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긴소매 셔츠는 이탈리아 남자 패션의 기본이다. 여름에도 흐린 날이면 찬바람이 불어서 티셔츠 위에 긴소매 셔츠를 덧입는다. 조금 추워지면 셔츠 위에 가죽 블루종과 스웨터를 입고, 약간 공식적인 곳에서는 셔츠 위에 재킷을 입으며, 더 공식적인 경우에는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 어디까지나 셔츠가 기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패션에 대한 생각이 편안해졌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지만 기본이 정해지면 다음은 비교적 간단하다.
75p.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폭발적인 기쁨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폭발적인 기쁨이 평생 이어지면, 우리는 아마 지칠 대로 지쳐서 결국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매우 조용한 충실감, 성취감이 아닐까.
113p. ...종교 개혁을 이룬 나라인 독일은 합리성과 진실함과 강건함이 모든 개념의 기본이다. 독일인은 간소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각 유명브랜드 매장의 인테리어나 점원의 태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에는 없는 ‘소심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비싸고 화려한 것을 판다는 것이 마틴 루터를 낳은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실은 괴롭습니다." 같은 분위기가 가게 전체에 떠도는 것 같다.
123p. ...셔츠란 폴로든 긴소매 면 셔츠든 티셔츠든, 얼마만큼 정확하게 군더더기를 배제하는가, 또 얼마만큼 티 나지 않게 연구했는가로 디자인의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촌스러운 셔츠는 무언가가 부족한 게 아니라 군더더기가 두드러진다.
130p.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138p. ..아시시에는 몇 번이나 갔다. 나는 성프란체스코 대성당보다 산다미아노라는 소박한 수도원을 좋아했다.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긴 언덕길 옆 경사지에 올리브 숲이 있었다. 올리브잎의 겉면과 뒷면은 색이 미묘하게 달라서 빛의 양에 따라 나무 전체가 부옇게 보일 때가 있다. 윤곽이 희미한 올리브 나무들이 몇백 그루나 경사지에 늘어선 모습을 즐겨 봤다. 아시시 주택가를 걷는 것도 상쾌했다. 언덕길에 비좁게 집이 늘어서있어서 고향 사세보가 생각났다.
149p. ..생제르맹데프레에서의 즐거운 추억 중 하나는 대학생 아들과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렀을 때, 크고 무거운 쇼핑 봉투를 들고 호텔까지 돌아오면서 ‘개 발견하기‘라는 게임을 한 것이다. 더 이상 들지 못할 정도로 옷과 구두를 사서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걷다 보니 둘 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생 때 한 게임을 생각해 냈다. 처음에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짐을 다 든다. 그러다 개를 발견하면 교대하는 단순한 게임이다. 파리는 개가 많아서 교대도 잦았지만, 어찌된 건지 개가 한참 보이지 않아 두 사람분의 짐을 들고 계속 걷기도 했다. 개가 두 마리 있으면 교대 플러스 교대여서 짐을 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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