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날 아침 나나에하마의 난바다에 걸친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며 아이짱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고 했다. 그날부터 현실을 버리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뛰어드는 것 외에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년을 이끌어준 것은, 울기 위해 들어간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자기의 손을 찾아 소리없이 다가온 알지 못할 사나이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미묘한 속삭임이었다……. - P-1

.."이렇게 하루 종일 일부러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뭔가 다른 차원의 상상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어요. 한번 해보세요." - P-1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지만, 아리오는 이 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너무나 가슴아팠다. 고지는 꺼림칙한 마조히스트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상대는 소설 같은 데 나오는 검정 타이츠의 예쁜 소녀나 음탕한 귀부인도 아니고, 아이짱이 말했던 어느 건달인 것이 틀림없다. 아무나 배짱있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니며, 하베로크 엘리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건달 따위에게 시달림을 받고 싶어하는 병적인 성적 욕구가, 고지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

"..다 아는 일이지만, 한 종류의 꽃이라면 파랑‧빨강‧노랑의 세 빛깔이 갖추어져 있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장미나 백일초에는 어느 빛깔도 있지만 파란색이 없어요. 또 나팔꽃에는 절대로 노란색이 없지요. 어떤 꽃이나 한 가지 색은 없는 거예요. 특히 올해—아아, 이제는 작년이군요, 영국‧독일‧프랑스의 대표적인 장미꽃 명인이 일제히 라일락 타임, 마겐타, 프레류드라는 이름의 파란 장미를 저마다 처음으로 발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노란 나팔꽃도 세다가야(世田谷)의 오사키(尾崎)란 분이 몇 십 년이나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본디 있을 수 없는 색을 무리하게 닮은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피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다만, 고지 씨가 죽음을 당한 1954년에, 영국‧독일‧프랑스의 장미 제작 3대 명인이 모두 잇따라 파란 장미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머리를 스쳐가는 찰나에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으니까, 혹시 내 추리가 맞다고 하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장미의 보고서’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 P-1

.."가장 원초적인 것이지만 누구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단순하고 강렬한 동기. ……알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그게 말이지요, 단지 고지 씨가 ‘동생’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질투고 열등감이고 이해관계고 아무것도 없지만 고지 씨가 동생이니까 죽였다, 그런 일은 없을까요? 누구든지 모든 ‘형’에게는 이유가 없는 카인의 피가 솟구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놀라운 동기가 아닐까요?" - P-1

.."이것이 피면 이름은 분명히 ‘오프란드 워 네안offrande au néant,’—‘허무에의 제물’로 할 거라고 고지가 말했던 겁니다. 나는 모르지만 발레리의 시에 그런 것이 있다고 했어요."
..‘허무에의 제물’—아리오도 그 방면에 문외한이지만, 다음에 물어 보았더니 《잃어버린 미주(美酒)》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였다. - P-1

"...그에게는 쿠바드라는, 지금도 미개인들 사이에는 남아 있는 의만(擬娩)의 끼가 있었던 모양이야. 요컨대 첫 아이가 생겼는데 아내에게만 산고를 겪게 할 수는 없다는 감정이 고조되어, 마치 자기도 낳는 것처럼 함께 괴로움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야...." - P-1

..무레타는 이렇게 해서 ‘범인’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워 없애버렸다. 지금 무레타가 밝힌 말 그대로 고지가 가장 사랑한 어머니를 여읜 뒤에 신의 각인 같은 십자가를 육체에 지니고, 견디지 못하여 어리석은 꿈의 세계로 도피하였다면—그리고 소지가 그것을 계속 감쌌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엉뚱한 짐작으로 ‘범인’이라고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엾은 공상 끝에 생긴 ‘고노스 겐지’는 이렇게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와 함께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도 덧없이 송두리째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것일까. - P-1

..그날을 위해서 뿌리는 썩은 흙 속으로 뻗어가고 줄기는 끊임없이 양분을 빨아 올린다고 생각하니,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당연한 생리가 실은 몹시 잔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아리오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히사오는 벌써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서향(瑞香)의 향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잖아."
..여느 때의 언덕 중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저녁 어둠 속에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숨을 내쉬었다. - P-1

...‘메구로(目黑)’에 사는 그가 ‘메시로(目白)’의 사건에 휘말려, ‘메아오(目靑)’의 방화와 ‘메아카(目赤)’의 살인에 이끌려, 지금 범인인 오지를 가리키는 ‘메오(目黃)’의 부동명왕 앞에 서 있는 것은, 둘도 없는 기이한 인연인 것 같다.... - P-1

"...전부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1955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무책임한 호기심이 새로 만들어낼 즐거움만은 당신들 몫이 아니겠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그럴싸하게 잔학한 사건이 얼마든지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구경하는 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처참한 광경이라도 좋아서 바라보는 것이 괴물의 정체라고. 나에게는 무서운 허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그 장미의 이름에서 나온 시는 뭔가 우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음미해 보아도 그런 허무에의 제물을 위해서 나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내가 도지로를 죽인 것은 인간의 긍지를 위해서 한 노릇이지만, 어떻게 되었던 바다는 말이 없는 거야. 내가 한 짓도 다른 의미로 ‘허무에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P-1

"...내가 생각한 것은 한 장의 장대한 벽화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어. 거기에는 살아서 혈육이 통한 인간을 그대로 새겨 넣고, 무지로 인한 어리석은 비극이 아닌, 순정한 비극이 가진 성격을 빠짐없이 갖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거야. 가령 그것이 실현되어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으로 불린다면, 그때는 나도 이름을 드러내 놓고 지금의 일본에는 이런 살인이 필요하다고, 순수한 악, 비극다운 비극이, 거꾸로 이 시대의 인간질서를 돌이킬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어...." - P-1

(해설)
...사실, 한 사람의 작가는 가능한 한 다채로운 작품을 가려 쓰는 능력과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언뜻 보기에 아무리 비현실이나 반세계와 관계없는 소설이지만, 내 관심은 늘 죽음과 변신, 이를 꿰뚫는 시간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로 주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라는 작가 자신의 말을, 나는 솔직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