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p.
...언뜻 한 인간에게 상황에 따라 다른 준거가 있는 듯 보이겠지만, 그 틀을 지탱하는 바탕엔 그의 견고한 기준이 있다. 차별을 불편해하는 언니의 살아 있는 감각이다. 상대를 이루는 ‘존재의 성질‘을 어디에 하나로 묶지 않으려는 자세. 상대를 고유함 그 자체로 새로이 받아들이는 느린 마음이다.
..역사란 모든 개인이 살아온 시간의 합이다. 오늘을 사는 나와 당신이 그 역사의 뉘앙스를 이루고 있겠지. 고유하게. - P-1

51p.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을 때 사람은 쉬이 우울감에 빠진다. 특히 자기 생각과 감정, 상태를 현지어로 설명하기 힘든 경우엔 더 그렇다. 입을 열 때마다 상대가 미간을 좁히며 집중해야 소통이 가능하면, 폐 끼치기 싫은 마음과 함께 초라해진 마음이 찾아온다. 집 현관은 심호흡하고 건너가야 하는 일상의 국경이다.... - P-1

72p.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든 중요한 사람의 이름은 제대로 불리는 것을 경험한다.... - P-1

101p.
..결혼과 이민은 매우 닮았다. 다만 이 닮은꼴을 충족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가부장제에서 비켜난 결혼이거나 부부만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없어야 한다. 둘 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한다. 남의 편에 둘러싸인 관계 속에서 투항을 요구받는데 그동안 살아온 20~30년 경험은 애초에 잊자고 회유한다. 이민은 출신 국가의 경제력이 친정 부모의 능력처럼 작동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하러 오면 "돈 벌러 왔다"라는 소리를 듣고, 부자 나라에서 오면 글로벌 가족이라고 불린다. ‘다문화 가정‘은 ‘무시‘를 허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둘 다 지위 하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결승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 P-1

110p.
...‘그‘가 장벽을 넘었다. 장벽과 그에 압도당하는 동요를 구별하는 차원에 이른 것이다. 장벽에 사로잡힐 때, 이는 짜증으로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실상은 일상의 과속방지턱일 수 있다.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마다 장벽 하나쯤은 안기는 것이 인생이니까. 그걸 넘는 주체는 오직 우리다.... - P-1

126p.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적어도 청소년기를 보낸 30대와 40대로 이들에게는 아시아 사람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시아인 개념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경찰이고 교사이며 이웃인 곳에서, 즉 한국을 제1국으로 삼는 사람이 지역을 아시아와 지구로 확장할 때 갖는 동류의식 같다. 이렇게 보니 ‘한국 사회에서 황인종인 한국인이 왜 백인을 우대하고 동일시할까?‘ 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나이지리아 흑인도 백인과 동일시한다. 1등 시민이 1등 지구인(백인 우월주의 사고일지라도)과 동일시하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 P-1

137p.
...삶에서 나온 그들의 당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입양과 친부모에 관해 자연스레 거론해서 아이가 생부모를 찾고 싶을 때 부모를 배신하는 것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활 반경 안에 ‘생물학적 거울‘을 꼭 갖도록 조성하는 일이었다. 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 말이다.... - P-1

140p.
.."우리 지금 미국 집에 왔어."
..아이는 곧바로 오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아이가 사랑이 충만한 외할머니 품에서 마음에 묶여 있던 감정 매듭을 많이 푼 것 같아 감사했다. 에바도 지금 가장 안전한 곳에서 스스로 온갖 매듭을 푸는 것이 아닐까? 여느 아이가 겪는 성장통과 어쩔 수 없이 묶인 여러 고비 그리고 사회가 묶어놓은 불편한 시선의 자취들까지…. 나는 벨이 35개월 된 에바를 낳았다고 믿는다. - P-1

185p.
..한편에서 "내국인에게 돌아갈 자리도 부족하다. 외국인 이주민에게까지 혜택을 넓힐 수는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부족한 파이를 키우도록 정책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복지의 파이도 커져야 마땅하지만, 시장의 셈은 정비례를 모르고 권력은 반비례 정치로 몸을 사리며 표심 따라 부유한다. 오히려 국가 공동체를 갈등으로 분리 통치하는 시도가 병법처럼 통치술로 자리한 지 오래다. 그리하여 재난이 닥쳤을 때 호명되는 이름의 다수는 여전히 서민이다.... - P-1

217p.
..취약함을 보살피는 일상의 태도가 쌓이고 쌓여 정성을 기울인 사람까지 살리는 일이 일어날 때, 서구 전통에서는 이를 ‘은총‘이라 부르고 극동 문화에서는 ‘복 받았다‘라고 부른다.... - P-1

258p.
.."참 곱다. 예전에는 그렇게 다녀도 여름이라 초록이려니 했는데 지금은 마음에 콕 박히네. 아주 아름답다."
..먹먹해졌다. 삼킨 말이 있을 것 같았다. 혹, ‘또 볼 수 있을까?‘란 말은 아닐지. 인간 수명을 거의 누렸다는 생각에 이제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온 마음을 채운다는 말이지 싶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리한 지점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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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사형 선고뿐이야. 그것만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거든. 마틸드는 이런 생각을 했다. - P-1

..좋은 가문은 많은 자질을 가져다주지. 그런 자질이 없으면 기분이 거슬릴 거야. 예를 들어 쥘리앵 같은 사람이 그렇지. 그러나 좋은 가문이란 사형 선고를 불러올 만한 영혼의 특성을 퇴색하게 한단 말이야. 마틸드는 이런 생각을 했다. - P-1

.."딱한 일입니다!" 쥘리앵이 말했다. "죄를 저지르더라도 즐겁게 저질러야죠. 그것만이 범죄의 미점(美點)이니까요. 또한 그런 이유로만 범죄를 약간 정당화할 수도 있겠죠." - P-1

...쥘리앵은 이 오만한 아가씨에게 단 한 번이라도 무방비 상태로 모욕을 당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차피 사이가 벌어질 것이라면, 내가 개인적 위엄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곧장 뒤따라올 모욕의 표시에 반발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 자존심의 정당한 권리를 방어하면서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P-1

...귀족 계급의 살롱이란, 거기서 나온 후에 자랑하기에는 적당한 곳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예절 그 자체가 대단해 보이는 것도 처음 며칠뿐이다. 쥘리앵은 실제로 그것을 경험했다. 처음의 매혹이 지나면 놀라움이 찾아온다. 예절이란 것도 거친 태도가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없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 P-1

..위대한 행동치고 시초에 극단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었던가? 범인(凡人)의 눈에 그런 행동이 가능해 보이는 것은 행동이 완료된 후일 뿐이다. 그렇다, 앞으로는 그런 기적이 따르는 사랑이 내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 P-1

..질투의 고통으로 그는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연적이 사랑받는다는 의혹 자체가 이미 대단한 괴로움이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연적에 대한 사랑의 얘기를 상세히 듣다니 그건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케일뤼스나 크루아즈누아를 하찮게 보던 쥘리앵의 자존심이 이 순간 얼마나 심한 징벌을 받았던가! 그는 얼마나 격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그들의 사소한 장점까지도 과장해 생각했던가! 그는 얼마나 솔직한 심정으로 자기 자신을 멸시했던가! - P-1

..대담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화내는 것과 남에게 화풀이하는 것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무섭게 화내는 것은 강렬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 P-1

.."당신은 수도승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런던에서 제가 말씀드린 근엄의 원리를 너무 과장하고 계십니다. 슬픈 태도는 좋지 않아요. 권태로운 모습을 보여야지요. 당신이 슬픈 모습을 짓고 있으면 그건 뭔가 결핍된 것이 있거나 무슨 실패를 했다는 표시지요.
..그건 자신의 열등함을 보이는 거예요. 반대로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건 당신보다 열등한 사람이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애썼으나 소용없다는 표시지요. 당신은 지금 중대한 착각을 하고 계신 겁니다." - P-1

..정치사(政治事)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집안일에 있어서도 후작은 한 사흘 동안은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열중했다. 그러고 나면 그 행동 방침이 이치에 잘 들어맞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치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계획을 뒷받침할 때만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 P-1

...나는 죽는다 라는 그 숙명적인 말에, 그가 품었던 야심의 희망이 하나하나 그의 가슴에서 뽑혀 나갔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전 생애는 불행을 향한 기나긴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불행 가운데서도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 만한 것을 조금도 잊고 싶지 않았다. - P-1

..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단 말인가? 그 가엾은 노인을 보고 이런 무서운 비애에 빠져야 하는 것은 내가 남들처럼 늙어서 죽어야 할 경우뿐이다. 그러나 한창 나이에 순식간에 죽는다는 것은 그런 서글픈 노쇠에서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 P-1

..이때 쥘리앵은 능숙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두드리듯 침착하게 마틸드의 성격을 다룰 수 있었다.... - P-1

..우리는 나일강의 근원을 전혀 모르고 있다. 강들 중의 왕인 나일강이 조그만 개울 상태로 흐르는 근원을 인간의 눈은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이처럼 어떤 인간의 눈도 쥘리앵의 나약한 모습은 보지 못할 것이다.... - P-1

..감옥에서의 최악의 불행은 자기 방문을 잠글 수 없는 것이란 말이야.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 P-1

(작품 해설)
...쥘리앵은 자신의 출신 계층 내에서나 그가 발붙이려고 애쓰는 상류 계층 내에서나 다 같이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환경 속에서 낯선 사람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철저하게 뿌리 뽑힌 자이며 항상 ‘대양 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홀로’ 있는 이 외로운 이방인은 상층 계급뿐만 아니라 시대 전체, 시대의 가치관 및 이상 전체와 대립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특이한 감수성의 소유자는 스탕달이 창안한 저 사회적 정화(精華)들의 미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서클인 ‘행복한 소수’란 그룹 말고는 어떠한 사회적 카테고리 속에도 집어넣기 어려운 인물이다. 이 예외적인 존재에 대해 ‘그의 존재 자체가 시대에, 선과 악에, 가치관에, 생의 의미에 제기된 의문’이라고 한 어떤 비평가의 견해는 수긍할 만하며, 그것이 쥘리앵 소렐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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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p. «파노라마섬 기담»
..히로스케는 예술이란 보기에 따라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욕구의 발로인 셈입니다. 가령 음악가는 천연의 바람 소리나 파도소리,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소리를 창조하려 애씁니다. 화가는 모델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개성에 따라 바꾸고 미화하며, 시인 역시 단순히 사실을 보도하거나 기록하는 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이른바 예술가들은 간접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번거로운 수단만으로 만족합니다. 어째서 그들은 대자연에 착안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직접 대자연을 악기로, 물감으로, 문자로 구사하지 않을까요.... - P-1

36p. «파노라마섬 기담»
..그보다 히로스케는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난 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이제 호적에서도 말소되었고, 이 넓은 세상에 일가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한 명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후좌우에 앉은 승객들도, 창밖으로 보이는 길가의 풍경도, 한 그루의 나무도, 한 채의 집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갓 태어난 듯 매우 산뜻한 기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이며 이제부터는 외톨박이처럼 홀로 그 감당하기 벅찬 대사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형언할 수 없는 고독감에 끝내는 눈물까지 나려 했습니다. - P-1

86p. «파노라마섬 기담»
...잠시 뒤 히로스케가 재촉하는 바람에 지요코가 당나귀에 올라타서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어린 여인 바로 위에 피어 있던 눈에 띄게 커다란 동백꽃 한 송이가 마치 액체가 방울져 떨어지듯이 똑 떨어지더니 어린 여인의 보동보동한 어깻죽지를 타고 미끄러져 늪에 고인 물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늪에 고인 물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파문은 한 줄도 일지 않았습니다.... - P-1

142~143p. «인간 의자»
..의자 안의 사랑(!)이 얼마나 신비롭고 도취적인 매력을 가졌는지 실제로 의자 안에 들어와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촉각과 청각, 그리고 약간의 후각만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암흑 세계의 사랑입니다. 결코 이 세상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나라의 애욕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정말 상상조차 못하겠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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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 나나에하마의 난바다에 걸친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며 아이짱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고 했다. 그날부터 현실을 버리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뛰어드는 것 외에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년을 이끌어준 것은, 울기 위해 들어간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자기의 손을 찾아 소리없이 다가온 알지 못할 사나이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미묘한 속삭임이었다……. - P-1

.."이렇게 하루 종일 일부러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뭔가 다른 차원의 상상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어요. 한번 해보세요." - P-1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지만, 아리오는 이 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너무나 가슴아팠다. 고지는 꺼림칙한 마조히스트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상대는 소설 같은 데 나오는 검정 타이츠의 예쁜 소녀나 음탕한 귀부인도 아니고, 아이짱이 말했던 어느 건달인 것이 틀림없다. 아무나 배짱있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니며, 하베로크 엘리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건달 따위에게 시달림을 받고 싶어하는 병적인 성적 욕구가, 고지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

"..다 아는 일이지만, 한 종류의 꽃이라면 파랑‧빨강‧노랑의 세 빛깔이 갖추어져 있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장미나 백일초에는 어느 빛깔도 있지만 파란색이 없어요. 또 나팔꽃에는 절대로 노란색이 없지요. 어떤 꽃이나 한 가지 색은 없는 거예요. 특히 올해—아아, 이제는 작년이군요, 영국‧독일‧프랑스의 대표적인 장미꽃 명인이 일제히 라일락 타임, 마겐타, 프레류드라는 이름의 파란 장미를 저마다 처음으로 발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노란 나팔꽃도 세다가야(世田谷)의 오사키(尾崎)란 분이 몇 십 년이나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본디 있을 수 없는 색을 무리하게 닮은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피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다만, 고지 씨가 죽음을 당한 1954년에, 영국‧독일‧프랑스의 장미 제작 3대 명인이 모두 잇따라 파란 장미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머리를 스쳐가는 찰나에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으니까, 혹시 내 추리가 맞다고 하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장미의 보고서’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 P-1

.."가장 원초적인 것이지만 누구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단순하고 강렬한 동기. ……알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그게 말이지요, 단지 고지 씨가 ‘동생’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질투고 열등감이고 이해관계고 아무것도 없지만 고지 씨가 동생이니까 죽였다, 그런 일은 없을까요? 누구든지 모든 ‘형’에게는 이유가 없는 카인의 피가 솟구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놀라운 동기가 아닐까요?" - P-1

.."이것이 피면 이름은 분명히 ‘오프란드 워 네안offrande au néant,’—‘허무에의 제물’로 할 거라고 고지가 말했던 겁니다. 나는 모르지만 발레리의 시에 그런 것이 있다고 했어요."
..‘허무에의 제물’—아리오도 그 방면에 문외한이지만, 다음에 물어 보았더니 《잃어버린 미주(美酒)》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였다. - P-1

"...그에게는 쿠바드라는, 지금도 미개인들 사이에는 남아 있는 의만(擬娩)의 끼가 있었던 모양이야. 요컨대 첫 아이가 생겼는데 아내에게만 산고를 겪게 할 수는 없다는 감정이 고조되어, 마치 자기도 낳는 것처럼 함께 괴로움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야...." - P-1

..무레타는 이렇게 해서 ‘범인’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워 없애버렸다. 지금 무레타가 밝힌 말 그대로 고지가 가장 사랑한 어머니를 여읜 뒤에 신의 각인 같은 십자가를 육체에 지니고, 견디지 못하여 어리석은 꿈의 세계로 도피하였다면—그리고 소지가 그것을 계속 감쌌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엉뚱한 짐작으로 ‘범인’이라고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엾은 공상 끝에 생긴 ‘고노스 겐지’는 이렇게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와 함께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도 덧없이 송두리째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것일까. - P-1

..그날을 위해서 뿌리는 썩은 흙 속으로 뻗어가고 줄기는 끊임없이 양분을 빨아 올린다고 생각하니,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당연한 생리가 실은 몹시 잔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아리오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히사오는 벌써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서향(瑞香)의 향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잖아."
..여느 때의 언덕 중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저녁 어둠 속에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숨을 내쉬었다. - P-1

...‘메구로(目黑)’에 사는 그가 ‘메시로(目白)’의 사건에 휘말려, ‘메아오(目靑)’의 방화와 ‘메아카(目赤)’의 살인에 이끌려, 지금 범인인 오지를 가리키는 ‘메오(目黃)’의 부동명왕 앞에 서 있는 것은, 둘도 없는 기이한 인연인 것 같다.... - P-1

"...전부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1955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무책임한 호기심이 새로 만들어낼 즐거움만은 당신들 몫이 아니겠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그럴싸하게 잔학한 사건이 얼마든지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구경하는 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처참한 광경이라도 좋아서 바라보는 것이 괴물의 정체라고. 나에게는 무서운 허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그 장미의 이름에서 나온 시는 뭔가 우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음미해 보아도 그런 허무에의 제물을 위해서 나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내가 도지로를 죽인 것은 인간의 긍지를 위해서 한 노릇이지만, 어떻게 되었던 바다는 말이 없는 거야. 내가 한 짓도 다른 의미로 ‘허무에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P-1

"...내가 생각한 것은 한 장의 장대한 벽화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어. 거기에는 살아서 혈육이 통한 인간을 그대로 새겨 넣고, 무지로 인한 어리석은 비극이 아닌, 순정한 비극이 가진 성격을 빠짐없이 갖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거야. 가령 그것이 실현되어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으로 불린다면, 그때는 나도 이름을 드러내 놓고 지금의 일본에는 이런 살인이 필요하다고, 순수한 악, 비극다운 비극이, 거꾸로 이 시대의 인간질서를 돌이킬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어...." - P-1

(해설)
...사실, 한 사람의 작가는 가능한 한 다채로운 작품을 가려 쓰는 능력과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언뜻 보기에 아무리 비현실이나 반세계와 관계없는 소설이지만, 내 관심은 늘 죽음과 변신, 이를 꿰뚫는 시간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로 주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라는 작가 자신의 말을, 나는 솔직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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