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이 사람이 말하는 건 애초부터 공감이 아니다.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은 편협 할 수가 없다. 자신의 공감이 한 쪽으로 치우친 건 아닐까 확인 하는 건 공감의 조정이지 공감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 좀 논리가 이상하다. 저자가 관심이 필요했나보다. 전형적인 노이즈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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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스튜디오 2023-02-0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의 감정이나 의견 주장 등에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게 공감인데... 편협할 수 없다니요...? 사람은 옳다 그르다로 공감하지 않아요. 그 이유를 모르신다면 다시 생각해보시길 추천드려요!

농담 2023-04-17 01:33   좋아요 0 | URL
공감이 잘못됐다면 그건 공감의 방향성 문제지 공감 자체적 문제는 아니죠 ㅎ 사람이 연대하는 근원이 공감인데 공감을 버리고 나면 뭐가 남죠. 공감이 없으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 조차 일어나지 않아요. 공감이 위험하니 안 쓸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전제부터 틀렸어요. 그쪽이나 다시 생각해봐요 ㅎ냉정은 공감을 조정할 때 써야지 공감을 삭제하는 쪽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요.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아무런 자신의 의견없이 수용할 수 있지 ㅋㅋ

2023-03-19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갠롱 2023-03-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안읽고 다시면 어떡합니까

농담 2023-04-17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제부터 잘못 된 책을 왜 읽나요.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어요. 유튜브에 자세히 나오더군요 ㅎ

파피루스 2023-04-21 15:07   좋아요 0 | URL
아하, 유튜브 신봉자이셨군요. 그럼 이해가 됩니다.

이세형 2023-04-1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은 사람으로서, 저자가 공감을 쓰지 말라고 한 대목은 없었습니다. 공감이 만능이 아니라는 당부를, 마치 저자가 공감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듯이 파악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방식 아닌지요. 게다가 댓글을 찬찬히 살펴보니, 님께서 이미 ‘방향성이 잘못된 공감‘에 대해 거론하셨네요. 저자가 주의를 당부하는 바가 바로 그 지점이고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인데, 그렇다면 도리어 님께서 쓰신 위의 댓글이야말로 이 책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군요.

농담 2023-04-13 03:31   좋아요 0 | URL
제 말은 공감을 쓰자 말자, 이런 게 아니구요. 공감을 안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재밌는 견해라는 겁니다. 어떻게 공감을 쓰지 않을 수 있나요. 공감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동력 그 자체예요. 공감을 수정하고 잘 운용하는 게 이성이라면, 공감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겁니다. 악셀은 잘못이 없어요. 방향이 잘못됐다면 운전대가 잘못한 겁니다. 그럼 운전대에 관한 제목을 뽑았어야 하는데 공감의 배신이라고 하니까. 사이비 마케팅의 냄새를 강하게 풍겨서 도저히 읽을 맛이 안나더라는 얘깁니다. 방향이 잘못됐는데 왜 악셀을 밟았냐고 질문하는 건 앞뒤가 안맞아요. 이해가 되실런지 모르겠네요. 전제부터 틀렸어요.

이세형 2023-04-14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은 사람으로서, 저자는 ‘공감을 안 쓸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 대목이 없습니다. 님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저자는 악셀 안 밟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자는 공감‘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님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저자는 악셀만 밟는다고 운전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원제 Against Empathy는 공감에 대해 반대한다는 식의 사전적인 풀이가 아니라, 특정 사물/개념에 대한 일방적/맹목적 추종의 경계를 촉구하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이를 의역한 공감의 배신이라는 제목을 가리켜 전제부터 틀렸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존재에 대한 희화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에게 허락되는 제목이란 학술지 논문처럼 기계적인 서술 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 책은 공감의 강력한 힘이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핸들링을 잘못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를 엄연히 인정하고, 이를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겸허히 바라보며 우리의 행동을 고쳐나가자는 촉구입니다. 지금껏 공감의 힘만 생각했지 공감의 핸들링을 고려하지 않은 이들에게, 제목상의 배신이라는 수사학은 주의 깊게 자신의 태도를 점검토록 하는 의미심장한 수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말씀은 흡사 ‘창조를 위한 파괴‘라는 표현을 두고 ‘어떻게 창조랑 파괴가 같은 선으로 연결되냐, 창조는 만드는거고 파괴는 없애는 거다, 파괴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사이비 마케팅이다, 파괴가 창조라니 재밌는 견해다, 창조는 폭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해 제목을 뽑아야지 왜 폭력을 언급하냐‘ 라는 식의 주장과 비슷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혹시 제목에 대해 느낀 불쾌감을, 책 내용에 대한 추측과 어지럽게 뒤섞어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제목에 대한 취향이야 개개인 나름이니 상관 없습니다만, 이를 다시 마케팅에 대한 음모론적 사고로 치환하는 것은 충분한 증거도 없이 비약적 결론을 도출시키는 것에 해당하는 듯하여, 이 점 조심스레 논하여 봅니다.

책 어디에도 공감을 안 쓸 수 있다는 ‘재밌는 견해‘는 없습니다. 왜 악셀을 밟았냐고 질문하는 대목도 없고요. 악셀만 밟는 걸로 운전이 잘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악셀만 밟았다고 운전을 잘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라고 당부하는 책이었습니다. 님이 말하신, 핸들을 잘못 돌린 공감에 대해서 당부하는 책이었습니다. 운전을 위해서 핸들도 다루고, 브레이크도 익혀야하는 필요성을 알려주는 책에 더 가까웠습니다. 제목에 대한 불쾌감을 가지고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책을 다소 성급하게 논하신 것 같아, 이 점에 대해 조심스레 말씀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농담 2023-04-17 01:34   좋아요 0 | URL
세형님의 거창하고 현학적인 답변은 잘 읽었습니다. 일단 알라딘에 나와있는 책의 발췌문부터 확인해 봅시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공감은 어리석은 판단에 근거할 때가 많고, 무관심과 잔인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정치적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처럼 중요한 관계를 좀먹고, 친구나 부모, 남편, 아내로서의 역할을 더 어렵게 만든다.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 그리고 이 책을 쓰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와 같이 공감에 반대하도록 여러분을 설득하는 것이다..˝

공감에 반대한다고 정확히 명시가 되어 있는데요. 알라딘에 나와있는 발췌만 보고도 책의 성향과 논리적 허점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감에 반대하는 것(Against). 내가 무언가에 반대한다는 것은 해당 개념이 분리되는 걸 뜻합니다. 반대한다는 말이 언제부터 우리 인류사에 고쳐쓰자의 은유로 해석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님의 말대로 저자가 ‘악셀을 안 밟아도 된다는 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다‘고 해서, 반대한다는 말이 악셀을 조심해서 밟으라는 의미로 해석되진 않습니다. 우리가 나는 저것에 반대한다고 할 때 상대방이 그걸 조심해서 쓰자는 얘기로 알아듣진 않지요. 님의 주장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저자의 텍스트는 뚜렷하게 공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공감은 남에게 다가가는 동력원(악셀)이고, 이성이 방향타라면, 잘못된 방향에 관한 문제는 핸들링의 범주내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방향이 잘못됐는데 동력을 나무라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동력원은 방향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직 이해가 안되시나요. ㅎ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 공감입니다. 공감은 느낌이예요. 공감은 타인에게 다가가는 힘일 뿐이고, 저자가 나열하는 모든 문제는 이성의 판단에 관한 영역입니다. 한마디로 저자는 공감이 관여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공감을 나무라는 허수애비 논리를 펼치고 있어요. 위궤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 간이 잘못됐다고 하진 않잖습니까? 악셀과 운전대는 하는 일이 달라요. 세형님. 그 누구도 운전석에 앉아서 방향타만 잡고 있진 않습니다. 공감을 안 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이 의식이 있는 한 공감은 계속해서 타인을 향해서 다가갈 뿐입니다. 공감이 무슨 죄가 있나요. 연대의 힘을 만드는 근원이 공감인데 이걸 쓰지말자는 주장이 아직도 제정신으로 들린다면 저도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네요.

그리고 이 책은 학술 서적이지 문학 작품이 아닙니다. 문학책이라면 막연한 은유든 다원적 은유든 뭐든 본인 마음입니다. 따라서 원제든 부제든 문학의 특성을 반영한 은유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심리학 교수이고, 이 책은 소설이 아니며,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본인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님의 문학적 견해는 자동으로 기각됩니다. 예를들면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봅시다. 이 은유는 책의 내용을 온전히 반영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고전적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타당한 표현이죠. 저자가 스스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주장을 할 때에는 은유 또한 책의 내용과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사실 문학도 이런 식으로 제목이 중구난방 날뛰지는 않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책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수사가 아니에요. 의미심장한 수사학도 어떠한 접점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의 주장과 공감의 배신이라는 주장은 접점은 있어보이나 님의 말대로 공감을 쓰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면. 내용과 전혀 맞지 않아요.

세형님의 예들, 창조와 파괴라든가, 밀란 쿤테라 소설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논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입니다. 접점이 없다는 소리예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 때, 전혀 다른 개념을 들고 나와도 상관은 없지만, 논리적 접점이 있어야 은유의 타당성이 확보됩니다. 아무 말이나 던진다면 그냥 의식의 흐름이죠.

이세형 2023-04-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창하고 현학적인 답변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굳이 첨언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태도가 아닌지 우선 여쭙습니다.

책의 발췌문 대목을 가져와서 공감에 반대한다고 정확히 명시되어 있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는 니체와 그의 책을 소개하며 ‘신은 죽었다’ 라는 소개 구절을 읽은 뒤 신이 어떻게 죽는단 말이냐, 신이 죽는다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이 니체라는 자는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텍스트가 전체적 맥락에 놓여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엽적인 단락만 확인하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길게 작성하신 공감에 대한 말씀은 저에게 하신 말씀뿐 아니라 이미 앞의 댓글들로 수차례 얘기하신 바를 똑같이 되풀이하신 것이라 가타부타 덧달지 않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댓글로 충분히 답했습니다. 공감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동원해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책의 내용은 공감‘만’으로 다 해결된다는 식의 태도를 경계하는 것에 더 가깝다, 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목과 조금의 발췌문만 가지고 책이 공감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며 또다시 도돌이표처럼 공감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똑같은 설명을 또다른 비유로 되풀이하실 거라면 구태여 막지는 않겠습니다만, 비유가 달라졌을 뿐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시는 것이리라 미리 지적해드립니다.

이 책이 문학 작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또한 이 책은 교양서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계실 겁니다. 같은 문단에서 님께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은유의 제목을 예시로 드셨군요. 그렇다면 지금 이 말씀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이 책은 문학 작품이 아니므로 그런 제목을 하면 안된다.
2. 문학적인 수사가 동원되더라도 책의 내용에 근거해야 한다.

학자가 자신의 견해를 책으로 쓰는데 거기에다가 문학적인 표현을 제목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이며, 굳이 쓴다면 책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라는 말일 겝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전문 학술지가 아닌 교양서적에 문학적 수사가 쓰이는 것은 (본인께서 동원하신 예시를 포함하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네요.

이 책에 대해 읽지도 않고 제목과 발췌문 만으로 평가하는 님의 방식은, 마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제목과 발췌문만 살핀 다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체감상 시간은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되는데 이를 틀린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인간의 인지 능력 자체를 폄하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지극히 사이비 마케팅에 해당한다... 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읽은 사람이 이 책은 시간에 대한 과학책이다, 인간의 인식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라고 설명해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정작 읽지 않았으면서 제목과 발췌문만을 가지고서 시간의 사전적 정의와 시간 개념에 대한 비유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적 파괴와 밀란 쿤데라 소설 등이 언급된 것을 두고서 일방적으로 ‘의식의 흐름’이라고 치부하셨습니다만, 해당 표현들은 님의 부정적 견해가 책 내용의 정합성이 아니라 ‘제목에 대한 불쾌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수사적 표현에 시선이 꽂힌 게 첫 번째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공감의 정의, 악셀에의 비유, 많은 말씀을 (그러나 같은 내용을) 여러차례 반복하고 계시지만, 그 기나긴 반복이 결국 제목이 구사한 수사학에 본인 개인이 느낀 불쾌감으로 말미암아 취한 공격적 태도일 뿐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논리적 접점을 말씀하셨는데, 수사학이라는 쟁점을 놓치시고 문학이냐 아니냐의 구분으로 접근하심은 코끼리의 뒷다리를 만지고 계신 겁니다. 본인께서 느낀 불쾌감의 출발이 수사학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제목에서 느낀 그 불쾌감이 과연 정합한 것인가, 책의 내용도 과연 그러한가, 이에 대한 검증으로 님께서는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발췌문’만 읽었으며 (니체로 치면,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중심으로 특정 단락 하나 정도만 읽고) 본인이 짐작한 바가 정답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간 적 없는 사람이 남대문을 두고 문이니까 당연히 문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서울에 다녀와 본 사람이 남대문에 문턱이 없음을 보았노라고 아무리 설명함에도 불구, 문에는 당연히 문턱이 있는 거라며 건축 기술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한 기나긴 비유를 거듭 반복한다면, 아무리 서울에 다녀와 본 사람인들 그의 주장을 이길 수 없을 겝니다. 여전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그 내용을 두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실 거라면 (그러니까, 남대문은 본 적 없지만 문턱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주장을 펼치실 거라면) 그거야 본인의 재량 아니겠습니까. 책에 대해서는 짐작하시는 것과 그 결이 다르다고 이미 다른 사람들의 댓글로도 달려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짐작은 이러하다고 고집하신다면야 그 또한 본인의 자유이고 재량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결국 궁극적으로 그 모든 자신의 말을 검증할 독서 그 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과학으로 치면 실험 검증은 없는 상태로 참 거짓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 이에 대한 인식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목과 발췌문만 읽는 식으로 독서 행위를 대체한다면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을 폭동 예찬서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도 훌륭한 독서 행위를 한 것일 겝니다. 딱히 책을 읽어보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본인의 입장이 독서 행위 그 자체는 결여된 상태에서 편린적인 단서에 근거해 있음은 인지하고 계셔야 할 겝니다.

농담 2023-04-15 22:47   좋아요 0 | URL
세형님은 자신의 글을 찬찬히 살피면서 논리를 정리하셔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쓸데없는 예시는 덜어내고 쟁점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1. 이 책은 노이즈 마케팅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 ‘공감을 사용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공감을 조정해야한다. 공감을 쓰지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는데, 그 누구도 이 주장의 근거를 책의 발췌나 문장을 통해서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님도 마찬가지구요. 만약 세형님을 포함하여 책을 읽은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는 공감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책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저급 마케팅이 됩니다.

강조하는 표현이나, 반증 등 은유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누군가 수사학적 은유를 했는데 책의 내용과 관련이 없다면 그 표현은 궤변이 됩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공감의 배신처럼 책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모를수도 있겠죠) 인간이 기대고 있던 초월적(신), 절대적(도덕)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명제로 표현한 겁니다. 이 은유는 니체의 판단과 논리적 일치를 이룹니다. 표현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을 ‘정합적 은유‘라고 합시다.

사실은 공감이 좋은 놈인데, 공감이 나쁜 놈이라고 역설하는 걸 ‘역설(逆說)적 은유‘라고 합시다. (불일치)

공감의 배신은 이 두가지 은유 중 첫번째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공감을 부정적으로 강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마케팅을 하는 것이고 저자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저자가 ‘공감의 배신‘ ‘공감에 반대한다‘라고 썼다면 텍스트 그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책처럼 심오한 해석을 요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니체도 위의 은유 법칙에 반하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그런 글은 궤변에 불과하니까요. 반대로 해석해서도 안되고, 제멋대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근거는 텍스트에서 찾습니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이해했고, 발췌문에 나온 저자의 텍스트도 그러한데, 책을 읽은 사람들은(세형님을 포함하여) 책을 읽고도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네요. 어째 서울을 가보지도 않은 저보다 서울을 모르십니까.ㅎ 그리고 문턱 얘기는 왜 하신 거예요. ㅎ 저로서는 님의 예시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ㅎㅎ 저는 이 책이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2. 만약 님의 주장이 맞다면 (공감을 사용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은 반어도 아니고 정합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공감이 나쁘지만 그래도 잘 빨아서 쓰자‘ 정도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더욱 노이즈 마케팅이 되는 것이죠. 노이즈 마케팅이 무엇인지 뜻은 님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공감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공감은 상대방과 연결되는 원초적 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감은 고쳐쓸 수 없습니다. 굳이 계몽주의 시대에나 통용되던 이분법으로 보자면 이성의 반대편엔 감성이 있습니다. (감각이라고 합니다) 감성이 공감이라고 칩시다. 그래도 말이 안됩니다. 이성과 감성은 하는 일이 다릅니다. 공감은 그저 일어나는 느낌이자 기분이며 정서 상태입니다. 판단은 이성이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모든 문제점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판단의 문제이며, 그렇다면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로 결론을 내려야죠. 그리고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이성이 판단을 잘못 내린겁니다. 논리적으로 판단 미스의 모든 책임은 이성에게 있습니다. 감각은 판단하지 않으니까요. 공감은 그저 할 일을 할 뿐이예요. 그래서 허수아비 논리라고 한 겁니다. 했던 얘기를 또 하게 되네요.

저는 ‘제목이 구사한 수사학에 불쾌감으로 말미암아 공격적 태도‘를 취한 게 아닙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저의 비판은 정리된 논리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님은 책의 제목처럼 우와좌왕 하시네요. 도대체 님의 논리가 뭐죠. ㅎ 공감을 잘 쓰자는 말이라면 저자는 ‘공감에 반대한다‘, ‘공감에 반대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거짓 강조가 되는데, 거짓 강조는 희극(코미디)에서나 나옵니다. 공감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감이 좋다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ㅎ 강조도 아니고, 반어도 아니며, 역설도 아니라면 남은 건 저급 마케팅밖에 없습니다.

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글을 여러번 쉽게 수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자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책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논리는 펼치지 말아주세요. 책을 읽지 않아도 발췌를 통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공감을 쓰느냐, 마느냐, 아니면 잘 쓰느냐. 셋중에 하나 거든요. 이 책이 그렇게 어려운 책도 아니고요,.

이세형 2023-04-1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정도 짐작은 했습니다만, 짐작대로 동원하는 개념이 늘어났을 뿐 순환논법을 구사하시는 건 여전히 반복됨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이를 두고 정리된 논리체계라고 생각하신 점에 대해서는 짐작 바깥이었습니다. 여러번 수정하신 덕인지 잘 확인하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농담 2023-04-16 00:45   좋아요 0 | URL
님이 순환논법의 진정한 의미를 잘 알고 계신지 의문이네요. 순환논법은 ‘공감은 나쁘다. 왜냐하면 공감은 나쁘기 때문이다.‘ 이런 게 순환논법입니다. ㅎ 암튼 세형님도 수고하셨습니다.

Sati 2023-06-26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님이 꼭 읽어야 할 책인데 정작 읽지도 않고 똥을 많이도 싸놓으셨네요. 본인이 만든 노이즈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 2024-04-2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안읽어보고 구구절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