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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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당히 문제적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빨간머리 앤> 아니면<소공녀> 같은 소설들을 예전에는 이른바 '세계 소녀 명작'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와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한번씩은 꼭 이 화제를 꺼내게 된다. 얇게 축약된 '동화'로만 받아들였던 소녀들의 이야기 중에서 무얼 제일 좋아했나요? 


오래도록 질문과 대답들이 쌓여가면서 나는 우연히, 그렇지만 꽤 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하루키 소설들에도 감흥이 없었다.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금발 소녀와 푸른 원피스, 하얀 시계토끼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소설로서의 앨리스 스토리에 대해 묻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단 <이상한 나라> 및 <거울 나라> 완역본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정신사나운 맥락없음을 꾹 참고 독파해봤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더라'는 감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솔직한 의견은 하루키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금껏 가장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까닭으로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다. 똑같이 잘 가다듬어진 문장들이어도, 똑같이 개인 내면에 깊이 천착하고 있어도, 똑같이 바람 내음이 많이 묻어나더라도, 인적사항이 명확한 에세이 속의 '나'를 이해하기가 7배 정도 쉽다. 국가, 도시, 가족관계, 학교, 직장을 모두 다 밝혀놓는다 해도 하루키 월드에 사는 '나'는 초연하여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반복되는 일상을 아무리 잘 꾸려나가도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물은 가끔 모래나 물을 넘어서서 거의 공기에 가까울 만큼 물리적인 무게감이 없고, 심지어 '여기, 바로 이 곳'이 아닌 '저 곳(때로는 그 곳)'으로 자주 건너간다.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은 앨리스보다도 더 '이상한 나라'에 오래오래 머물러, 이러다가는 조만간 '여기'가 희미해질 것만 같다. 독자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것은 '여기'에 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불 같은 에너지가 폭발하고 다음 전개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아지경으로 책장을 넘기게 하는 글을 읽는 것은 차라리 쉽다. 책에 담긴 사나움이 나를 끌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일은 그와는 많이 다르다. 작가는 모든 트릭을 파헤치는 추리소설과 정반대 위치에 서 있고 독자는 그가 말해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혼자 메워나가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키 소설은 독자가 무엇으로 공백을 채웠는지가 무척 잘 드러나게 되는 창작물이다. 



나는 이번 겨울이 가장 맹혹한 추위를 떨치고 있을 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심하게 앓았고, 고통과 약 기운으로 인해 하루의 절반을 수마에게 바쳐야 했다. 빛과 소음에 민감해진 육체는 가벼운 식사와 잠 이외의 모든 활동을 거부했지만 몽롱한 정신으로도 조금씩 책을 읽는 것만은 허용해주었고, 나는 가끔 무릎에서 떨어지고 마는 무거운 책을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똑, 똑 소리를 내며 활자들이 물방울처럼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 내용물이 모조리 바닥나고 만 모래시계처럼 공허한 내 안을 채운 건 '서사'가 아니라 '묘사'였다. 


나는 지금껏 하루키 작품들을 읽으며 '왜'라든가 '어째서' 따위의 이유와 해명을 많이 요구해왔고, 그건 어떤 분석을 참고해도 만족스럽게 충족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 없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 문장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작가가 서술하는 풍경이며 표현하는 심상들을 마음에 쌓아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 며칠 동안 내가 했던 것은 독서였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레이스 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 낮과 밤이 흔적도 없이 나를 통과하는 동안 검은 글자들만이 너울대는 명주 천으로 화했다가 스케치로 변했다가 색채를 띠기도 하고 다시 빛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여기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있고 그들은 서로의 100%를 원한다. 기적과도 같은 선명한 감정과 눈부신 광경을 소년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멀고 먼 도시는 그들이 쏟아부은 시간과 감정을 먹고 자라나 완전한 실체를 갖추게 된다. 소녀를 잃어버리고 어른이 된 '나'는 갑작스럽게 그 도시로 끌려들어갔다가(1부) 또 홀연히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더니(2부), 3부 마지막에서는 1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계절이 바뀌고,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고,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성명을 짐작할 수 없는 캐릭터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서사의 배경을 아주 끈질기게 써내려간다.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처럼 공들여.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베 짜기를 시도한 페넬로페처럼 지치지도 않고. 긴 시간을 들여 토대를 잘 쌓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공간을 찬찬히 자아낸다. '나'의 뇌리에 박힌 장면들은 몇 번이고 리플레이되며, 토씨만 조금 달라진 문장들이 계속해서 겹쳐진다. 반복노동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되풀이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소녀와 그가 마음을 준 사람들과 그가 머문 자리들을 눈으로 본 것처럼 환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열일곱 소년의 눈에 비친 열여섯 소녀의 뒷모습. 연녹색 원피스 자락과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 강물에 둘러싸인 곱고 하얀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있던 소년소녀. 나이든 소년이 찾아간 그 도시. 광장에 서 있는 바늘 없는 시계탑.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 책 대신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있는 해질녘 도서관,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김을 피우는 검은색 주전자. 그 주전자가 내는 달가닥 소리. 벽과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의 뿔피리 소리. 밤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단각수들의 발굽 소리. '나'에게 약초차를 끓여주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입고 있던 노란색 레인코트.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현실'의 도서관을 둘러싼 새하얀 겨울.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타닥타닥 타는 사과나무 고목의 향을 맡으며 떠올리는 '그 도시'의 사과 과자 맛. '현실'에서 마시는 완전무결한 홍차. 선택을 앞둔 '내'가 소녀에게 '내일 보자'라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전했을 때 서서히 바뀌어가던 소녀의 표정. 


쓰고 있는 동안 나의 안쪽 깊은 곳에도, '내'가 느꼈던 투명하고 고요한 슬픔이 찰랑거리며 차오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흘린 단편적 정보만을 듣고 도시의 지도를 그려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놀라워하지만,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 정경을 그리듯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작가가 상상한 장면이 독자의 마음에도 아로새겨지는 마법. 이것이야말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가진 회화적인 힘이다. 



-

미켈란젤로는 돌 안에 이미 상(像)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발견하는 게 조각가의 임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리석에 갇힌 신을, 천사를, 인간을 발견하고 그가 자유를 찾도록 도왔다. 그간 하루키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가 확립한 본인만의 스타일(패턴, 캐릭터 조형, 자주 쓰는 소재, 스토리 구조)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동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모두 모여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래된'이라는 형용사가 수도 없이 등장해 우리에게마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도시에 골똘히 빠져들었는지 알 수 있다. 후기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그의 원형(原型)이자 이를테면 그의 '씨앗'이다. 동어반복이나 자기복제에 관한 비판을 받아온 하루키지만 사과 씨앗에서 복숭아가 자랄 수는 없는 법이고 그는 최선을 다해 사과나무들을 키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그렇기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다음 열매 맺는 걸 지켜봐온 이들에게 바치는 '사과 과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가상세계라는 메타버스 개념이 낯설다. SNS 프로필을 바꾸면서도 아바타라는 말이 생경하다.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나, 아니 어쩌면 나의 분신(그림자). '나'라는 한 인간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그리고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들처럼? 여기에 있긴 하지만 정말로는 여기에 없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평행세계 소재를 통해 루이스 캐럴과 하루키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앨리스와 하루키 월드의 인물들은 정말로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개업했던 재즈카페 간판에 체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는 일화를 알게 된 뒤로 나는 하루키 신작을 펼칠 때마다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를 상기했다.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곤란을 겪을 때면 나타났다가, 곧 허공에 웃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고양이를.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줄래?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I don't much care where.

난 어디라도 상관없는데...

Then it doesn't much matter which way you go.

그러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 

...So long as I get somewhere.

어딘가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Oh, you're sure to do that, if only you walk long enough.

그럼. 넌 분명히 도착하게 돼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하루키는 무엇이 옳으며 그러므로 어느 길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창작자가 아니다. 그는 늘 어디로 가도 상관없다고 그건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더라도 걷다 보면 길이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줄 거라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때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착했구나. 그러니 '나' 역시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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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4 -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를 기원하며!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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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키워드 10 중에서 ‘On Dopamine Farming 도파밍‘이 제일 와닿았다. ‘도둑맞은 집중력‘과 함께 읽어도 좋은 부분. 쪼개 쓰는 시간, 찰나의 짧은 쾌락, 쾌감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활동들. 100세 시대인데 사람들은 긴 호흡이 아니라 찰나의 반짝임에 계속 사로잡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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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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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당도한 분들을 위한 QnA

Q 1. 1991년생 SF 작가 최의택의 습작기가 그렇게 재미있다더라. 

▶ 알라딘 미리보기 22~29쪽 <아임 소 소리, 존>을 읽어보세요. 진짜 재밌음. 


Q 2. 대충 어떤 내용일까?

▶ 알라딘 eBook 미리보기 6~16쪽 프롤로그를 읽어보세요.


>Q 3. ≪슈뢰딩거의 아이들≫을 잘 읽긴 했는데 이건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주요 소재가 장애라면 너무 무겁지 않으려나. 

▶ 알라딘 미리보기 12~21쪽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을 읽어보세요. 어림잡아 그 정도의 무게와 온도입니다. 미리니름 하나 하자면 생각지도 못한 뭔가가 날아올 때가 있기는 있어요. 독자들은 그가 미래에 시도할 '탈출 계획'을 반강제로 공유하게 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 '언어'라는 틀 안에 있는 세상 

약 20년 전, 크레파스와 색연필 빛깔을 나타낼 때 흔히 쓰였던 '살색'이란 용어가 '연주황'을 거쳐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이 일은 내 머릿속에 이상하리만치 뚜렷한 모습으로 남았다. 집 밖을 나서면 바로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살았는데, 이 소식을 들었던 날 매일 보는 어린이들이 꽤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실제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이 아이들은 내가 어릴 때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더하여 말과 글과 언어에 담긴 함의를 세상 모두가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내가 '장애우'란 단어의 생성과 쇠락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도 아마 그 일 덕분일 것이다.



▲ 네이버 데이터랩으로 살펴본 2016~2022년 장애인, 장애우 검색 트렌드 



애초에 '장애자(불구자)'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놈 자(者)'에 대한 거부감도 컸거니와 1989년 장애인 복지법이 개정되며 중립적인 '장애인'이 널리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장애우(友)'라는 말을 만들었고 실제로 이 단어도 이천년대 초중반 상당히 널리 쓰였다. 장애인 대신 장애우란 말을 사용하자고,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학교교육을 받은 나 같은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어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왜 많은 이들이 친근하게 느꼈던 '장애우'는 '장애인'과 달리 법적·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어가 되어가고 있을까? 장애를 가진 많은 당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미상 타인이 그렇게 지칭할 수 있을 뿐, 장애인 본인이 스스로를 장애우로 부를 수 없는 의존적·비주체적 단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를 친구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장애인들의 말은 왜 언어가 사회적 약속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언어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약속이어야 하는가. 그 약속은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가. 



한국이 살색, 장애우, 코시안(Kosian, Korean + Asian) 같은 단어들로 여러 혼란을 겪던 시기, 나는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좀 정리된 상태 아닐까 하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장애를 '개개인의 신체 특성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았으니 그런 환상을 품을 만도 했다. 해서 2008년판 콜린스 코빌드 사전을 펼쳐보니 disabled 항목에 이런 서술이 달려있었다. 

장애인을 가리키는 형용사로는 handicapped보다 disabled, physically challenged, differently abled가 더 선호된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이들을 가장 신중하게 지칭하는 표현은 people with disabilities 또는 people with special needs이다. 




▲ 구글 엔그램으로 살펴본 handicapped의 1980~2019년 사용 빈도. 

책이야말로 실제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구글 엔그램은 신문과 잡지를 제외한 책 본문만을 빅데이터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언어-개념-문화의 시대적 진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957년 발간된 ≪A Dictionary of Contemporary American Usage≫에서는 'handicapped children'이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되어있지만, 이제는 어느 사전이든 handicapped를 '구식이고 무례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인식도 제각각인지 다른 책을 뒤지거나 구글링을 해보면 꽤 말이 다르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표현들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변화를 거듭해왔다. 직설적인 disabled를 가장 부정적이고 구식인 말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곡하게 돌려말하는 challenged와 differently abled가 더 나쁘다는 의견이 있고, with special needs는 우리말의 장애우와 마찬가지로 비장애인들의 시점에서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2018년 평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disability 대신 impairment를 쓸 것을 권고했다. 장애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이는 자주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이며, 2020년대로 가까워지면 '사람 우선 언어 person first language'에 대항하는 '정체성 우선 언어 identity first language'라는 개념이 확고해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장애인이 자신을 사람 우선 언어로 소개한다면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person with difficulty/disability)이에요.'라고 말할 것이고, 

정체성 우선 언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장애인(disabled person)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눈치챘겠지만 사람 우선 언어의 경우 당연히 장애(혹은 진단명)보다 person이 앞에 위치한다. 이 2가지 발화에 온갖 사회적·의료적 맥락이 뒤엉켜 있으며, 장애는 인간이 가진 한 가지 특성일 뿐 전부가 아님을 주장하는 전자야말로 소외와 비인간화를 피한 중립적 묘사라는 목소리가 컸다. 반면 후자를 취한 사람이 전자를 향해 장애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거냐며,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다루는 일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 드는 행위 아니냐며 일갈할 때도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거칠게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사람 우선 언어가 우선적으로 권장되었지만 이제는 개개인의 의사에 맞게 스스로 채택한 언어도 함께 존중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에 대해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이 내게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해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현재 작가 최의택은 자신의 언어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는 여정 한가운데에 있는 중이다. 




▶▶▶▶▶ 글쓰기가 가장 만만한 소설가의 하루하루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최의택과 달리 수필은 내게 난감한 영역이다. 피천득이 아무리 수필을 예찬해도 국어 시간에나 시험을 치를 때나 늘 수필 쪽이 제일 재미가 없었다. 일상을 다룬 웹툰은 신나게 웃으면서 보는데 수필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쓴 에세이는 더욱 난처하다.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 않는 한 소설가의 개인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심한 독자인 걸 어떡하겠나. 신간을 앞에 두고 '저어... 새 소설은 언제쯤 나오나요?' 같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래놓고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잡은 건 여기에 소설 뒷이야기가 가득 실려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감독과 배우에게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작가들이 작정하고 자기 글을 주제로 삼아 수다를 떨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말해줄 때 들어야 한다. 



나는 최의택 작가를 로켓 앤솔로지 단편으로 처음 알았고 그 소설 제목이 ≪나의 탈출을 우리의 순간들로 미분하면≫이어서 그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작 그는 EBS 고등수학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듣자마자 곧 중학수학으로 노선을 바꾸었단다. 캐릭터 작명을 잘하는 작가라고도 생각해왔는데 습작생 시절에는 주인공 이름을 '존'으로 지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까인 전적이 있었다. '핑' 던지면 '퐁'하고 날아오는 대사들이 최의택 소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전에는 왜 인물들이 말을 안 하냐는 피드백을 받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랩을 따라불렀다는 일화를 읽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무미건조하게 옮겨 쓴 이 에피소드들은 실제 책에서는 정말 생기발랄한 어투로 이야기되며, 최근 들어 뭔가를 읽고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다. 내가 장애인 작가의 일상 에세이를 읽는 중이라는 걸 아는 가족이 거기 그렇게 웃을 얘기가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다. 진짜 '재밌고' 작가가 '나대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는 내 말에 가족이 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말 해도 돼? 

42쪽

문장이나 대화, 인물에 대한 칭찬은 나를 일어나 춤추게 했다(말이 그렇다는 거다).



창작자들은 만들기만 할 뿐, 완성되고 나면 해석은 작품을 보고 듣고 읽는 자들에게 달려있다. 그럼에도 별점과 댓글과 리뷰를 뒤지다 말고 실제 쓰고 그리고 연기하고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찾게 된다. 그러나 보통 '작가의 말'은 길어봐야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 않나. 그러니 최의택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역시 덕질을 해본 작가라 그런지, 독자가 알고 싶어하는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풀어준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은 주로 무얼 읽는지, 그가 글을 '어떻게(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쓰는지, 특정 소재와 장르를 고르게 된 연유는 뭔지. 최초의 아이디어가 완성을 향해 다가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작가는 주로 어떤 피드백을 취하고 편집자는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작가의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작품에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왜 어떤 주제에 천착하게 되는지. 소설가는 인물을 어떻게 조형하는지 왜 특정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특히 작가에게 쓰기 편한지. 글을 쓴다는 것이 작가에게 밥벌이와 자아실현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렇게 물음에 물음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다 보면 기어코 닿게 되는 것은 저자 최의택, 자신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현재의 그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삶과 과거와 육체도 최의택이란 존재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도 말하게 된다. 




▶▶▶▶▶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 

태어나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온 최의택이지만 자신의 장애명은 외우지 못했다. 펜을 들고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워질 무렵 그는 고등학교에서 자퇴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휠체어를 그의 연장된 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주었던 최초의 친구들과 한참 멀어진 채,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깊게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장애로부터도 격리된다. 그러나 그가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모아 물었다. "장애명이 뭔가요?"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거의 잊고 사는 것에 성공했던 장애를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다 들이댄 것이다. 그동안은 그저 타인과 대면하지 않았기에 대상화될 일도 타자화될 일도 없었던 것뿐이었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는 그리운 유년기와 결별한다.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최의택으로 살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있었다. 

- "아이들이 뽑은 거예요. 제 맘대로 못 해요, 어머니."
그래서 나는 진짜로 반장이 됐다. 
- 그때 그 시절(글쓴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와 연관된 사람 모두가 처음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만 장애인이 처음인 건 아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적어도 그때 나는 살았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초등학생 최의택으로서 살았다. 
<내가 사랑한 시절> 중에서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반강제로 자각당한 그는 장애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하도 그러니 '장애인인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에 장애인 다큐멘터리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던 그였지만 이내 장애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뭔지 모를 해방감과 개운함을 느낀다. "그래, 나 장애인이다." 하지만 타인이 일방적으로 따옴표 안에 넣어 분류하고 정의한 규정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그의 자아 탐색과 장애 수용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에, 말하자면 그는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 가깝다. 



여기서 최의택도 언급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 떠올랐다. 장애인은 어떻게 장애라는 정체성을 '수용'하게 되는가? 장애는 경험이며, 장애인은 사는 동안 그 경험에 맞서는 동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애를 바라보고, 그것을 삶과 연결하고,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써내려간 '서사'의 결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는 지금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을,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을,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취향에 관해서라면 하루 종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정작 '나'에 대해서는 몰랐던 사람. 소설 속 청소년 주인공들처럼 최의택 작가도 진보와 퇴보를 되풀이하며 성장 중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퇴하고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밝히면서도, 이제는 숨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직도 나의 장애로부터는 눈을 돌리고 싶다고, 똑바로 응시해 현실을 알게 되면 그 무게에 내가 짓눌리는 건 아닐까 싶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글쓰기가 마치 사회운동이나 투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는 계속 쓰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당사자인 본인이 쓴다 해도, 장애를 다루는 소설이 결국 장애를 대상화시켜 더더욱 밖으로 밀어내는 건 아닌지 고민 중이지만 그는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장애와는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글이 배제와 소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나'는 '내'가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며 진작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장애 수용의 일환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더하여 스스로 쓰는 평론이기도 하고 동시에 투쟁 일지인 것도 맞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여러 가지 것들과 맞서 싸우고 분투하고 이름붙여 호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사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도, 여기 사람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소수자로서도, 단어를 잣고 글을 짜는 작가로서도 확장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그는 아직 길 위에 있으며, ‘disabled person'과 'person with difficulty’ 사이에서 과도기 청소년처럼 여전히 갈등 중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언어로 말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이 탐험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고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절망을 즐기지 않기 위하여> 



글쓴이는 자신이 쓰는 글에 담긴 가벼운 에너지를 강조하고 읽는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미리보기에 <아임 소 소리 존>' 장(章) 전문이 공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부분도 바로 거기였다. 그러나 책에는 <내가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과 <실격하는 삶>도 있다. 읽고 있노라면 치밀하고 단단한 슬픔, 새어나가지 않고 머무르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휠체어를 타고 극장에 가는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 시상식이나 행사에 참석하려면 어느 정도의 각오와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장애 보장구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지, 나이들어가는 부모님을 둔 그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정현종, <방문객>)'이 글에 새겨져 있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스스로에게 철퇴를 가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꼭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회의 틀 바깥으로 떠밀리다 못해 끝내 스스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 약해서, 이상해서, 소수라서 그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길에서 벗어나고 만다. 그들에겐 그러한 불합리를 바로잡을 힘은커녕 그에 대해 이야기할 목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길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소리쳐 알려야 한다. 누가? 길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의 말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이 '네가 얘길 해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게 정말 싫었다고. 그런 얘길 인터뷰로 전했던 게 올해 여름이었는데, 가을에 그는 소리쳐 알리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쓰는 것으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인간 최의택은 아직 자기 언어를 찾아 헤매는 중이지만 자음과 모음을 굴리고 다듬는 작가 최의택은 ≪비인간≫에서 일찌감치 '말'을 결정하고 소리내어 불렀다. 퀴어, 병신, 불구자 같은 멸칭(蔑稱)은 그의 소설에서 금기어도 비속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번역기를 돌릴 필요가 없다. 듣고 읽을 마음만 있다면,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말과 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최의택의 말이 내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느끼는 감각은 이상한 걸까?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인어공주 하나만일 리는 없지 않은가. ㅇㅇ이어서 혹은 ㅇㅇ이 아니어서, 한 마디로 '주류이자 다수'가 아니기에 나의 말이 아닌 타자의 말로 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는 무력한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맞은편에 있는 상대가 내 말을 외계인과의 교신보다 더 이질적으로 받아들일 거란 걸 일찌감치 알아서 나는 나답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공감이나 이해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듣기만이라도 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 말고 다른 건 될 수 없는 사람들끼리 가까이 앉아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작가인 최의택은 쓰고, 독자인 나는 읽는다. 인간 최의택이 말하고 싶어한다. 그럼 그 전언을 받은 사람이 돌려보낼 답은 하나밖에 없다. 들을게요. 그리고 같이 이야기해요.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 나의 언어로 세상을 조립하는 일에 대해서.  

질환 이야기를 할 필요는 계속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질병이나 장애와 함께 더 오래 살아가게 됨에 따라, 의료는 그러한 삶에서의 의료 외적인 요구들을 점점 더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특수함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야기는 언제나 상처에서부터 시작해왔고 치유의 한 형태였다.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몇 년 전에 읽었던 질답을 옮기며 끝맺겠다. 

Q. 개인의 언어를 존중하기 위해 장애인을 만나면 물어봐야 할까요? 사람 중심 표현과 정체정 중심 표현 중에서 뭘 선호하는지 말이에요. 

A. 언제든지 물을 수 있죠. 그게 필요하다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지 않나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뭘 해야 하는지요.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물어주세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최의택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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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양육 -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고 소통하는 법
셰팔리 차바리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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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나르시스) 이야기를 읽고 큰 의문에 잠긴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해 말해보자면,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의 어머니는 일찍이 예언을 하나 받는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겠지.' 그리고 스스로를 모른 채 자라난 이 소년은 투명한 샘물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해 상사병으로 숨을 거둔다. 나는 '아니, 거울만 보여주면서 키웠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라는 마음에 격하게 반발했다. 신화에 담긴 은유와 상징을 깨닫기에는 어려도 한참 어렸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이 신화가 '헛된 자기애'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1. 나를 알고 나서야 타인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2. 그 타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독립된 개체이며, 이걸 알아야 자기애를 넘어서서 타인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 

3. 그러나 아이가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부모였다. 

이렇게 보자면 나르키소스 신화는 '자기 발견 - 타인에 대한 인식 - 그것을 막은 문제적 양육'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걸 배운 건 대학 교양 강의에서였는데 그때 우리는 교수님에게서 꽤 유용한 조언도 함께 얻었다. 취업을 앞두고 자기계발서 같은 실용서적을 많이 읽고 있겠지만, 때로는 정신의학/심리학이나 인간관계론, 심지어는 육아법을 다룬 책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늘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였기 때문에 누군가 꽤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평생 아이를 낳을 일 없고 교육업에 종사하지도 않을 사람에게 육아팁 같은 게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아마 같은 장소에 있던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육아서적에 아기를 목욕시키고 분유 온도를 맞추는 방법만 나와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그 아이는 지금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 있어요. 어른이 된 자신이 그 어린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을까요? 다른 방면으로도 생각해봅시다. 부모된 이들만 아동과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회가 건강합니까?'



이런 이유에서 나는 가끔 자녀교육/육아서적 카테고리에 있는 책을 찾곤 하며, <깨어있는 양육>도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교수님처럼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정신 분야에서 귀하게 여기는 값진 경험'이라 말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관점에 입각해 도움말을 건넨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해본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지 않으며 부모는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부모가 아닌 이들도 어른이 되려면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과거의 노예이며, 아이들은 그 과거를 곧잘 불러낸다. 왜냐하면 분명 잊힌 것 같은 사건들도 우리가 마주하고 그 사건을 둘러싼 감정들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무의식 차원에서 계속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심리 치료사로 일하다 보면 40대, 50대, 60대 남녀가 아직도 정서적으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모의 분노와 멸시, 방치, 억압의 메아리에 갇혀 있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갈등은, 그 대상이 아이든 배우자든 아니면 다른 어른이든, 어느 정도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갈등 상황에 어른은 존재하지 않고, 떼쓰는 아이들만 있는 셈이다. 이를 양육에 적용하면 여러 면에서 애가 애를 키우는 꼴이다.



이 책은 전작 <깨어있는 부모>와 이어진다. 여기서는 딱 한 문장만을 가져오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불안'에 반응한다. 저자가 이 사실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책을 썼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한 줄을 많은 이들과 공유했는데, 자식이 없거나 비혼인 이들조차 '아이'를 '남(타인)'으로 바꾸면 그냥 내 이야기인 것 같다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도 모르게 부모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불안을 먼저 치료할 필요가 있다. 나도 모르게 굳어진 행동패턴, 낡은 사고방식, 해묵은 상흔, 오래된 습관들로 뭉쳐지고 굳어져버린 응어리들이 해소된 다음에야 타인을 왜곡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있는 부모> 마지막 장에서 와서야 훈육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깨어있는 양육>은 그 훈육에 대한 실전상황 대처법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선 용어의 개념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간다. 훈육(訓育, 가르칠 훈-기를 육) = discipline의 어원을 disciple(추종자, 복종)이 아니라 disco(배우다)에 두자고. 전자가 '징계에 따른 복종'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이 일이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배움(learn)'임을 강조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에 관해 부모의 책임과 가정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것이 '처벌'이나 '징계'라는 방식으로만 나타난다면 장기적인 효과가 없으리란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훈육이 필요한 상황, 즉 아이가 일탈행위와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부모와 어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깨어있는 양육>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적절한 조언을 해주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부모>에서부터 반복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불량하게 구는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지금까지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쩌면 부모의 불량한 정서 상태를 먼저 치유해야 하는 건 아닐까? 



가령 부모가 아이에게서 존중과 신뢰를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누구나 어릴 때 같은 행동을 하고도 어떤 때는 혼이 나고 어떤 때는 그냥 넘어간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서 일을 해도 명확하고 일관된 기준이 없으면 혼란스럽다. 하물며 부모가 절대적인 세상에서 사는 아이가 매일 복불복을 하는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저자는 기분이 태도가 되는 일, 특히 감정에 따라 '된다/안 된다'를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을 매우 경계한다. 훈육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인간이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에 있다. 깨어있는 부모가 되어 깨어있는 양육을 하려면, 부모는 아이의 행동을 점검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예리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의 피곤과 오래된 습관이 겹쳐져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언행이 튀어나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미숙한 에고를 단련해 아이와 함께 커나가는 어른이 되려면 우리는 용기있게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아이가 낳아놓으면 저절로 크는 존재가 아니듯이,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토대를 쌓는 것에는 자녀나 부모나 아이나 성인이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또한 성장하는' 것이다. 



나와 또래들은 대부분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훈육되었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방식을 제일 익숙하고 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네가 ~하면 나는 ~하겠다'는 말을 수백 수천 번 들어왔다. 배운 대로 물려주는 것이 일견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일컬어 '죄수와 간수 양육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네가 숙제하지 않고 게임만 하면 휴대폰을 압수할 거야. 하지만 네가 숙제를 하면 놀이공원에 데려가마. 아이와 어른, 자녀와 부모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이 대화를 복기해보자. 이게 거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죄수의 행동을 감시하며 그 행동에 따라 보상 혹은 처벌을 내리는 간수와 다를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통제를 받으면 인간은 무엇을 빼앗기거나 반대로 무엇을 얻는 것에만 집중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물론 이런 방법이 필요할 때도 많겠지만, 모든 상황에서 통하는 만능해결법이 아님에도 우리는 거의 평생을 이런 대화를 나누며 살아왔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은 자기조절능력을 획득하지 못한 채 타인의 벌과 상에 끌려다니고, 스스로를 절제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내적 동기가 아닌 외부의 통제에 휘둘리다 보면 자신의 중심을 세울 수 없다. 나의 바람이 진정 나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리라. 그래서 저자는 실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위험이 발생하는 순간(아이가 도로에 뛰어들거나 남에게 피해를 줄 때)이 아니라면, 부모가 과하게 개입하지 말고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경험하게 하라고 충고한다. 배고파서 허기를 느껴야 밥을 찾지 않겠나. 식사하지 않는다고 억지로 대가를 제시하면서 밥을 먹이거나 벌을 주는 것은 순간만 모면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책에는 이런 실제적이고 세세한 카운슬링이 가득하다. 양육, 훈육,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독립적인 한 개체가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도록 기르는 것이 양육이라면, 그 양육의 주체도 단단하게 자립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아이의 모든 문제를 부모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며, 아이에게 모멸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엄하게 말하는 동시에 괴로운 순간을 잠시 넘어가게 만드는 사탕발림도 단호하게 끊어내고자 한다. 아이가 안 좋은 일을 겪어 곤란해하고 있을 때 회피를 택하는 것은 쉽고 해결로 나아가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에게 사탕과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휴대폰과 게임기를 쥐어주고 '참 속상하겠다'며 달래기 바쁘다.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어른들이 먼저 회피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분명 존재하고, 이는 육아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는데 그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다 보니 우리는 진상이 되고 만다. 부모로서도 게다가 인간으로서도. 하여 저자는 자녀와 교감하되 그의 성장과 발달을 막지 말라고 거듭해 이야기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가 정신적으로 자랄 때 부모도 함께 커갈 거라고. 부모가 먼저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면 아이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혐오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해할 거라고. 부모가 아이와 연결되어 있을 때 양쪽 모두 잘 '배울' 수 있다고.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지켜보기 Witness

물어보기 Inquire

중립 지키기 Neutrality

협상하기 Negotiate

공감하기 Empathize

해결하기 Resolve

부모와 아이가 모두 만족할 '윈윈전략 WINNER' 및



'내 아이와 제대로 소통하기 위한 10계명'은 책을 읽는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부분이다. 특히 10계명은 대인관계와 직장생활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성인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법하다. 욱하지 않기, 나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하지 않기, 잠시 타임아웃 주고 호흡하기,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등은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 가능하고 실제 내 잘못된 행동 교정에도 꽤 효과가 있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 아이는 어른을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잘 생각지 않는 것 같다. 부모도 자식으로 인해, 성인도 어린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양육'이란 제목에 얽매이지 않고 부모가 아닌 이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저자가 쓴 '내 아이의 다짐'이라는 글에서 '내 아이'를 '타인'으로 바꾸어도 뜻은 무리없이 통한다. 

내 아이는 내가 색칠할 도화지가 아니며,

내가 다듬을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내 아이는 세상과 공유할 전리품이 아니며,

내 영예로운 훈장도 아니다.

내 아이는 하나의 견해나 기대 혹은 환상이 아니며, 

나를 비추는 거울도 내 유산도 아니다.

내 아이는 내 인형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며,

내 노력이나 소망도 아니다.


​내 아이는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며, 

시도하고, 울고, 배우고, 망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아이 아닌 어른도 마찬가지다. 부모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더듬거리고 비틀거리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울고 망치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갈 수 있다. 아이를 기르고 있는 많은 보호자들과 교육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많이 찾는 감정코칭 책이겠지만, 그저 나를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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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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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깊게 공부하는 일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유튜브 영상을 볼 때 144P 화질과 4K 화질이 비교 불가할 만큼 다른 것처럼, 지식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도 그러하다. 어떤 일을 자세히 알게 되면 이전에 그것을 흐릿하게 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인식과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질 때마다 따라오는 뿌듯한 만족감과 성취.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면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많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달했다. '이 전쟁은 적어도 내 지리지식을 넓혀주고 있어요. 석 달 전 나는 세계에 폴란드 로즈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요. 들어도 아무 것도 몰랐을 테고 알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그 면적, 위치, 군사상 의미에 이르기까지요.' '한때는 나도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쓰지 않았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식은 넓어질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는 괴롭답니다.' <베를린 함락 1945>를 읽는 일이 바로 그렇다. 



나는 전쟁을 전혀 모르고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작가의 말대로 '무장해제된' 사람 그 자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회인이 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가 전쟁들의 결과물로 이루어졌음을, 전란을 빼놓고 우리 사회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함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가 궁금해서 땅을 파고 있으면 손에 걸려나오는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막연한 공포심 때문에 그걸 내려놓은 다음 다시 묻어버리면 이내 평화로워질 수 있었지만, 그건 영원히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올해 6.25 전쟁(한국전쟁)이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자 나는 미루고 또 미루던 1~2차 세계대전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매일 검색 포털에 뜨는 전화(戰火) 소식들을 외면하고 넘어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베를린 함락 1945>가 늦게 번역되었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때를 고를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올해 5월 말, 러시아가 바흐무트를 점령한 직후 이를 1945년 베를린 함락에 비유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서점의 세계사 신간 코너에는 이 책과 함께 <제3제국사>가 함께 진열되어 있었고, 관련된 책들이 줄지어 꽂힌 아래 칸에는 <1945>, <제2차 세계대전>, <아르덴 대공세 1944>, <한국전쟁의 기원>, <독소전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들이 있었다. 세상 어딘가는 오늘도 전장의 화마에 휩싸여 있고 우리는 아직 세계대전을 옛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만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이나마 다각도로 공부했다고 할 만한 전쟁사는 한국의 삼국통일전쟁과 임진왜란밖에 없는데, 그로 미루어보면 전쟁을 다룬 글들은 크게 정치​·외교와 전략​전술·군사지리·무기 두 파트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베를린 함락 1945>는 후자 쪽에 약간 더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에(작가가 전직 육군 장교 출신이다!), 전자에 관련된 배경지식들을 먼저 알고 나서 읽는 것을 권한다. 책은 

1. 1945년 4월 16일~5월 2일에 걸쳐 

2. 러시아의 붉은 군대 Vs.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3. 베를린 전투

를 다루고 있으므로 전쟁의 결정부터 전개, 귀결, 영향과 유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사고들을 통사(通史)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일은 무리다. 물론 저자는 다짜고짜 바로 1945년 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며, 300쪽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서서히 나치 독일의 수도를 향해 다가간다. 유럽을 점령했던 제국의 수도에서 '비인간적인 도적의 수도'로 전락한 베를린으로. 



7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무게는 의외로 가볍다. 양장본이고 제본이 잘 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안정적으로 잘 펼쳐지고, 책을 고정시키는 문진과 독서대의 도움 없이도 읽기 편했다. 지정학적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자료가 충실하며, 2차 세계대전이나 독소전쟁의 양상에 대해 잘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고 싶을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마지막에 인물 색인이 잘 정리되어 있다. 동생은 괴벨스와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만 골라 읽더니 대단히 불유쾌한 얼굴로 책을 돌려주었는데, 며칠 뒤 히틀러의 최후만큼은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책을 가져갔다. 



시종일관 돋보이는 부분은 작가의 서술 방식으로, 그는 러시아 연방 국립기록보관소에 있는 미공개문서까지 수집하며 검증된 사실을 생생히 보도하고(시사 저널리즘), 나날의 사건들이 역사와 인간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평가하며(서사 기록) 우리로 하여금 격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문예). 독자는 비버의 글을 읽으며 단지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정서를 느끼는데, 그 감정의 진폭이 너무 엄청나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현실의 사건과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한' 역사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이게 문학(文學,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저자가 연표와 사건과 잘 알려진 인물들을 쫓아갈 때는 빠른 속도감과 적당한 거리감 때문에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문장은 간결하고 대사가 많아 더더욱 소설 같다. 그러나 그가 참호와 방공호에 있는 개개인의 일기​·서신​·회고록을 가까이 클로즈업해서 눈앞에 들이댈 때마다 나는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의 증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얼어붙었다. 군대를 지휘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총 한 번 제대로 들지 않은 하인리히 힘러를 비웃고 경멸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읽겠다는 용기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멈추고 주저하고 책을 덮어 달아났다. 

어떤 어머니들은 동사해 둘둘 말아놓은 아기 위에 엎드려 울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눈 속에서 정신을 잃고 길가의 나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아이들은 무서워서 그저 울며 가까이에 서 있었다. 어차피 그 추위 속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 죽은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곡소리가 침묵을 깼다. 공포와 공황이 나를 덮쳤다. 그런 참담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리고 이 광경 뒤로 무섭고 강력한 환상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우리가 바로 이들이었다. 우리에게 닥칠 미래였다. 



여성이라면 끝까지 이 책을 잡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다. 약육강식에 따른 재앙, 방화, 파괴, 약탈, 그리고 강간. 전시가 아니더라도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쟁 범죄로서의 강간이 어떤 것인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그리신 <빼앗긴 순정>을 보고 뱃속이 싸늘한 한기로 가득차 부르르 떨었던 경험을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2002년 이 책이 출간되기 전 러시아는 베를린에서의 집단 강간을 이야기하는 일은 '나치 침략에 저항한 소련의 신성한 성취'를 더럽힌다며 반발했다. 붉은 군대의 성전(聖戰)은 그런 비도덕적 사건 따위로 흠집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러시아는 아직도 그때처럼 '독일인, 특히 독일 여성들(그리고 모든 적대국)에 대한 우리 병사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며, 우리는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에서 '사냥당한' 피해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저자 역시 그 책을 일부 인용해 대조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의 추악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2023년, 우크라이나 인권변호사 마트비추크는 고발한다. 처벌받지도 단죄되지도 않은 전쟁 범죄가 21세기에 어떻게 재현되는지. 



글쓴이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에서 강간이 어떤 것인지도 말한다. 윤간은 병사들 사이에서 유대감과 동지애를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며, 성폭행이 그들에게는 휴식 겸 성적 욕구도 충족하는 거라고 설명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전쟁 강간은 최초에 복수라는 명분 아래에서 잔인하고 즉각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적국과 적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 위한 대체물로 힘없는 여성이 선택되고, 가해자의 비인간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단계도 이때다. 일찍이 적이 저질렀던 짓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 뿐이고, 이제는 적이 마땅히 그 고통을 겪을 차례이므로 여성들은 증오를 받아내야 할 보복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강간은 전쟁의 전리품을 취하는 행동과 흡사해지고, 더 나아가면 피해자들도 생존에 대한 위협과 거듭된 굶주림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음식을 얻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 단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소련군 장교의 '점령군 아내(현지처)'가 되었다. 히틀러는 '남자가 위대할수록 여자는 더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며 강한 남성을 찬양했지만, 독일 남성들은 이 거대한 패배에서 도피하기를 원했다. 여성들이 집단 강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말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던 모습과 달리 남자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회피했다. 



저자는 세뇌를 통해 학습한 체제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적들을 절멸시키고 자신도 죽기를 원할 만큼 삶이 산산조각난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 페이지가 넘어가고 윤간당한 피해자들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자 가해자들이 말한다. '러시아 병사들은 여자를 쏘지 않아. 독일군이나 그러지.' 적보다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이념은 증오를 심어주는 선전활동으로 더 강화되고, 결국 이쪽도 저쪽도 우리의 분노는 비이성적이지 않고 우리가 하는 복수는 맹목적이지 않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만다. 그러니 내가 더 우월한 사상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너희를 해방시키러 왔다고 생각한 소련군들이 독일 농가의 부유한 생활상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격노한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질투로 내가 가질 수 없는 라디오, 피아노, 거울, 도자기를 깨부수었다. 배신감에 휩싸여 (장교라면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쓸 수 없을) 가죽 소파를 찢어버렸다. 그러다가도 온갖 자재들을 본국으로 부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온 사람이라면 여기서도 현대 화학​·물리학이 자본주의며 군국주의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또 그게 얼마나 비극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가공해 비누를 만드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만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소련은 독일의 실험실과 공장들을 빼앗아 본국의 핵 프로그램에 활용하려 했지만 사회주의의 패배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독일에서 많은 장비를 강탈했으나 원자재가 없고 연구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그 모든 게 그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군사주의와 궤를 같이 하여 발달시키려던 과학은 자본의 힘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서문부터 마지막 인용자료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명멸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독소전쟁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던 거지만, 그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사에도 완전히 파묻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계대전 하면 떠오르는 히틀러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상세히 쓰여있으나 그건 전혀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 망상도(이런 망상병자를 춘원 이광수는 '가정도 없고 향략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사람'이라며 숭배했다. 세계대전이 한국인의 근현대 정신세계와 절대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상자가 아무리 많아도 미래를 위한 영광의 씨니까 괜찮다며 소리친 광기도, 비루한 권력을 탐한 비열한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불멸을 원했고 확실히 역사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치욕을 얻겠지만 나는 그를 필요 이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인생사를 더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든 이름을 떠올릴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오래도록 고여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 '어린이 병사'라 불리며 지옥으로 내던져진 아이들,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갈 테고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겠지'라는 노래를 부르는 붉은 군대, 화장실 휴지를 양팔에 가득 들고 죽은 여자, 후송된 중상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연인을 발견하고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노르웨이 간호사, 소련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던 예배 광경, 인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봄이면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나는 튤립과 라일락, 베를린의 정복자로서 자신이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소련군 병사들, 절망적인 상태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려고 수류탄을 던지려던 어린 소년과 미친 짓 하지 말라고 그를 저지한 병장, 조국의 변절자라며 총살당한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죽지 못해 살아남았고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에서 일했을 뿐이건만), 수도 바르샤바가 파괴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독일에 대한 어떤 자비심도 가지지 않았던 폴란드인 부대들 그러나 폴란드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스탈린, 어머니를 강간하는 소련군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총에 맞은 13세 남자아이...... 이런 삶을 그리고 이런 죽음을 어떻게 망각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겠나. 그것도 정전(停戰) 상태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해상도가 너무 높아져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버렸다 해서 다시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사건에 속한 인간들을 '독소전을 겪은 독일인 전체'이라는 식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균질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걸 잊는다면 과거사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저자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 통제되지 않는 권력의 잔인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깊이 사유하며 극한에 놓인 이들의 최악과 최선을 번갈아가며 조명한다. 탁월한 연구가인 동시에 빼어난 문장가이기는 쉽지 않은데 앤터니 비버는 제대로 된 전사(戰史)를 찾는 탐구자와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 문학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는 전투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잔혹한 역사의 전환점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고 싶은 이에게도 권한다. '몰살 투쟁만을 중심에 둔다. 우리는 적을 살려두는 식의 전쟁 따위 하지 않는다'는 연설이 흐르던 시대, 원한이 충돌하던 시기를 사람들은 무슨 수로 살아냈는가? 저자는 역사의 물줄기에서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읽는 이의 정신에 많은 씨앗을 뿌리는 책이며, 그 씨앗이 어떤 방향으로 싹터 자랄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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