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니노를 알아왔지만 내게 그는 꿈같은 존재였다. 그를 내 곁에 영원히 붙잡아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대상이었기에 나에게 그는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와의 미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달랐다. 그는 현재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커다란 바위였다. 그곳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이자 아이로타 집안에서 내려오는 규율의 지배를 받는 영토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위대한 이상과 명문가에 대한 숭배와 원리원칙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 않는 여학생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평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학업의 대가로 자신들의 미래가 집안일에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의도한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쓴 글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나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생각도 공책에 적어두었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그들의 관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왕관의 보석 같은 존재?‘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교양 있는 교수님은 지금 내게 내 책의 원죄는 경미한 것인데 그것을 매번 치명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교묘하게 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 해석이 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중과 같은 수준의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점으로 내 작품을 바라본 것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젠 됐어. 이젠 그런 종속적인 태도를 버려야겠어. 독자들과 의견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해. 독자들 기준으로 수준을 낮춰선 안 돼."

..이때 타라타노 교수의 목소리는 진정 환희로 가득 찼다. 혁명의 기운이 젊은이와 기성세대에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타라타노 교수가 이야기하는 내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현재가 실은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과거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그의 집착에 놀랐다.

...그날의 광경을 전부 기억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올 때 그럴듯해 보이고 싶어서 공책을 꺼내 들고 이런저런 광경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

..『푸른 요정』이 공장 마당의 모닥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공기 속에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릴라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릴라는 며칠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봤자 상처만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자신의 불행이 일반적인 불쾌함이 되고 그러다 가벼운 우울함이 되고 그마저도 일상의 고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오래된 소설에 나오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입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업적을 이룬 후 길을 가다가 평생 한 번도 목초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헐벗고 굶주린 목동이 놀랍도록 용맹하게 맨손으로 사나운 야수를 제압하고 길들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의 말을 듣고 있기가 힘에 겨웠다. 릴라와는 도무지 안정된 관계를 구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싶으면 릴라는 이내 이상한 생각을 해서 균형을 깨뜨렸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이에서 관계의 안정성은 언제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달의 백색 평원이라니."
..릴라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니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니까."
..릴라는 달은 수억 개의 돌멩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달도 결국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니 골치 아픈 일투성이라도 꿋꿋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책들을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다. 시어머니가 좋지 않게 평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나와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나를 무능한 어머니의 역할에서 탈피시키려 했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내게 말을 걸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번뜩이는 영감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둔해진 머리와 멍해진 눈빛을 다시 반짝이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 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 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 보일 뿐이거든."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 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당연히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몸이 달걀 껍데기 같아서 팔이나 이마나 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바람에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은밀한 속내가 모두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니노는 무려 열흘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은 니노를 유혹하고 싶어 했던 지난날의 집착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니노와 농담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아양을 떨지도 않았고 과할 정도로 챙겨주면서 다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마리아로사를 흉내 내어 해방된 여성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위험한 생각을 품지도 않았고 애틋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끌려 하지도 않았다.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 때 니노 옆에 앉으려 애쓰지도 않았고 헝클어진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니노와 단둘이 남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의 팔꿈치에 내 팔꿈치를 스치거나 그의 팔에 내 팔이나 가슴을 스치거나 그의 다리에 내 다리를 스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수줍고 단정한 태도로 그와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대화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저 니노가 식사를 잘하고 아이들이 그를 너무 귀찮게 하지 않고 그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쓸 뿐이었다.
..꼭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니노는 피에트로, 데데, 엘사와 항상 장난을 쳤다. 하지만 내게 말할 때만큼은 늘 진지했다. 예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말을 가렸다.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하게 됐다. 나는 니노가 우리집에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친밀한 말이나 행동을 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만 머물며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이 된 것 같아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두 남자 사이에 싹텄던 우정이 왜 일방적인 적대감으로 바뀐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니노는 내게 내 남편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니노는 내가 피에트로를 지나치게 이상화해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젊은 대학교수 이미지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보잘것없는 실체를 내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 논문부터 학문적으로 중요한 저서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해줄 두 번째 책을 집필하는 데 오랜 시간 동안 몰두하고 있는 학자가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인간과 살고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남자를 위해 딸을 둘이나 낳은 거야.‘
..니노는 마지막 며칠 동안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니노는 피에트로를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해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피에트로를 파괴함으로써 내 자아를 되찾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는 자기 자신이 내게 피에트로의 이상적인 대안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이 단순해진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려 했다. 가끔 니노에게 행복한지 물으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키스했다. 드높은 창공에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표면인 비행기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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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p.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어떤 목적을 위해 마련된 장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연구를 위한 실내 공간에 있으면 몸이 움찔거려 집중할 수 없고, 글을 쓰기 위한 서재라고 생각하면 딴짓이 하고 싶어집니다. ‘일부러 마련해놓은 장소‘에 있으면 어쩐지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된 듯 갑갑하고 근지러운 기분이 듭니다.

11p.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행위라기보다 사건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결코 예정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흐름을 잘 타느냐 못 타느냐가 정해집니다. 감각적으로 거의 도박과도 비슷합니다.

37p.
..암산으로 계산할 경우라면 우리는 계산의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필산이라면 복잡한 계산의 과정을 작은 과정으로 쪼개어 종이에 적힌 글자를 가지고 더하거나 곱하는 등 기계적으로 조작하면 그만입니다. 이렇듯 ‘쓰기‘는 ‘생각하기‘를 확장하는 수단인 셈입니다.

65p.
..어쩌면 ‘아‘가 적힌 카드의 독특한 나무 재질이나 만졌을 때의 느낌, 냄새, 미세한 흠, 또는 얼룩이야말로 아이들이 맨 처음 접하는 ‘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글자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카드가 지닌 물질적인 특징이나 폰트의 종류, 크기, 글자를 칠한 색깔 같은 디자인의 특징을 모조리 내다 버려야만 글자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학습이란 결국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밖의 것은 대량으로 내다 버리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상화‘입니다.

80p.
..예전에 뇌경색을 일으킨 지 3년 반이 지난 여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암묵적인 앎‘ 같은 것,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어떻게 하는지도 잊어버리더군요...."

131p.
..실제로 나카세 에리 씨는 앞이 보이는 사람이 묘사한 내용중에 ‘빠져 있다‘고 느끼는 정보도 있다고 합니다. 나카세 씨 경험의 기억으로 보자면 응당 ‘있어야 할 당연한‘ 정보가 나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카세 씨는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책에서는 의자 다리가 어떻고 책상 다리가 어떤지는 묘사하지만, 재질이 어떻고 앉았을 때 얼마나 편한지는 별로 쓰여 있지 않아요. 테이블이 사각형인지 원형인지도 그다지 묘사하지 않고요. 특히 촉각이나 냄새 같은 것은 비장애인 작가가 쓴 책에 거의 빠져 있는 것 같아요."

135p.
..요약해서 말하자면 앞이 보이는 사람은 한순간에 전체를 파악하기를 원하고, 글을 읽더라도 ‘전체를 한숨에 읽고 싶다‘는 쪽에 속합니다. 그만큼 세부 사항의 정확도는 나중으로 돌리기 쉽습니다. 한편,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하나 세부를 먼저 짚어냄으로써 내용을 파악하고 싶은 쪽입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그만큼 정확하게 알아가는 방식이지요.

144p.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청각장애인의 신체는 스스로 발성은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와 마주했을 때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내 몸에서 목소리를 벗겨내는 행위를 자신에게 요구한다. 한평생 자신의 귀로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귀로 듣는 일은 꿈이나 상상의 세계에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 곁에 바싹 붙으려고 하는 목소리를 벗겨내지 않으면 귀로 듣는 일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2p.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헛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의족·의수, 거울 이미지, 이미지 등 ‘이것은 내 몸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헛통증은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실제로 움직였다‘는 결과 보고가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말해 예측과 결과의 불일치를 메우면 헛통증이 약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였다‘는 (착각한) 정보를 뇌에 전달해주면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200~201p.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어느 날 모리 씨는 ‘동물처럼 사는 길‘을 떠올렸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리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물은 상처를 입었다고 엉엉 울지 않잖아요. 그저 살아남으려고만 하지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동물처럼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기를 도중에 포기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대신 목숨을 포기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할지 기로에 놓였을 때 나는 목숨을 부지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마주한 현상을 조망하며 이유를 자문하기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형이상학적 의식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모리 씨는 인간으로서 자기 안에 있는 이성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고 모리 씨는 말합니다.

234~235p.
..이것을 바탕으로 하시모토는 이렇게 논합니다. "통증이 있기 때문에 몸은 내 일부가 되는 것이다. 통증이 없다면 내 몸은 ‘자동차‘나 ‘도구‘ 같은 소유물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통증이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를 초월한 무엇이다. 소유물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통증이 없는 몸이다."
..통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플 때 우리는 자기 몸이 ‘어디론가 끌려간‘ 듯 느낍니다. 그렇지만 애초부터 몸이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아닙니다. 몸이란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이 전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284p.
..뒤집어 말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시로 씨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독자의 입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시로 씨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도 기껏해야 독자와 비슷한 수준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있었던 일을 새삼스레 다시 즐길 수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같은 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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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이때부터 사단장이 출근하고 나면 소련 사람들이 지은 이 병영의 양옥 건물 안에는 서른두 살인 사단장의 아내 류롄과 스물여덟 살인 취사병 겸 공무원 우다왕만 남게 되었다. 마치 커다란 꽃밭에 신선한 꽃나무 한 그루와 호미 한 자루만 남은 것 같았다.

31~32p.
..방 안은 불이 꺼진 채 온통 황혼처럼 어두침침했다. 방 안에 놓인 침대와 탁자, 의자가 끈적끈적하고 걸쭉한 분위기 속에 진흙탕처럼 뒤엉켜 있었다. 류롄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마오쩌둥 선집》 1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다왕이 전에 먹던 사탕 맛을 음미하듯 과거를 회상하게 되어서야 그날 그 황혼의 어두침침함 속에서는 절대로 책을 볼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롄은 그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고 있었을 뿐, 결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다왕은 그 순간에는 류롄이 정말 책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날이 흐리면 비가 오고 해가 뜨면 날이 개듯 그 자리에서 발생한 모든 것이 순리에 맞고 인지상정이라고 믿었다.

42p.
...이지적 판단이 끝없이 떨어지는 우박처럼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러고는 이내 차가운 빗물이 되어 펄펄 끓는 그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102~103p.
...사실 과거든 현재는 아니면 미래든, 수많은 문제에 있어 단순함이 항상 복잡함을 지배하는 법이었다. 단순함은 언제나 황제였고 복잡함은 신하에 불과했다. 수없이 복잡한 일도 표면을 벗겨내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과 같은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들만 남았다. 우다왕이 사단장 사택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바로 이런 단순함 때문이었다. 영웅이 되살아나 그의 운명을 구해준 것 같은 바로 이런 단순함이었다.

108p.
...여성 군복은 약간 헐렁했지만 남성 군복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젊은 사람이 입으면 조금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이 입으면 다소 젊어 보이며, 잘생긴 사람이 입으면 대중 한가운데로 떨어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못생긴 사람이 입으면 오히려 약간 멋있어 보였다....

117~118p.
..사건의 결말은 이미 엄숙함에서 황당함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황당함의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고 우다왕의 상상도 넘어섰지만 여전히 질탕한 이야기 한가운데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위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어쩌면 특수한 정경 속에서 바로 그 황당함 때문에 한 가지 진실을 실증해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황당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허위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감정 세계에서 황당함은 모든 일의 귀착점인지도 모른다. 황당한 결말이 있어야만 과정의 가치를 경험적으로 실증해낼 수 있다. 결말이 황당하지 않으면 그 핍진한 과정들은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해도 결국에는 유희 같은 허상과 무의미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127p.
..동방을 밝히자마자 우다왕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그녀는 세월과 미래를 바쳐야 할 신혼의 몸을 자신의 품에 먼저 안으려 했다.
..이때부터 성性이 시작되었고 사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51p.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부엌 시멘트 바닥 위에서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털이 뽑힌 돼지 두 마리가 죽어서 도마 밑에 던져져 있는 것 같았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이 어떻게 상점의 가격표처럼 두 사람 몸 위에 올려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74p.
.."배고파요?"
.."안 고파. 샤오우, 우린 짐승이 된 것 같아."
.."짐승이면 어때요."
.."이런 화파희(花把戲, 마술이나 잡기를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갖가지 부정한 방법을 의미함)는 어디서 배운 거야?"
.."화파희라니요?"
.."방금 보여준 연극 말이야."
.."뱃속에 원한이 가득 차 있어서 풀려다 보니 그런 방법이 생각난 거예요."
.."누가 그렇게 미운데?"
.."모르겠어요."

292p.
..사흘 뒤, 사단의 해산이 선포되었다. 우다왕과 류롄의 사랑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하지만 전부 떠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의 비밀이 모든 사람의 망각 속에 깊이 묻혀버렸다. 마치 황금덩이 하나가 깊은 바닷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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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긴소매 셔츠는 이탈리아 남자 패션의 기본이다. 여름에도 흐린 날이면 찬바람이 불어서 티셔츠 위에 긴소매 셔츠를 덧입는다. 조금 추워지면 셔츠 위에 가죽 블루종과 스웨터를 입고, 약간 공식적인 곳에서는 셔츠 위에 재킷을 입으며, 더 공식적인 경우에는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 어디까지나 셔츠가 기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패션에 대한 생각이 편안해졌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지만 기본이 정해지면 다음은 비교적 간단하다.

75p.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폭발적인 기쁨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폭발적인 기쁨이 평생 이어지면, 우리는 아마 지칠 대로 지쳐서 결국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매우 조용한 충실감, 성취감이 아닐까.

113p.
...종교 개혁을 이룬 나라인 독일은 합리성과 진실함과 강건함이 모든 개념의 기본이다. 독일인은 간소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각 유명브랜드 매장의 인테리어나 점원의 태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에는 없는 ‘소심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비싸고 화려한 것을 판다는 것이 마틴 루터를 낳은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실은 괴롭습니다." 같은 분위기가 가게 전체에 떠도는 것 같다.

123p.
...셔츠란 폴로든 긴소매 면 셔츠든 티셔츠든, 얼마만큼 정확하게 군더더기를 배제하는가, 또 얼마만큼 티 나지 않게 연구했는가로 디자인의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촌스러운 셔츠는 무언가가 부족한 게 아니라 군더더기가 두드러진다.

130p.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138p.
..아시시에는 몇 번이나 갔다. 나는 성프란체스코 대성당보다 산다미아노라는 소박한 수도원을 좋아했다.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긴 언덕길 옆 경사지에 올리브 숲이 있었다. 올리브잎의 겉면과 뒷면은 색이 미묘하게 달라서 빛의 양에 따라 나무 전체가 부옇게 보일 때가 있다. 윤곽이 희미한 올리브 나무들이 몇백 그루나 경사지에 늘어선 모습을 즐겨 봤다. 아시시 주택가를 걷는 것도 상쾌했다. 언덕길에 비좁게 집이 늘어서있어서 고향 사세보가 생각났다.

149p.
..생제르맹데프레에서의 즐거운 추억 중 하나는 대학생 아들과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렀을 때, 크고 무거운 쇼핑 봉투를 들고 호텔까지 돌아오면서 ‘개 발견하기‘라는 게임을 한 것이다. 더 이상 들지 못할 정도로 옷과 구두를 사서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걷다 보니 둘 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생 때 한 게임을 생각해 냈다. 처음에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짐을 다 든다. 그러다 개를 발견하면 교대하는 단순한 게임이다. 파리는 개가 많아서 교대도 잦았지만, 어찌된 건지 개가 한참 보이지 않아 두 사람분의 짐을 들고 계속 걷기도 했다. 개가 두 마리 있으면 교대 플러스 교대여서 짐을 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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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내가 하는 거짓말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몹시 고향으로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고, 위로의 말을 애써 찾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저녁 내내 감히 웃지 못했다. 내 거짓말의 효과는 대충 그 정도였다.

26p.
..종종 나는 집 앞에 앉아서 흙장난을 했는데, 흙으로 커다란 페니스나 여자의 엉덩이, 젖가슴 따위를 만들며 놀았다. 붉은 점토에다 어머니의 몸뚱이를 조각하기도 했는데, 그 몸뚱이에 구멍을 내기 위해 손가락을 찔러넣곤 했다. 입, 코, 눈, 귀, 성기, 항문, 배꼽.
..어머니는 우리집이나 내 옷이나 신발과 마찬가지로 구멍투성이였다. 나는 진흙으로 그 구멍들을 메우고 발로 밟았다.

61p.
..술집에서 네번째 모금이 있던 날, 종업원이 내게 말했다.
..—당신네 외국인들은 만날 조의금을 걷고 만날 장례식을 하는군요.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맘껏 즐기고 있다네.

115~116p.
..시간이 갈라진다. 유년의 빈 공백은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 갇힌 일그러진 태양은? 허공에서 전복된 길은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다.

116p.
..나는 곧 치료될 것이다. 무언가가 나의 내부나 공간 어딘가에서 부서질 것이다. 나는 미지의 깊은 곳을 향해 떠날 것이다. 대지 위에는 수확과 참을 수 없는 기다림과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143p.
...감히 누구를 죽이지도 못하고, 자살도 못 하는 그가 택하는 다른 형태의 자살은 바로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리라. 린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끝에 모두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토비아스는 꿈을 죽이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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