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은 일주일 중 금요일에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주말을 앞두었다는 그 쾌락은 평일의 고난과 시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의식이 꺼진 동안의 삶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상태를 바라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죽고 싶지도 않고 생활 속에 존재하고도 싶지만, 그 삶을 목도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만 깨어 있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김현은 그런 부류였다. 그의 인생관이 어떻든 윤희랑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성을 보이게 된 데에는 미약하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유소현은 마법공학과에서 배운 신화 생물의 생태를 떠올렸어. 날개의 점막이야말로 용의 유전자가 얼마나 많이 발현되었는지 보여 주는 상징이었지. 원래 용날개의 점막은 어미 용이 직접 찢어 주는 거거든. 그래야 새끼 용이 날 수 있게 돼. 하지만 용순이에게는 어미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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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타인의 책상 앞에 앉으면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어쩐지 뒤가 켕긴다. 꼭 그 인물로 행세하는 기분이다.

126p.
..비에 젖은 번체자 간판. 축축한 거리, 습한 도시 냄새.
..이곳은 데자뷔의 거리다. 어떤 것을 봐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컨대 작은 노점에서 과자를 사는 소녀, 흰 하복에 검정 가죽 구두, 예컨대 스포츠 백을 배낭처럼 등에 지고 농구공을 튀기며 걸어가는 소년, 예컨대 가게 앞 테이블에서 쌀국수를 먹는 어머니와 아이. 예컨대 건어물 가게 앞에 걸터앉아 수다 떠는 할머니.
..하나하나가 어쩌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인생처럼 느껴진다.

133p.
.."TAIPEI는 기억의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시는 어디나 그렇지만, TAIPEI는 여러 이국의 기억까지 지니고 있지. 난 이곳에서 거리를 걷다 보면 ‘추억‘에 집어삼켜질 것 같아. ‘추억‘은 개인적인 것일 텐데, 나만의 것일 텐데, 이렇게 골목을 걷다 보면 TAIPEI의 ‘추억‘이 사방에서 성난 물결처럼 밀려들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만 같네."
.."예컨대 저기 기대 세워놓은 자전거. 예컨대 포장길에 나란히 선 일륜차의 번호판 중 하나. 허물어져가는 붉은 벽돌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전깃줄과 넝쿨. 폐가의 초인종과 잠긴 우편함. 잠깐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눈으로, 모공으로 ‘추억‘이 침입해. 나 자신이 TAIPEI ‘추억‘의 일부가 되고 말아."

288p.
..술과 책의 판매도 호조다. 야간외출금지령 탓에 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는 한편 아침까지 밖에서 노는 사람도 오히려 늘었다. 라이프스타일이 양극화되었다. 금욕적인 타입과 은밀히 향락을 즐기는 타입. 원래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라고 금지령 덕에 밤놀이가 전보다 더 재미있어졌어, 하는 일본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책을 읽게 하려면 책을 금지하는 게 제일이라고 마유미가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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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두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일을 하다 일단 육지에 발을 디디면 찰떡을 밟은 작은 새처럼 하코다테나 오타루小樽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면 너무나 쉽게 ‘태어났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알몸이 되어 쫓겨났다. 결국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구축함은 날개를 접은 잿빛 물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선체를 흔들며 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몸 전체가 ‘잠‘을 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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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p.
..버리지 못한 이유를 아는 것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버린 이유를 아는 것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193p.
..시험 삼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읽고 보는 것은 내 인생의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책이나 TV를 보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훨씬 머리에 정보가 오래 남지 않나요?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귀찮다‘고 여겨지면 그 정보는 당신에게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199p.
..앞으로 많은 물건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를 들이면 둘을 버린다‘는 규칙을 세우면 물건을 줄이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옷을 사면 옷을 버린다. 식기를 사면 식기를 버린다는 ‘같은 장르 버리기‘도 괜찮고 ‘버리는 물건에 일용품이나 소모품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등 자기만의 규칙을 만들 것을 추천합니다.
..이 방법이 효과적인 것은 들이기 전 단계에서 ‘버리기‘를 생각함으로써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버리기가 아깝다면 새로 사들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204p.
..물건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형태가 없는 것에 돈을 쓰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나서 물건의 가치와 대면하는 기회가 늘어난 지금, 물건 이외의 가치를 느끼는 힘도 커졌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선물."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한 여행 경비."
.."내 미래를 만들기 위한 투자."
..있어도 없어도 그리 곤란하지 않고 오히려 관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드는 물건에 들였던 돈을 지금은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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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p.
...닥터 지바고가 운명의 어둑한 회랑을 거닐지 않으면 안 되었듯이, 아마 무슨 이유에서인가 역사적 굴곡의 상징이 되어 브래지어는 뜻밖의 비련에 휩쓸리게 된 것 같다. 불쌍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무엇인가의 상징‘ 같은 것만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34p.
..비행기 엔진이 멈추자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오후, 온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해 보였다. 구불구불한 산 능선과 소나무 숲과 곳곳에 흩어진 하얀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고, 저멀리에는 에게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떠돌며 헤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조용하며 아득히 멀리에 있었다. 지금까지 만사를 하나로 묶고 있던 띠 같은 것이 어떤 힘에 의해 풀려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대로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세계가 이미 다 흩어졌으니 앞으로는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다 끝내는 육체를 잃고 오감만이 남아 잔업 처리하듯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신기하고 적막한 느낌이었다.

51p.
...휴대전화의 착신 멜로디도 그렇지만, 후렴이 없는 음악은 함께할 곳이 없어 그런지 묘하게 지친다.
..문득 생각났는데 세상에는 종종 ‘후렴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핏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에 깊이가 없다고 할까, 미로 속으로 들어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여지없이 녹초가 되고 피로도 의외로 오래간다. 물론 이것 역시 비틀스한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얘기지만.

187p.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은 상처가 되는가 하면, 잘못된 칭찬을 받는 것일 터다. 이미 상당 부분 확신하는 바이다. 그런 칭찬을 받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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