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니노를 알아왔지만 내게 그는 꿈같은 존재였다. 그를 내 곁에 영원히 붙잡아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대상이었기에 나에게 그는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와의 미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달랐다. 그는 현재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커다란 바위였다. 그곳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이자 아이로타 집안에서 내려오는 규율의 지배를 받는 영토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위대한 이상과 명문가에 대한 숭배와 원리원칙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 않는 여학생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평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학업의 대가로 자신들의 미래가 집안일에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의도한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쓴 글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나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생각도 공책에 적어두었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그들의 관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왕관의 보석 같은 존재?‘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교양 있는 교수님은 지금 내게 내 책의 원죄는 경미한 것인데 그것을 매번 치명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교묘하게 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 해석이 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중과 같은 수준의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점으로 내 작품을 바라본 것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젠 됐어. 이젠 그런 종속적인 태도를 버려야겠어. 독자들과 의견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해. 독자들 기준으로 수준을 낮춰선 안 돼."

..이때 타라타노 교수의 목소리는 진정 환희로 가득 찼다. 혁명의 기운이 젊은이와 기성세대에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타라타노 교수가 이야기하는 내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현재가 실은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과거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그의 집착에 놀랐다.

...그날의 광경을 전부 기억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올 때 그럴듯해 보이고 싶어서 공책을 꺼내 들고 이런저런 광경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

..『푸른 요정』이 공장 마당의 모닥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공기 속에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릴라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릴라는 며칠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봤자 상처만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자신의 불행이 일반적인 불쾌함이 되고 그러다 가벼운 우울함이 되고 그마저도 일상의 고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오래된 소설에 나오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입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업적을 이룬 후 길을 가다가 평생 한 번도 목초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헐벗고 굶주린 목동이 놀랍도록 용맹하게 맨손으로 사나운 야수를 제압하고 길들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의 말을 듣고 있기가 힘에 겨웠다. 릴라와는 도무지 안정된 관계를 구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싶으면 릴라는 이내 이상한 생각을 해서 균형을 깨뜨렸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이에서 관계의 안정성은 언제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달의 백색 평원이라니."
..릴라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니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니까."
..릴라는 달은 수억 개의 돌멩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달도 결국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니 골치 아픈 일투성이라도 꿋꿋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책들을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다. 시어머니가 좋지 않게 평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나와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나를 무능한 어머니의 역할에서 탈피시키려 했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내게 말을 걸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번뜩이는 영감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둔해진 머리와 멍해진 눈빛을 다시 반짝이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 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 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 보일 뿐이거든."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 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당연히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몸이 달걀 껍데기 같아서 팔이나 이마나 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바람에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은밀한 속내가 모두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니노는 무려 열흘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은 니노를 유혹하고 싶어 했던 지난날의 집착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니노와 농담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아양을 떨지도 않았고 과할 정도로 챙겨주면서 다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마리아로사를 흉내 내어 해방된 여성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위험한 생각을 품지도 않았고 애틋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끌려 하지도 않았다.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 때 니노 옆에 앉으려 애쓰지도 않았고 헝클어진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니노와 단둘이 남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의 팔꿈치에 내 팔꿈치를 스치거나 그의 팔에 내 팔이나 가슴을 스치거나 그의 다리에 내 다리를 스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수줍고 단정한 태도로 그와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대화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저 니노가 식사를 잘하고 아이들이 그를 너무 귀찮게 하지 않고 그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쓸 뿐이었다.
..꼭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니노는 피에트로, 데데, 엘사와 항상 장난을 쳤다. 하지만 내게 말할 때만큼은 늘 진지했다. 예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말을 가렸다.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하게 됐다. 나는 니노가 우리집에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친밀한 말이나 행동을 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만 머물며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이 된 것 같아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두 남자 사이에 싹텄던 우정이 왜 일방적인 적대감으로 바뀐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니노는 내게 내 남편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니노는 내가 피에트로를 지나치게 이상화해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젊은 대학교수 이미지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보잘것없는 실체를 내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 논문부터 학문적으로 중요한 저서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해줄 두 번째 책을 집필하는 데 오랜 시간 동안 몰두하고 있는 학자가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인간과 살고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남자를 위해 딸을 둘이나 낳은 거야.‘
..니노는 마지막 며칠 동안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니노는 피에트로를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해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피에트로를 파괴함으로써 내 자아를 되찾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는 자기 자신이 내게 피에트로의 이상적인 대안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이 단순해진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려 했다. 가끔 니노에게 행복한지 물으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키스했다. 드높은 창공에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표면인 비행기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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