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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동사 Foster
1. <관계∙성장 등>을 촉진하다, <기술∙정신 등>을 육성하다
2. (일정 기간 동안) <남의 아이>를 수양부모로서 양육하다
책등에 적힌 제목을 보고 읽을 책을 결정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원제와 번역 타이틀이 둘 다 만족스러운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한국어판 '맡겨진 소녀'라는 다섯 글자에 사람을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왜 작가가 제목으로 'foster'를 선택했는지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녀는 임신한 어머니의 노동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어차피 늘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친척집에 당도한다. 그 아버지가 정말 얼마나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사람인지, 아이를 맡기며 '먹을 걸 엄청나게 축낼 테니 대신 일을 시키라'는 말을 던진다. 소녀의 어머니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여유도 생각할 시간도 여윳돈도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없는 그 많은 것들이 맡겨진 친척집에 있지만, 마찬가지로 슬픔과 고통과 눈물도 그 집에 있었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머리칼이 하얗게 셀 정도의 무게로.
조개껍데기처럼 '매끈하고 깨끗하고 연약한' 소녀는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 아래 여름 한 철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많지 않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환대받는 이가 아니다. 따발총처럼 오가는 큰따옴표 대신,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그림들이 수놓여져 있다. 쓴 것도 아니고 그린 것도 아니고, 질감이 느껴지는 수를 놓고 레이스를 뜬 것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벽에 걸어두고 봐야 할 호사스런 작품이 아니라 늘 손에 닿아 기분 좋게 낡은 듯한 그런 자수 같다. 소녀가 우편함까지 순록처럼 빠르게 달리는 장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소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을 잡고 안아주는 장면들, 아저씨가 함께 간 바닷가에서 소녀가 파도를 향해 내달리는 광경, 소녀가 아저씨와 함께 <하이디>와 <눈의 여왕>을 읽는 풍경, 어느덧 달리기를 잘하게 된 소녀가 떠나는 차를 향해 뛰어내려가는 모습.........
많은 리뷰들에서 놀라움을 표시하듯 책은 아주 얇다. 하지만 뭐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사이에 숨겨진 마음과 이야기들이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다. 빨리 달려나가지 않는 대신 한없이 깊어진다. 그래서 페이지 수는 적지만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문장 안쪽을 자꾸 뜯어보게 된다. 가령 아이가 우물에서 푹 젖어 감기에 걸렸을 때, 그게 의도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가늠해봐야 한다. 마지막 대사도 마찬가지로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소녀는 원래도 말수가 적었고, 아저씨는 말을 아껴야 하는 이유를 소녀에게 알려주었고, 집에 돌아온 소녀는 엄마의 추궁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아니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독자는 종이 너머에서 전해듣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실제적인 책 두께보다 한참 길고 두껍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후에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 바라는 그림이 있지만 그렇게 되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소녀는 사랑하고 사랑받은 여름 한 철이라는 불멸의 정령을 거느리고 있다. 영원토록 행복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사라지지 않는 한 순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 아닌가. 비가 오지 않아도 마르지 않았던 아주머니 아저씨네 우물처럼, 소녀의 마음에서도 그 계절의 사랑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안해보려고 해도 책을 읽는 내가 덜 슬퍼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다.
여자아이 하나에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하나라는 그림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랑해온 <빨간머리 앤>의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목가적인 배경과 생활상은 미약하게 <초원의 집>을 연상시킨다(초원의 집에 나오는 자연상은 거의 폭력적일 만큼 생생해서 목가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리고 읽는 내내 문체와 문장에서 <스토너>의 향기가 났다. 50펜스 동전을 받으면 좋겠다며 상상하고, 10파운드 복권에 당첨되면 경사가 나는 집에서 온 소녀는 아저씨에게서 1파운드 지폐를 받고 간식거리를 산다. 초코아이스, 초코바, 껌. 매슈 아저씨가 앤에게 초콜릿을 사다주던 기억이 나는 건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소녀가 안전하고 포근한 울타리 안에서 가사와 육아에 지친 어머니를 머릿속에 그릴 때, 농학 대신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일을 하고 또 일을 하다 천천히 쇠하고 죽어갈 부모님을 생각하는 스토너를 생각한 것도 역시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아주 오래된 곳에서 건너온 듯한 향기가 나는 소설이다.
여름, 책을 읽고는 싶고 무거운 책을 들 수는 없는 계절 많은 이들의 품에 안겨주고 싶다.
저 집에 돌아가야 돼요? 그럼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렇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니?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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