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
...닥터 지바고가 운명의 어둑한 회랑을 거닐지 않으면 안 되었듯이, 아마 무슨 이유에서인가 역사적 굴곡의 상징이 되어 브래지어는 뜻밖의 비련에 휩쓸리게 된 것 같다. 불쌍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무엇인가의 상징‘ 같은 것만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34p.
..비행기 엔진이 멈추자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오후, 온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해 보였다. 구불구불한 산 능선과 소나무 숲과 곳곳에 흩어진 하얀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고, 저멀리에는 에게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떠돌며 헤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조용하며 아득히 멀리에 있었다. 지금까지 만사를 하나로 묶고 있던 띠 같은 것이 어떤 힘에 의해 풀려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대로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세계가 이미 다 흩어졌으니 앞으로는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다 끝내는 육체를 잃고 오감만이 남아 잔업 처리하듯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신기하고 적막한 느낌이었다.

51p.
...휴대전화의 착신 멜로디도 그렇지만, 후렴이 없는 음악은 함께할 곳이 없어 그런지 묘하게 지친다.
..문득 생각났는데 세상에는 종종 ‘후렴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핏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에 깊이가 없다고 할까, 미로 속으로 들어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여지없이 녹초가 되고 피로도 의외로 오래간다. 물론 이것 역시 비틀스한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얘기지만.

187p.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은 상처가 되는가 하면, 잘못된 칭찬을 받는 것일 터다. 이미 상당 부분 확신하는 바이다. 그런 칭찬을 받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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