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어떤 목적을 위해 마련된 장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연구를 위한 실내 공간에 있으면 몸이 움찔거려 집중할 수 없고, 글을 쓰기 위한 서재라고 생각하면 딴짓이 하고 싶어집니다. ‘일부러 마련해놓은 장소‘에 있으면 어쩐지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된 듯 갑갑하고 근지러운 기분이 듭니다.

11p.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행위라기보다 사건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결코 예정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흐름을 잘 타느냐 못 타느냐가 정해집니다. 감각적으로 거의 도박과도 비슷합니다.

37p.
..암산으로 계산할 경우라면 우리는 계산의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필산이라면 복잡한 계산의 과정을 작은 과정으로 쪼개어 종이에 적힌 글자를 가지고 더하거나 곱하는 등 기계적으로 조작하면 그만입니다. 이렇듯 ‘쓰기‘는 ‘생각하기‘를 확장하는 수단인 셈입니다.

65p.
..어쩌면 ‘아‘가 적힌 카드의 독특한 나무 재질이나 만졌을 때의 느낌, 냄새, 미세한 흠, 또는 얼룩이야말로 아이들이 맨 처음 접하는 ‘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글자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카드가 지닌 물질적인 특징이나 폰트의 종류, 크기, 글자를 칠한 색깔 같은 디자인의 특징을 모조리 내다 버려야만 글자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학습이란 결국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밖의 것은 대량으로 내다 버리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상화‘입니다.

80p.
..예전에 뇌경색을 일으킨 지 3년 반이 지난 여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암묵적인 앎‘ 같은 것,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어떻게 하는지도 잊어버리더군요...."

131p.
..실제로 나카세 에리 씨는 앞이 보이는 사람이 묘사한 내용중에 ‘빠져 있다‘고 느끼는 정보도 있다고 합니다. 나카세 씨 경험의 기억으로 보자면 응당 ‘있어야 할 당연한‘ 정보가 나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카세 씨는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책에서는 의자 다리가 어떻고 책상 다리가 어떤지는 묘사하지만, 재질이 어떻고 앉았을 때 얼마나 편한지는 별로 쓰여 있지 않아요. 테이블이 사각형인지 원형인지도 그다지 묘사하지 않고요. 특히 촉각이나 냄새 같은 것은 비장애인 작가가 쓴 책에 거의 빠져 있는 것 같아요."

135p.
..요약해서 말하자면 앞이 보이는 사람은 한순간에 전체를 파악하기를 원하고, 글을 읽더라도 ‘전체를 한숨에 읽고 싶다‘는 쪽에 속합니다. 그만큼 세부 사항의 정확도는 나중으로 돌리기 쉽습니다. 한편,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하나 세부를 먼저 짚어냄으로써 내용을 파악하고 싶은 쪽입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그만큼 정확하게 알아가는 방식이지요.

144p.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청각장애인의 신체는 스스로 발성은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와 마주했을 때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내 몸에서 목소리를 벗겨내는 행위를 자신에게 요구한다. 한평생 자신의 귀로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귀로 듣는 일은 꿈이나 상상의 세계에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 곁에 바싹 붙으려고 하는 목소리를 벗겨내지 않으면 귀로 듣는 일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2p.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헛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의족·의수, 거울 이미지, 이미지 등 ‘이것은 내 몸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헛통증은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실제로 움직였다‘는 결과 보고가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말해 예측과 결과의 불일치를 메우면 헛통증이 약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였다‘는 (착각한) 정보를 뇌에 전달해주면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200~201p.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어느 날 모리 씨는 ‘동물처럼 사는 길‘을 떠올렸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리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물은 상처를 입었다고 엉엉 울지 않잖아요. 그저 살아남으려고만 하지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동물처럼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기를 도중에 포기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대신 목숨을 포기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할지 기로에 놓였을 때 나는 목숨을 부지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마주한 현상을 조망하며 이유를 자문하기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형이상학적 의식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모리 씨는 인간으로서 자기 안에 있는 이성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고 모리 씨는 말합니다.

234~235p.
..이것을 바탕으로 하시모토는 이렇게 논합니다. "통증이 있기 때문에 몸은 내 일부가 되는 것이다. 통증이 없다면 내 몸은 ‘자동차‘나 ‘도구‘ 같은 소유물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통증이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를 초월한 무엇이다. 소유물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통증이 없는 몸이다."
..통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플 때 우리는 자기 몸이 ‘어디론가 끌려간‘ 듯 느낍니다. 그렇지만 애초부터 몸이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아닙니다. 몸이란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이 전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284p.
..뒤집어 말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시로 씨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독자의 입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시로 씨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도 기껏해야 독자와 비슷한 수준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있었던 일을 새삼스레 다시 즐길 수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같은 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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