어졌다. 언어, 시각, 보행 1급 장애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는 단어다.

한혜경 씨의 소원은 건강해져 예전처럼 일을 하는 거다. 월급을 받아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언젠가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어머니 김시녀 씨의 소원은 딸이 숟가락질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녀는 매일같이 재활치료원을 찾는다. 그녀가 예전처럼 직장에 다니는 일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모두가 인정했던 삼성, 하지만…

한혜경 씨는 6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12시간 맞교대가 일상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삼성에 다닌다고 그러면 애들이 다 인정했어요."

그녀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간 딸은 김시녀 씨의 자랑이기도 했다.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김시녀 씨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정작 혜경씨는 밥 먹을 새도 없이 자기 바빴다. 늘 피곤해했다. 스물 몇 살짜리 얼굴에 빨간 여드름이 가득했다. 생리도 몇 달 넘게 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 생리불순은 회사에 들어오면 한 번씩은 겪는 절차처럼 얘기되고 있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나자 아예 생리를 하지 않았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 후에도 어깨나 머리가 자주 아팠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으면 며칠은 괜찮았다. 걸음도 자꾸 뒤뚱거렸다. 뼈를 다친 건가 싶어 X-ray를 찍어보기도 했다. 별 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을 전전하는 사이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혜경 씨는 신들린 것 마냥 헛소리를 해댔다.

신경과를 찾았다. 진료를 하던 의사가 머리를 MRI 촬영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온갖 병원을 갔지만 머리 쪽에 이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검사 결과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의사는 말했다.

"종양 크기로 보니 7, 8년 쯤 된 거네요."

2005년 수술을 받을 당시로부터 7년 전이면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때였다. 치료하기에 바빠 그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재활치료를 받던 중, 혜경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회복지사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이라는 단체를 알려주었다.

한번 연락이나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을 노리고 접근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가 찾아왔다.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서 한 작업 내용을 듣기 위해서였다.

혜경 씨는 6년 동안 솔더크림을 회로기판에 바르는 작업을 했다. 회로기판열처리 기계에 넣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불량을 검사하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곁에 두었던 솔더크림의 주성분이 '납'이었다. 납은 발암물질이다. 솔더크림은 종종 피부에 묻곤 했다. 불량품은 육안으로 가려야 하기에 열처리 된 회로기판을 가까이서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판에 묻은 납이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작업장에 납 냄새가 가득했다. 종일 맡다보니 기숙사에 와도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급된 보호장비는 면으로 된 마스크와 비닐장갑뿐이었다.

혜경 씨에게 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삼성은 좋은 회사이니까, 당연히 그런 (위험한) 거 안 쓰겠지 생각했나봐요."

겨우 19살에 들어간 회사였다.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작업장에서 버젓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다. 회사는 그녀가 사용하는 약품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일을 가르쳐주면서 손에 크림이 묻으면 IPA(Isoprophyl Alcohol)로 닦으라고 말한 게 안전교육의 전부였다. 유기용제 IPA조차 중추신경계열에 영향을 주는 독성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업환경이었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


ⓒ프레시안(김봉규)
"말해줬어야죠. 뭘 쓰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럼 내가 나 혼자라도 정기검진 받고 병원에 가고 그랬을 거잖아요. 반도체가 그렇게 중요해요? 사람이 이렇게 되지 않게 알아서 해줘야지…."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다. 으, 으, 화를 누르는 소리다.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가만히 안 놔두고 싶어요."

"먹어도 맛을 몰라, 슬퍼도 눈물이 안나…"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인정되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혜경 씨의 병을 산재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질병이라고 했다. 삼성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착각이라고 했다.

혜경 씨에게 산재 인정은 억울함을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딸의 곁을 떠날 수 없기에 김시녀 씨는 어떤 벌이도 할 수가 없다. 집을 팔고 차를 팔아 치료비를 대고 약값을 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김시녀 씨의 근심은 늘어간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덧 진정이 된 혜경 씨가 차분히 말한다.

"내가 갑자기 장애인이 됐어요.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가끔씩 울컥울컥 해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혜경이는 종일 집에 있거나 병원에서 운동하는 거 밖에 없어요. 쟤도 예쁜 옷 입은 사람 보면 자기도 입고 싶을 거고,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을 거잖아요. 뭘 먹어도 맛을 아나. 슬퍼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기를 해.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잘 수 있나?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요…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대체 그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혜경아, 금방 돼. 될 거야. 너 너무 걱정하지 마…내가 나한테 말해줘요."

그리고 돌아본다.

"엄마가 고생이 많아."

"아니야…엄마잖아…."

"나 나중에 또 병 걸리면 수술시키지 마. 진짜로 약속."


ⓒ반올림
혜경 씨는 팔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아당긴다. 약속도장을 찍으려는 모양이다. 김시녀 씨는 손을 뒤로 뺀다.

"됐어, 이 지지배야."

"수술시키면 안 돼."

"아유, 재발 안 돼."

그녀가 이번엔 내 쪽을 보며 말한다.

"건강해, 건강할 때 지켜야 해. 건강이 최고예요."

종양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큰 까닭이었다. 남은 종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혜경 씨 어머니 말대로 "재발되면 모녀가 삼성 앞에 가서 텐트치고 살다가 거기서 둘이 죽던지 뭘 하던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 4월, 반올림은 한혜경 씨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에 맞서 재심사를 요청했다. 8월 초 결과가 나왔다. 불승인이었다. 현재 반올림은 노동부에 재심사청구를 준비 중이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희정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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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된 글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지킴이 반올림'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목소리를 <프레시안>을 통해 9회에 걸쳐 전달한다. 2007년 故 황유미 씨의 죽음에서 출발한 반올림은 3년이 지난 지금 100여 명이 피해 노동자를 더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것도 노동조합이 없어 노동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어려운 삼성에서다.

반도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오늘날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지, 인체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한 연구도 거의 진행된 바가 없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경제의 중추로 자리매김한 탓에 그들의 발병에 대한 의문을 가장 앞서 규명해야할 정부도 소극적인 조사에 그치고 있다.

'반올림'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고, 반도체 산업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반올림의 활동을 알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고통받는 이들과 연결하려는 목적도 있다. 연재된 글은 여분의 이야기를 보태 2011년 책으로 엮일 예정이다. 본 연재는 <레디앙>, <참세상>, <미디어 충청>, <울산노동뉴스>와 공동 게재된다. <편집자>

그에겐 딸이 있다. 반도체 회사에 입사해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딸은 백혈병 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항암치료로 벗겨진 머리와 핏기 없이 창백한 딸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생각했다.'왜 우리 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10만 명 중 2, 3명이 걸린다는 희귀병이다. 가족 중에 백혈병은 커녕 암에 걸린 사람도 없다. 딸은 겨우 21살이었다. 고3 때 삼성 반도체에 입사한 후로 회사와 기숙사만을 오가던 아이였다.

'일하다가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막연한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 딸과 같은 조에서 일한 이숙영이라는 사람도 백혈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곳에서 2인 1조로 일했는데, 똑같은 병에 걸려. 백혈병이라는 게 감기도 아니고 옮겨 다니는 전염병도 아니잖아요? 그 희귀한 병이 둘 다 똑같이 일하다가, 똑같이 걸린다는 건 틀림없이 이상하잖아요. 뭐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는 딸 유미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아픈 딸이 괜한 걱정을 할까봐 조심스러웠다. 지나가는 말로 한번 묻고 며칠 뒤에 다시 묻는 식이었다. 유미는 디퓨전(diffusion) 공정에서 일한다고 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여러 화학약품에 담가 세척하는 일이었다.

"무슨 약품을 쓰는데?"

그가 묻자 유미는 영어로 된 약품 명칭 몇 개를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딸의 다이어리에는 공정 순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 쓰고 외웠다. 그런 아이가 자신이 매일같이 쓴 용액의 성분을 몰랐다. 화학약품의 이름과 기능은 외우고 또 외워도, 성분은 알지 못했다.

물어볼 곳이 회사 밖에 없었다. 황상기씨는 딸이 다니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전화를 했다. 산재인 것 같다고 하자, 회사 직원은 펄쩍 뛰었다. 과장과 직장이 집으로 찾아와 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퇴사를 할 테니 산재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회사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치료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남은 치료비가 4000만 원이었다. 병간호를 하느라 일을 하지 못해 벌이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치료비를 보상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때만 해도 딸이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다 나은 줄 알았다.

몇 주 뒤, 유미가 열이 펄펄 끓었다. 내성이 생겨서 해열제도 듣질 않았다. 애를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재발이 된 게였다. 마침 회사 직원이 아주대병원으로 찾아왔다. 직원은 약속된 치료비가 아닌 500만 원을 건넸다.

"500만 원을 내밀면서 그것밖에 없데.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었는데, 그 돈을 안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애가 저러고 있으니까."

속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딸의 병이 산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산재다 싶은 거야. 내 눈으로 본 게 있잖아."

회사는 산재라는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으로 꾀고 술수를 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산재'라는 단어도 못 꺼내게 하는 삼성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날은 '개인질병'이라며 윽박지르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마음에 눈물만 흘리다 온 적도 있었다.

고심 끝에 황상기씨는 언론에 이 문제를 알리기로 했다. 먼저 공영방송을 찾았다. <KBS> 방송국에 제보를 하니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힘없는 개인이 증거를 어떻게 찾아요?"

그것도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증거를 찾아오라니,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그는 딸에게 인터넷 이용법을 배웠다. 작은 언론사를 찾기로 했다. 손에 익지 않아 인터넷 검색이 서툴렀다. 전화번호가 보이기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월간 <말>지의 윤보중 기자와 연락이 됐다. 비슷한 경로로 <수원시민신문> 김삼석 기자와도 만나게 된다. 유미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고(故) 황유미 씨와 부친 황상기 씨. ⓒ반올림

그러나 2년 여의 투병생활 끝에 2007년 3월, 유미는 세상을 떠났다.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황상기씨는 싸움을 결심했다. 근로복지공단에 삼성을 상대로 산재 신청을 했다. 삼성 반도체에 백혈병 환자가 황유미, 이숙영 외에 4명이 더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삼성 홍보그룹 관계자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환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인권단체들이 있었다. 다산인권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유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위를 결성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시작이었다.

그 후 3년, 황상기 씨 한 명이었던 제보자는 100여 명에 다다랐다. 백혈병뿐 아니라 악성 림프종, 재생불량성 빈혈, 뇌암, 루게릭 등 희귀질병들이 제보되고 있다. 이들은 작업공정에서 벤젠과 납, 방사선 등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모두 대표적인 발암 물질이다.

유미가 세척을 하기 위해 만진 웨이퍼에도 벤젠이 묻어 있었다. 세척약품 중 하나로 사용한 황산은 발암을 촉진시키는 물질이다. 막연한 의심으로 시작했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점차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삼성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 보고서'도 그의 의심을 뒷받침해준다. 보고서는 반도체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99종의 화학물질 중 삼성이 자체적으로 성분을 확인한 경우는 한 건도 없고, 심지어 10종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제 황상기 씨는 산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거기에 어떤 유독물질이 있었는지 몰랐을까요? 삼성이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살인이에요, 살인."

19살 유미의 다이어리를 봤다. 2003년 10월 6일 <삼성전자 입사>라고 적은 날부터 삼성전자 직원 유미의 생활은 시작된다. 교복 대신 하얀 방진복을 입은 유미는 21일 월급날을 달력에 표시해두었다. 일기에는 날짜 옆에 '월급날 10일이 남았음'이라는 문구가 날씨 마냥 적혀 있었다.

11월에는 수능 날에 표시를 했다. 유미의 친구들은 이날 수학능력시험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은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입사 초반엔 퇴사하고 싶단 생각 정말 많이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맨날 울고 엄마한테도 퇴사하고 싶다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면서도 엄마 때문에 퇴사하지 못하고 참고 일했다. 차라리 친구들처럼 대학이나 갈 걸. 싫은데도 참고 일하는 건 엄마한테 미안해서이다. 엄마가 대학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우겨서 이 회사 왔는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퇴사 못하겠다. 슬픈 책이라도 읽고서 아주 펑펑 울고 싶다."

달력에는 Day(오전 근무) Swing(오후 근무), G.Y(밤 근무)가 표시된 사이사이로 '집에 가는 날'이 적혀 있다.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한 선물 목록에는 내복이 들어가 있다.

일기에는 휴무 때 어떻게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는지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였다. 방진복에 낙서를 해 혼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정수칙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용모 단정,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는 수칙도 보인다. 청정수칙을 중시하고 직원들의 복장까지 단속하는 삼성이 수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건강에는 왜이리 무심한 걸까.

유미가 3번이나 옮겨 적은 작업수칙, 품질수칙 10대 항목 어디에도 안전장치나 안전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2004년도 마지막 장에는 다짐서가 있다. 2005년에는 작업할 때 MISS를 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신입사원 유미의 1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다음해 6월, 유미는 백혈병 판정을 받는다.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에서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말하는 내내 기침이 잦다.

"제가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고는 많이 울었어요.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골수이식을 받고 회복되던 때였다. 그러나 몇 달 후, 병이 재발한 그녀는 영영 눈을 감았다.

황상기 씨를 만나기 위해 속초에 간 날이었다.

"저기가 울산 바위에요."

속초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앞장서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가리킨 곳에 푸른 능선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산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예, 그러고 말았다. 황상기씨는 다시 앞섰다.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 와서야 유미씨의 유골을 뿌린 곳이 울산 바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딸을 울산 바위에 뿌린 이유를 이야기 했다.

"유미가 방사선 화학약품 때문에 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주 공기가 맑고 깨끗한 산에서 맑고 푸른 동해바다 바라보면서 있으라고 그곳에 뿌렸어요."

황상기 씨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산재임을 밝혀내겠다고 딸에게 한 약속도 이루어내길 바란다.

故 황유미 씨의 명복을 빕니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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