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곶 이야기»
...나의 타고난 비상을 방해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었다. 하지만 행위의 실패는 때때로 그 목적의 선함에 의해 보상받는다. 내 경우에도 효과는 있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 수동적이기만 했던 몽상에서 벗어나, 나는 몽상을 향한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는 주어진 책에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손으로 천일야화를 써야 했다. 나는 몽상을 향한 탐닉에서 몽상을 향한 용기로 나아갔다. ······ 어쨌든 탐닉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용기가 있는 것이다. - P-1

39p. «곶 이야기»
...걸핏하면 내 안에서 고개를 치켜들려던 강하고 날카로운 비애의 감정에 공포가 불을 지핀 탓에, 나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에는 쓸쓸함과 불안함, 이유를 알 수 없는 동정이 뒤섞여 있었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며 버릇없이 울 때 속이 후련해지는 울음과는 달리, 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애달픔이 있었다. 나는 멀리 소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았다. 눈물 젖은 눈에, 그 소나무는 비에 흠뻑 젖은 듯이 보였다.... - P-1

43p. «곶 이야기»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어째서인지 이번 일만큼은 부모님은 물론 나이외의 누구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또 그것을 말하지 않는 데서 기쁨과 용기를 가지라고, 묵계와도 같은 무언의 다정함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 P-1

44p. «곶 이야기»
..나는 이번 여름에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법조차 배워 오지 못한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야단맞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움직일 수 없는 신비로운 만족감이 있었다. 수영은 배우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인간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을, 훗날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매고, 어쩌면 그것과 바꿀 수 있다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하나의 진실을, 나는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 P-1

55p. «시를 쓰는 소년»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을 노래하는 것에, 소년은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는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없는 것을 조금도 한탄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아직 체험하지 않은 세계의 현실과 그의 내적 세계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나 긴장도 보이지 않았기에, 굳이 자신의 내적 세계의 우위를 믿을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는 어떤 비이성적인 확신에 의해, 그가 이 세상에서 아직 체험하지 않은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처럼 예민한 감수성에는,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원형이, 어떤 경우에는 단지 예감이기는 했지만, 포착되어서 복습되어 있고, 나머지 경험은 모두 이러한 감정의 원소들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원소란? 그는 독단적으로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말이다." - P-1

60p. «시를 쓰는 소년»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을 하는 인간의 그 평범함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P-1

62p. «시를 쓰는 소년»
..소년은 들으면서, 그의 고백에 단 하나도 미지의 요소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 모든 것은 글로 쓰였고, 모든 것은 예감되었으며, 모든 것은 복습되었다. 글로 쓰인 사랑이 훨씬 생생하다. 시로 노래된 사랑이 훨씬 아름답다. R이 그 이상을 꿈꾸기 위해 현실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함을 향한 욕구가 왜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P-1

63p. «시를 쓰는 소년»
..⸺ 바로 그 순간, 소년은 무언가에 눈을 뜬 것이다. 사랑이니 인생이니 하는 인식 속에 반드시 끼어드는 우스꽝스러운 불순물, 그것 없이는 인생이나 사랑의 한가운데를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불순물을 본 것이다. 즉, 자신의 짱구를 아름답다고 굳게 믿는 것. - P-1

78p. «의자»
..신음은 고통의 전달 수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음 소리를 냄으로써 달래지는 고통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고통은 알려지기를 바라지만, 고통 속의 쾌락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 P-1

103p. «보온병»
..가와세도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인사말은 잊은 채 대답했다. 가와세는 그 순간, 늘 빈틈없이 꼼꼼하게 정해놓은 과거와의 거리가, 뭔가의 계기로 살짝 줄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와세는 그것이 외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도량형이 외국에서는 흐트러져버린다. 타국에서의 만남은 표정을 순식간에 과장해버려,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해도 이미 늦어 곤란할 때가 있다. 이것은 꼭 남녀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남자 지인끼리도 그렇다. - P-1

106p. «보온병»
...이 여자는 옛날부터, 먼 곳의 불을 바라보듯 보면 아름답다고, 가와세는 생각했다. - P-1

118p. «보온병»
..그런 식에 익숙해지면, 여자도 결국 자기방어를 위해 자연스럽게 열정을 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무척 담백하게 느껴지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를 썼다. 반쯤은 공리적인, 반쯤은 취향적인 동기에서 가와세는 아사카와의 정사(情事)가 최대한 ‘세련된 관계‘임을 바랐고, 그러는 사이에 그것이 서로의 허영심의 핵심이 되면서 어느새 옅은 유쾌한 절망이 스며들었다. 늘 주고받는 농담이나 말장난도 점점 공허해지더니, 어느샌가 자신들은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고 천하무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P-1

136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이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동기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현세는 정지해버린다. 고승의 눈에는 그 정지된 모습만이 보일 뿐, 현세는 그저 종이 위의 그림, 타국의 지도 한 장일 뿐이다. 이런 무루(無漏)의 심경은 공포마저 잊게 만든다. 왜 지옥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현세의 무력함은 너무도 자명했고, 게다가 그는 결코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높은 덕의 결과라는 것 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P-1

142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남자들이 정쟁을 일삼는 동안, 그녀는 다른 방법, 순전히 여성적인 방법에 의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삭발하여 출가하는 여자를 비웃었다. 대체로 여자는 속세는 버릴지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버릴 수 없다. 남자만이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노승은 한때 속세를 버렸다. 그는 귀족들보다 훨씬 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속세를 버렸듯이, 그는 이번에는 후궁 때문에 내세마저 버리려는 것이다. - P-1

143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이었던 고승이 한순간에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버린 것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싸움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용기는, 만약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할 일을 기꺼이 금하고 있다는 긍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 P-1

145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사실은, 이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고승은 그만큼 더 깊이 부처를 배반하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불가능이 어느새 해탈의 불가능과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은 확고해지고, 사념(邪念)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희망이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단념하기 쉽지만, 이 불가능한 사랑은 호수처럼 고요히 땅을 뒤덮고, 흘러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 P-1

164p. «히나의 집»
...어느 시대든 청춘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 오늘날처럼 청춘을 방해하는 외부의 장해가 많은 시대에는 내부의 장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동정을 잃지 않는 건실한 청년의 수가 오히려 많다 라는 반대 논리도 성립하는 것이다. - P-1

174p. «히나의 집»
..나는 전차가 그 불빛 한가운데서 멈추고, 발차하고, 또다시 그 불빛의 낙원에서 멀어져가는 것이 오늘밤에는 묘하게 느껴졌다. 타고 있는 전차가 마치 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은 언제나 항해를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 P-1

195p. «표»
..그는 자신도 강으로 가서 거기서 다니를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회색 바지를 접고 앉아 있던 다니가 그 바지가 힘없이 떠오르듯 일어서더니, 늘 그렇듯 왼쪽 어깨를 살짝 내린 채, 시끌벅적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내려갔다. 센이치로는 왠지 다니가 두 번 일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19p. «괴물»
..나리모치는 전하를 저주했다. 그의 저주는 매우 근대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인 저주로, 거창한 주문이나 주술은 필요 없다. 그저 늘 마음에 새기고, 잊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1914년, 황족 청년은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

228p. «괴물»
..아이는 이부자리 옆까지 와서 쪼그려 앉아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도 두려움은 없고,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리모치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중에, 질투가 섞인 호기심이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다.... - P-1

234p. «괴물»
..이쓰코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비난의 표시로, 이미 그녀는 아버지를 간병 받아야 할 애착 인형처럼 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아버지에게도 듣는 귀, 보는 눈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귀, 아버지의 눈은 육체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세계에서 가만히 이 세상을 향해 있는 귀와 눈 같았다. 그 다른 세계에서 무슨 말이 들린다 해도, 이 세상에서는 수치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귀, 이 세상의 눈 앞에서만 사람은 후안무치하게,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리라. - P-1

236p. «괴물»
..나리모치는 이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으로 모든 것이 결정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겉보기엔 볼품없는 중요한 순간이 더러 있는 법이다. 그것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군중 속에 섞인 암살자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 P-1

255p. «우국»
..두 사람이 죽음을 결심했을 때의 그 기쁨에 조금도 불순함이 없다는 것에 중위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물론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모르는 둘만의 정당한 쾌락이 대의와 신의 위엄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도덕에 의해 지켜졌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눈 속에서 정당한 죽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철벽에 둘러싸인 채 타인의 손끝 하나도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정의의 갑옷으로 무장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의 충정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당착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같은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 P-1

256p. «우국»
..이것이 그대로 죽은 얼굴이 된다! 이미 그 얼굴은, 정확히 말해, 반쯤은 중위의 소유를 떠나 죽은 군인의 기념비 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눈을 감아보았다.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여, 이제 그는 사물을 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 P-1

256~257p. «우국»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사람의 얼굴, 마지막 여자의 얼굴이다. 나그네가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땅의 아름다운 풍경에 쏟는, 떠나는 이의 눈빛으로 중위는 찬찬히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P-1

265~266p. «우국»
..레이코의 손가락이 금박을 입힌 차가운 먹을 밀자, 연지(硯池)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고, 그녀는 이런 동작의 반복이, 이 손가락의 압력, 이 희미한 소리의 왕래가 오로지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죽음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것은 시간을 담박하게 잘게 자르는 일상의 평범한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갈면 갈수록 매끄러움을 더해가는 먹의 감촉과 짙어지는 먹 냄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이 있었다. - P-1

268p. «우국»
..그것은 잠깐 동안의 신비로운 환상으로 중위를 이끌었다. 전장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차원에 발을 걸치고, 불가능한 이 둘의 공존을 구현하면서 지금 내가 죽으려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복(至福)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아름다운 눈에 내 죽음의 순간순간이 비친다는 것은, 짙은 향기의 미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것과 같다. 거기에서는 무언가가 허용되고 있다.... - P-1

271~272p. «우국»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레이코의 몸을 찢는 듯한 비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 고통이 점점 자라난다. 뻗어 오른다. 남편이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그의 존재 전체가 고통으로 환원되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감옥의 죄수가 되어버린 것을 레이코는 느낀다. 더구나 레이코에게는 고통이 없다. 비탄은 고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레이코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가 무정하고 높은 유리벽을 세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94p. «황야에서»
..내 마음은 좀 더 다른 것이었다. 남이 있어서는 안 되는 내 서재에서, 장마철 아침의 희미한 어둠 속에 떨면서 서 있는 한 청년의 극도로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가 거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P-1

299p. «황야에서»
..그것은 내 마음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황야다. 내 마음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미개척의 황폐한 지방이다. 그곳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황량하고, 무성한 나무도 없고, 자라나는 풀꽃도 없다. 여기저기 드러난 바위 위를 바람이 스쳐가며, 바위 표면에 모래를 희미하게 흩뿌리고는 또 어디론가 실어간다. 나는 그 황야의 소재를 알면서도 발길을 향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그곳을 찾아갔던 적이 있고, 또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그 녀석은 그 황야에서 온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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