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2p.
..감기로 학교를 쉬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시계를 올려다보며, 지금쯤 산수시간이겠지 또는 이제 슬슬 급식을 먹겠구나, 생각할 때의 내 기분. 사진을 찍은 것도, 녹음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때의 심정이 기억나는 것일까.
..감기로 쉬지 않았다면, 평소대로 학교에 갔을 나. 그 ‘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며 이불 속에 있는 일은 즐거웠다. 비어 있을 내 자리에 앉아 공상 속에서 급식을 먹었다.

93p.
..이불 속에서 어린 시절에 종종 했던 놀이가 있다.
..자신이 자는 위치를 거꾸로 뒤집기라는 내가 고안한 놀이다.
..상상한다.
..지금은, 벽 방향으로 머리가 있고 발 쪽에는 옷장이 있다. 그것을 머리 방향에 옷장이 있다고 상상해보는 놀이다.
..눈을 감은 채, 가능한 한 세밀하게 뒤집은 방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쪽으로 머리가 있으니까 천정의 모습은 이런 느낌이겠지. 창문은 오른쪽으로 바뀌고, 벽에 걸린 시계는 왼쪽.

162p.
..빵집에서 거북이 멜론빵을 산다. 멜론빵을 거북이같이 만들었을 뿐, 맛은 보통의 멜론빵이다. 하지만 ‘얼굴‘이 있는 탓에 여느 때보다 조심해서 입에 넣었다. 예전 우리 집 청소기에 수예점에서 찾아낸 인형용 눈을 달아봤더니, 그 순간 청소기의 ‘수고‘가 느껴졌었다.

166p.
..세탁한 담요를 벽장에 넣었다. "추워지면 또 만나!" 하면서 담요에 말을 걸어봤다가 침울해지고 말았다. 여름이 지나면 짧은 가을, 그리고 북풍의 계절. 겨울에 태어난 나는 당연하지만, 겨울에 나이를 먹는다.

207p.
..여러 가지 일이 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특히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은 좋은 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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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p.
..그녀는 자신들이 마분지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기슭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35p.
..장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영이 이해한 것은 조금 더 나중이었다. 장사는, 돈을 쓰려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모바일 쿠폰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게에 왔다. 점원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을지 의식하는 사람도 있고,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면 쿠폰을 받기 싫어 꼼수를 부리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고작 1000원, 2000원을 아끼려고 이 수고를 들여야 하나, 자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그 쿠폰은 지금 쓸 수 없다는 안내를 받으면 누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멀쩡한 사람도 화를 내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는 고스란히 점원이 뒤집어쓴다.

137p.
..신문이나 책을 읽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생각은 온통 할인 제도와 그날 매상, 그리고 손님이 풍기는 분위기에 쏠려 있었다.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156p.
..하은은 그들이 자기 욕을 하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그 대화에 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외에도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편하고 속절없는 충동을 느꼈다. 오래된 것이었다.

227p.
..이제 자기 삶이 전환기에 이르렀음을, 어떤 불확실성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단계‘를 향해 정신없이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금 어떻게 미끄러지느냐가 앞으로 수십 년을 좌우할 것이었다.

267p.
..신은 자신이 어떤 역할극을 수행하는 중이고, 그 자리에서 너무 순도 높은 진실은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323p.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낡은 기타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그는 생각했다.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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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p.
..피사체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된다. 거기 넋을 놓고 있다가는 사랑하는 피사체를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다. 핀이 나가거나 노출이 맞지 않게 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그 유명한 금언을 패러디해 말하자면, 사랑하면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면 그르치게 되니 이때의 피사체는 당신이 사랑하던 그 피사체가 아니게 된다.

233p.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즉각적이고 기능적인 판단을 한다. 누군가가 청담동이나 회기동에 살고 있다고 말할 때, 물건을 사기 위해 남대문시장이나 명동 롯데백화점에 간다고 말할 때, 우리는 즉각 판단을 한다. 남대문시장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아, 남대문시장이오, 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남대문시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시니컬한 금언이 하나 있다.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다.

238p.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술도 여행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 술은 맛이 변해버린다. 아니, 맛은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본래 술을 둘러싸고 있던 그 무언가가 달라져버린다....

240~241p.
...거품이 맥주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꽃꽂이가 꽃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 수집벽이 그 물건의 가치를 초과하는 것, 그런 일종의 전도야말로 일본 문화의 특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해진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숙련, 무가치한 초과, 장인은 그 모든 것의 ‘거품‘ 속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눈부신 잉여이다.

294.
...막상 비너스포트 안에 들어가면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 머물고 싶어진다. 오후 5시에 하늘의 빛이 바뀌고 가로등에 불이 켜지자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는 어떤 여성의 이야기도 나는 전해 들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컴의 프리킥에 알면서도 당하듯, 예고된 환상도 이렇게 처절할 때는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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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죽어서 다시 내 몸속에 들어왔어.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죽는다는 건 태어나지 않은 거래. 그 아이는 앞으로 내 핏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나는 점점 더 그 애를 닮아갈 거야."

..과거에 사로잡힌 나를 아내는 결코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옛날 여자인지라 이래저래 나를 돌봐주었다. 매사에 의지가 되던 아내를 잃고 나는 황야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죽음의 황야에서 나 혼자 그 옛날 전쟁터 섬의 기억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패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애초에 싸우기를 포기하고 그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황야를 홀로 떠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문 모를 노인네가 되는 것이 가장 편리할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 황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옛날에 그 섬에서 범한 죄 따위는 전쟁터의 잔재가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 어딘가에 매몰되어 잊어버릴 수 있다. 죄의식으로 고통받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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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p.
.."그러면 온갖 일들이 모두 정해지고 더 커지잖아. 그러기에는 아직 일러. 지금은 먼지 하나 일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일 수밖에 없는 때야. 조심, 조심, 숨죽이고. 크게 움직이면 목숨이 축나."

55p.
..엄마가 마음에서 우러나 끓여 주는 커피가 얼마나 진하고 뜨겁고 향기롭고 맛있는지를 알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엄마는 의무에 따라 습관적으로 나를 대하고 돌보았는데, 지금은 다르다. 함께 마시고 싶어서 맛있게 끓인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64~65p.
.."하루 시간의 흐름이, 저녁때가 되기 전에 갑자기 길어졌다가 해가 저물면 또 갑자기 빨라지잖니. 그 감각을 요즘 겨우 되찾았어. 이제는 매일 느낄 수 있어. 시간이 점점 늘어나 찹쌀떡처럼 주욱 늘어졌다가 확 빨라지는 경계를 알겠어.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날마다 되풀이되는데도 싫증나지 않아..."

84p.
..이 세상에는 그렇게 늘려 가는 힘과 줄여 가는 힘이 같은 분량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분량은 같은데, 줄여 가는 힘 쪽이 크게 느껴진다는 것도.

164p.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해, 생뚱맞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미 그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한 자신에게 놀란다. 들은 바로 그 순간, 적응한 부분이 생겨난다. 그리고 점점 자라난다. 어떤 일에든 그렇다.

178p.
..도시에 살다 보면 점차 인식이 흐려지는 것 중에는 개인이 가진 힘의 크기도 있다.
..커다란 빌딩 안에 있는 대형 서점에도 간판 점원은 있을 테고, 그 점원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면 모두들 허전해할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금방 새 사람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고 서점은 평소대로 운영된다. 도시 사람들은 일이 그렇게 돌아가야 안심한다.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회사도 망하지 않고 거리도그대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만으로는 어딘가 미진하게 느끼는 것도 인간이라는 존재다.
..나는 요즘에야, 특히 아빠가 죽고 아빠네 밴드가 해체된 후에야, 개인의 힘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그 사람이 없어지면 끝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오래가기는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지금 음미하고 경험하고 싶다고 절감하게 되는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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