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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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부터 입추까지는 세상 누구도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더위에 유독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한 달 동안은 누구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타인에게 그 어떤 것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계절, 뻔뻔스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책만은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한겨울에 읽었으나, 역시 여름이야말로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과 잘 어울리는 계절 아니겠나. 더구나 CCTV가 활약하는 현대보다는 먼 옛날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고려 말기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고 유교국가가 확립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시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시대 인물과 배경에 능통해 딱히 부연설명이 필요없고 권력제도가 아직 어딘가 붕 떠 있는 때인 여말선초 궁궐이 배경이라는 것에 일단 높은 가산점을 주고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ㅡ 피바람은 몇 번이 불었고 한을 품은 채 이승을 떠난 사람들은 몇이겠나. 


세종과 성종을 거쳐 유교국의 기틀이 완전히 마련되기 전이지만, 태종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왕으로 등장한다(단, 그는 논리적 성향과 '공포 및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걸 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알에서 탄생하던 신화적 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을 조각하던 주술적 시대에서 벗어나던 때의 왕. 감정과 느낌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더라도, '이성'이 우선시되는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왕이 이 책의 배후에 버티고 있다. 많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감만은 차고도 넘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딸 경안궁주에게 궁 안의 금기+궁녀규칙조례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궁주'라는 호칭 자체가 고려시대의 여성 작호이다. 이렇듯 전 시대가 남긴 유산들이 다 정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현 시대가 완전히 정립되지도 않았다. 새로운 궁이 만들어지고 나라의 주인이 바뀐 때 '이야기'가 탄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보고 들은 것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구중궁궐에서, 순종과 성실만이 최고 미덕인 궁녀의 목소리로 궁궐의 비밀들이 흘러나온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 수련회와 수학여행을 가서 친구들끼리 교실과 방의 불을 꺼놓고 숨죽이며 나누던 그 이야기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책 앞부분에는 세로로 적힌 궁녀 규칙 조례가 한 장 길게 접혀있는데, 말로는 궁에 온 걸 환영한다고 되어있지만 이것도 저것도 온통 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의구심을 품지 말라는 말만 가득하다. 처음 읽을 때는 궁이라는 곳이 그렇지 사람이 사라져도 찾기 어렵지 하고 넘겼지만, 사실은 이런 조례를 만들어야만 했던 비밀이 저 멀리 숨어있고 그 비밀은 후반에야 폭로된다. 그리고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괴이쩍인 이야기들에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순간, 잠 못 드는 밤의 잠기운이 싹 달아나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 


궁녀들은 궁의 또다른 주인이자 공무원이고, 직업인이고, 여자이며, 서로에게는 직장동료이자 친구고 또한 지지고 볶는 경쟁상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 방향과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책은 오피스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여자 기숙사의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여고괴담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궁궐은 그들의 집이고 학교고 직장이었다. 그 복합공간에 얼마나 많은 웃음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과 비명이 잠들어있겠는지. 하나의 줄기 아래 뿌리를 파보면 여러 맛이 나는 감자와 고구마가 있는 기분이 들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신라 강수 선생이 등장해서 읽는 이를 깜짝 놀래킨다거나, 춘향전의 탄생에 관한 비화로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옛 절기행사나 풍습의 기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거나. 


미스터리/기담/괴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꼬박꼬박 그런 장르를 읽게 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를 읽은 이들이 한국 책도 추천해달라고 할 때 골라줄 것이 마땅치 않았다. 구비문학과 민속문학 서적에 수많은 전설과 민담과 설화가 실려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ㅠㅠ 올해 이 책을 많이 추천했는데, 대부분 다 좋은 반응을 돌려주어 뿌듯했다. 2부가 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영화나 드라마로 촬영되는 것도 바라고 있다. 


*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마지막에야 적어놓자면 내가 역사용어에 능통하지는 않지만 왕의 딸이거나 왕의 후궁들로서 하나의 독립된 거주공간(여기서는 주로 '당'이라든가 '재')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 자신을 '본궁'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궁'이 그런 식의 지칭이나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냉궁'이란 용어도 마찬가지고. 작년에 방영된 퓨전사극 드라마에서도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부분인데, 너무 많은 형식을 지키는 것에 지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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