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날 아침 나나에하마의 난바다에 걸친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며 아이짱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고 했다. 그날부터 현실을 버리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뛰어드는 것 외에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년을 이끌어준 것은, 울기 위해 들어간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자기의 손을 찾아 소리없이 다가온 알지 못할 사나이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미묘한 속삭임이었다……. - P-1

.."이렇게 하루 종일 일부러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뭔가 다른 차원의 상상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어요. 한번 해보세요." - P-1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지만, 아리오는 이 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너무나 가슴아팠다. 고지는 꺼림칙한 마조히스트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상대는 소설 같은 데 나오는 검정 타이츠의 예쁜 소녀나 음탕한 귀부인도 아니고, 아이짱이 말했던 어느 건달인 것이 틀림없다. 아무나 배짱있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니며, 하베로크 엘리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건달 따위에게 시달림을 받고 싶어하는 병적인 성적 욕구가, 고지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

"..다 아는 일이지만, 한 종류의 꽃이라면 파랑‧빨강‧노랑의 세 빛깔이 갖추어져 있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장미나 백일초에는 어느 빛깔도 있지만 파란색이 없어요. 또 나팔꽃에는 절대로 노란색이 없지요. 어떤 꽃이나 한 가지 색은 없는 거예요. 특히 올해—아아, 이제는 작년이군요, 영국‧독일‧프랑스의 대표적인 장미꽃 명인이 일제히 라일락 타임, 마겐타, 프레류드라는 이름의 파란 장미를 저마다 처음으로 발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노란 나팔꽃도 세다가야(世田谷)의 오사키(尾崎)란 분이 몇 십 년이나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본디 있을 수 없는 색을 무리하게 닮은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피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다만, 고지 씨가 죽음을 당한 1954년에, 영국‧독일‧프랑스의 장미 제작 3대 명인이 모두 잇따라 파란 장미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머리를 스쳐가는 찰나에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으니까, 혹시 내 추리가 맞다고 하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장미의 보고서’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 P-1

.."가장 원초적인 것이지만 누구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단순하고 강렬한 동기. ……알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그게 말이지요, 단지 고지 씨가 ‘동생’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질투고 열등감이고 이해관계고 아무것도 없지만 고지 씨가 동생이니까 죽였다, 그런 일은 없을까요? 누구든지 모든 ‘형’에게는 이유가 없는 카인의 피가 솟구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놀라운 동기가 아닐까요?" - P-1

.."이것이 피면 이름은 분명히 ‘오프란드 워 네안offrande au néant,’—‘허무에의 제물’로 할 거라고 고지가 말했던 겁니다. 나는 모르지만 발레리의 시에 그런 것이 있다고 했어요."
..‘허무에의 제물’—아리오도 그 방면에 문외한이지만, 다음에 물어 보았더니 《잃어버린 미주(美酒)》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였다. - P-1

"...그에게는 쿠바드라는, 지금도 미개인들 사이에는 남아 있는 의만(擬娩)의 끼가 있었던 모양이야. 요컨대 첫 아이가 생겼는데 아내에게만 산고를 겪게 할 수는 없다는 감정이 고조되어, 마치 자기도 낳는 것처럼 함께 괴로움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야...." - P-1

..무레타는 이렇게 해서 ‘범인’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워 없애버렸다. 지금 무레타가 밝힌 말 그대로 고지가 가장 사랑한 어머니를 여읜 뒤에 신의 각인 같은 십자가를 육체에 지니고, 견디지 못하여 어리석은 꿈의 세계로 도피하였다면—그리고 소지가 그것을 계속 감쌌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엉뚱한 짐작으로 ‘범인’이라고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엾은 공상 끝에 생긴 ‘고노스 겐지’는 이렇게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와 함께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도 덧없이 송두리째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것일까. - P-1

..그날을 위해서 뿌리는 썩은 흙 속으로 뻗어가고 줄기는 끊임없이 양분을 빨아 올린다고 생각하니,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당연한 생리가 실은 몹시 잔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아리오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히사오는 벌써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서향(瑞香)의 향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잖아."
..여느 때의 언덕 중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저녁 어둠 속에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숨을 내쉬었다. - P-1

...‘메구로(目黑)’에 사는 그가 ‘메시로(目白)’의 사건에 휘말려, ‘메아오(目靑)’의 방화와 ‘메아카(目赤)’의 살인에 이끌려, 지금 범인인 오지를 가리키는 ‘메오(目黃)’의 부동명왕 앞에 서 있는 것은, 둘도 없는 기이한 인연인 것 같다.... - P-1

"...전부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1955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무책임한 호기심이 새로 만들어낼 즐거움만은 당신들 몫이 아니겠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그럴싸하게 잔학한 사건이 얼마든지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구경하는 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처참한 광경이라도 좋아서 바라보는 것이 괴물의 정체라고. 나에게는 무서운 허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그 장미의 이름에서 나온 시는 뭔가 우아한 의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음미해 보아도 그런 허무에의 제물을 위해서 나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내가 도지로를 죽인 것은 인간의 긍지를 위해서 한 노릇이지만, 어떻게 되었던 바다는 말이 없는 거야. 내가 한 짓도 다른 의미로 ‘허무에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P-1

"...내가 생각한 것은 한 장의 장대한 벽화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어. 거기에는 살아서 혈육이 통한 인간을 그대로 새겨 넣고, 무지로 인한 어리석은 비극이 아닌, 순정한 비극이 가진 성격을 빠짐없이 갖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거야. 가령 그것이 실현되어 히누마 집안 살인사건으로 불린다면, 그때는 나도 이름을 드러내 놓고 지금의 일본에는 이런 살인이 필요하다고, 순수한 악, 비극다운 비극이, 거꾸로 이 시대의 인간질서를 돌이킬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어...." - P-1

(해설)
...사실, 한 사람의 작가는 가능한 한 다채로운 작품을 가려 쓰는 능력과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언뜻 보기에 아무리 비현실이나 반세계와 관계없는 소설이지만, 내 관심은 늘 죽음과 변신, 이를 꿰뚫는 시간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로 주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라는 작가 자신의 말을, 나는 솔직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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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p.
...감귤류 열매의 중과피는 껍질 안쪽 하얀 부분, 즉 귤락이다. 귤락의 영문명인 알베도는 주로 물체가 빛을 반사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지만, 감귤류에서는 이와 무관하게 ‘백색‘을 뜻하는 라틴어 albēd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 귤락의 영문명은 언론 기사나 건강 정보 등을 통해 알베도라는 용어로 알려졌지만, 영어권에서는 ‘피스pith‘라는 단어가 더 일반적이다. - P-1

71p.
..소설 《1984》,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엽란을 날려라》라는 작품에서 돈이란 이름의 신을 거부하고 맞서는 고든 콤스톡이란 인물을 그려냈다. 이는 궁핍한 환경에서 분투한 자신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엽란은 1930년대 영국에서 집마다 기르던 흔한 관상용 식물이자, 중산층의 삶이자, 주인공이 결국 타협하고 마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 P-1

79p.
..뮈즐레는 ‘개 주둥이에 입마개를 씌우다‘, ‘입을 봉하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museler에서 유래했다. 같은 의미의 영단어 muzzle과 어원이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 P-1

114~115p.
..이때 많은 사람이 긴 장화 윗부분에 플라스크를 숨겨 주류를 운반했다. 부츠의 윗부분을 뜻하는 부트레그bootleg(부틀렉)는 금주법 시대를 거치며 밀주 혹은 밀주를 제조·판매하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이후 뜻이 더 확대돼 ‘불법으로 만든‘, ‘해적판(의)‘을 의미하게 됐다. - P-1

124p.
..배낭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료는 기원전 3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배낭의 주인은 외치Ötzi, 일명 ‘아이스맨‘으로 불리는 미라다. 이 남성 미라는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해발 3,200미터 고도의 알프스 산맥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5,3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빙하에 파묻혀 냉동된 덕에 시신뿐만 아니라 가죽옷과 나무 활·구리 손도끼 같은 소지품까지 온전하게 남았다. 이때 나무 배낭도 함께 발견되었다. 현장에서는 U자 형태로 휜 2미터 길이의 개암나무 막대와 길이 38~40센티미터의 좁은 나무판 두 개가 나왔는데, 학자들은 막대와 나무판을 끈으로 묶어 틀을 잡은 다음, 가죽 자루나 그물을 매달아 배낭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의 지게도 있다. 엄밀히 따지면 배낭은 아니지만, 짐을 얹어서 지고 다닌다는 점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하다. 1690년(숙종 16년)에 나온 《역어유해譯語類解》라는 책에서는 지게의 뜻을 풀어 배협자背狹子라고 적고 있다. - P-1

139p.
..영미권에서는 양말 코핀을 양말 포장 클립socks packing clip이라 부른다. 하지만 양말 코핀 대신 앞에서 설명한 택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고리가 포함된 종이 라벨 포장 방식도 많이 쓰는데, 이는 행택hang tag·양말택sock tag이라고 한다. 브랜드명을 비롯한 각종 정보를 기입할 수 있고 포장·진열에 모두 활용할 수 있어 별도의 브랜드를 가진 양말 전문 업체에서 애용한다. 행택을 양말에 고정하는 역할은 예상했겠지만 우리의 듬직한 친구, 택핀이 맡는다. 양말 중앙을 감싸는 종이 라벨은 양말 띠지wrap label라고 한다. 덧신 양말(페이크 삭스) 안에 모양 잡기 용도로 들어간 두꺼운 마분지 ‘그거‘의 이름은 속대다. - P-1

176p.
..개인적으로는 노루발보다는 말발굽이 더 적당한 우리말 단어라고 본다. 포유류의 하위 분류군 중 우제목偶蹄目과 기제목奇蹄目이 있는데 발굽이 짝수냐 홀수냐가 기준이 된다. 노루는 굽 앞쪽이 갈라져 두 개로 나뉘는 우제목 동물인 반면, 말은 한 개의 굽을 가진 기제목 동물이다. 노루발장도리나 재봉틀 부속 등 노루발이란 이름을 가진 사물들을 떠올려보면, 공통적으로 노루의 발굽처럼 두 갈래로 나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도어스토퍼에서 바닥에 닿는 부분의 형태는 노루발보다는 말발굽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말 호칭도 후자가 적합하다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다. - P-1

181~182p.
..아일랜드 식탁·페닌슐라형 카운터의 등장은 주방 및 부엌이란 공간의 위상 변화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본디 주방은 집의 중심이었다.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출현해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가 된 수혈주거竪穴住居, pit-house를 살펴보자. 움집이라고도 하는 수혈주거는 땅에 깊고 평평한 구덩이를 만들어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선사 시대 반지하식 주택이다. 이 원시적인 가옥 중앙에는 불구덩이hearth가 있었다. 집 바닥에 불을 피워놓고 돌·진흙 따위를 둘러 구획을 만든 것이다. 지붕에는 연기 구멍을 만들어 연기를 빼냈다. 불구덩이는 난로이자 주방이었다. 추위를 물리치는 온기와 허기를 달래주는 따뜻한 음식, 어둠을 밝히는 빛까지 제공하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hearth라는 단어는 현재까지 살아남아 난로와 가정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 (보통 ‘hearth and home‘이라고 표현)가 됐다. - P-1

195p.
...빗장은 경관 혹은 염이라고도 하는데 재미있게도 경扃·관關·염​扊·이​扅 네 글자 모두 문빗장을 뜻하는 한자어다. 포도 포葡와 포도 도萄가 합쳐진 포도와 유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포도처럼 중국이 서역에서 들여온 새로운 문물을 지칭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한자를 묶어서 만든 단어를 연면사連綿詞라고 하는데, 연면사는 낱자로는 쓰이지 않고 함께 써야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 P-1

228p.
..콘페티의 순우리말로 ‘꽃보라‘를 추천하는 의견도 있다. ‘떨어져서 바람에 날리는 수많은 꽃잎‘을 뜻하는 꽃보라와 콘페티의 이미지가 제법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이미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할 때 뿌리는 여러 색깔의 작은 종잇조각‘이란 의미로 꽃보라를 쓰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 P-1

255p.
..팬그램은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사용해 만든 문장이다. 한글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조합을 전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자음 혹은 모음을 포함한 문장을 팬그램으로 친다. 낱자 전체를 망라하므로 서체 예문으로 자주 쓰인다. 윈도 OS에서 폰트의 예문으로 쓰이는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한글 모든 자음 사용)나 "The Quick Brown Fox Jumps Over The Lazy Dog." 등이 대표적인 팬그램이다. - P-1

314p.
..​산포체의 영어 표기인 ‘diaspore’는 ‘흩어지다(이산離散)’를 의미하는 그리스어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했다. 단어를 더 쪼개보면 ‘너머’를 뜻하는 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뜻의 spero가 합쳐진 말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자·타의로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민족 집단과 그 이동 현상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다. - P-1

332p.
..@의 독특한 모양 때문에 나라·언어권마다 호칭이 다양하다. 원숭이 꼬리(네덜란드), 돼지 꼬리(노르웨이), 코끼리 코(덴마크), 거미원숭이(독일어), 작은 개(러시아), 원숭이(폴란드·불가리아), 달팽이(이탈리아), 쥐(대만), 청어 절임(체코), 고양이 꼬리(핀란드), 벌레(헝가리), 사자(말레이시아) 등이다. 동물의 사육제가 따로 없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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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p.
..하지만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 해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질 것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 따위는 단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 또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랬으니 나 자신을 불행한 괴짜로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P-1

60p.
..선사 시대의 공룡들처럼 지성보다는 근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지성과 감성을 배제하고 의지와 경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현대판 공룡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이 현대판 공룡의 놀라운 성공 때문에 현대인들은 너도나도 이 공룡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다.... - P-1

97p.
..사실 질투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긴다.... - P-1

98p.
..나는 어린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게끔 키우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공작새들은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공작새들은 저마다 자기 꼬리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작새는 온순하다.... - P-1

100p.
..그러므로 현대는 특별히 질투가 만연해 있는 시대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나라를, 여자는 남자를, 정숙한 여자는 정숙하지 않으면서도 처벌받지 않는 여자를 질투한다. 질투가 다른 계급과 민족, 다른 성(性) 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주요한 원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질투의 결과로 빚어진 정의는 자칫하면 최악의 것, 즉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 정의가 되기 쉽다. - P-1

109p.
..합리적인 도덕 원칙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행동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물론 이런 논리가 성립되려면, 그런 행동은 결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금욕주의를 제쳐두고 이야기한다면, 이상적인 도덕군자란 즐거움의 효과를 능가할 만한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 P-1

115p.
..설사 합리적인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삶의 방식을 개선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죄의식 안에는 절망감과 자존심을 갉아먹는 감정이 존재한다. 자존심을 잃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행동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될 만한 상황을 되도록 피해가는 데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 P-1

118~119p.
..인습적인 도덕 원칙은 지나치게 자아에 집중해왔다. 죄악의 개념은 자아에 어리석을 만큼 관심을 집중한 결과로 빚어진 산물 가운데 하나다. 이런 그릇된 도덕이 빚어낸 주관적인 기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성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죄의식에 감염된 사람이 병을 완치하려면 이성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쩌면 이 병은 정신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 병을 극복한 사람은 병에 걸려본 적도 없고, 치료한 적도 없는 사람에 비해 정신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성에 대한 혐오가 흔히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성의 작용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P-1

128p.
..자신의 동기를 의심해보는 것은 특히 자선가와 정치가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 또는 이 세상의 일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고, 이 전망을 실현하면서 인류 전체 또는 그 일부에 은혜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때로는 옳고, 때로는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신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 P-1

148p.
..물론 일부러 여론을 조롱하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여론을 조롱한다는 것은 전도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정말로 여론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힘이자, 행복의 원천이 된다. 지나치게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한결같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사회보다 훨씬 더 재미 있는 사회다. 각자의 성격이 개성적으로 발전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개성이 유지된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복사판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수 있다. 이것은 귀족제도의 장점 중 하나였다. 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던 귀족 제도는 괴팍스런 행동이 허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 P-1

150~151p.
...그러나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 P-1

159p.
..과학자의 삶에서는 행복의 모든 조건이 실현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고, 자신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에도 중요하게 보이는 업적을 달성한다. 과학자들의 업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그들의 업적은 중요하게 여긴다. 과학자가 예술가보다 행복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반인들은 그림이나 시를 이해할 수 없으면 나쁜 그림, 나쁜 시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린다(사실이다). 결국 최고 실력의 화가들이 다락방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화가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행복을 누린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보이는 회의적인 태도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기주장을 되새겨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아리 속에 파묻힌 채 냉혹한 바깥 세계를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 P-1

161~162p.
...최고의 학식을 갖춘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냉소주의는 안락감과 무력감의 결합에서 생기는 것이다. 무력감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안락감은 이런 생각을 할 때 느끼는 고통을 웬만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 P-1

167p.
..우표 외에도 수집할 수 있는 물건은 얼마든지 있다. 옛 도자기, 담뱃갑, 로마의 동전, 활촉, 부싯돌 등 상상해보면 황홀한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가! 사실 우리 인간들 중에는 이렇게 작은 즐거움에 비해 너무나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어렸을 때 수집을 해본 경험이 있지만, 수집은 성인들에게는 더 이상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즐거움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 P-1

168p.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받을 것이다. - P-1

171p.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 P-1

176p.
...무수히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경험이 된다. 우리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건들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관심이 내면으로 쏠려 있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에 값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관심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다가 한 번씩 자신의 영혼으로 눈을 돌릴 때면, 자신의 내면이 대단히 다채롭고 재미 있는 종류의 원료들을 분류하고 재결합하여, 아름다운 혹은 발전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P-1

185p.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다.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열정을 잃게 되는 주된 원인은 바로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미개인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한다. 이런 모습은 직접적인 충동에 순종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일하러 나서는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충동에 의해서 움직인다.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경우, 충동은 충동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는 직접적으로 행사되지 않고, 이론이나 신념, 결단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행사된다. 막 출근길에 나선 사람은 방금 아침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다. 그러나 그는 배가 고파질 것을 알고 있고, 직장에 나가는 것은 앞으로 맞게 될 허기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 P-1

199p.
..사랑을 중요시하지 않는 야망은 대개 인류에 대한 분노 또는 증오가 빚어낸 산물이다. 이러한 분노와 증오는 어려서 겪은 불행, 어른이 되어서 겪은 불의, 또는 피해망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한다. 세상을 완전히 즐기려는 사람은 지나치게 강한 자아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이 가진 특징 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받는 사랑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이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할 때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 - P-1

200p.
...여러 종류의 신중함 가운데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랑에 대한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 P-1

213p.
..젊음이 지나간 뒤에는 더욱 그렇겠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곧 인생의 막을 내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최초의 세포로부터 멀고 먼 미지의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관습적인 표현을 빌린 의식적인 생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마음가짐은 초문명적이며 지적인 세계관이지만, 막연한 본능적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원시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초문명적인 세계관에는 이런 본능적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미래에 확고한 흔적을 남길 만큼 위대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일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특별한 재능을 갖지 못한 남녀의 경우에는 자녀를 통해서만 이러한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 - P-1

229~230p.
..물론 파괴는 다음에 이어질 건설의 준비과정으로서 꼭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파괴는 건설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건설과는 전혀 무관하게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흔히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건설을 위해 파괴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하는 활동의 파괴성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파괴한 뒤에 무엇이 건설되느냐고 추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새로 건설될 것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로 모호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파괴적인 준비 과정에 대해서만 열띤 태도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 P-1

240p.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일생 동안,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습득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한 지식이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연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것, 영웅적이거나 기괴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구경거리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베푸는 여러 특권 중의 하나를 포기하는셈이다. - P-1

254p.
..체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절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할 수 없는 희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다. 전자는 나쁜 것이고, 후자는 좋은 것이다. 중요한 일에 실패해 원대한 성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버린 사람은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히기 쉽다.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힌 사람은 진지한 활동이라면 뭐든지 단념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관용구나 명상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절망감을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내면의 좌절을 숨기기 위해서 어떤 위장을 한다고 해도 이런 사람은 본질적으로 쓸모없는 인간, 철저히 불행한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복할 수 없는 희망 때문에 체념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정복할 수 없는 희망은 개인적 관심의 범위를 벗어난 원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든지 간에 죽음이나 질병 앞에 무릎을 꿇거나, 적에게 정복당하거나 성공에 도달할 수 없는 어리석은 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희망이 꺾이는 일이 수천 번 되풀이된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 개인적인 목적이 인류를 위한 보다 원대한 희망의 일부인 경우에는 아무리 실패를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절망감에 빠지지는 않는다. - P-1

257p.
..심각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을 때, 기상천외한 비유와 절묘한 비교를 동원해서 위안을 찾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문명인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화상을 가지고 있고, 그 자화상을 더럽힌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 일어나면 속이 상할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자화상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자화상으로 가득 찬 화랑을 통째로 가지고 있다가 문제 상황에 맞는 그림을 하나 골라내는 것이다. 그 화랑에 우스꽝스러운 작품을 몇 점쯤 걸어두면 더 좋다. 굉장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자화상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매일 희극에 등장하는 광대 모습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짜증이 더 솟구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 P-1

258p.
..어떤 종류의 체념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는 용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체념은 비록 처음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절망과 환멸로부터 이 사람을 보호해준다. 날이 갈수록 믿을 수 없어지는 사실을 믿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부아를 돋우는 일은 없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조건의 하나다. - P-1

266p.
..모든 불행은 의식이 분열되거나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서 생긴다.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아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객관적인 관심과 사랑의 힘에 의해 자아와 사회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자아와 사회는 통합될 수 없다. 행복한 사람은 자아의 내적인 통합이나 자아와 사회가 이루는 통합의 실패로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의 인격은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세상에 대항하여 맞서고 있지도 않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의 본능을 좇아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에 충분히 몸을 맡길 때,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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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p.
..소중한 것이 곧 신이 된다.
..필자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소중한 것과 두려운 것은 신이 된다. - P-1

28p.
..지금도 솎아내기는 계속되고 있다.
..낳고 나서 솎아내는지, 낳기 전에 솎아내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도 가장 효과적인 솎아내기일지 모른다.
..다양한 수단으로 솎아내진 아이들 대신 애완동물과 캐릭터 상품이 세상에 범람한다.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아이들이, 우리를 위한 진혼의 아이돌이, 영상 속에서 인형처럼 완벽하게 웃으며 우리를 응시한다. - P-1

70p.
..아닌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나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쓸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은 대체품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상실의 예감을 지니고 있다. ‘좋아하는 것‘에는 상실의 아픔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P-1

164p.
..바벨의 탑 때부터 파괴의 예감이 존재하는 곳에는 높은 건물을 짓게 돼 있다. - P-1

177p.
..여기가 도쿄의 중심. 자연으로 뒤덮인 일왕의 성. 과거에 이곳에서부터 소용돌이를 그리듯 도시가 형성됐다. 교토가 바둑판이고, 오사카가 바다에서부터 강을 따라 동서로 확장된 것과는 다르다.
..확실히 이곳은 늘 정지해 있고, 주위 도시만이 눈이 핑핑 돌아갈 것처럼 변화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모두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 P-1

188p.
..도쿄는 그림자도 배제해왔다. 그때 이래로 절전이 장려되고 있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환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어둠은 제거되고 사물도 사람도 밝게 비춰진다.
..그건 일본화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그림은 순간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변화해가는 시간 자체를 그린다. 순간이라면 그 시각의 빛을 그리고 그 빛이 자아내는 그림자도 그려내야 하지만, 흐르는 시간 전체를 그린다면 그림자는 의미가 없다.
..일본화는 이 경치를 담았던 것이다. 그림자도 어둠도 없는, 한없이 이차원 애니메이션에 가까워가는 이 세계를. - P-1

246p.
.."맞아, 맞아. 나이 많은 사람들 그림이 무서워. 이렇게 보면 애들 그림은 되레 너무 잘 그린 것 같다니까. 일만 하고 사느라 그림 같은 건 그린 적도 없는 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해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봤다, 그런 게 무섭지." - P-1

259p.
..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봤다고 생각하는 과거.
..하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
..그건 조금도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아주 평범하게 체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P-1

311p.
..그렇다면 묘비명에 새겨진 이름, ‘도쿄‘라는 글자는 영원히 붉은색이다. 피가 통하는 이름이 ‘언제까지고‘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그 선명한 붉은색을 눈에 아로새길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 글자를 우러러보고, 이윽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그 앞을 지날 것이다. 무수한 각자의 인생을 ‘과거형‘으로 하기 위해.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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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말도 되는대로 내뱉은 것 없이 족히 두어 시간이나 교묘한 대화를 나눈 끝에, 마침내 농부의 교활함이 먹고살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부유한 사람의 교활함을 이겼다. 쥘리앵의 새로운 생활을 규정할 많은 조문이 확정되었다. 그의 봉급이 400프랑으로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에 선불로 지불하도록 타결되었던 것이다. - P-1

.."무슨 어리석은 소리요!" 남편은 대꾸했다. "우리 마음에도 꼭 들고 우리에게 잘 봉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다 하다니! 그가 소홀해져서 성의를 북돋아 줘야 할 때나 선물을 하는 거지." - P-1

..극도의 혼란 때문에 두 볼이 붉게 물들고 당황한 기색에 싸인 두 여인 사이에서, 쥘리앵의 오만한 창백함과 어둡고 단호한 태도는 야릇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 여인들과 일체의 부드러운 감정을 멸시했다. - P-1

..쥘리앵의 하찮은 허영심은 독백을 계속했다. 어느 날 내가 입신양명하게 되었을 때 가정 교사라는 천한 직분에 있었다고 누가 비난이라도 한다면 나는 사랑 때문에 그랬노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더욱더 이 여자를 사로잡아야겠다. - P-1

...오래 갈망하던 것을 막 획득하고 난 다음에 으레 그렇듯이, 그의 마음은 놀라움과 불안한 동요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마음의 상태란, 무엇을 갈망하는 데 습관이 들었다가 더 이상 갈망할 것을 찾지 못하게 되었으나 아직 추억에 잠기기는 이른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 P-1

...쥘리앵이 자기보다도 위선적인 데 놀란 군수는 무언가 분명한 얘기를 끌어내 보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신이 난 쥘리앵은 연습할 기회를 포착하고는 다른 말로 그의 답변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졸지 않는 척해 보이는 의회의 회기 끝 무렵을 이용하려고 하는 웅변적인 장관도, 이처럼 많은 변설을 늘어놓으면서 이처럼 조금밖에 말하지 않은 때는 없으리라.... - P-1

.."그것이 세속의 헛된 화려함의 결과란 것일세. 자네는 분명 웃음 짓는 얼굴에만 익숙해 있을 것이네. 그건 거짓 연극에 지나지 않지. 진실은 엄격한 것이라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책무도 역시 엄격한 것이 아닐까? 외면의 공허한 우아함에 대한 지나친 민감성이란 약점을 자네의 양심이 경계하도록 늘 주의해야 할 것이네." - P-1

...셸랑 사제는 자기 자신에게 그랬듯 쥘리앵에 대해서도 경솔했던 셈이었다. 쥘리앵에게 올바르게 사고하고 헛된 소리를 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 준 연후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습관이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훌륭한 논법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 P-1

..그 장엄한 종소리는 50상팀의 임금을 받는 스무 명의 일꾼이 열대여섯 명 정도의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노동이란 생각을 쥘리앵에게 불러일으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밧줄이나 목재가 낡아 가는 것이라든지, 2세기마다 떨어져 내리는 종의 위험 따위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지기들의 임금을 깎는 수단이나, 또는 성당의 재정을 축내지 않으면서 어떤 물건을 선심 쓰듯 대신 지불함으로써 임금을 가로채는 수단 따위에 생각이 미쳐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현명한 성찰을 하는 대신, 그처럼 우렁차고도 은은한 종소리에 들뜬 쥘리앵의 영혼은 공상의 세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훌륭한 성직자도 위대한 행정가도 되지 못하리라. 이처럼 흥분하기 쉬운 영혼은 기껏 예술가가 되기에나 안성맞춤인 것이다.... - P-1

..진정한 정열이란 오직 그 정열 자체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파리에서는 정열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 P-1

.."저를 멸시하는 사람에게 저는 대답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 같군요." 쥘리앵이 몹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네는 그 경멸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어. 그것은 과장된 찬사로만 표시된다네. 자네가 바보라면 그런 찬사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출세하고자 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척해야 할 걸세." - P-1

...이 대귀족들은 왕의 사륜마차에 타본 명문 귀족의 후예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쥘리앵은 ‘십자군’이란 단어만이 그들의 얼굴에 존경 어린 엄숙한 표정을 부여하는 유일한 말임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존경에는 항상 친절을 베푸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 P-1

...드 라 몰 저택에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항상 완벽한 정중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낙오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골뜨기다운 상식은 이런 결과를 ‘뭐든지 새로운 동안만 아름다운 법’이란 속담으로 설명하려 들었다.
..어쩌면 쥘리앵에게 처음보다 좀 더 통찰력이 생겼거나, 아니면 파리의 세련이 일으켰던 처음의 매혹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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