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타인의 책상 앞에 앉으면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어쩐지 뒤가 켕긴다. 꼭 그 인물로 행세하는 기분이다.
126p. ..비에 젖은 번체자 간판. 축축한 거리, 습한 도시 냄새. ..이곳은 데자뷔의 거리다. 어떤 것을 봐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컨대 작은 노점에서 과자를 사는 소녀, 흰 하복에 검정 가죽 구두, 예컨대 스포츠 백을 배낭처럼 등에 지고 농구공을 튀기며 걸어가는 소년, 예컨대 가게 앞 테이블에서 쌀국수를 먹는 어머니와 아이. 예컨대 건어물 가게 앞에 걸터앉아 수다 떠는 할머니. ..하나하나가 어쩌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인생처럼 느껴진다.
133p. .."TAIPEI는 기억의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시는 어디나 그렇지만, TAIPEI는 여러 이국의 기억까지 지니고 있지. 난 이곳에서 거리를 걷다 보면 ‘추억‘에 집어삼켜질 것 같아. ‘추억‘은 개인적인 것일 텐데, 나만의 것일 텐데, 이렇게 골목을 걷다 보면 TAIPEI의 ‘추억‘이 사방에서 성난 물결처럼 밀려들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만 같네." .."예컨대 저기 기대 세워놓은 자전거. 예컨대 포장길에 나란히 선 일륜차의 번호판 중 하나. 허물어져가는 붉은 벽돌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전깃줄과 넝쿨. 폐가의 초인종과 잠긴 우편함. 잠깐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눈으로, 모공으로 ‘추억‘이 침입해. 나 자신이 TAIPEI ‘추억‘의 일부가 되고 말아."
288p. ..술과 책의 판매도 호조다. 야간외출금지령 탓에 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는 한편 아침까지 밖에서 노는 사람도 오히려 늘었다. 라이프스타일이 양극화되었다. 금욕적인 타입과 은밀히 향락을 즐기는 타입. 원래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라고 금지령 덕에 밤놀이가 전보다 더 재미있어졌어, 하는 일본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책을 읽게 하려면 책을 금지하는 게 제일이라고 마유미가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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