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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 - 우리의 삶에서 상상력이 사라졌을 때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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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를 만난 건 2016년, 필사를 해보고 싶다는 말에 누군가 이 책 6장을 추천해서였다. 쪽수를 확인하고 놀라서 일단 도서관을 찾기로 마음먹었다가, 책을 소장한 지역 도서관이 딱 한 군데라는 검색 결과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산 넘고 물 건너가면서까지 책을 소중히 모셔올 만한 일이 생겼고, 반납할 무렵 동생에게서 새 책 선물이 왔다. 그때부터 내 잠자리 머리맡 책장에는 언제나 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처음 펼쳐들 때는 고아하다는 문체 이외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책, 그러나 이내 많은 문을 여는 비밀열쇠가 열어준 책, 8년 뒤 새 모습으로 만나게 된 배리 로페즈의 <북극을 꿈꾸다 Arctic Dreams>이다. 


독서는 때로 대단히 사치스런 취미가 될 수 있음을 독립하고 직장에 다니면서야 알았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다 정신을 차리면 밤 11시였고 하루 일과 중 빼먹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재미와 흥미만 좇는 취미생활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세상과 최소한의 연결점만 남겨두고 책 속으로 파고드는 단절감을 좋아했다. 짜투리 시간에 짬짬이 읽는 것으로는 충족 불가능한 길고 긴 몰입. 잘 먹고 잘 자도 해소되지 않는 허기에 지쳐 몇 달을 보낸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한 문장, 한 문단, 한 쪽만 읽어도 전체를 탐독하는 것 같은 감각을 고스란히 되살려주는 책 따로 골라두기. 포식은 못해도 곯지는 않도록. 이 책에는 그런 만나(manna) 같은 문장들이 빼곡하다. 

나는 얼굴에 느껴지던 빛의 감촉을 기억한다. 얼마나 너그러운가. 수세기 동안 이어진 겨울의 증거를 그처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땅에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연민이라니. 

'들어가며: 전설만큼이나 먼 땅'


책 내용은 미리보기 전부가 아니라 목차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각 장 제목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듬어졌다.) 글쓴이는 보통 사람이 궁금해할 수 있는 북극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만, 사진이나 그림 자료는 지도 말고는 싣지 않았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가 만난 북극을 가늠할 수 있다. 북극이라 불리는 장소는 어디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문명인'이 거기를 알기 전부터 머물던 동물들의 생존 방식은 어떠한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존립한 이들을 작가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 땅을 찾아나선 이들은 인류 역사에 무슨 자취를 남겼는지, 지나온 길을 거쳐 내일로 나아가는 길은 어느 방향일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배리 로페즈는 자신이 북극의 이방인이라는 거리감을 잊지 않는다. 북극만의 고유함에 집중하면서, 다름을 쉽게 틀림으로 구분짓지 않으려 분투한다. 그는 북극해 유역의 사향소가 평온한 강인함을 지녔다고 평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야말로 줄곧 그런 태도였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숱한 탐험가들처럼 '척박한 땅'에 깃발을 꽂아 정복했다며 환호하지 않는다. 트로피를 거머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는다. 다만 눈을 떼지 않고 귀를 닫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온몸으로 다가간다. 지식이나 개념을 자신만의 언어로 잘 풀어 설명하는 지성 이상으로 돋보이는 관찰자로서의 존중.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장자크 루소가 말하는 진정한 '자연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세부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빈번한 관찰로 익숙해지도록 합시다. 이는 단순한 기억의 노역이 아니라 관찰과 사실에 대한 연구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 자연주의자에게 걸맞은 방식입니다. 

<루소의 식물학 강의> 

바로 배리 로페즈가 북극과 그곳 생명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 아닌가. 이 책은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들을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하지 않고('누구도 이야기 전부를 들려줄 수는 없으므로'), '자신이 마침내 이해한 것을 나누려는 욕망'을 끌어안고 있다.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읽은 책은 그만큼 독자에게 무언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개정판을 손에 쥐고 나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작가는 우리와 북극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독자들과 무엇을 함께하고 싶은가? 조금 쑥스럽지만, 좋은 책이 누군가의 평범한 나날에 어떤 나이테를 그렸는지 나를 열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름마다 옥수수와 수박과 여름 채소들을 엄청나게 먹어치운다.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굴면서도 알고 있다. 나보다 훠얼씬 더 키가 큰 옥수수들을 올려다보던 그 덥고 눈부신 밭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시장에 가든 마트에 들르든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있는 옥수수는 이제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걸. 갓 딴 옥수수를 삶거나 구워내면 얼마나 달콤한 맛이 나는지, 그렇게 금방 따야만 더 맛있는 채소는 뭔지, 무청은 왜 말려서 먹는지, 보석 같은 겨울 열매들 이름이 무엇인지, 향긋한 쑥과 독초 초오는 뭐가 다른지 알려주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배리 로페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 '마음의 땅'과 한없이 '분리되어 멀어졌다.' 정월대보름에 의식이라도 치르듯 잡곡밥과 견과류를 챙겨도, 매 절기마다 달라지는 날씨를 예민하게 느껴도, 봄꽃들의 개화 시기를 매년 확인하며 일기에 적어넣고 주말마다 숲으로 긴 산책을 나가도,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법을 외우고 있어도. 나는 대지와 멀리멀리 떨어진 도시인이라는 걸 해가 갈수록 절감한다. 외할머니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계셨던 '고유한 눈(the native eye)'이 내게는 없다. 내가 땅을 알고, 대지가 나를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서려들던 그때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는 유년과 완전히 작별했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였건만 어린 시절이 강제로 떠나가고 있다고 의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뒤 집안 어른들이 외갓집과 딸린 땅을 모두 정리하겠다고 결정하신 날 나는 고향마저 상실했다. 상(喪)을 두 번이나 치른 기분으로 새해부터 큰 몸살을 앓으며 <북극을 꿈꾸다>를 찾았던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북극 같아서였다. 현실에서 도망가기 위해 내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땅을 밟았다. 거기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을 만날 줄도 모르고. 병가도 못 내고 야근까지 하던 주에 일부러 짬을 내 먼 도서관까지 가 낯선 책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와 새벽마다 그 안으로 달아났다.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이 책이 '땅'을 말할 때 나는 산과 논밭에서 나고 자라 거기서 숨을 거두신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마음의 고향, 삶과 죽음의 풍경, 지금은 닿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충만한 기억, 들판이 쉼터고 놀이터였던 날들. 내 마음속 대지와 북극은 기후부터 생물종까지 닮은 것 하나 없는데도 그렇다. 밤산책 중 절하는 것에 익숙해질 만큼 경이로움을 품었던 그의 감정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향수가 아닌 공경의 마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뿌리고 거둬들이는 땅을 섬기듯 돌보고, 빛과 비를 내려주는 하늘에 경애하듯 감사를 바치셨다. 그런 마음가짐은 곧 내게도 전이되었다. 방학마다 머물던 방은 창이 동향·서향으로 두 개 나 있어서, 해가 돋을 때도 저물 때도 온갖 빛들이 너울거리며 들어와 곁을 채웠다. 세상 어느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부럽지 않은 광채 안에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게 되었었다. 


그 기억 때문에 이전에도 지금도 6장, 그리고 작가가 빛을 다룬 문장들을 가장 좋아한다. 저자는 눈과 얼음의 세계에 떨어지는 '빛'을 몹시 사랑하고 색조에 일어나는 작고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보며 그걸 전달하는 능력까지 탁월하다. 북극의 장엄한 빛과 오로라가 서구 미술사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하면서 대성당을 신성한 빛의 건축이라 생각했던 유럽 신비주의까지 흘러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그가 본 '빛'을 반영했다 싶은 개정판 표지의 풍경도 마음에 들고, 보석 세공처럼 섬세하게 공들인 번역도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원문을 보고 나면 도리어 번역본이 더 귀중하게 여겨질 만큼 아름답다. 역자 신해경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눈부신 구절들. 

- 더 북쪽으로 가자 낙오병들처럼 자기 생각에 골몰한 채 쓸쓸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은 빙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추문과 재난이 난무하는 신들의 황혼, 신화의 세계로부터 떠밀려 내려오는 것 같았다. 떨어진 달의 조각들. It was as if they had been borne down from a world of myth, some Götterdämmerung of noise and catastrophe. Fallen pieces of the moon.


- 석양이 질 때 얼음은 태양의 색들을 받아들인다. 장미색, 붉은빛이 도는 갖은 노란색, 물결치는 자주색, 부드러운 분홍색. 얼음은 빛을 반사하는 동시에 수정처럼 맑은 모퉁이와 가장자리에 빛을 가두었고, 빛은 얼음 속에서 더 강해졌다. The ice both reflected the light and trapped it within its crystalline corners and edges, where it intensified.

6장 '얼음과 빛: 공포의 미' 


- 보라색과 짙은 황색 무늬의 석양은 이미 오래전에 기울었다. 하늘은 천천히 흐르는 바다나 별과 별 사이를 흐르는 물결처럼 조용한 파스텔 색조로 흔들리고 있다. 석양의 색은 해돋이의 색이 되었다. 북극의 경계에 내리는 천상의 빛. The violet and saffron streaks of the sunset had long been on the wane. They had gone to pastels, muted, like slow water or interstellar currents, rolling over. They had become the colors of sunrise. The celestial light on an arctic cusp.

'나오며: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땅'


나는 최근 출간된 에세이를 통해서야 저자의 인생에 대해 겨우 알게 되었고, 그저 아름다움에 잘 반응하는 감성을 타고났겠거니 했던 막연한 인식에서도 벗어났다. 푸른 하늘과 강렬한 햇살을 가진 땅에서 자란 소년이 겪어야만 했던 길고 지속적인 학대. 누구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을 때, 아이를 절망에서 건져올린 것은 '무심히 바라본 하늘 한 조각'이었다. 그가 안식을 구한 곳은 홈 스위트 홈도 공동체도 아닌 빛과 물과 새와 나무ㅡ 자연. 아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種) 또한 자신과 동등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소유하기보다 나란히, 더불어 살기를 고민하는 어른이 되었다. 배리 로페즈는 섬으로 바다로 초원으로 사막으로 북극으로, 걷고 떠나고 여행하고 탐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번 처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사람에게서도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이 시대가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우리를 강하게 유혹'해도 사랑하기를 선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 다시 6장을 읽었을 때, 잠들지 못하는 밤 나를 어루만지던 그 문장들보다 그걸 쓴 작가를 생각했다. 북극의 빛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를. <해리 포터>에서 덤블도어가 해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너에게 벌어졌던 그 모든 일들을 돌이켜 볼 때,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야말로 너의 가장 특별한 능력'이라고. 

캘리포니아 보이로서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 



나 자신은 새 책을 들면 우선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독서가 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췌독을 많이 권하는 편이다. 다른 인생사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뭐가 됐든 하나만 건지면 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북극을 꿈꾸다>는 어떤 독자든 정말 뭐라도 하나 정도는 크게 받아갈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한 지역을 소개하기 위해 많은 분야의 학문이 불려나왔으며, 그 모든 것들이 잘 정돈되어 정결한 문체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생물학(생태학)-지리학에 기반을 둔 사실성을 기본으로 하되 신화(민속, 민담), 역사(고고학, 문화인류학), 문학, 미술(상징), 언어 등 다양한 관점으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내는 솜씨는 감탄스러울 정도다. 그저 춥고 황량한 곳이라고 단정짓기 쉬운 공간을, 저자는 사려 깊은 통찰력과 깊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오래 응시한다. 따로 굴러다니기 쉬운 구슬(지식)들을 유려한 실(생명에 대한 폭넓은 감응)로 잘 꿰어놓으면, 아무 상관도 없어보였던 것들조차 실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각 장에도 글 전체에도 충실히 반영되어, 소주제를 다룬 한 장 한 장이 독립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서로 단단하게 연결된 대서사시 같다. 그러므로 이 두껍고 무거운 벽돌책 어디를 먼저 읽어도 좋다. 


가령 나는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조카에게 3장 '북극곰: 통찰하는 방랑자'를 부분부분 읽어주곤 한다. 비행기를 좋아하고 공룡과 포켓몬을 애지중지하며 곰과 판다에 애정을 쏟아붓는 어린 아이에게, 북극곰의 털빛을 묘사한 글귀를 반복해 들려주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린왕자>를 얇은 그림책으로만 본 조카지만, 그 애는 이제 북극곰이 가끔 어린왕자의 머리칼처럼 밀밭색을 띤다는 걸 안다. 북극곰 책을 잔뜩 빌려올 때마다 얘는 어떤 색이냐고 물어보는 건 이제 우리 둘만의 놀이가 되었다. 나도 조카도 북극곰을 그저 하얗다고만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나오는 흰곰을 사랑하는 조카가 좀 더 자라면 금빛 밀밭 같은 에바 캐시디의 'Fields of Gold'를 들려줄 수 있을까?  

제일 밝은 흰색은 봄의 털갈이 때 볼 수 있고, 제일 순수한 흰색은 어린 새끼들에게서 볼 수 있다. 햇빛에 노출되면 털은 미묘한 색을 띤다. 색은 연한 레몬색이나 살구색, 크림색, 밀짚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색조가 짙어진다. 햇빛이 거의 없는 가을날 오후에 나이 든 수컷을 보면 털색이 잘 익은 밀 같은 노란 황금색을 띨 것이다. 


광고홍보학과에 다니며 상징과 기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에게는 3장과 4장 '일각고래: 해석 불가능한 코드'를 추천했었다.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하는 폴라베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발표가 끝난 뒤여서 과제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대신 흥미로운 감상이 길게 돌아왔다. 북극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북극곰에 대해 전방위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내가 한 말이었고,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에 따라 인간들이 북극곰에게 어떤 이미지를 투영해왔는지 읽고 지금 자본이 북극곰을 어떤 '마스코트'로 활용하는지 설명해준 건 그 학생이었다. 우리는 그저 유희로 어미가 보는 앞에서 새끼 두 마리를 쏘아 죽인 인간의 악랄함에 벌컥 화를 내다가, 동석한 지인에게서 새끼를 납치당하고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죽은 원숭이의 중국 고사(故事)를 들었다. 인간은 천적에 대한 방어행동을 연구하겠다고 어미를 잃은 사향소 새끼에게 늑대 사체를 묶어놓고 그 행위를 과학이라 내세웠다. 동물원에서 기를 새끼 사향소를 확보하겠다고 끝끝내 버티는 성체들을 모조리 쏘아죽인 것도 인간이다. 어느 문명이나 인간은 동물을 착취하고는 비천한 타자로 대상화한다. 식물도, 흙도, 토지도, 같은 사람까지도. 밝을 명(明) 자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반대로 숭배한다고 해서 책임이며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환상은 이따금 무지와 다르지 않다. 중세 명화마다 출현하는 신비로운 유니콘이 코뿔소가 잘못 전래된 공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일각고래와도 관련이 있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고결하고 순결한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는 마크,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마다 반복적으로 쓰는 소재(일각수 一角獸), 아이와 여성을 편안하게 느끼고 설탕을 좋아하는 <해리포터>의 신비한 동물, 최근에는 신인 아이돌 ILLIT의 뮤직비디오에 표상으로 나오기도 하는 유니콘. 왜 유니콘이 이토록 상서로운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꼭 4장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어떤 미술서적보다도 근거가 명확하고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데, 일각고래의 엄니가 유니콘 뿔이라며 비싸게 유통된 이야기까지 가닿으면 원하는 이미지를 멋대로 동물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 문화에 실로 복잡한 마음을 품게 된다.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소리를 주고받는 고래가 지적인 동물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고래를 괴롭게 만드는 수중 소음을 발생시키는 작업에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특정한 주파수 52 헤르츠로만 노래하는 외로운 고래로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고, 그 중 <나의 고래를 위하여>는 내가 무척 아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일각고래가 죽은 이의 피부색과 비슷하다고 시체고래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똑같은 종이다. <북극을 꿈꾸다>가 열어준 길을 헤매다 보면 언제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참고문헌처럼 자세한 데이터 아래 서정적인 서사까지 수놓아서, 여기에 푹 빠지면 무수한 느낌표와 물음표가 폭발한다. 


세계 신화와 종교 강좌를 들었을 때도 이 책이 기억났다. 어느 날 붓다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어느 제자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며 대답했고, 붓다는 바로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설파했다. 한 번 들이마신 숨을 다시 내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니, 결국 죽음은 그림자마냥 항시 우리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다음 수업 시간에 나는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의 일부를 낭독했다. 기온이 떨어지고 일조량이 적어져 먹이가 줄어들면, 북극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거나 길을 떠난다. 한 계절 동안만 이동하는 사향소도 있고, 먹이 사냥을 위해 굴을 나서는 늑대처럼 짧게 움직이는 동물도 있다. 이렇게 계절 변화에 따라 새와 동물들이 이동하는 일을 저자는 땅의 호흡에 비유한다. 그들의 대이동은 땅의 숨결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새 터전을 찾아 떠나는 동물들 뒤로 대지가 숨쉬고 있다고 상상한 작가는 붓다와 조금 닮은 것 같단 내 말에, 한 선생님이 그런 상상력은 모든 창세신화에도 비친다고 가르쳐주셨다.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과 형제들이 거인 이미르를 죽여 새 세상을 만들었다ㅡ 이 흙은 이미르의 살이요, 저 산과 절벽은 이미르의 뼈, 그 바다 또한 이미르의 피와 땀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땅도 호흡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땅도 그러하다. 대지가 영원히 존재할 거라 착각하지만, 땅도 사멸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을 믿는 대신 '심장으로, 머리로, 피부로' 땅의 생기를 느끼고 다른 생명들과 같이 살아야만 한다. 

그곳에 서 있으면 누구나 땅이 차오르는 것을, 햇빛의 영향력 아래 뭔가 실질적인 것이 솟아나는 것을, 그 기꺼운 포옹과 광휘를 느낄 수 있다. 동물들이 오고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땅이 그들을 만나러 부풀어오르고 또 동물들이 떠난 뒤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동을 숨쉬기로, 땅의 호흡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북극의 대지는 봄에 빛과 동물들을 크게 들이마신다. 여름에는 오래 숨을 참는다. 그리고 가을에 숨을 내쉬면서 그 모든 것을 남쪽으로 몰아낸다.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 


이 책이 지닌 탐험기로서의 가치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면 서운하다. 내가 절판된 <아메리고>, <땅끝에서>를 빌려 읽고 <빙하여 안녕>이라든지 <북극에서 얼어붙다> 같은 책들을 주기적으로 찾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다.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보다 조금 더 호흡이 긴 표류기, 원정기, 횡단기, 유랑기 등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8장 '항로: 열정과 탐욕이 얽힌 순수한 욕망' 및 9장 '역사: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펼쳐주고 싶다. 저마다의 욕망을 가진 외지인들이 북극에 이르게 된 항로와 그들이 남긴 '업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개인부터 단체, 국가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찾아내고 독점하기 위해 얽히고 설킨 경쟁을 벌이며 반목했다. 우연과 오류, 상처와 시기질투, 의지와 열정, 헌신과 영광으로 점철된 치열함을 거쳐 배리 로페즈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앞에 나열한 어떤 것도 아닌 '존엄과 존중'이다. 인류가 신대륙을 '개척'하고 원(선)주민을 '계몽'할 때마다 없는 것처럼 굴던 그 마음 말이다. 


나는,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부정할 수 없다. 21세기는 역사상 최고로 격렬하게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 이상(理想)의 절반도 쫓아가지 못하는 중이다. 우리는 '모른다'고 인정하기를 너무나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다. 아무리 오래, 많이 배워도 우물 안 개구리이며 그간 한정된 지식과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아는 것만 '일반적 진리'라 규정했다고, 내가 모르거나 공감하지 않는 건 '비정상'으로 감정했다고 수긍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저질러왔다. 서구가 제3세계를, 도시가 주변부를, 부자가 빈자를, 기득권이 소수성을 압박하던 방식 그대로 낯선 곳의 동식물과 사람을 휘두르려 했다. 북극만이 간직하고 있는 특성을 애써 알려 하는 것보다 북극을 황폐한 불모지로 취급하는 것이 더 쉬웠으니까. 눈과 얼음이 그저 '많다'고만 해놓는 게 더 간단하니까(북극에서 눈과 얼음은 동식물들에게 쉴 곳이 되고, 은거할 장소를 제공하고, 온실이며 산실(産室)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진실로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 쪽은 북극이 아니라 교감하기를 잊어버린 우리일지도 모른다. 


먼 도시에 앉아서도 손가락 하나로 극점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류는, 황당하게도 아직 진짜 원시성이 뭔지조차 알지 못한다. 과학에 무지해 이 21세기에도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미개한가, 아니면 굶주림에 시달려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 더 야만적인가? 문명인들은 후자를 보고서도 외면하는 일에 도가 텄다. 그러니 '주변 땅을 옷처럼 두르고 그 땅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하기'에 외려 자연에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운 외경심을 가진 에스키모인들을 오해하는 것이다. 순수한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고 감상적으로 동경하거나(그들의 삶에도 악과 태만이 담기고 그들의 생활에도 우리만큼 고통스러운 모순이 지천이거늘), 몰지각하고 무분별하다며 고개를 돌리거나. 지성을 이용해 하는 일이란 자원을 추출하기 위해 북극에 수많은 드릴을 꽂아놓는 것 정도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저자는 끊임없이 염려한다. 땅에서 숫자만을 산출하지 않기를, 땅을 들여다볼 때 거기 깃든 사람들도 잊지 않기를. 계절마다 기후 위기를 실감하고, 매일 누군가 전쟁으로 죽어간다는 서늘한 소식이 들려온다. 인간이 스스로를 가다듬고 살아남을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배리 로페즈의 희망 어린 경고를 되새겨야만 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 중 하나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존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바람 중 하나는 그런 존엄을 우리 각자의 꿈으로, 많든 적든 본보기로 삼을 수 있도록 각자의 삶으로 가져오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의 존엄에는 땅과 땅의 식물들과 동물들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북극을 꿈꾸다>로 처음, 아니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참 많다. 우리는 보통 잘 아는 사람의 '앎'을 듣거나,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을 보게 된다. 전문성에는 '사랑'이 결여될 때가 많고 '순정함'은 객관성을 상실하곤 하는데 배리 로페즈는 아는 만큼 사랑하고 공감하는 만큼 제대로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드문 사람이다. 경험하고 기록하는 자로서 그는 우리에게 북극 '공부'를 권유하기보다는 그저 그 고유한 장소를 온몸으로 느껴보며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안다고 만족하는 순간 오판하기 쉬우니, 눈을 떼지 말고 부단히 바라보며 주의를 잃지 말아달라고. 상상하기를 멈추지 말자고. 북극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대지 위에서 현명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우리의 오래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 우리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한두 개 빠진 걸 제외하고는 솜씨 좋게 묘사를 완료했다는 듯 도표와 목록을 집어넣는다. 그러나 땅은 그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상을 완성할 수 없다.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 


- 요컨대 인간이 아무리 조당 리터 단위로 유량을 측정하고 정밀하게 유역이 표시된 지형도를 만들고 수생생물과 조류와 육상 생물 목록을 작성한다 한들, 우리는 강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 


- 어떤 식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찾아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있는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그것을 보는 법부터 가르치도록 합시다. 암기만 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 믿게 해야 합니다. 식물들의 명명법을 앵무새처럼 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루소의 식물학 강의> 


- 무언가를 봤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통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넘쳐난다. 명백한 정보란 우주 안에 찍힌 점 하나에 불과하고, 이 점에 선을 그려넣어 방향성을 부여하고픈 욕망에서 여러 해석이 생겨난다. 

4장 '일각고래: 해석 불가능한 코드'


'움벨트(Umwelt: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과 주변세계, 또는 그에 대한 지각)’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날 둘러싼 것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 고민함에 따라 우리는 상호작용할 수도 단절될 수도 있다. 같은 시간을 살고 동일한 공간에 머물러도 외부를 인식하는 마음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배리 로페즈는 온대·열대 기후에 익숙한 우리에게서 선입견이라는 눈가리개를 조심스레 벗겨낸 다음, 지름길(연구로 밝혀진 숫자·통계)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아직 가보지 않은 길(직관과 체험)을 겁내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는 독자가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가며 모든 방향에서 북극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도록 돕는다.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목소리에 이끌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사진 한 장 없는 불친절함에 서운해하기보다 고요히 눈을 감고 상상할 기회를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하게 된다. 다시 눈꺼풀을 열어 실제보다 더 생생한 심상에서 깨어나더라도 쓸쓸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문을 나가면 온 사방이 봄이고 꽃이고 바람이며 별이다. 거리를 초월하여 아주 먼 곳을 꿈꾸게 하는 동시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더 사랑하게 하던 마법사, 여명과 황혼의 나라로 떠나버린 배리 로페즈에게 봄 안부를 전한다. 


#배리로페즈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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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표 종이비행기 : 파종소 1 국가 대표 종이비행기
위플레이 지음, 조혁진 감수 / 로이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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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월드컵이 있듯이 다른 종목들도 세계선수권(월드)이라는 권위있는 대회가 존재하는데, 종이비행기도 세계 대회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까? 오랜만에 <국가 대표 종이비행기> 신간이 나왔고, 이전에 출간된 3권 세트처럼 이번 책도 종이비행기 국가대표팀 '위플레이'가 만들고 썼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올컬러이고, 비행기나 종이접기에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조차 당장 전용지를 한 장 뜯어내어 접어본 다음 밖에서 날려보고 싶다는 바람이 들게 하는 반짝반짝한 책이다. 


이전 출간작들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데, 종이비행기에도 당연히 세부 종목이 있어서 이정욱 선수는 '오래 날리기', 김영준 선수는 '멀리 날리기', 이승훈 선수는 '곡예비행' 담당이다. 선수들이 본인 종목을 각각 맡아서 한 권씩 펴낸 책들은 그 분야에 특화+최적화되어 있어서 어떻게 하면 목적에 맞는 종이 비행기를 접을 수 있는지, 그런 비행기의 특징은 무엇인지, 또 그걸 잘 날리기 위해서는 내가 정확히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대한 비행기술까지 아주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책을 펼쳐들고 약 3분 정도만 읽어봐도 이건 어릴 때 내가 대충 접고 던지던 '놀이'가 아니라 연구+노력+공학 원리+예술적 디자인의 집결체라는 걸 알 수 있다. 전기를 쓰지도 않고 모터나 엔진을 달지도 않은 종이비행기가 어떻게 스포츠가 될 수 있는지 과학적인 설명도 잘 정리되어 있고, 종이접기에 관한 기본적 포인트들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종이비행기에 대한 애정과 열정과 자부심은 별 생각없이 책을 집어든 사람조차 그 마음에 감화될 만큼 반짝반짝 빛날 정도이다. 게다가 그 다양한 빛깔과 무늬를 새긴 전용지라니! 민무늬 색종이로만 비행기를 접다가 용도에 맞는+화려함까지 겸비한 전용 접기종이를 만날 수 있다니! 나는 <멀리 날리기>에 실린 투창형 비행기들을 제일 좋아하는데, 비행기고 연이고 오래 날려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뾰족하고 날카롭게 접어 단단하고 빠르게 활공하는 비행기를 처음 허공에 띄워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서툰 어린 시절 경험을 몇 배로 보상받는 듯한 기분. 푸른 하늘에 날아가는 붉고 노랗고 날렵한 나의 비행기.  


이번에 나온 <파종소>는 '파일럿 종이비행기를 소개합니다'의 줄임말로, 위플레이 유튜브 구독자들이 직접 개발한 독창적인 비행기를 소개하는 신간이다. 각 분야별로 1권씩 발행되었던 지난 책들과는 달리 하나의 책에 '멀리 날리기/오래 날리기/곡예비행'이 모두 실려있는데, 역시 사람의 취향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지 나는 이번에도 투창형이 좋았다! 비행에 최적화된 무게에 맞춰 만들어진 전용지들은 어찌나 화려한지, 나는 투창형 2개 접어보고 친구네 아이들에게 이 책을 거의 헌납하다시피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책을 보여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고 위플레이 유튜브에서 '부메랑 종이비행기(접기 쉬운데 잘 돌아온다는 신기한 특징까지 가지고 있다!)'를 접어본 뒤 은근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친구와도 신나게 놀았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이미 종이접기 같은 건 다 졸업한 청소년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이런 즐거움을 맛보게 되다니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더 늦지 않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기도 하고. 


참, 곰손이라 종이접기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걱정할 것 없다. QR 코드로 접는 방법부터 비행 영상까지 소개해주는 데다, 나도 어디 가서 곰손 소리 듣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데 책에 실린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잘 따라 접을 수 있었다. 종이접기가 소근육을 발달시키고 치매를 예방하기에 좋은 활동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아이나 어른이나 인내심과 집중력이 부족해 실패할 때도 많은데 그게 큼지막하고 멋진 전용 종이로 접는 비행기라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책에 적힌 추천사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주인공은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대대장인데, '책에 실린 비행 원리,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는 엔지니어링 기술을 익혀 대한민국 하늘을 지킬 멋진 파일럿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는 두근거리는 기대평을 남기셨다. 이 종이비행기가 언젠가 진짜 비행기가 되고, 그걸 손에 들고 있던 이가 나중에는 그 비행기에 탈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 않더라도, 실제 비행기만큼 멋진 걸 내 손으로 만들어 오로지 바람과 나의 힘만으로 띄울 수 있다는 일은 참 멋지지 않나? 


점점 날이 풀리다 못해 정오부터는 덥다는 느낌마저 드는 봄이 무르익고 있다. 책을 열어보면, 마음에 드는 그래서 꼭 만들고 싶어지고 날아보게 하고 싶은 비행기가 하나는 있을 것이다. 이 봄, <파종소>와 함께 하는 종이 비행기 접기+날리기를 좋은 취미생활로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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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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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과 통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예 파편화되어 모든 개인들이 홀로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연결'에 지극한 열망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보면 거기엔 꼭 '관계'가 있더라. 아기 팬더들을 더할 나위 없이 아끼고 보듬는 사육사 할아버지, 이런 케미 저런 조합으로 불리는 아이돌 관계성, 소설/웹툰/드라마와 영화/심지어는 역사적 일화에서까지 '원앤온리'라든가 '구원 서사'라든가 하는 이름표를 달고 낱낱이 파헤쳐지는 유대와 교감. 


relationship이란 단어에서 어근 lat-는 '나르다 to carry'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실어나르며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관계(關係)'는 또 어떠한가? 밧줄로 문과 빗장을 꽁꽁 묶어놓은 모양을 따온 글자 하나, 결박당한 사람을 그려낸 글자 하나 해서 두 한자 모두에 실 사(絲)가 들어가 있다. 우리말로도 누군가와 '엮인다'고, '얽힌다'고 하지 않나. 극단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은 끈이나 줄로 함께 묶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여기에 무척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르고 선택할 만한 자격이 없으니까) 그냥 주어지는 걸 받을 수밖에 없다'며 자책하던 남자와 그의 곁에 있던 이들에 관한 글. 


맞다. 나는 역시 <리틀 라이프>를 한 남자가 살면서 만났던 이들과 그 자신이 무엇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새겨놓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쉰을 넘긴 나이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뒤쫓아가면서 우리는 그에게 흔적을 남긴 인물들과도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이 자취는 칼로 쑤셔놓은 것보다 더 잔악하고, 저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멍 같고, 그 자국은 햇살을 받으며 핀 봄꽃 같다. 개인 심리를 장대하게 다룬 소설이지만 주변 인물들의 마음결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왔다 갔다 하는 시점 이동과 변환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안에 갇히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캐릭터의 시선으로 주인공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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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언뜻 청춘소설처럼 시작한다. 배경은 뉴욕. 진로라는 고민거리를 안고 걱정하는 네 친구들. 재능도 개성도 뚜렷한 20대 청년들을 비추던 조명이 이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다리가 불편하고 타인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동정과 연민을 싫어하는, 아름다운 주드. 주드는 모든 관계가 give and take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무지 친구들에게 줄 것이 없다(고 여긴다). 애정, 시간, 돈, 심지어는 정보까지. 그는 비밀 하나조차도 털어놓지 못한다. '고백은 유통화폐였고, 폭로는 친밀함의 형식'이기에 사람들은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타인과 가까워지지만, 주드는 도리어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결코 자신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친구들 또한 묻지 않고 그를 배려하며 그의 곁에 머문다. 

맬컴과 윌럼은 주드의 양쪽에서 주드가 미끄러지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이, 하지만 주드가 넘어질까봐 대비하고 있다는 의심은 주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제이비 자신도 그렇게 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하자고 서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그냥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천애고아인 주드에게 양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해럴드 또한 주드를 '모른다.' 주드는 자신을 내보이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친구들과 해럴드를 밀어내지도 못한다. 그들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주드를 좋은-괜찮은-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믿을수록 주드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어째서? 거짓이 밝혀지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나면, 비상한 두뇌에 근사한 외모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아보면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경멸하고 실망한 채 떠나갈 것이다. 그래서 주드는 팔을 긋는다. 행복한 하루일수록 불안에 잠식당한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기 때문에 자해를 한다. 
전ㅡ 좋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했어요.
그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끔찍한 일들, 부끄러운 일들을 했다는 걸, 
그걸 알게 되면 저랑 관계되는 건 고사하고, 알게 된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할 일들을요.

그가 왜 그러는지 알려지는 부분은 출간 당시부터 논쟁거리였고, 아마 오래도록 그러할 것이다. 주드의 과거에 대한 묘사가 '포르노적'이라고 비판하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이 작품에는 폭력에 대한 서술이 넘친다. 읽는 이가 상상할 수 있는 학대들은 모조리 다 등장한다. 깜박, 깜박하는 플래시백 속에 흐르는 눈물과 비명들. 작가는 담담하게 쓰지도 절제하지도 않았다. 그걸 직면하는 동안 마음 어딘가가 칼로 그어지고, 나중에는 그 자리들이 조각칼로 파내어지는 것만 같을 정도로 괴롭다. 행위 자체의 잔인함도 문제지만, 그 일들을 당하는 어린 주드의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져 숨을 계속 끊어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사람들은 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경고문구가 리뷰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한 인간이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악인을 만나며 또 어떻게 그리 다종다양한 불행을 겪을 수 있느냐?'라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의아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굳이 현실과의 정합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란 내 손톱 아래 박힌 가시가 제일 아픈 존재이며, 기억이란 절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제가 우리의 오늘을 구성하며, 성격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적인 진실만큼 감정적인 진실도 중요하다. 과거가 설령 30% 정도만 진짜라 해도 주드의 생채기는 120%만큼 쓰라릴 수 있고, 주드의 의식은 지난날을 정말 그렇게 인지할 수 있다. 하여 중요한 건 '이게 말이 되느냐 아니냐'보다는, 그 결과 그가 자신에 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끝없는 자기 혐오, 자해, 자살 시도를 거듭하는 성인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꼭 하나뿐인 방법이기에. 

주드는 몸도 마음도 다치고, 사건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부분에까지 극심한 손상을 입고 만다(Moral Injury). 작가는 이런 점을 두고 인터뷰에서 '결코 나아지지 않는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One of the things I wanted to do with this book was create a protagonist who never gets better. to begin healthy (or appear so), and end sick — both the main character, Jude, and the plot itself.'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은 건강하게 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처럼 시작했다가 아프게 끝난다. 주드와 그가 사는 세상의 신이자 창조주인 작가는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주드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주드는 번번이 최선을 다해 괴로워하기에, 가끔 독자들은 1권을 덮은 다음 2권 읽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자에게 '1,000쪽이나 되는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 별 같은 희망을 발견하기를, 빛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이는 경험'만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다. 결말을 보고 누군가는 짙은 허망함을 느꼈겠지만,


매일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다시 하루를 맞이하려던 모습 그 자체에 눈이 부셨던 사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것이, 우리네 삶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 최종장이 어떻게 쓰여지더라도 거기까지 가기 위한 여정 역시 아프도록 무겁다는 걸 나도 이제 깨달아가고 있어서다. 작가 말대로 주인공은 최후에 낫지 않은 상태로 우리를 떠나갔다. 그렇지만 주드는 나아지려고, 이겨내려고,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시도하고 다시 시도했다. 살기 위해서 견디고 버티고 참았다. 만성적인 트라우마에 맞서 저항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런 사람더러 결국 이겨내지 못했으니 패배했다고 단언해야만 할까? 완전한 회복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나긴 투쟁을 무의미했다고 치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리틀 라이프>를 '기어이 그렇게 됐다'며 요약할 것인지, '도리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방점을 찍을 것인지는 우리 몫이다. 나는 주드에게 노력한 걸 안다고, 사실 열넷이나 열여섯쯤에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당신 인생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삶은 대체로 너에게 매정했고 운명은 너를 한계까지 몰아갔지만 그럼에도 가끔 '인생이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듯한 순간들이 있었던 걸 기쁘게 지켜보았다고 말하고프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당신이 끝없는 어둠 속에만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소설은 예상보다 어둡지 않다. 아물지 않은 흉터가 내도록 터져나오고, 참담한 광경이 이어지지만 뜻밖에도 읽는 이들은 일정한, 어떻게 보면 냉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작가는 한 인간의 내면(內, 마음/심리/영혼)을 끝까지 파고들어 상처가 좀 나을라 치면 피딱지를 뜯어내게 만들었다. 대신 그의 겉모습과 배경(外, 바깥 및 표면)에는 다디단 시럽을 발라둔다. 도저히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 비극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에 공감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말 개연성이 없는 부분은 사건사고가 아니라 '캐릭터 설정' 그 자체에 있다.


The City 뉴욕이라는 공간이 내뿜는 휘황찬란함,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주드(예술가가 그를 보고 영감을 얻은 다음 화폭에 담고 싶어할 만큼),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일궈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대학 동창들, 섬약하기에 더 매혹적인 주드를 아끼는 좋은 친구들과 매우 훌륭한 인품을 지닌 양부와 진심어린 치료를 해주되 진료비는 단 1원도 청구하지 않는 의사, 이 친절하고 아량있고 관대한 사람들이 피워내는 우정과 애정 그리고 헌신, 인물들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계급이며 지적인 교양도 풍부해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소위 '먹물 내음'이 난다는 점, 자주 화제에 오르는 전문지식과 예술과 아름다움, 가난이라든가 인종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깊이 파고들지도 않는 정서... 그래서 다소 장르소설 같다고 느껴질 만한 그런 과잉된 부분들이 몰입을 방해하거나 흐름을 깨는가? (그런 이들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 그렇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폭풍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 같은 주드의 영혼을 따라가는 것만도 상당히 벅찬 일인데 이런저런 환경과 외피마저 처절했다면 이건 르포나 시사고발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작정하고 읽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나가떨어지거나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과 풍경에는 이따금 멜로드라마를 연상케 할 만큼 낭만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고, 그 덕분에 독자들은 불필요한 긴장을 덜어놓고 좀 더 안전한 위치에서 비극을 헤아리게 된다(그래서 나는 무겁고 어둡다는 까닭으로 이 책을 포기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리틀 라이프>의 이런 지점은 누군가에겐 비판거리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큰 장점일 수 있고,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든 포인트에서 핍진성을 획득하려고 노리는 것보다, 가장 보여주고픈 커다란 물줄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약하게 만드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작가는 항해의 키를 놓치지 않고 굳건하게 주드와 주드를 둘러싼 관계에 에너지를 응집하는 일에 성공했다. 



이제야 겨우 처음 했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한야 야나기하라는 무척 유려한 문장들로 소설을 가득 채워놓았는데, 특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일에 탁월하다. 특히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상호작용들을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다루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소중한 사람들과 가까워졌음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하는 주드라든가 

그는 윌럼과 하는 두 가지 대화를 다 좋아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일상적 대화를 즐긴다. 늘 큰 문제들—사랑, 신뢰—로 윌럼에게 묶여 있다고 느꼈지만, 작은 일들, 청구서나 세금, 치과 치료 등으로도 묶여 있다는 게 좋다. 몇 년 전 해럴드와 줄리아네 집에 갔을 때 일이 늘 생각난다. 그때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 주말 대부분을 거실 소파에서 담요를 두른 채 자다 깨다 하며 보냈다. 그 토요일 밤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해럴드와 줄리아가 집 부엌 수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라 세부 사항은 대부분 듣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동 생활의 역할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른들 관계의 이상적 표현 같았다. 


오랜 후에 친구들을 멀어지게 만든 제이비의 '단점'을 사랑스러워했던 윌럼

제이비는 윌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럴 때 그는 제이비를 완벽하게 사랑했다. 한없이 어리석고 경박한 짓을 할 수 있는, 또 기꺼이 하는 제이비를. 이런 건 맬컴이나 주드와는 절대 나눌 수 없었다. 맬컴은 아무리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예법을 지키고 싶어했고, 주드는 진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구조 작업'이 아님을 깨닫는 윌럼을 표현한 장면들이 그러하다. 

"괜찮아." 주드는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팔을 잡은 채 윌럼의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을 거야, 월럼." 그는 고객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윌럼이 가끔 들었던 그 단호하고 선언적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늘 널 보살펴 줄게, 알지?" 그는 미소지었다. "그럼." 그에게 위안이 된 건 그런 안심되는 말 자체라기보다 자기도 뭔가 줄 게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과 확신에 차 보이는 주드의 태도였다. 그걸 보자 윌럼은 그들의 관계가 결국 구조 작업이 아니라, 그가 주드를 구하고 그만큼 자주 주드도 그를 구했던 우정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 그런데도 지난 일곱 달 동안 그는 자기가 주드를 회복시켜놓겠다고, 자기가 그를 고칠 거라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고칠 필요가 없는데. 주드는 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도 주드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내가 제일 감탄했던 대목도 빼먹을 수 없다. 최초의 빛이자 가장 깊은 어둠이었던,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떤 죗값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나버린 루크 수사는 작중 최고의 악인이자 만악의 근원이다. 하지만 주드는 저주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루크를 일백퍼센트 증오하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을 수치스럽게 간주하는 쪽을 택한다. 독자가 화를 내며 이건 명백히 흑 아니면 백인 문제니까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루크의 미소짓는 얼굴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던 시절, 그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의 루크를 생각했다. 그는 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있었다. 꽃들의 온기와 향기가 그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그건 그가 그토록 소박하게 행복했던, 복잡할 것 전혀 없는 기쁨을 알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 꼬마 미남이 왔구나!" 루크는 외쳤다. "아, 주드ㅡ 널 보니 너무 행복하다."


언젠가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반짝이는 일순간, 그러나 오래 사유하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다 못해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런 기분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타인을 완전히 사랑하는 일도 아예 미워하는 일도 실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걸. 너를 황폐하게 만든 사람을 왜 그리워하냐고 따져묻기에는 인간도 인간관계도 너무 복잡하다는 걸.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내겐 나쁠 수 있고, 쓰레기 같은 사람이 내겐 구세주였던 시간도 있다는 걸. 사랑과 이해는 다른 영역에 있어서 사랑한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걸. 소설에는 모순된 양가감정이 수없이 나타난다. 창작자인 제이비가 주드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주드가 바라 마지 않는 평범한 삶을 납득하지 못할 때, 주드만큼 날 필요로 하지 않기에 제이비를 덜 사랑한다는 윌럼이 어쩌면 주드를 보며 남동생 헤밍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주드가 한결같이 낙관적인 해럴드의 순진함과 무지함에 좌절하면서도 동시에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두꺼운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 마음들을, 감히 이해한다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다고. 내가 말로 하지도 글로 쓰지도 못하고 어디쯤 박제해둔 채 영영 열어보지 않았던 그 감정들을 자극해 어제 일인 것처럼 회상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나는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당신도 이걸 읽으면서 지진을 느꼈나요? 지층이 휘어지고 끊어지는 기분을 그대도 느꼈나요.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고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섬광처럼 느껴지는 짧은 행복은요? 주드와 내가 느낀 것처럼요.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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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는 해럴드의 아들이 만들어준 컵을 깨뜨렸다. 해럴드가 먼저 보낸 아들이 남긴 머그를. 해럴드는 주드가 사과하기 위해 쓴 편지에 위와 같은 답장을 보낸다. 두 사람이 보낸 세월이 어찌 끝났든 이런 빛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주드에게는 이런 날이 있었고 이런 사랑을 받았고, 그렇기에 주드는 아주 간단한 일로 다시 절망에 빠졌던 날까지도 생각한다. 살아갈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특히, 해럴드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 플롯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서, 특징적인 문체와 고유한 스타일이 멋스러워서,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충격적인 반전이나 결말을 기대해서, 몰랐던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서, 나와 공명하는 무언가를 찾고파서, 비루한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푹 빠져있다 돌아올 흡입력 넘치는 세계를 원해서...... 우리는 각각의 바람들을 충족해주길 바라며 오늘도 소설을 집어든다. 여기 몹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소설이 있다. 감히, 당신이 바라던 것 어느 하나쯤은 여기 있을 거라 말하고 싶다. 책장이 넘어가는 걸 아쉬워하며 읽게 될 거라고 장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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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마녀와 꿈꾸는 돌멩이 노란돼지 창작동화
윤미경 지음, 김미연 그림 / 노란돼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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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도 한국어로도 ‘꿈‘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게 참 신기해요. 지금 계절처럼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이불 속으로만 파고들고 싶을 때 어린 조카와 함께 이 동화를 읽고 싶어요. 선물해준 마리모를 보고 이렇게 겨울잠 자고 싶다던 조카를 안고 같이 드림랜드로 떠나 봄을 기다리고 싶어요. 곧 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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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상당히 문제적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빨간머리 앤> 아니면<소공녀> 같은 소설들을 예전에는 이른바 '세계 소녀 명작'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와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한번씩은 꼭 이 화제를 꺼내게 된다. 얇게 축약된 '동화'로만 받아들였던 소녀들의 이야기 중에서 무얼 제일 좋아했나요? 


오래도록 질문과 대답들이 쌓여가면서 나는 우연히, 그렇지만 꽤 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하루키 소설들에도 감흥이 없었다.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금발 소녀와 푸른 원피스, 하얀 시계토끼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소설로서의 앨리스 스토리에 대해 묻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단 <이상한 나라> 및 <거울 나라> 완역본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정신사나운 맥락없음을 꾹 참고 독파해봤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더라'는 감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솔직한 의견은 하루키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금껏 가장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까닭으로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다. 똑같이 잘 가다듬어진 문장들이어도, 똑같이 개인 내면에 깊이 천착하고 있어도, 똑같이 바람 내음이 많이 묻어나더라도, 인적사항이 명확한 에세이 속의 '나'를 이해하기가 7배 정도 쉽다. 국가, 도시, 가족관계, 학교, 직장을 모두 다 밝혀놓는다 해도 하루키 월드에 사는 '나'는 초연하여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반복되는 일상을 아무리 잘 꾸려나가도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물은 가끔 모래나 물을 넘어서서 거의 공기에 가까울 만큼 물리적인 무게감이 없고, 심지어 '여기, 바로 이 곳'이 아닌 '저 곳(때로는 그 곳)'으로 자주 건너간다.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은 앨리스보다도 더 '이상한 나라'에 오래오래 머물러, 이러다가는 조만간 '여기'가 희미해질 것만 같다. 독자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것은 '여기'에 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불 같은 에너지가 폭발하고 다음 전개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아지경으로 책장을 넘기게 하는 글을 읽는 것은 차라리 쉽다. 책에 담긴 사나움이 나를 끌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일은 그와는 많이 다르다. 작가는 모든 트릭을 파헤치는 추리소설과 정반대 위치에 서 있고 독자는 그가 말해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혼자 메워나가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키 소설은 독자가 무엇으로 공백을 채웠는지가 무척 잘 드러나게 되는 창작물이다. 



나는 이번 겨울이 가장 맹혹한 추위를 떨치고 있을 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심하게 앓았고, 고통과 약 기운으로 인해 하루의 절반을 수마에게 바쳐야 했다. 빛과 소음에 민감해진 육체는 가벼운 식사와 잠 이외의 모든 활동을 거부했지만 몽롱한 정신으로도 조금씩 책을 읽는 것만은 허용해주었고, 나는 가끔 무릎에서 떨어지고 마는 무거운 책을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똑, 똑 소리를 내며 활자들이 물방울처럼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 내용물이 모조리 바닥나고 만 모래시계처럼 공허한 내 안을 채운 건 '서사'가 아니라 '묘사'였다. 


나는 지금껏 하루키 작품들을 읽으며 '왜'라든가 '어째서' 따위의 이유와 해명을 많이 요구해왔고, 그건 어떤 분석을 참고해도 만족스럽게 충족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 없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 문장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작가가 서술하는 풍경이며 표현하는 심상들을 마음에 쌓아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 며칠 동안 내가 했던 것은 독서였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레이스 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 낮과 밤이 흔적도 없이 나를 통과하는 동안 검은 글자들만이 너울대는 명주 천으로 화했다가 스케치로 변했다가 색채를 띠기도 하고 다시 빛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여기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있고 그들은 서로의 100%를 원한다. 기적과도 같은 선명한 감정과 눈부신 광경을 소년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멀고 먼 도시는 그들이 쏟아부은 시간과 감정을 먹고 자라나 완전한 실체를 갖추게 된다. 소녀를 잃어버리고 어른이 된 '나'는 갑작스럽게 그 도시로 끌려들어갔다가(1부) 또 홀연히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더니(2부), 3부 마지막에서는 1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계절이 바뀌고,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고,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성명을 짐작할 수 없는 캐릭터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서사의 배경을 아주 끈질기게 써내려간다.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처럼 공들여.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베 짜기를 시도한 페넬로페처럼 지치지도 않고. 긴 시간을 들여 토대를 잘 쌓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공간을 찬찬히 자아낸다. '나'의 뇌리에 박힌 장면들은 몇 번이고 리플레이되며, 토씨만 조금 달라진 문장들이 계속해서 겹쳐진다. 반복노동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되풀이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소녀와 그가 마음을 준 사람들과 그가 머문 자리들을 눈으로 본 것처럼 환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열일곱 소년의 눈에 비친 열여섯 소녀의 뒷모습. 연녹색 원피스 자락과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 강물에 둘러싸인 곱고 하얀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있던 소년소녀. 나이든 소년이 찾아간 그 도시. 광장에 서 있는 바늘 없는 시계탑.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 책 대신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있는 해질녘 도서관,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김을 피우는 검은색 주전자. 그 주전자가 내는 달가닥 소리. 벽과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의 뿔피리 소리. 밤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단각수들의 발굽 소리. '나'에게 약초차를 끓여주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입고 있던 노란색 레인코트.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현실'의 도서관을 둘러싼 새하얀 겨울.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타닥타닥 타는 사과나무 고목의 향을 맡으며 떠올리는 '그 도시'의 사과 과자 맛. '현실'에서 마시는 완전무결한 홍차. 선택을 앞둔 '내'가 소녀에게 '내일 보자'라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전했을 때 서서히 바뀌어가던 소녀의 표정. 


쓰고 있는 동안 나의 안쪽 깊은 곳에도, '내'가 느꼈던 투명하고 고요한 슬픔이 찰랑거리며 차오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흘린 단편적 정보만을 듣고 도시의 지도를 그려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놀라워하지만,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 정경을 그리듯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작가가 상상한 장면이 독자의 마음에도 아로새겨지는 마법. 이것이야말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가진 회화적인 힘이다. 



-

미켈란젤로는 돌 안에 이미 상(像)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발견하는 게 조각가의 임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리석에 갇힌 신을, 천사를, 인간을 발견하고 그가 자유를 찾도록 도왔다. 그간 하루키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가 확립한 본인만의 스타일(패턴, 캐릭터 조형, 자주 쓰는 소재, 스토리 구조)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동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모두 모여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래된'이라는 형용사가 수도 없이 등장해 우리에게마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도시에 골똘히 빠져들었는지 알 수 있다. 후기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그의 원형(原型)이자 이를테면 그의 '씨앗'이다. 동어반복이나 자기복제에 관한 비판을 받아온 하루키지만 사과 씨앗에서 복숭아가 자랄 수는 없는 법이고 그는 최선을 다해 사과나무들을 키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그렇기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다음 열매 맺는 걸 지켜봐온 이들에게 바치는 '사과 과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가상세계라는 메타버스 개념이 낯설다. SNS 프로필을 바꾸면서도 아바타라는 말이 생경하다.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나, 아니 어쩌면 나의 분신(그림자). '나'라는 한 인간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그리고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들처럼? 여기에 있긴 하지만 정말로는 여기에 없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평행세계 소재를 통해 루이스 캐럴과 하루키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앨리스와 하루키 월드의 인물들은 정말로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개업했던 재즈카페 간판에 체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는 일화를 알게 된 뒤로 나는 하루키 신작을 펼칠 때마다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를 상기했다.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곤란을 겪을 때면 나타났다가, 곧 허공에 웃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고양이를.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줄래?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I don't much care where.

난 어디라도 상관없는데...

Then it doesn't much matter which way you go.

그러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 

...So long as I get somewhere.

어딘가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Oh, you're sure to do that, if only you walk long enough.

그럼. 넌 분명히 도착하게 돼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하루키는 무엇이 옳으며 그러므로 어느 길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창작자가 아니다. 그는 늘 어디로 가도 상관없다고 그건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더라도 걷다 보면 길이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줄 거라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때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착했구나. 그러니 '나' 역시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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