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p.
..하지만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 해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질 것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 따위는 단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 또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랬으니 나 자신을 불행한 괴짜로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P-1

60p.
..선사 시대의 공룡들처럼 지성보다는 근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지성과 감성을 배제하고 의지와 경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현대판 공룡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이 현대판 공룡의 놀라운 성공 때문에 현대인들은 너도나도 이 공룡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다.... - P-1

97p.
..사실 질투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긴다.... - P-1

98p.
..나는 어린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게끔 키우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공작새들은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공작새들은 저마다 자기 꼬리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작새는 온순하다.... - P-1

100p.
..그러므로 현대는 특별히 질투가 만연해 있는 시대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나라를, 여자는 남자를, 정숙한 여자는 정숙하지 않으면서도 처벌받지 않는 여자를 질투한다. 질투가 다른 계급과 민족, 다른 성(性) 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주요한 원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질투의 결과로 빚어진 정의는 자칫하면 최악의 것, 즉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 정의가 되기 쉽다. - P-1

109p.
..합리적인 도덕 원칙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행동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물론 이런 논리가 성립되려면, 그런 행동은 결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금욕주의를 제쳐두고 이야기한다면, 이상적인 도덕군자란 즐거움의 효과를 능가할 만한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 P-1

115p.
..설사 합리적인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삶의 방식을 개선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죄의식 안에는 절망감과 자존심을 갉아먹는 감정이 존재한다. 자존심을 잃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행동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될 만한 상황을 되도록 피해가는 데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 P-1

118~119p.
..인습적인 도덕 원칙은 지나치게 자아에 집중해왔다. 죄악의 개념은 자아에 어리석을 만큼 관심을 집중한 결과로 빚어진 산물 가운데 하나다. 이런 그릇된 도덕이 빚어낸 주관적인 기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성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죄의식에 감염된 사람이 병을 완치하려면 이성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쩌면 이 병은 정신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 병을 극복한 사람은 병에 걸려본 적도 없고, 치료한 적도 없는 사람에 비해 정신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성에 대한 혐오가 흔히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성의 작용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P-1

128p.
..자신의 동기를 의심해보는 것은 특히 자선가와 정치가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 또는 이 세상의 일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고, 이 전망을 실현하면서 인류 전체 또는 그 일부에 은혜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때로는 옳고, 때로는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신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 P-1

148p.
..물론 일부러 여론을 조롱하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여론을 조롱한다는 것은 전도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정말로 여론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힘이자, 행복의 원천이 된다. 지나치게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한결같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사회보다 훨씬 더 재미 있는 사회다. 각자의 성격이 개성적으로 발전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개성이 유지된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복사판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수 있다. 이것은 귀족제도의 장점 중 하나였다. 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던 귀족 제도는 괴팍스런 행동이 허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 P-1

150~151p.
...그러나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 P-1

159p.
..과학자의 삶에서는 행복의 모든 조건이 실현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고, 자신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에도 중요하게 보이는 업적을 달성한다. 과학자들의 업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그들의 업적은 중요하게 여긴다. 과학자가 예술가보다 행복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반인들은 그림이나 시를 이해할 수 없으면 나쁜 그림, 나쁜 시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린다(사실이다). 결국 최고 실력의 화가들이 다락방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화가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행복을 누린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보이는 회의적인 태도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기주장을 되새겨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아리 속에 파묻힌 채 냉혹한 바깥 세계를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 P-1

161~162p.
...최고의 학식을 갖춘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냉소주의는 안락감과 무력감의 결합에서 생기는 것이다. 무력감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안락감은 이런 생각을 할 때 느끼는 고통을 웬만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 P-1

167p.
..우표 외에도 수집할 수 있는 물건은 얼마든지 있다. 옛 도자기, 담뱃갑, 로마의 동전, 활촉, 부싯돌 등 상상해보면 황홀한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가! 사실 우리 인간들 중에는 이렇게 작은 즐거움에 비해 너무나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어렸을 때 수집을 해본 경험이 있지만, 수집은 성인들에게는 더 이상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즐거움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 P-1

168p.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받을 것이다. - P-1

171p.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 P-1

176p.
...무수히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경험이 된다. 우리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건들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관심이 내면으로 쏠려 있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에 값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관심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다가 한 번씩 자신의 영혼으로 눈을 돌릴 때면, 자신의 내면이 대단히 다채롭고 재미 있는 종류의 원료들을 분류하고 재결합하여, 아름다운 혹은 발전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P-1

185p.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다.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열정을 잃게 되는 주된 원인은 바로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미개인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한다. 이런 모습은 직접적인 충동에 순종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일하러 나서는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충동에 의해서 움직인다.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경우, 충동은 충동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는 직접적으로 행사되지 않고, 이론이나 신념, 결단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행사된다. 막 출근길에 나선 사람은 방금 아침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다. 그러나 그는 배가 고파질 것을 알고 있고, 직장에 나가는 것은 앞으로 맞게 될 허기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 P-1

199p.
..사랑을 중요시하지 않는 야망은 대개 인류에 대한 분노 또는 증오가 빚어낸 산물이다. 이러한 분노와 증오는 어려서 겪은 불행, 어른이 되어서 겪은 불의, 또는 피해망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한다. 세상을 완전히 즐기려는 사람은 지나치게 강한 자아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이 가진 특징 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받는 사랑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이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할 때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 - P-1

200p.
...여러 종류의 신중함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랑에 대한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 P-1

213p.
..젊음이 지나간 뒤에는 더욱 그렇겠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곧 인생의 막을 내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최초의 세포로부터 멀고 먼 미지의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관습적인 표현을 빌린 의식적인 생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마음가짐은 초문명적이며 지적인 세계관이지만, 막연한 본능적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원시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초문명적인 세계관에는 이런 본능적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미래에 확고한 흔적을 남길 만큼 위대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일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특별한 재능을 갖지 못한 남녀의 경우에는 자녀를 통해서만 이러한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 - P-1

229~230p.
..물론 파괴는 다음에 이어질 건설의 준비과정으로서 꼭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파괴는 건설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건설과는 전혀 무관하게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흔히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건설을 위해 파괴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하는 활동의 파괴성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파괴한 뒤에 무엇이 건설되느냐고 추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새로 건설될 것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로 모호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파괴적인 준비 과정에 대해서만 열띤 태도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 P-1

240p.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일생 동안,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습득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한 지식이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연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것, 영웅적이거나 기괴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구경거리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베푸는 여러 특권 중의 하나를 포기하는셈이다. - P-1

254p.
..체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절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할 수 없는 희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다. 전자는 나쁜 것이고, 후자는 좋은 것이다. 중요한 일에 실패해 원대한 성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버린 사람은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히기 쉽다.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힌 사람은 진지한 활동이라면 뭐든지 단념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관용구나 명상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절망감을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내면의 좌절을 숨기기 위해서 어떤 위장을 한다고 해도 이런 사람은 본질적으로 쓸모없는 인간, 철저히 불행한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복할 수 없는 희망 때문에 체념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정복할 수 없는 희망은 개인적 관심의 범위를 벗어난 원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든지 간에 죽음이나 질병 앞에 무릎을 꿇거나, 적에게 정복당하거나 성공에 도달할 수 없는 어리석은 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희망이 꺾이는 일이 수천 번 되풀이된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 개인적인 목적이 인류를 위한 보다 원대한 희망의 일부인 경우에는 아무리 실패를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절망감에 빠지지는 않는다. - P-1

257p.
..심각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을 때, 기상천외한 비유와 절묘한 비교를 동원해서 위안을 찾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문명인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화상을 가지고 있고, 그 자화상을 더럽힌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 일어나면 속이 상할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자화상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자화상으로 가득 찬 화랑을 통째로 가지고 있다가 문제 상황에 맞는 그림을 하나 골라내는 것이다. 그 화랑에 우스꽝스러운 작품을 몇 점쯤 걸어두면 더 좋다. 굉장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자화상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매일 희극에 등장하는 광대 모습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짜증이 더 솟구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 P-1

258p.
..어떤 종류의 체념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는 용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체념은 비록 처음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절망과 환멸로부터 이 사람을 보호해준다. 날이 갈수록 믿을 수 없어지는 사실을 믿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부아를 돋우는 일은 없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조건의 하나다. - P-1

266p.
..모든 불행은 의식이 분열되거나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서 생긴다.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아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객관적인 관심과 사랑의 힘에 의해 자아와 사회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자아와 사회는 통합될 수 없다. 행복한 사람은 자아의 내적인 통합이나 자아와 사회가 이루는 통합의 실패로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의 인격은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세상에 대항하여 맞서고 있지도 않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의 본능을 좇아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에 충분히 몸을 맡길 때,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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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p.
..소중한 것이 곧 신이 된다.
..필자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소중한 것과 두려운 것은 신이 된다. - P-1

28p.
..지금도 솎아내기는 계속되고 있다.
..낳고 나서 솎아내는지, 낳기 전에 솎아내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도 가장 효과적인 솎아내기일지 모른다.
..다양한 수단으로 솎아내진 아이들 대신 애완동물과 캐릭터 상품이 세상에 범람한다.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아이들이, 우리를 위한 진혼의 아이돌이, 영상 속에서 인형처럼 완벽하게 웃으며 우리를 응시한다. - P-1

70p.
..아닌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나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쓸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은 대체품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상실의 예감을 지니고 있다. ‘좋아하는 것‘에는 상실의 아픔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P-1

164p.
..바벨의 탑 때부터 파괴의 예감이 존재하는 곳에는 높은 건물을 짓게 돼 있다. - P-1

177p.
..여기가 도쿄의 중심. 자연으로 뒤덮인 일왕의 성. 과거에 이곳에서부터 소용돌이를 그리듯 도시가 형성됐다. 교토가 바둑판이고, 오사카가 바다에서부터 강을 따라 동서로 확장된 것과는 다르다.
..확실히 이곳은 늘 정지해 있고, 주위 도시만이 눈이 핑핑 돌아갈 것처럼 변화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모두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 P-1

188p.
..도쿄는 그림자도 배제해왔다. 그때 이래로 절전이 장려되고 있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환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어둠은 제거되고 사물도 사람도 밝게 비춰진다.
..그건 일본화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그림은 순간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변화해가는 시간 자체를 그린다. 순간이라면 그 시각의 빛을 그리고 그 빛이 자아내는 그림자도 그려내야 하지만, 흐르는 시간 전체를 그린다면 그림자는 의미가 없다.
..일본화는 이 경치를 담았던 것이다. 그림자도 어둠도 없는, 한없이 이차원 애니메이션에 가까워가는 이 세계를. - P-1

246p.
.."맞아, 맞아. 나이 많은 사람들 그림이 무서워. 이렇게 보면 애들 그림은 되레 너무 잘 그린 것 같다니까. 일만 하고 사느라 그림 같은 건 그린 적도 없는 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해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봤다, 그런 게 무섭지." - P-1

259p.
..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봤다고 생각하는 과거.
..하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
..그건 조금도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아주 평범하게 체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P-1

311p.
..그렇다면 묘비명에 새겨진 이름, ‘도쿄‘라는 글자는 영원히 붉은색이다. 피가 통하는 이름이 ‘언제까지고‘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그 선명한 붉은색을 눈에 아로새길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 글자를 우러러보고, 이윽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그 앞을 지날 것이다. 무수한 각자의 인생을 ‘과거형‘으로 하기 위해.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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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말도 되는대로 내뱉은 것 없이 족히 두어 시간이나 교묘한 대화를 나눈 끝에, 마침내 농부의 교활함이 먹고살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부유한 사람의 교활함을 이겼다. 쥘리앵의 새로운 생활을 규정할 많은 조문이 확정되었다. 그의 봉급이 400프랑으로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에 선불로 지불하도록 타결되었던 것이다. - P-1

.."무슨 어리석은 소리요!" 남편은 대꾸했다. "우리 마음에도 꼭 들고 우리에게 잘 봉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다 하다니! 그가 소홀해져서 성의를 북돋아 줘야 할 때나 선물을 하는 거지." - P-1

..극도의 혼란 때문에 두 볼이 붉게 물들고 당황한 기색에 싸인 두 여인 사이에서, 쥘리앵의 오만한 창백함과 어둡고 단호한 태도는 야릇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 여인들과 일체의 부드러운 감정을 멸시했다. - P-1

..쥘리앵의 하찮은 허영심은 독백을 계속했다. 어느 날 내가 입신양명하게 되었을 때 가정 교사라는 천한 직분에 있었다고 누가 비난이라도 한다면 나는 사랑 때문에 그랬노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더욱더 이 여자를 사로잡아야겠다. - P-1

...오래 갈망하던 것을 막 획득하고 난 다음에 으레 그렇듯이, 그의 마음은 놀라움과 불안한 동요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마음의 상태란, 무엇을 갈망하는 데 습관이 들었다가 더 이상 갈망할 것을 찾지 못하게 되었으나 아직 추억에 잠기기는 이른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 P-1

...쥘리앵이 자기보다도 위선적인 데 놀란 군수는 무언가 분명한 얘기를 끌어내 보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신이 난 쥘리앵은 연습할 기회를 포착하고는 다른 말로 그의 답변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졸지 않는 척해 보이는 의회의 회기 끝 무렵을 이용하려고 하는 웅변적인 장관도, 이처럼 많은 변설을 늘어놓으면서 이처럼 조금밖에 말하지 않은 때는 없으리라.... - P-1

.."그것이 세속의 헛된 화려함의 결과란 것일세. 자네는 분명 웃음 짓는 얼굴에만 익숙해 있을 것이네. 그건 거짓 연극에 지나지 않지. 진실은 엄격한 것이라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책무도 역시 엄격한 것이 아닐까? 외면의 공허한 우아함에 대한 지나친 민감성이란 약점을 자네의 양심이 경계하도록 늘 주의해야 할 것이네." - P-1

...셸랑 사제는 자기 자신에게 그랬듯 쥘리앵에 대해서도 경솔했던 셈이었다. 쥘리앵에게 올바르게 사고하고 헛된 소리를 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 준 연후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습관이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훌륭한 논법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 P-1

..그 장엄한 종소리는 50상팀의 임금을 받는 스무 명의 일꾼이 열대여섯 명 정도의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노동이란 생각을 쥘리앵에게 불러일으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밧줄이나 목재가 낡아 가는 것이라든지, 2세기마다 떨어져 내리는 종의 위험 따위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지기들의 임금을 깎는 수단이나, 또는 성당의 재정을 축내지 않으면서 어떤 물건을 선심 쓰듯 대신 지불함으로써 임금을 가로채는 수단 따위에 생각이 미쳐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현명한 성찰을 하는 대신, 그처럼 우렁차고도 은은한 종소리에 들뜬 쥘리앵의 영혼은 공상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훌륭한 성직자도 위대한 행정가도 되지 못하리라. 이처럼 흥분하기 쉬운 영혼은 기껏 예술가가 되기에나 안성맞춤인 것이다.... - P-1

..진정한 정열이란 오직 그 정열 자체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파리에서는 정열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 P-1

.."저를 멸시하는 사람에게 저는 대답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 같군요." 쥘리앵이 몹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네는 그 경멸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어. 그것은 과장된 찬사로만 표시된다네. 자네가 바보라면 그런 찬사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출세하고자 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척해야 할 걸세." - P-1

...이 대귀족들은 왕의 사륜마차에 타본 명문 귀족의 후예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쥘리앵은 ‘십자군’이란 단어만이 그들의 얼굴에 존경 어린 엄숙한 표정을 부여하는 유일한 말임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존경에는 항상 친절을 베푸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 P-1

...드 라 몰 저택에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항상 완벽한 정중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낙오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골뜨기다운 상식은 이런 결과를 ‘뭐든지 새로운 동안만 아름다운 법’이란 속담으로 설명하려 들었다.
..어쩌면 쥘리앵에게 처음보다 좀 더 통찰력이 생겼거나, 아니면 파리의 세련이 일으켰던 처음의 매혹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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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곶 이야기»
...나의 타고난 비상을 방해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었다. 하지만 행위의 실패는 때때로 그 목적의 선함에 의해 보상받는다. 내 경우에도 효과는 있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 수동적이기만 했던 몽상에서 벗어나, 나는 몽상을 향한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는 주어진 책에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손으로 천일야화를 써야 했다. 나는 몽상을 향한 탐닉에서 몽상을 향한 용기로 나아갔다. ······ 어쨌든 탐닉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용기가 있는 것이다. - P-1

39p. «곶 이야기»
...걸핏하면 내 안에서 고개를 치켜들려던 강하고 날카로운 비애의 감정에 공포가 불을 지핀 탓에, 나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에는 쓸쓸함과 불안함, 이유를 알 수 없는 동정이 뒤섞여 있었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며 버릇없이 울 때 속이 후련해지는 울음과는 달리, 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애달픔이 있었다. 나는 멀리 소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았다. 눈물 젖은 눈에, 그 소나무는 비에 흠뻑 젖은 듯이 보였다.... - P-1

43p. «곶 이야기»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어째서인지 이번 일만큼은 부모님은 물론 나이외의 누구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또 그것을 말하지 않는 데서 기쁨과 용기를 가지라고, 묵계와도 같은 무언의 다정함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 P-1

44p. «곶 이야기»
..나는 이번 여름에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법조차 배워 오지 못한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야단맞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움직일 수 없는 신비로운 만족감이 있었다. 수영은 배우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인간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을, 훗날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매고, 어쩌면 그것과 바꿀 수 있다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하나의 진실을, 나는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 P-1

55p. «시를 쓰는 소년»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을 노래하는 것에, 소년은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는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없는 것을 조금도 한탄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아직 체험하지 않은 세계의 현실과 그의 내적 세계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나 긴장도 보이지 않았기에, 굳이 자신의 내적 세계의 우위를 믿을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는 어떤 비이성적인 확신에 의해, 그가 이 세상에서 아직 체험하지 않은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처럼 예민한 감수성에는,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원형이, 어떤 경우에는 단지 예감이기는 했지만, 포착되어서 복습되어 있고, 나머지 경험은 모두 이러한 감정의 원소들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원소란? 그는 독단적으로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말이다." - P-1

60p. «시를 쓰는 소년»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을 하는 인간의 그 평범함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P-1

62p. «시를 쓰는 소년»
..소년은 들으면서, 그의 고백에 단 하나도 미지의 요소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 모든 것은 글로 쓰였고, 모든 것은 예감되었으며, 모든 것은 복습되었다. 글로 쓰인 사랑이 훨씬 생생하다. 시로 노래된 사랑이 훨씬 아름답다. R이 그 이상을 꿈꾸기 위해 현실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함을 향한 욕구가 왜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P-1

63p. «시를 쓰는 소년»
..⸺ 바로 그 순간, 소년은 무언가에 눈을 뜬 것이다. 사랑이니 인생이니 하는 인식 속에 반드시 끼어드는 우스꽝스러운 불순물, 그것 없이는 인생이나 사랑의 한가운데를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불순물을 본 것이다. 즉, 자신의 짱구를 아름답다고 굳게 믿는 것. - P-1

78p. «의자»
..신음은 고통의 전달 수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음 소리를 냄으로써 달래지는 고통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고통은 알려지기를 바라지만, 고통 속의 쾌락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 P-1

103p. «보온병»
..가와세도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인사말은 잊은 채 대답했다. 가와세는 그 순간, 늘 빈틈없이 꼼꼼하게 정해놓은 과거와의 거리가, 뭔가의 계기로 살짝 줄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와세는 그것이 외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도량형이 외국에서는 흐트러져버린다. 타국에서의 만남은 표정을 순식간에 과장해버려,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해도 이미 늦어 곤란할 때가 있다. 이것은 꼭 남녀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남자 지인끼리도 그렇다. - P-1

106p. «보온병»
...이 여자는 옛날부터, 먼 곳의 불을 바라보듯 보면 아름답다고, 가와세는 생각했다. - P-1

118p. «보온병»
..그런 식에 익숙해지면, 여자도 결국 자기방어를 위해 자연스럽게 열정을 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무척 담백하게 느껴지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를 썼다. 반쯤은 공리적인, 반쯤은 취향적인 동기에서 가와세는 아사카와의 정사(情事)가 최대한 ‘세련된 관계‘임을 바랐고, 그러는 사이에 그것이 서로의 허영심의 핵심이 되면서 어느새 옅은 유쾌한 절망이 스며들었다. 늘 주고받는 농담이나 말장난도 점점 공허해지더니, 어느샌가 자신들은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고 천하무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P-1

136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이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동기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현세는 정지해버린다. 고승의 눈에는 그 정지된 모습만이 보일 뿐, 현세는 그저 종이 위의 그림, 타국의 지도 한 장일 뿐이다. 이런 무루(無漏)의 심경은 공포마저 잊게 만든다. 왜 지옥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현세의 무력함은 너무도 자명했고, 게다가 그는 결코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높은 덕의 결과라는 것 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P-1

142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남자들이 정쟁을 일삼는 동안, 그녀는 다른 방법, 순전히 여성적인 방법에 의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삭발하여 출가하는 여자를 비웃었다. 대체로 여자는 속세는 버릴지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버릴 수 없다. 남자만이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노승은 한때 속세를 버렸다. 그는 귀족들보다 훨씬 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속세를 버렸듯이, 그는 이번에는 후궁 때문에 내세마저 버리려는 것이다. - P-1

143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이었던 고승이 한순간에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버린 것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싸움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용기는, 만약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할 일을 기꺼이 금하고 있다는 긍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 P-1

145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사실은, 이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고승은 그만큼 더 깊이 부처를 배반하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불가능이 어느새 해탈의 불가능과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은 확고해지고, 사념(邪念)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희망이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단념하기 쉽지만, 이 불가능한 사랑은 호수처럼 고요히 땅을 뒤덮고, 흘러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 P-1

164p. «히나의 집»
...어느 시대든 청춘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 오늘날처럼 청춘을 방해하는 외부의 장해가 많은 시대에는 내부의 장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동정을 잃지 않는 건실한 청년의 수가 오히려 많다 라는 반대 논리도 성립하는 것이다. - P-1

174p. «히나의 집»
..나는 전차가 그 불빛 한가운데서 멈추고, 발차하고, 또다시 그 불빛의 낙원에서 멀어져가는 것이 오늘밤에는 묘하게 느껴졌다. 타고 있는 전차가 마치 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은 언제나 항해를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 P-1

195p. «표»
..그는 자신도 강으로 가서 거기서 다니를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회색 바지를 접고 앉아 있던 다니가 그 바지가 힘없이 떠오르듯 일어서더니, 늘 그렇듯 왼쪽 어깨를 살짝 내린 채, 시끌벅적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내려갔다. 센이치로는 왠지 다니가 두 번 일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19p. «괴물»
..나리모치는 전하를 저주했다. 그의 저주는 매우 근대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인 저주로, 거창한 주문이나 주술은 필요 없다. 그저 늘 마음에 새기고, 잊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1914년, 황족 청년은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

228p. «괴물»
..아이는 이부자리 옆까지 와서 쪼그려 앉아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도 두려움은 없고,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리모치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중에, 질투가 섞인 호기심이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다.... - P-1

234p. «괴물»
..이쓰코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비난의 표시로, 이미 그녀는 아버지를 간병 받아야 할 애착 인형처럼 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아버지에게도 듣는 귀, 보는 눈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귀, 아버지의 눈은 육체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세계에서 가만히 이 세상을 향해 있는 귀와 눈 같았다. 그 다른 세계에서 무슨 말이 들린다 해도, 이 세상에서는 수치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귀, 이 세상의 눈 앞에서만 사람은 후안무치하게,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리라. - P-1

236p. «괴물»
..나리모치는 이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으로 모든 것이 결정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겉보기엔 볼품없는 중요한 순간이 더러 있는 법이다. 그것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군중 속에 섞인 암살자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 P-1

255p. «우국»
..두 사람이 죽음을 결심했을 때의 그 기쁨에 조금도 불순함이 없다는 것에 중위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물론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모르는 둘만의 정당한 쾌락이 대의와 신의 위엄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도덕에 의해 지켜졌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눈 속에서 정당한 죽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철벽에 둘러싸인 채 타인의 손끝 하나도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정의의 갑옷으로 무장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의 충정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당착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같은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 P-1

256p. «우국»
..이것이 그대로 죽은 얼굴이 된다! 이미 그 얼굴은, 정확히 말해, 반쯤은 중위의 소유를 떠나 죽은 군인의 기념비 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눈을 감아보았다.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여, 이제 그는 사물을 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 P-1

256~257p. «우국»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사람의 얼굴, 마지막 여자의 얼굴이다. 나그네가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땅의 아름다운 풍경에 쏟는, 떠나는 이의 눈빛으로 중위는 찬찬히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P-1

265~266p. «우국»
..레이코의 손가락이 금박을 입힌 차가운 먹을 밀자, 연지(硯池)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고, 그녀는 이런 동작의 반복이, 이 손가락의 압력, 이 희미한 소리의 왕래가 오로지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죽음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것은 시간을 담박하게 잘게 자르는 일상의 평범한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갈면 갈수록 매끄러움을 더해가는 먹의 감촉과 짙어지는 먹 냄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이 있었다. - P-1

268p. «우국»
..그것은 잠깐 동안의 신비로운 환상으로 중위를 이끌었다. 전장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차원에 발을 걸치고, 불가능한 이 둘의 공존을 구현하면서 지금 내가 죽으려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복(至福)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아름다운 눈에 내 죽음의 순간순간이 비친다는 것은, 짙은 향기의 미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것과 같다. 거기에서는 무언가가 허용되고 있다.... - P-1

271~272p. «우국»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레이코의 몸을 찢는 듯한 비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 고통이 점점 자라난다. 뻗어 오른다. 남편이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그의 존재 전체가 고통으로 환원되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감옥의 죄수가 되어버린 것을 레이코는 느낀다. 더구나 레이코에게는 고통이 없다. 비탄은 고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레이코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가 무정하고 높은 유리벽을 세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94p. «황야에서»
..내 마음은 좀 더 다른 것이었다. 남이 있어서는 안 되는 내 서재에서, 장마철 아침의 희미한 어둠 속에 떨면서 서 있는 한 청년의 극도로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가 거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P-1

299p. «황야에서»
..그것은 내 마음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황야다. 내 마음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미개척의 황폐한 지방이다. 그곳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황량하고, 무성한 나무도 없고, 자라나는 풀꽃도 없다. 여기저기 드러난 바위 위를 바람이 스쳐가며, 바위 표면에 모래를 희미하게 흩뿌리고는 또 어디론가 실어간다. 나는 그 황야의 소재를 알면서도 발길을 향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그곳을 찾아갔던 적이 있고, 또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그 녀석은 그 황야에서 온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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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은 그녀의 편지를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문체였고, 그것만으로 편지의 모든 풍부함과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부분의 독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기록’이라는 문학의 목적 자체를 놓치고 말았다. 문체는 쓰디쓴 액체를 담아 세상에 권하는 하찮은 그릇에 불과하다.... - P-1

...그녀는 자신도 죄인임을 알고 있었다.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온갖 색깔의 사랑을 포함할 만큼 광대했지만, 그 안에 폭압적인 그림자도 없진 않았으며,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비열한 굴레에서 벗어나길 갈망했지만, 딸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 P-1

...소년들은 거기서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말은 침묵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시는 더욱 가치 없는 형태의 말이었다.... - P-1

...이 마누엘의 사랑은 문학을 흉내 내어 생긴 것이 아니었다. 50년 전 프랑스의 한 독설가는 "사랑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지만, 그에게는 이런 말이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 P-1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 P-1

.."하지만 마누엘, 우리 마누엘. 네가 어렸을 때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줬는지 기억 안 나니? 시내 여기저기를 기꺼이 돌아다니면서 작은 심부름을 해줬었는데. 내가 아플 때는 식당에 가서 수프를 끓여 달래서 가져오기도 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줬는지 기억나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 P-1

...간밤에 선장은 나와 함께 앉아서 딸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딸아이가 멀리 여행 중이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딸아이가 영국에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 말 하면 넌 나를 비웃겠지만, 선장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 P-1

...그는 모험가의 여섯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타인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되 자기 얼굴과 이름은 바꾸는 능력, 타고난 말솜씨, 무궁무진한 독창성, 비밀주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재능,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부자들을 경멸하여 사기를 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음까지. - P-1

..스무 살이 가까워지면서, 피오 아저씨는 자신에게 세 가지 삶의 지향점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다소 이상한 형태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다채롭고 은밀하고 전지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는 자신이 멀리서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고 본인들보다 그들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공적인 삶에서의 명예와 지위 따위는 저버릴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이 가끔은 행동으로 이어져서 국가적, 개인적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 P-1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애욕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갈 때 그녀의 얼굴에 살짝 어리는 불안의 흔적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처럼 애욕을 부정하는 것 자체에서 애틋한 애정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관계에 숨어 있는 희미한 열정의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 열정은 시종일관 권태로운 의무에 바쳐진 일생마저도 달콤한 꿈처럼 지나가게 만들 수 있었다. - P-1

...우리는 놀라운 수준의 훌륭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한 채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피오 아저씨와 카밀라 페리촐레는 그들보다 앞서 칼데론이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상계 수준의 연극을 페루에서 일궈내려고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걸작이 목표로 하는 대중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 P-1

..모든 부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그들의 집과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광범위한 독서를 한 사람들만이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 P-1

...이제 미모가 사라졌으니 헌신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이러한 가정은 그녀가 애욕으로서의 사랑 외에는 어떤 사랑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애욕으로서의 사랑은 관대함과 배려 속에서 성장하고, 꿈처럼 아름다운 장면과 위대한 시를 낳는다. 그럼에도 그런 사랑은 가장 분명한 이기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 사랑은 오랜 예속과 자기혐오, 조롱, 크나큰 의심을 겪어낼 때까지는 충실한 애정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그런 사랑 속에서 일생을 보낸 많은 사람은 어제 개를 잃어버린 아이보다도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 P-1

..그리고 그 순간, 소녀 시절부터 집요하게 카밀라를 괴롭혀온 외로운 절망의 파도가 후아나 수녀의 분수와 장미꽃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이 지긋한 수녀원장의 흙 묻은 다정한 무릎 위에서 쉴 곳을 찾았다. - P-1

...그녀는 다짐했다. "이제는 나도 알아야 해. 세상 어디서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삼았던 특성들이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것을 말해 주는 새로운 증거에, 마치 소녀처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 P-1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 P-1

(해제)
...피오의 사랑은 "애욕"(140쪽)을 부정하면서(부정당하면서) 비틀리는데 그 경우엔 대개 가학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그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을 측정하는 식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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