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p. ...이때부터 사단장이 출근하고 나면 소련 사람들이 지은 이 병영의 양옥 건물 안에는 서른두 살인 사단장의 아내 류롄과 스물여덟 살인 취사병 겸 공무원 우다왕만 남게 되었다. 마치 커다란 꽃밭에 신선한 꽃나무 한 그루와 호미 한 자루만 남은 것 같았다.
31~32p. ..방 안은 불이 꺼진 채 온통 황혼처럼 어두침침했다. 방 안에 놓인 침대와 탁자, 의자가 끈적끈적하고 걸쭉한 분위기 속에 진흙탕처럼 뒤엉켜 있었다. 류롄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마오쩌둥 선집》 1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다왕이 전에 먹던 사탕 맛을 음미하듯 과거를 회상하게 되어서야 그날 그 황혼의 어두침침함 속에서는 절대로 책을 볼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롄은 그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고 있었을 뿐, 결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다왕은 그 순간에는 류롄이 정말 책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날이 흐리면 비가 오고 해가 뜨면 날이 개듯 그 자리에서 발생한 모든 것이 순리에 맞고 인지상정이라고 믿었다.
42p. ...이지적 판단이 끝없이 떨어지는 우박처럼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러고는 이내 차가운 빗물이 되어 펄펄 끓는 그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102~103p. ...사실 과거든 현재는 아니면 미래든, 수많은 문제에 있어 단순함이 항상 복잡함을 지배하는 법이었다. 단순함은 언제나 황제였고 복잡함은 신하에 불과했다. 수없이 복잡한 일도 표면을 벗겨내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과 같은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들만 남았다. 우다왕이 사단장 사택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바로 이런 단순함 때문이었다. 영웅이 되살아나 그의 운명을 구해준 것 같은 바로 이런 단순함이었다.
108p. ...여성 군복은 약간 헐렁했지만 남성 군복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젊은 사람이 입으면 조금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이 입으면 다소 젊어 보이며, 잘생긴 사람이 입으면 대중 한가운데로 떨어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못생긴 사람이 입으면 오히려 약간 멋있어 보였다....
117~118p. ..사건의 결말은 이미 엄숙함에서 황당함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황당함의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고 우다왕의 상상도 넘어섰지만 여전히 질탕한 이야기 한가운데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위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어쩌면 특수한 정경 속에서 바로 그 황당함 때문에 한 가지 진실을 실증해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황당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허위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감정 세계에서 황당함은 모든 일의 귀착점인지도 모른다. 황당한 결말이 있어야만 과정의 가치를 경험적으로 실증해낼 수 있다. 결말이 황당하지 않으면 그 핍진한 과정들은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해도 결국에는 유희 같은 허상과 무의미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127p. ..동방을 밝히자마자 우다왕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그녀는 세월과 미래를 바쳐야 할 신혼의 몸을 자신의 품에 먼저 안으려 했다. ..이때부터 성性이 시작되었고 사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51p.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부엌 시멘트 바닥 위에서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털이 뽑힌 돼지 두 마리가 죽어서 도마 밑에 던져져 있는 것 같았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이 어떻게 상점의 가격표처럼 두 사람 몸 위에 올려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74p. .."배고파요?" .."안 고파. 샤오우, 우린 짐승이 된 것 같아." .."짐승이면 어때요." .."이런 화파희(花把戲, 마술이나 잡기를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갖가지 부정한 방법을 의미함)는 어디서 배운 거야?" .."화파희라니요?" .."방금 보여준 연극 말이야." .."뱃속에 원한이 가득 차 있어서 풀려다 보니 그런 방법이 생각난 거예요." .."누가 그렇게 미운데?" .."모르겠어요."
292p. ..사흘 뒤, 사단의 해산이 선포되었다. 우다왕과 류롄의 사랑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하지만 전부 떠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의 비밀이 모든 사람의 망각 속에 깊이 묻혀버렸다. 마치 황금덩이 하나가 깊은 바닷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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