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
..건강 검진 결과는 점괘와 비슷하다. 물론 과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보면 둘은 양극단에 있지만, ‘나에 대한 것이 쓰여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같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가장 잘 알 테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종잇조각에 쓰여 있는 것 같아서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도 정말 똑같다.

58p.
..여행에서 돈을 쓴다는 건 뭐랄까, 그보다는 조금 더 생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파는 차 한 잔 값이 얼마인지, 싸구려 식당의 밥값이 얼마인지,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 여행했던 나는 지금도 이집트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피라미드 돌의 감촉, 드넓은 궁전에 비친 햇살,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 안의 뿌옇게 먼지 낀 모습 같은 건 기억나지만, 돈의 감촉이 빠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곳이 어디 먼 곳으로만 느껴진다.

85p.
..그런데 가방이라는 건 들려고 보니 정말 까다로운 물건이다. 들고 싶은 가방과 쓸모 있는 가방은 다르다. 쓸모 있는 가방과 들기 편한 가방은 다르다. 옷에 어울리는 가방과 어울리지 않는 가방은 다르다. 장소에 맞는 가방과 옷에 어울리는 가방은 다르다. 가방의 가격과 수납력은 다르다.
..정말이지 가방이란 녀석은 규칙성이 없고 제각각이다. 그리고 제각각이라서 나를 고민에 빠트린다.

109p.
..나는 우리 대부분은 매우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바쁘다고 말해도,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어서 심심해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달에 스물여덟 건의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있어서, 시간이 없네, 마감 못 지킬 거 같은데, 하고 말하는 나 또한 본질적으로는 한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가함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한가하고 따분하고 할 일이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내가 내 자리에 있어야 할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걸 두려워한다.

110~111p.
..휴대폰은 텅 빈 방을 연상시킨다. 개성도 없고, 창도 인기척도 없는 휑한 방. 그렇게 아무것도 없음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우리는 자신만의 가구를 들이고, 소품을 고르고, 취향에 맞는 분위기로 꾸민 다음, 방문을 쾅 닫는다. 자기만의 방에서 우리는 혼자가 된다. 그 방은 창문도 없고 밖으로 연결되는 도구도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한동안은 마음이 편하다.

165~166p.
..그때, 나는 내 급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화내기 전에, 다른 누군가가 내 화를 뛰어넘을 만한 기세로 먼저 화를 내주면 되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의 심리와 같다. 술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빨리 술에 취하면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는데, 그것과 비슷한 거다.

183~184p.
..내가 나에게 행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역할을 교대할 수 있었던 것.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것을 나도 엄마에게 해줄 수 있었고, 엄마가 내게 허용했던 것을 나도 엄마에게 허용할 수 있었던 것. 내 안에 실패의 낙인으로 찍힌 그 숙소, 일인당 9800엔짜리 일본식 서양식 절충형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그 일박 여행이 내 기억 속에서 신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192~193p.
..이십 대 내내 나와는 정반대로 장식품에 돈을 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확실히 나보다 더 센스 있게 장식품을 고를 것이다. 이십 대의 돈이 그 사람의 토대를 이룬다는 건 그런 말이다. 영화를 줄기차게 본 사람은 남보다 확실히 영화를 잘 알 것이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은 사람은 미각에 확실히 자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썼으니 그 대상물이 몸에 스며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돈이란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액세서리나 영화, 미식에 비하면,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그야말로 무위한 것이다. 센스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미각이 풍부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무위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구해주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때때로 실감한다.
..삼십 대가 되고 나서, 마음이 좀 편해졌구나, 하고 종종 생각한다. 마흔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려면 어때,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이 ‘아무려면 어때‘라는 기분이야말로 이십 대 시절의 그 무위한 것들이 만들어낸 기분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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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p.
...따라서 폭력적인 집단에서 이런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자존심과 평판만큼이나 생존 때문이다. 사실 자존심과 허세는 흔히 더 깊숙이에 있는 생존 본능이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이 일어나는 전후 사정과 무관하게 그 기능은 대체로 똑같다. 실제적이면서 수행적이고, 직접적 위협을 제거할뿐더러 잠재적 공격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38~39p.
..이 교도소의 많은 사람들이 재범자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어올 만한 짓을 했다. 법을 준수하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범죄를 저질렀고 처벌은 정당하다. 이런 환경에서 워크숍을 하다 보면, 범죄의 희생자에 대해 잊어버리기 쉽다. 이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범죄자한테서 보이는 파괴적이고 사회적으로 유해한 많은 행동에는 분명한 시발점이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사이코패스와 정신이상자를 제외하고, 이 교도소에 있는 거의 모두가 범죄자가 되기 이전의 삶을 되짚어보면 어려서 어떤 형태의 폭력을 겪은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다.

41p.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는 가정에서는 어려서부터 타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가능한 위협을 감지해 저지하려고 사람들의 어조를 살피고 얼굴 표정과 몸짓을 읽는 데 능해진다. 감정을 능숙하게 다뤄 학대하는 사람의 화를 저지할 수 있게 된다. 학대하는 사람의 요구와 그의 화를 유발하는 도화선을 직관적으로 알아서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절한다. 시행착오를 통해 대충 꿰맞춘 이런 생존 전략을 결국에는 본능적으로 구사한다. 많은 경우에 폭력의 위협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이 생존전략은 이들의 성격에 완전히 통합되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하기 전까지 효과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두려운 상대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왜곡해 과잉각성 상태를 조장하는 두려움을 그야말로 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은 폭력 사건에 선행하는 불안한 기대감이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폭력이 일어나길 원치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이 불가피함을 알아서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57p.
..계속되는 이런 심리장애가 전반적으로 공격적인 사회 환경과 결합해, 나는 학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내 머릿속은 내가 품은 다양한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주고받는 내면의 대화로 언제나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예행연습하거나 예전의 대화를 되풀이해 재생했다. 내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건 오로지 두려움뿐인 듯했다....

82p.
..우리는 이런 ‘결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하층계급 또는 상층계급 출신인 우리 각자의 경험의 결손, 그 경험이 제시되고 보도되고 논의되는 방식에서의 결손 말이다. 이런 결손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거나 고립되거나 왜곡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적대하거나 무관심해지는 문화로 이어진다....

93~94p.
..문제가정 아이들의 삶은 거리로 퍼져나간다. 이들은 아마도 수치심이나 창피함을 모면하려고 마침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을 알고 있고 아마도 자신을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응한다. 사생활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치재가 된다.
..존엄성이란, 있는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101~102p.
..‘조력자‘와 ‘멘토‘가 ‘참여‘하려는 노동계급 사람들을 위해 체계를 만든다. 이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희석해 영향력이나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 지역사회의 염원을 조정하도록 거든다. 이사회 조직은 어떤 단체가 그 지위를 좀 지나치게 망각하기 시작하면 언제라도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낸다. 글래스고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톰 레너드는 「교섭 조정자」라는 시에서 사실상 중간계급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현상을 풍자한다. 이 시는 계급 문제와 그것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강화되는지 이야기한다. ‘교섭 조정자‘라는 말만 하더라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쓰는 용어다. 이 시는 또 빈곤지역 사람들이 다른 계급 사람들을 보통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데, 대개 착취하고 가르치려 든다고 여긴다. 이는 경우에 따라 온당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게 우리 시대의 중점 과제다.

126p.
...어린 마음이 결코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이런 기억은 훗날 가서야 접근할 수 있는 저장소로 곧장 보내진다.

148p.
...이런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이들의 삶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조직이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채굴할 데이터와 서사를 담고 있는 자본 말이다. 선의를 가진 학생, 학자, 전문가들이 줄줄이 가난 깊숙이 내려와 필요한 걸 뽑아내고는 고립된 자신들의 집단으로 물러가 가난 사파리에서 가져온 인공 유물을 검토하는 것이다.

176p.
..자원이 부족한 ‘빈곤‘지역에서 소문은 교류의 한 형태였다. 불행하게도 가정에 눈에 띄게 문제가 있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내가 내 이야기의 작가가 되거나. 내가 선택한 건 후자였다.

213p.
..주류문화의 어떤 측면에 의해 왜곡되거나 소외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런 왜곡을 흔히 지배적 특권계급의 무지나 악의에 찬 의도 탓으로 돌린다. 이 특권계급이 어떤 사람에게는 남성, 어떤 사람에게는 백인,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신체장애가 없이 건강한 사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국인 또는 미국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특정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래서 문화와 정체성이 주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계급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요한 구분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선이라기보다 거대한 상처다....

228p.
..우리는 ‘중심‘이라는 말을 어떤 건물이나 지정된 공간같이 물리적 실체와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런 소비자 마을 때문이고 또 공동체의 중심에 말 그대로 가게를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센터‘(중심)는 보통 사람들이 모이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방 또는 사무실이 들어 있는 건물이다. 건물이 아니면 사람들이 여가 때 사용하는 장소다. 하지만 ‘중심‘이라는 말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생각하면 무엇이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248p.
..우리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부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중한 추론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라 여기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분노는 어리석은 생각과 편견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주창하고 있다고 믿는 고귀한 대의명분과 무관하게, 우리의 정신과정이 저들의 정신과정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놓친다. 점점 분열돼가는 사회에서 우리의 위선적인 신념은 우리 모두가 가진 몇 안 되는 공통점이다.

261p.
...정말로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을 인종주의자로 묵살해버리기 전에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흔히 범죄 행위나 만성 질병의 원인이 가난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다른 퇴행하는 사회 태도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건, 우리가 설득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말로 싸워야 하는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자유 통행권을 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들의 뿌리를 제대로 뽑아 숨을 곳을 남겨두지 않는것이다.

266p.
..나는 친구와 동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파벌, 계급,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단속, 권력의 불균형에 피로감을 느낀다. 활동가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나 차이가 있으면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슬프고 지친다. 때로는 특정한 사람들을 ‘불편하다‘고 여겨 등을 돌릴뿐더러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고 비방한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역겨운 일이다.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무슨 말을 잘못하거나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지 입장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갈등 해결의 과정 자체가 사실을 적극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이념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활동가들 사이에서 어쨌든 합당한 절차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믿으라는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사회정의가 아니다. 여기에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268p.
..활동가들은 말 자체가 폭력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겠지만,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이면 무엇이든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협박, 괴롭힘, 신체 폭력 행위가 용감하게 ‘기득권층에게 한 방 먹이는 일‘로 여겨진다. 모든 상호작용을 교차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고, 따라서 권력의 역학관계로 여긴다.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감정과잉 상태에 빠진 이 활동가들은 자주 자기 행동이 낳은 인간적 결과가 자신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전해들은 정보나 소셜미디어의 소문을 근거로 다시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한 사람의 평판을 망치거나 취업을 방해하려 든다. 결국 이런 문화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반면 이 문화 자체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270p.
...이렇게 악의에 차고 무기화되어 있으며 불통하는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경험들을 선별해 승격시켜 인증하고 영구화하는 반면, 그 외의 경험들은 최소화하거나 심하게 비난한다.

271p.
...현재 형태의 교차성은 특권계급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사회를 경쟁하는 정파들로 원자화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 다시 말해 잘 조직돼 하나로 통합된 교육받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킨다.

283p.
...약 없이는 세상에서 색깔이 빠진 것 같았다. 알코올이나 약물이 없으면 혼자이고 두렵다고 느꼈으나, 그 기운이 지속되고 있거나 그게 내 몸에 주입될 때는 터오는 새벽, 한 곡의 음악, 부탁한 것도 아닌데 친구가 베풀어주는 친절이 내 영혼에 불을 질렀다. 약에 취하면, 내가 가진 건 내가 있는 바로 그 순간뿐임을, 그 순간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리란 것을 문득 깨닫는다. 근거 없는 많은 믿음과는 달리, 약물은 한 사람의 자기 인식과 세계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쳐 가치관을 바꿔놓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부인할 수 없는 유용성은 모든 새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한시적이다. 그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시점이, 우리의 느낌과는 무관하게 약물 자체가 집요해지는 때가 온다. 더욱이 우리가 도망치는 현실이 더 혼란스럽고 우리가 품는 망상이 더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술꾼과 마약꾼들 속에 고립되기 시작한다....

291~292p.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을 겪으면 삶의 모든 게 검토 대상이 된다.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철저한 평가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분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려면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내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 나 자신을 알 수가 없다.
..10년에 걸쳐 쌓아온 가식과 자기정당화의 껍질을 벗겨내면서, 나는 내가 가진 정치적 신념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처럼 사심 없이 진정성 있고 고결한 횃불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292p.
..신념이 선택이나 진정성 못지않게 완전히 우연하게 생겨난다고 해서, 노력 없이 얻은 이 도덕적 우월감을 다각도로 검토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니면, 나만 그런 걸까? 인정하기 어려우면,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쏟아내는 상투적인 말을 넘어 우리의 신념을 검토하고 우리가 가진 오만의 행간을 살펴보라. 그러면 몇몇 가식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가치가 편리하게도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할 때가 흔하다....

294~295p.
..정치·종교적 부족주의에 시달리는 세계 문화 속에서 우리가 어딘가 틀린 건 아닌지 때때로 자문하는 일은 급진적인 정치 행위가 된다. ‘좋은 사람들‘인 우리가 역사에서 언제나 올바른 편에 있고 또한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쟁에서 언제나 올바른 편에 있다는 건 다소 편리하지 않은가? 무한한 우주 속 수십억 년 동안 존재해온 행성에서 모든 것에 대해 옳을 가능성은 분명 희박하다. 안 그런가? 이건 약간의 우연의 일치인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실로 생각해보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믿기 어려운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우리 자신의 부조리성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주장할 수 없다. 십대 이후로 죽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하기보다는 틀린 걸 인정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게 더 미덕 있는 행동이다.

339~340p.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자기성찰이 또 다른 형태의 구조적 억압, 개인들이 불평등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기계발에만 집중하도록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우선 우리 삶의 체제를 감당하고 유지하며 운영하지 못하면 가족, 공동체, 대의, 또는 운동은 쓸데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먼저 장악해야 하는 생산수단으로, 그런 다음에야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은 저항을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 부패,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모든 필요한 조치에 병행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비슷한 정도로 철저히 검토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구실이 아니라 21세기의 급진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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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쇼와 시절의 역사는 지난날의 가치관으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더미 속에 틀어박혀 지내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역사다. 표면적으로는 산업과 생활이 근대화되고 사회 전체가 윤택해졌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그 변화를 낯설어한다. 소설 『순례』는 그 변화의 속살을 그렸다. 예전의 가치관을 지켜온 사람은 잘못한 일도 없는데 기이한 눈초리를 받는 존재로 변해버린 풍경을 보여준 것이다.

..원래 유럽적인 의미의 이상적인 ‘개인‘이란 얼굴과 이름을 모두 유지하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개인이 그런 형태로 출현한 적이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 에도 시대(1603~1867년) 이전에는 무사나 지주 같은 계급에게만 성이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이름 없는 기타 인간‘일 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후의 역사란 ‘이름 없는 기타‘였던 사람들이 이름을 획득하고, 그들이 이름을 가진 구성원으로서 가족과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런 공동체는 전후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었다. 그러다 공동체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그 대안으로 개성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이 탄생한 것인데, 이때 사람들이 과거처럼 다시 이름을 상실했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돈의 최대 특징은 교환가치만 있을 뿐 사용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사회는 돈의 특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유동성 선호 현상에 지배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언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교환 가능한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다.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그런 인재란 전 세계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언어를 교환할 수 있는 천부적 유동성을 가진 인재이며, 화폐와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글로벌화는 돈을 만능시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원하는 동물이다.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익명이기를 원하는 바람, 또 한편으로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그것이다. 인간은 얼굴을 원한다. 그것도 강렬하게 말이다.
..하지만 소비사회에서는 판매 중인 물건만을 원해야 한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땅, 즉 조국에 적어도 한쪽 발은 담가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쪽 발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지점에 두고 다른 한쪽 발로 인생의 폭을 넓혀야 한다. 평온과 충족감은 확고한 토대 위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토대가 사라지면 불안해지고, 불안감을 해소하려 탐욕을 부리거나 금전 숭배자가 될 위험이 높다.

..지금 PB상품은 일본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편의점, 슈퍼마켓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거대 소매점은 소매업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강력한 소비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물량을 사들이는 구매력을 휘둘러 매입가격을 터무니없이 후려칠 수있다. 그렇게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매입한 물품을 PB 상표를 붙여 매장에 내놓으면 일반 소비자들은 싼 가격에 이끌려 그 물건을 구입한다. 이런 소비 행위는 지역의 산업과 경제를 파괴하는 데 가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근대화란 오로지 쾌적함을 찾아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었다. 쾌적함이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요로 다케시 교수는 말했다. 원래는 더워졌다 추워졌다 해야 정상인데 인간은 석유를 펑펑 태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인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소비에 대한 욕망은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생활 속에서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이다. 소비욕은 상품 더미 속을 오갈 때 커지고 불규칙한 생활, 스트레스로 가득 찬 업무, 그리고 삐거덕대는 인간관계를 메우려 할 때 더욱 자극을 받아 커진다. 현대인의 과잉 소비는 과잉 스트레스에서 오는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대상행동(substitute behavio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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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하지만 시대는 변하는 법이다. 비록 사람들은 변하지 않더라도.

127~128p.
..벨파스트는 이제 다른 곳이 되었다. 한 시간 전에 도시 가까이 다다랐을 때 스카이라인을 이룬 크레인의 숫자에 우선 놀랐다. 부를 상징하는 쇳덩어리 크레인은 공화당의 힘이 가장 센 서쪽, 로열리스트가 지배하는 동쪽, 부유층이 거주하는 남쪽, 신교와 가톨릭이 땅 한치를 두고 싸우는 북쪽까지 벨파스트 구석구석을 내려다보았다.
..벨파스트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18년 전 소총을 들고 벨파스트의 거리를 처음 걸었을 때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류 인생들은 스스로 초래한 비참함을 변함없이 먹고 살며 분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표면 아래에서는 변함없는 증오가 여전히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유복해진 벨파스트는 흉터를 필요할 때 숨기고 유리할 때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

132p.
...캠벨의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 있는 것은 헨드리 병장의 눈에 비친 헛된 희망이었다. 간청도, 눈물도 아닌, 헨드리가 그를 알아본 순간 이젠 살았다고 안도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헨드리의 희망은 죽기 직전, 캠벨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사라졌다.

174p.
..초승달 모양으로 변한 마리의 낯선 입술이 그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켰다.
.."허락해주신다면 당신을 알아가고 싶어요."
..그는 담배꽁초와 풍선껌이 짓밟혀 있는 길로 눈을 돌렸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입에 넣고 싶지 않아 하는 것들이었다.

305p.
..홀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단어였다.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겠지만, 혼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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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니노를 알아왔지만 내게 그는 꿈같은 존재였다. 그를 내 곁에 영원히 붙잡아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대상이었기에 나에게 그는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와의 미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달랐다. 그는 현재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커다란 바위였다. 그곳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이자 아이로타 집안에서 내려오는 규율의 지배를 받는 영토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위대한 이상과 명문가에 대한 숭배와 원리원칙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 않는 여학생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평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학업의 대가로 자신들의 미래가 집안일에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의도한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쓴 글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나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생각도 공책에 적어두었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그들의 관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왕관의 보석 같은 존재?‘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교양 있는 교수님은 지금 내게 내 책의 원죄는 경미한 것인데 그것을 매번 치명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교묘하게 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 해석이 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중과 같은 수준의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점으로 내 작품을 바라본 것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젠 됐어. 이젠 그런 종속적인 태도를 버려야겠어. 독자들과 의견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해. 독자들 기준으로 수준을 낮춰선 안 돼."

..이때 타라타노 교수의 목소리는 진정 환희로 가득 찼다. 혁명의 기운이 젊은이와 기성세대에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타라타노 교수가 이야기하는 내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현재가 실은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과거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그의 집착에 놀랐다.

...그날의 광경을 전부 기억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올 때 그럴듯해 보이고 싶어서 공책을 꺼내 들고 이런저런 광경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

..『푸른 요정』이 공장 마당의 모닥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공기 속에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릴라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릴라는 며칠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봤자 상처만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자신의 불행이 일반적인 불쾌함이 되고 그러다 가벼운 우울함이 되고 그마저도 일상의 고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오래된 소설에 나오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입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업적을 이룬 후 길을 가다가 평생 한 번도 목초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헐벗고 굶주린 목동이 놀랍도록 용맹하게 맨손으로 사나운 야수를 제압하고 길들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의 말을 듣고 있기가 힘에 겨웠다. 릴라와는 도무지 안정된 관계를 구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싶으면 릴라는 이내 이상한 생각을 해서 균형을 깨뜨렸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이에서 관계의 안정성은 언제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 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달의 백색 평원이라니."
..릴라가 비아냥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니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니까."
..릴라는 달은 수억 개의 돌멩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달도 결국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니 골치 아픈 일투성이라도 꿋꿋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책들을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다. 시어머니가 좋지 않게 평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나와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나를 무능한 어머니의 역할에서 탈피시키려 했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열심히 내게 말을 걸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번뜩이는 영감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둔해진 머리와 멍해진 눈빛을 다시 반짝이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 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 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 보일 뿐이거든."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 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당연히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몸이 달걀 껍데기 같아서 팔이나 이마나 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바람에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은밀한 속내가 모두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니노는 무려 열흘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은 니노를 유혹하고 싶어 했던 지난날의 집착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니노와 농담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아양을 떨지도 않았고 과할 정도로 챙겨주면서 다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마리아로사를 흉내 내어 해방된 여성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위험한 생각을 품지도 않았고 애틋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끌려 하지도 않았다.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 때 니노 옆에 앉으려 애쓰지도 않았고 헝클어진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니노와 단둘이 남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의 팔꿈치에 내 팔꿈치를 스치거나 그의 팔에 내 팔이나 가슴을 스치거나 그의 다리에 내 다리를 스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수줍고 단정한 태도로 그와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대화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저 니노가 식사를 잘하고 아이들이 그를 너무 귀찮게 하지 않고 그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쓸 뿐이었다.
..꼭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니노는 피에트로, 데데, 엘사와 항상 장난을 쳤다. 하지만 내게 말할 때만큼은 늘 진지했다. 예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말을 가렸다.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하게 됐다. 나는 니노가 우리집에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뻤지만 친밀한 말이나 행동을 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만 머물며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이 된 것 같아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두 남자 사이에 싹텄던 우정이 왜 일방적인 적대감으로 바뀐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니노는 내게 내 남편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니노는 내가 피에트로를 지나치게 이상화해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젊은 대학교수 이미지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보잘것없는 실체를 내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 논문부터 학문적으로 중요한 저서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해줄 두 번째 책을 집필하는 데 오랜 시간 동안 몰두하고 있는 학자가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인간과 살고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남자를 위해 딸을 둘이나 낳은 거야.‘
..니노는 마지막 며칠 동안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니노는 피에트로를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해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피에트로를 파괴함으로써 내 자아를 되찾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는 자기 자신이 내게 피에트로의 이상적인 대안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이 단순해진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려 했다. 가끔 니노에게 행복한지 물으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키스했다. 드높은 창공에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표면인 비행기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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