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p.
..그녀는 자신들이 마분지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기슭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35p.
..장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영이 이해한 것은 조금 더 나중이었다. 장사는, 돈을 쓰려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모바일 쿠폰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게에 왔다. 점원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을지 의식하는 사람도 있고,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면 쿠폰을 받기 싫어 꼼수를 부리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고작 1000원, 2000원을 아끼려고 이 수고를 들여야 하나, 자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그 쿠폰은 지금 쓸 수 없다는 안내를 받으면 누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멀쩡한 사람도 화를 내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는 고스란히 점원이 뒤집어쓴다.

137p.
..신문이나 책을 읽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생각은 온통 할인 제도와 그날 매상, 그리고 손님이 풍기는 분위기에 쏠려 있었다.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156p.
..하은은 그들이 자기 욕을 하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그 대화에 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외에도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편하고 속절없는 충동을 느꼈다. 오래된 것이었다.

227p.
..이제 자기 삶이 전환기에 이르렀음을, 어떤 불확실성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단계‘를 향해 정신없이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금 어떻게 미끄러지느냐가 앞으로 수십 년을 좌우할 것이었다.

267p.
..신은 자신이 어떤 역할극을 수행하는 중이고, 그 자리에서 너무 순도 높은 진실은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323p.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낡은 기타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그는 생각했다.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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