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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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소설과 영화/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버릇처럼 늘 고등학교 문학시간이 떠오른다. 문학의 갈래(장르 구분)를 공부하던 날, 계절은 가을이었고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필 5교시라 짝이 거의 가수면 상태에 빠졌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는 일이 잦은가 하면, 우리가 그날 국문학에 관해 '극과 서사 ≒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개념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느 서사든 주인공의 '자아'가 있고, 그와 대립하는 '세계'가 있는데 어느 한쪽이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는 않는다. 모든 극과 소설을 이렇게 일률적으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수업 마지막 10분 동안 우리는 <콩쥐팥쥐>와 <인어공주>부터 <해리포터>와 <난쏘공>에 이르기까지 아는 이야기를 죄다 꺼내며 그 이론을 검증(?)했다. 



여기에도 '세계'와 갈등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2016년을 사는 열다섯 은유가 느리게 가는 우체통 시스템을 통해 1년 뒤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5년 평생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아빠는 갑자기 재혼을 선언해 은유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기고, 이 '엿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은유는 독립(a.k.a 가출)을 결심한다. 그런데 은유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 편지에 답장이 왔다. 바로 그 다음 페이지에서 종이 색깔이 연하게 물든 분홍보라색으로 바뀌고, 또다른 은유가 나타난다. 이 은유는 국민학교(!) 3학년이고 1982년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성실하게 '-읍니다' 맞춤법을 지켜가며 말을 걸어온다. 여기까지 읽고 책배를 보니 흰색과 보라색이 교차한다.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편지와 편지로 이루어져 있구나. 나는 순식간에 단짝 친구와 교환일기를 주고받던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열다섯 은유가 잔뜩 열이 올라 너 누구냐며 따지는 편지를 부치자, 이번엔 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저쪽 세상의 국민학생 은유가 그새 2살을 더 먹은 것이다. 이미 재개발되어 사라진 주소, 편지에 동봉된 1982년산 500원짜리 동전과 위조지폐 같은 2000년대 천 원 한 장, 인터넷 검색으로 과거를 알아보는 소녀와 미래에서 도착한 예언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아이, 간첩과 암호문이란 무시무시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국민학생과 코스프레니 사이코패스니 하는 외래어가 입에 붙은 중학생. 두 동명이인은 서로를 미친 사람 취급하다가 이내 자신들이 쓴 편지가 시간을 건너 여행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대흥분한다. 과거에 있는 은유야, 너 대단한 행운을 잡은 것 같지 않아? 어쩌면 우리가 미래를,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둘은 과거와 미래에서 안부를 주고받는 특별한 사이가 된다. 



왜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문자로, 메일로, 편지로는 쓸 수 있을까? 

-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쪽팔리게 멍청한 말까지 해버렸어. 

어째서 가까이 있는 이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멀리 있는 이에게는 다 풀어낼 수 있을까?

- 난 15년 동안 혼자 방치된 채로 살았어. 세상 어떤 아빠가 자식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눈으로 봐? 아빠도 싫고 아빠가 재혼하려는 여자도 싫어서 가출하고 싶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느리고 번거로운 편지로 소통하고 교감할까? 

- 언니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나를 돌아보게 돼.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는 점점 더 지금의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는데, 어째서 편지에 쓰인 글씨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걸까. 언니, 아직 거기 있는 거지?



이제는 거의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시간 여행' 아래 이루어지는 소설이지만, 여기서 '세계'는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설정한다. 미래에 사는 은유가 딱 한 살을 더 먹을 동안 과거의 은유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을 겪는다. 그래서 둘은 처음엔 언니 동생 사이였다가 이내 친구가 되고 곧 다시 거꾸로 동생과 언니가 된다. 처음엔 미래의 은유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만(학력고사 문제를 찾는 걸로도 모자라 로또 당첨 번호까지 알려주겠다는 야심찬 청소년이여!), 이내 과거에 사는 은유가 어른으로 자라 탐정 노릇을 하게 되었다. 중학생 은유는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지와 불신과 의심에 시달리는 은유 동생을 위해, 과거에 사는 은유 언니가 그나마 신상명세라도 파악된 아빠를 찾아나선다. 과거에서 모은 씨줄과 현재에서 얻은 날줄이 교차되어 은유들은 서서히 진실에 다가서고, 왜 하필 두 사람의 편지가 시공간을 거스르고 앞질러가며 서로에게 도착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편지는 마치 내 앞으로 오는 것만 같아서, 40쪽 즈음 읽었을 때 이미 나는 은유들과 친구가 되어있었다. 이야기는 소꿉놀이 같은 교환일기로 시작되었다가 중반부에는 청소년 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의 이중주로 변화하고, 이내 긴박한 추리소설을 거쳐 애정어린 성장담으로 마무리된다. 낯선 타인들의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비밀과 오해가 벗겨지면서 파편화된 '세계'가 비로소 통합되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거'냐고 괴로워하던 은유는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인연'을 느끼며 가족을 되찾는다.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시종일관 긴장을 내려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설가 이꽃님을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아이>의 기막힌 엎어치기로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파격적이고 강렬한 미스터리는 없었지만, 대신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곳곳에 사소한 사랑스러움이 넘쳐나서 좋았다. 서간체 문학 특유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우리를 금방 은유들의 세상으로 빠지게 만들고, 30년 차이가 나는 시대상은 편지 곳곳에 낯익은 현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캐러멜 마키아토가 뭔지 궁금해하다가도 그게 간첩 암호라면 알려주지 말라고, 혹시 연탄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미친 거라면 물김치 국물 좀 마셔 보라고 하는 1984년 은유의 단호함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편지 형식답게 입말의 말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이꽃님 작가의 주특기 중 하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내어 웃게 되는 건 덤이다. <키다리 아저씨>,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채링크로스 84번지> 등 편지글 형식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도 네 마음에 들 거야' 하는 메모와 함께 건네주고 싶어진다. 



우울하고 울고 싶어질 때 우리는 의외로 가족과 친구에게 괴로움을 흘릴 수 없다.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거리감 없이 매일 보며 일상을 함께 하는 사이라면 뭐든 다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도 끈기와 지구력이 약하다. 은유는 아빠에 대한 고민을 친구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못하고(아빠도 마찬가지다.) 또다른 은유 역시 언니에게서 비롯된 열등감을 주변과 나누지 못한다. 두 은유는 멀리 있어서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마주대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토록 아득하고 그만큼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세상은 계속될 거'라는 말을 들은 다음 '걱정하며 살기엔 우리 삶은 너무 짧다'는 말을 해주기. 모든 게 뒤엉켜버린 순간에도 언니만은 그대로인 거냐고, 그렇다면 나도 늘 언니의 동생일 거라는 절박함에 '여전히 내 동생인 은유'라고 돌려주기. 쏟아내면 꼭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은유는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날 수 없는 친구, 세상에 없는 엄마, 다가오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아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빠의 여자친구. 은유를 둘러싼 비밀들, 나를 할퀴고 상처입히는 것 것만 같은 세상, 영원히 갈등하고 대립하여 화해란 불가능해 보였던 '세계'... 하지만 그 세계는 결코 일방적인 우위에 놓여있지 않았다. 언젠가 해리 포터에게 그의 스승인 덤블도어가 말했다. '강력한 사랑은 그 나름의 독특한 흔적을 남긴다는 걸 알고 있니? 흉터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흔적도 아니지만... 그렇게 깊은 사랑은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준단다. 너는 그렇게 아름다운 무언가의 흔적이 남겨진 사람이지.'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모든 서신을 통해 은유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쿵쿵대며 다가오는 세계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은유는 긴장했지만, 세계는 사실 오랫동안 은유에게 가기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은유를 안을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를 생각하고 네가 나를 생각하는 한 우리는 만날 수 없어도 잊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옆에 있는 사람과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특별한 기적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네가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서로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과도 같은 일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검은 표지에 반짝이는 색상으로 제목이 쓰여져 있다. 검은 바탕을 긁어내면 아래에 묻혀있던 총천연색들이 드러나는 스크래치 기법처럼, 이 소설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내는 이야기다. 더 많은 것들을 내 세상 안으로 들이고 내가 자라며 많은 날들을 잊어가더라도, 우리는 이제 서로를 모르던 때로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단선되지 않았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빠가 은유에게 처음 쓴 편지까지 포함해서, 모든 문장이 사랑의 은유 같다. 언제든 세계를 건너 네게 가겠다는 다짐. 네가 부를 때 나는 언제나, 지금도 여기에 있다는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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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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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분명히 적혀있는데도 두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어? 아까 나온 인물 아닌가?' 하며 연작소설임을 깨달았다. 서로 상관없는 인물, 공간, 배경을 가진 단편집 모음이라고 생각하다 연작이라는 걸 안 순간 나도 모르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그걸 깨달으면서 웃었다. 



범인을 밝혀야 하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누가 내게 시험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음 글에는 누가 등장하게 될 지 그런 걸 알아맞혀보고 싶은 기분. 지금 읽고 있는 글에서는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물 간 관계도를 그려보서 전체를 파악하고 싶은 기분.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아, 그 인물 이야기도 보고 싶었는데 역시 끝까지 스쳐지나가는 조연으로밖에 나오지 않았어.' 같은 아쉬움. A가 주역인 이야기에서 B는 엑스트라일 뿐이지만 C 스토리에서 B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 때의 작은 짜릿함. 



이 책을 함께 읽은 친구는 <은하의 밤>과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에 등장하는 아이돌 양요를 더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워했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인물 '현우'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았다는 말로 나를 웃겼다. 다른 독자들은 어느 인물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는지, 누굴 좀 더 보고 싶었는지 앙케이트 설문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읽는 이들은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을 책장에 넘어갈 때마다 깨닫게 된다. 손 안에 작은 만화경이 있는 기분이었다. 인물들은 교차되었다가도 평행선을 달리고,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날 것 같았다가도 멀어진다. 단편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사건들은 꽤 격한데 살짝 마른('건조하다'기보다도 '조금 마른' 느낌) 문체 때문에 그 감정의 높고 낮은 파도들이 확 덮쳐오지는 않는다. 그런 후폭풍은 책을 다 읽고 회상할 때야 찾아온다. 읽는 도중에는, 모든 것이 화끈하게 터지는 대신 손 안에서 잘못 굴리면 작게 '파삭'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질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게 꽤 조심스러웠다. 책이나 문장을 무슨 그런 식으로 비유하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은 동물계보다는 식물계에 가깝다. 그리고 생각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글들이 담겨있다. 



글은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묘하게 1인칭 관찰자 같은 분위기를 전달하며, 때때로 각 단편의 주인공들보다 그 주인공이 지켜보고 있는 타인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유리벽 너머로 독자인 내가 그들 모두를 관찰하고 있다는 감각. 가령 <데이, 이브닝, 나이트>에서는 한가을이 주인공이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병원 동료 안미진과 환자 승미 씨였다. <하바나 눈사람 클럽>에서는 한 두 페이지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남희가,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었다가도 모진 말을 듣고 울게 되는 남희가 좋았다. 



예쁜 표지와 크리스마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이 주는 정취 때문에 따스한 힐링을 기대하고 소설을 펼친다면 조금쯤 서운할 수도 있겠다. 서늘한 북풍이 몸을 스쳐지나가다가 얇은 어깨담요를 살짝 걸쳐주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너무 춥고 싶지 않다는 분께는 중후반부에 있는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를 먼저 권하고 싶다. 작가가 배치한 순서대로 읽지 않는다 해도 책의 인상을 해치지는 않는다. 반려견 설기를 잃은 세미가 카카오톡 목록을 보며 개를 키우는 이들에게 연락할 때, 내가 모은 강아지 사진들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느릿하게나마 조금씩 설기 없는 삶을 견뎌내려고 하는 세미를 보고 난 다음, 



혹시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없나요? 하고 묻는다면, 이번에 추천하고 싶은 건 <월계동 옥주>와 <하바나 눈사람 클럽>이다. 앞은 예쁘기도 하고 깨지기도 쉬워보이는 구슬 같은 청년들의 여름, 뒤는 성마른 청소년들의 겨울. 친구가 되었다가 다른 감정이 생기고 그래서 힘들고, 어떤 관계는 깨져나가고, 어떤 사이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요. 눈알을 굴리며 얘들 재회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냥 이대로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다음으로는 리얼 르포 예능국 이야기;;인 <은하의 밤>, <첫눈으로>, <크리스마스에는>을 차례로. 



많은 캐릭터와 많은 서사를 가진 글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 그 자체보다 어떤 장면이 또렷하게 새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크리스마스 타일>이란 소설을 <월계동 옥주>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호숫물을 떠다 등잔을 밝힐 정도로 아름답고 맑은 호수. 한 그룹을 이룬 친구끼리 모두 같이 가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헤어지고, 옥주와 예후이가 둘이서만 갔던 거울 같은 호수. 두 손으로 물을 떠다 등잔에 넣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지만 어쩐지 책을 읽는 내 이마 위로 그 등잔불이 비추는 느낌이었다. 



그 물이 흐르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눈으로 변화해 내리기도 한다. 그 흐르는 물을, 눈을 맞으며 나와 내 일상을 되돌이켜보게 되는 책, 마냥 환하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인 책, 금이 간 타일도 완전히 깨져버린 타일도 있지만 '못 쓰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 이야기, 내가 읽은 <크리스마스 타일>이다. 여름에 읽어서 더 좋았다. 겨울 입김과 쌩쌩 부는 바람에 지쳤어도, 이별의 상실을 겪었어도,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 인물들도 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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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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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부터 입추까지는 세상 누구도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더위에 유독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한 달 동안은 누구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타인에게 그 어떤 것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계절, 뻔뻔스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책만은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한겨울에 읽었으나, 역시 여름이야말로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과 잘 어울리는 계절 아니겠나. 더구나 CCTV가 활약하는 현대보다는 먼 옛날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고려 말기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고 유교국가가 확립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시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시대 인물과 배경에 능통해 딱히 부연설명이 필요없고 권력제도가 아직 어딘가 붕 떠 있는 때인 여말선초 궁궐이 배경이라는 것에 일단 높은 가산점을 주고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ㅡ 피바람은 몇 번이 불었고 한을 품은 채 이승을 떠난 사람들은 몇이겠나. 


세종과 성종을 거쳐 유교국의 기틀이 완전히 마련되기 전이지만, 태종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왕으로 등장한다(단, 그는 논리적 성향과 '공포 및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걸 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알에서 탄생하던 신화적 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을 조각하던 주술적 시대에서 벗어나던 때의 왕. 감정과 느낌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더라도, '이성'이 우선시되는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왕이 이 책의 배후에 버티고 있다. 많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감만은 차고도 넘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딸 경안궁주에게 궁 안의 금기+궁녀규칙조례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궁주'라는 호칭 자체가 고려시대의 여성 작호이다. 이렇듯 전 시대가 남긴 유산들이 다 정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현 시대가 완전히 정립되지도 않았다. 새로운 궁이 만들어지고 나라의 주인이 바뀐 때 '이야기'가 탄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보고 들은 것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구중궁궐에서, 순종과 성실만이 최고 미덕인 궁녀의 목소리로 궁궐의 비밀들이 흘러나온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 수련회와 수학여행을 가서 친구들끼리 교실과 방의 불을 꺼놓고 숨죽이며 나누던 그 이야기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책 앞부분에는 세로로 적힌 궁녀 규칙 조례가 한 장 길게 접혀있는데, 말로는 궁에 온 걸 환영한다고 되어있지만 이것도 저것도 온통 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의구심을 품지 말라는 말만 가득하다. 처음 읽을 때는 궁이라는 곳이 그렇지 사람이 사라져도 찾기 어렵지 하고 넘겼지만, 사실은 이런 조례를 만들어야만 했던 비밀이 저 멀리 숨어있고 그 비밀은 후반에야 폭로된다. 그리고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괴이쩍인 이야기들에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순간, 잠 못 드는 밤의 잠기운이 싹 달아나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 


궁녀들은 궁의 또다른 주인이자 공무원이고, 직업인이고, 여자이며, 서로에게는 직장동료이자 친구고 또한 지지고 볶는 경쟁상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 방향과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책은 오피스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여자 기숙사의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여고괴담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궁궐은 그들의 집이고 학교고 직장이었다. 그 복합공간에 얼마나 많은 웃음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과 비명이 잠들어있겠는지. 하나의 줄기 아래 뿌리를 파보면 여러 맛이 나는 감자와 고구마가 있는 기분이 들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신라 강수 선생이 등장해서 읽는 이를 깜짝 놀래킨다거나, 춘향전의 탄생에 관한 비화로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옛 절기행사나 풍습의 기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거나. 


미스터리/기담/괴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꼬박꼬박 그런 장르를 읽게 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를 읽은 이들이 한국 책도 추천해달라고 할 때 골라줄 것이 마땅치 않았다. 구비문학과 민속문학 서적에 수많은 전설과 민담과 설화가 실려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ㅠㅠ 올해 이 책을 많이 추천했는데, 대부분 다 좋은 반응을 돌려주어 뿌듯했다. 2부가 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영화나 드라마로 촬영되는 것도 바라고 있다. 


*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마지막에야 적어놓자면 내가 역사용어에 능통하지는 않지만 왕의 딸이거나 왕의 후궁들로서 하나의 독립된 거주공간(여기서는 주로 '당'이라든가 '재')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 자신을 '본궁'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궁'이 그런 식의 지칭이나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냉궁'이란 용어도 마찬가지고. 작년에 방영된 퓨전사극 드라마에서도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부분인데, 너무 많은 형식을 지키는 것에 지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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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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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Foster

1. <관계∙성장 등>을 촉진하다, <기술∙정신 등>을 육성하다

2. (일정 기간 동안) <남의 아이>를 수양부모로서 양육하다


책등에 적힌 제목을 보고 읽을 책을 결정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원제와 번역 타이틀이 둘 다 만족스러운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한국어판 '맡겨진 소녀'라는 다섯 글자에 사람을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왜 작가가 제목으로 'foster'를 선택했는지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임신한 어머니의 노동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어차피 늘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친척집에 당도한다. 그 아버지가 정말 얼마나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사람인지, 아이를 맡기며 '먹을 걸 엄청나게 축낼 테니 대신 일을 시키라'는 말을 던진다. 소녀의 어머니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여유도 생각할 시간도 여윳돈도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없는 그 많은 것들이 맡겨진 친척집에 있지만, 마찬가지로 슬픔과 고통과 눈물도 그 집에 있었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머리칼이 하얗게 셀 정도의 무게로. 


조개껍데기처럼 '매끈하고 깨끗하고 연약한' 소녀는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 아래 여름 한 철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많지 않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환대받는 이가 아니다. 따발총처럼 오가는 큰따옴표 대신,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그림들이 수놓여져 있다. 쓴 것도 아니고 그린 것도 아니고, 질감이 느껴지는 수를 놓고 레이스를 뜬 것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벽에 걸어두고 봐야 할 호사스런 작품이 아니라 늘 손에 닿아 기분 좋게 낡은 듯한 그런 자수 같다. 소녀가 우편함까지 순록처럼 빠르게 달리는 장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소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을 잡고 안아주는 장면들, 아저씨가 함께 간 바닷가에서 소녀가 파도를 향해 내달리는 광경, 소녀가 아저씨와 함께 <하이디>와 <눈의 여왕>을 읽는 풍경, 어느덧 달리기를 잘하게 된 소녀가 떠나는 차를 향해 뛰어내려가는 모습.........  


많은 리뷰들에서 놀라움을 표시하듯 책은 아주 얇다. 하지만 뭐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사이에 숨겨진 마음과 이야기들이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다. 빨리 달려나가지 않는 대신 한없이 깊어진다. 그래서 페이지 수는 적지만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문장 안쪽을 자꾸 뜯어보게 된다. 가령 아이가 우물에서 푹 젖어 감기에 걸렸을 때, 그게 의도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가늠해봐야 한다. 마지막 대사도 마찬가지로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소녀는 원래도 말수가 적었고, 아저씨는 말을 아껴야 하는 이유를 소녀에게 알려주었고, 집에 돌아온 소녀는 엄마의 추궁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아니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독자는 종이 너머에서 전해듣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실제적인 책 두께보다 한참 길고 두껍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후에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 바라는 그림이 있지만 그렇게 되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소녀는 사랑하고 사랑받은 여름 한 철이라는 불멸의 정령을 거느리고 있다. 영원토록 행복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사라지지 않는 한 순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 아닌가. 비가 오지 않아도 마르지 않았던 아주머니 아저씨네 우물처럼, 소녀의 마음에서도 그 계절의 사랑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안해보려고 해도 책을 읽는 내가 덜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다. 


여자아이 하나에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하나라는 그림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랑해온 <빨간머리 앤>의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목가적인 배경과 생활상은 미약하게 <초원의 집>을 연상시킨다(초원의 집에 나오는 자연상은 거의 폭력적일 만큼 생생해서 목가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리고 읽는 내내 문체와 문장에서 <스토너>의 향기가 났다. 50펜스 동전을 받으면 좋겠다며 상상하고, 10파운드 복권에 당첨되면 경사가 나는 집에서 온 소녀는 아저씨에게서 1파운드 지폐를 받고 간식거리를 산다. 초코아이스, 초코바, 껌. 매슈 아저씨가 앤에게 초콜릿을 사다주던 기억이 나는 건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소녀가 안전하고 포근한 울타리 안에서 가사와 육아에 지친 어머니를 머릿속에 그릴 때, 농학 대신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일을 하고 또 일을 하다 천천히 쇠하고 죽어갈 부모님을 생각하는 스토너를 생각한 것도 역시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아주 오래된 곳에서 건너온 듯한 향기가 나는 소설이다. 

여름, 책을 읽고는 싶고 무거운 책을 들 수는 없는 계절 많은 이들의 품에 안겨주고 싶다. 

저 집에 돌아가야 돼요?
그럼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렇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니?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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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운영하는 작은 빵집 SOFT BREAD 호야의 베이킹 클래스 1
김진호 지음 / 더테이블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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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홈베이킹 책들은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책들 중 가장 화려하고 예쁘장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빛나는 사진들만 보면 눈이 돌아가고, 설령 직접 만들어 먹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달달한 위로가 된다. 마음이 복잡할 때 청소를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들이 많은데, 같은 맥락에서 뭔가가 차근차근 잘 분류되고 정리된 책을 보는 것도 마음의 예민함을 많이 낮춰준다. 그래서 신경질이 날 때면 책장에서 요리책을, 특히 베이킹 책들을 꺼내보곤 한다. 정확한 레시피와 체계적인 절차, 밀가루, 설탕, 버터, 달걀, 포근포근 몽실몽실 달콤쌉싸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집에 홈베이킹 책들이 아주 많은데, 내 손으로 빵을 만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늘 시식만 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책장에 꽂힌 베이킹 서적들이 좋은 안내서인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수능을 치지 않더라도 서점에 가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스무 장 이상 넘겨보면 감이 오지 않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친절하고 상세한 도움을 주는 좋은 참고서라고 느껴진다. 비전문가의 느낌적인 느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빵을 굽는 가족이 많이 꺼내 보는 걸로 봐서 내 감상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꼭 책에 있는 메뉴를 만들지 않더라도 팁을 찾아보기 위해 자주 뒤적이는 책, 눈으로 사진을 보는 만큼 꼼꼼하게 글을 읽어나갈 수 있게 조언이 많은 책. 아마 이 책도 우리집 책장을 들락날락하며 베일 것 같은 가장자리들이 부드러워지고, 손때를 타고, 천천히 세월을 입게 될 것 같다. 


일단 호불호를 타는 메뉴가 거의 없고, 웬만한 사람들이면 좋아할 대중적인 빵들로 가득하다. 오르지 못할 산이 아니라 밑준비 단단히 하고 걸어올라가면 기분 좋게 올랐다 내려올 수 있고 성취감도 있는 산을 소개해주는 느낌. 개인적으로 케이크나 과자는 그렇지 않아도 빵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꼭 너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절해지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 먹고 싶어지는 빵들이 콕콕 박혀있다. 야채 고로케를 너무 먹고 싶었지만 이 더위에 사람에게 튀김이 먹고 싶다 말하는 건 범죄와도 같은 일이라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부들 소금빵을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다. 다른 레시피로 만든 소금빵도 두어번 먹어봤지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이래서 소금빵을 좋아하나 싶을 만큼 맛있었다! 


현재 우리집 오븐은 스팀이 가능하지만 예전 오븐엔 그런 기능이 없었는데, 그럴 때 '스팀 기능이 없는 오븐에서 하드 계열 빵 굽기' 같은 조언을 진작 들을 수 있으면 참 좋았겠다 싶더라. 발효 때문에 빵을 만들기 어려워해서 꼭 오븐으로 빵을 만들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냐고 토닥이면서 나름 괜찮아보이는 책을 사다 나른 적도 있는데, 가족 말로는 이 책에 실린 발효 과정 설명들도 마음에 든다고. 친절하지만 한없이 늘어지지 않아 군더더기가 없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는 쿠키와 케이크에 비해 부재료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굽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맘 편하게 이거 먹어보고 싶다고 부탁할 수 있는 빵이 많아서 좋았다. 


단과자빵은 빵과 충전물(앙금이나 내용물)이 어우러져 가장 맛있고 남김 없이 먹을 수 있는 사이즈를 추천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유는 '맛있으면서 크기도 크면 좋겠지만, 먹다 보면 질릴 수 있으므로 너무 크게 만드는 건 추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요즘 빵들이 전에 비해 작아졌다 싶은 것이 좀 불만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팥빵과 크림빵을 하나 다 먹는다고 칠 때 제일 맛있고 약간만 더 먹고 싶어지는 그 크기가 딱 여기서 말하는 50~60g인 듯. 큰 빵을 많이 먹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고 나도 그 중 하나지만, '끝까지 맛있게 먹고 부담없이 소화하기 좋아서 가장 만족스러운 크기'에 중점을 두고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느껴졌다. 일이나 과제도 그렇지 않나, 너무 적으면 성취감이 없고 너무 많으면 허덕이게 된다. 빵도 음식도 같은 것이다. 


여름은 두 달 넘게 남았지만 날이 풀리고 나면 고로케 류를 만들 때 나도 거들어볼 생각이다. 오븐은 잘 다루지 못해도 볶음과 튀김은 할 수 있으니 그때 열심히 양파를 볶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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