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
...따라서 폭력적인 집단에서 이런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자존심과 평판만큼이나 생존 때문이다. 사실 자존심과 허세는 흔히 더 깊숙이에 있는 생존 본능이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이 일어나는 전후 사정과 무관하게 그 기능은 대체로 똑같다. 실제적이면서 수행적이고, 직접적 위협을 제거할뿐더러 잠재적 공격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38~39p.
..이 교도소의 많은 사람들이 재범자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어올 만한 짓을 했다. 법을 준수하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범죄를 저질렀고 처벌은 정당하다. 이런 환경에서 워크숍을 하다 보면, 범죄의 희생자에 대해 잊어버리기 쉽다. 이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범죄자한테서 보이는 파괴적이고 사회적으로 유해한 많은 행동에는 분명한 시발점이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사이코패스와 정신이상자를 제외하고, 이 교도소에 있는 거의 모두가 범죄자가 되기 이전의 삶을 되짚어보면 어려서 어떤 형태의 폭력을 겪은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다.

41p.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는 가정에서는 어려서부터 타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가능한 위협을 감지해 저지하려고 사람들의 어조를 살피고 얼굴 표정과 몸짓을 읽는 데 능해진다. 감정을 능숙하게 다뤄 학대하는 사람의 화를 저지할 수 있게 된다. 학대하는 사람의 요구와 그의 화를 유발하는 도화선을 직관적으로 알아서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절한다. 시행착오를 통해 대충 꿰맞춘 이런 생존 전략을 결국에는 본능적으로 구사한다. 많은 경우에 폭력의 위협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이 생존전략은 이들의 성격에 완전히 통합되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하기 전까지 효과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두려운 상대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왜곡해 과잉각성 상태를 조장하는 두려움을 그야말로 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은 폭력 사건에 선행하는 불안한 기대감이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폭력이 일어나길 원치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이 불가피함을 알아서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57p.
..계속되는 이런 심리장애가 전반적으로 공격적인 사회 환경과 결합해, 나는 학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내 머릿속은 내가 품은 다양한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주고받는 내면의 대화로 언제나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예행연습하거나 예전의 대화를 되풀이해 재생했다. 내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건 오로지 두려움뿐인 듯했다....

82p.
..우리는 이런 ‘결손‘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하층계급 또는 상층계급 출신인 우리 각자의 경험의 결손, 그 경험이 제시되고 보도되고 논의되는 방식에서의 결손 말이다. 이런 결손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거나 고립되거나 왜곡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적대하거나 무관심해지는 문화로 이어진다....

93~94p.
..문제가정 아이들의 삶은 거리로 퍼져나간다. 이들은 아마도 수치심이나 창피함을 모면하려고 마침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을 알고 있고 아마도 자신을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응한다. 사생활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치재가 된다.
..존엄성이란, 있는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101~102p.
..‘조력자‘와 ‘멘토‘가 ‘참여‘하려는 노동계급 사람들을 위해 체계를 만든다. 이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희석해 영향력이나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 지역사회의 염원을 조정하도록 거든다. 이사회 조직은 어떤 단체가 그 지위를 좀 지나치게 망각하기 시작하면 언제라도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낸다. 글래스고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톰 레너드는 「교섭 조정자」라는 시에서 사실상 중간계급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현상을 풍자한다. 이 시는 계급 문제와 그것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강화되는지 이야기한다. ‘교섭 조정자‘라는 말만 하더라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쓰는 용어다. 이 시는 또 빈곤지역 사람들이 다른 계급 사람들을 보통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데, 대개 착취하고 가르치려 든다고 여긴다. 이는 경우에 따라 온당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게 우리 시대의 중점 과제다.

126p.
...어린 마음이 결코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이런 기억은 훗날 가서야 접근할 수 있는 저장소로 곧장 보내진다.

148p.
...이런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이들의 삶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조직이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채굴할 데이터와 서사를 담고 있는 자본 말이다. 선의를 가진 학생, 학자, 전문가들이 줄줄이 가난 깊숙이 내려와 필요한 걸 뽑아내고는 고립된 자신들의 집단으로 물러가 가난 사파리에서 가져온 인공 유물을 검토하는 것이다.

176p.
..자원이 부족한 ‘빈곤‘지역에서 소문은 교류의 한 형태였다. 불행하게도 가정에 눈에 띄게 문제가 있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내가 내 이야기의 작가가 되거나. 내가 선택한 건 후자였다.

213p.
..주류문화의 어떤 측면에 의해 왜곡되거나 소외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런 왜곡을 흔히 지배적 특권계급의 무지나 악의에 찬 의도 탓으로 돌린다. 이 특권계급이 어떤 사람에게는 남성, 어떤 사람에게는 백인,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신체장애가 없이 건강한 사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국인 또는 미국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특정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래서 문화와 정체성이 주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계급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요한 구분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선이라기보다 거대한 상처다....

228p.
..우리는 ‘중심‘이라는 말을 어떤 건물이나 지정된 공간같이 물리적 실체와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런 소비자 마을 때문이고 또 공동체의 중심에 말 그대로 가게를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센터‘(중심)는 보통 사람들이 모이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방 또는 사무실이 들어 있는 건물이다. 건물이 아니면 사람들이 여가 때 사용하는 장소다. 하지만 ‘중심‘이라는 말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생각하면 무엇이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248p.
..우리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부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중한 추론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라 여기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분노는 어리석은 생각과 편견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주창하고 있다고 믿는 고귀한 대의명분과 무관하게, 우리의 정신과정이 저들의 정신과정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놓친다. 점점 분열돼가는 사회에서 우리의 위선적인 신념은 우리 모두가 가진 몇 안 되는 공통점이다.

261p.
...정말로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을 인종주의자로 묵살해버리기 전에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흔히 범죄 행위나 만성 질병의 원인이 가난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다른 퇴행하는 사회 태도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건, 우리가 설득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말로 싸워야 하는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자유 통행권을 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들의 뿌리를 제대로 뽑아 숨을 곳을 남겨두지 않는것이다.

266p.
..나는 친구와 동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파벌, 계급,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단속, 권력의 불균형에 피로감을 느낀다. 활동가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나 차이가 있으면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슬프고 지친다. 때로는 특정한 사람들을 ‘불편하다‘고 여겨 등을 돌릴뿐더러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고 비방한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회,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역겨운 일이다.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무슨 말을 잘못하거나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지 입장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갈등 해결의 과정 자체가 사실을 적극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이념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활동가들 사이에서 어쨌든 합당한 절차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믿으라는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사회정의가 아니다. 여기에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268p.
..활동가들은 말 자체가 폭력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겠지만,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이면 무엇이든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협박, 괴롭힘, 신체 폭력 행위가 용감하게 ‘기득권층에게 한 방 먹이는 일‘로 여겨진다. 모든 상호작용을 교차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고, 따라서 권력의 역학관계로 여긴다.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감정과잉 상태에 빠진 이 활동가들은 자주 자기 행동이 낳은 인간적 결과가 자신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전해들은 정보나 소셜미디어의 소문을 근거로 다시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한 사람의 평판을 망치거나 취업을 방해하려 든다. 결국 이런 문화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반면 이 문화 자체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270p.
...이렇게 악의에 차고 무기화되어 있으며 불통하는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경험들을 선별해 승격시켜 인증하고 영구화하는 반면, 그 외의 경험들은 최소화하거나 심하게 비난한다.

271p.
...현재 형태의 교차성은 특권계급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사회를 경쟁하는 정파들로 원자화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 다시 말해 잘 조직돼 하나로 통합된 교육받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킨다.

283p.
...약 없이는 세상에서 색깔이 빠진 것 같았다. 알코올이나 약물이 없으면 혼자이고 두렵다고 느꼈으나, 그 기운이 지속되고 있거나 그게 내 몸에 주입될 때는 터오는 새벽, 한 곡의 음악, 부탁한 것도 아닌데 친구가 베풀어주는 친절이 내 영혼에 불을 질렀다. 약에 취하면, 내가 가진 건 내가 있는 바로 그 순간뿐임을, 그 순간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리란 것을 문득 깨닫는다. 근거 없는 많은 믿음과는 달리, 약물은 한 사람의 자기 인식과 세계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쳐 가치관을 바꿔놓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부인할 수 없는 유용성은 모든 새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한시적이다. 그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시점이, 우리의 느낌과는 무관하게 약물 자체가 집요해지는 때가 온다. 더욱이 우리가 도망치는 현실이 더 혼란스럽고 우리가 품는 망상이 더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술꾼과 마약꾼들 속에 고립되기 시작한다....

291~292p.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을 겪으면 삶의 모든 게 검토 대상이 된다.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철저한 평가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분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려면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내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 나 자신을 알 수가 없다.
..10년에 걸쳐 쌓아온 가식과 자기정당화의 껍질을 벗겨내면서, 나는 내가 가진 정치적 신념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처럼 사심 없이 진정성 있고 고결한 횃불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292p.
..신념이 선택이나 진정성 못지않게 완전히 우연하게 생겨난다고 해서, 노력 없이 얻은 이 도덕적 우월감을 다각도로 검토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니면, 나만 그런 걸까? 인정하기 어려우면,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쏟아내는 상투적인 말을 넘어 우리의 신념을 검토하고 우리가 가진 오만의 행간을 살펴보라. 그러면 몇몇 가식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가치가 편리하게도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할 때가 흔하다....

294~295p.
..정치·종교적 부족주의에 시달리는 세계 문화 속에서 우리가 어딘가 틀린 건 아닌지 때때로 자문하는 일은 급진적인 정치 행위가 된다. ‘좋은 사람들‘인 우리가 역사에서 언제나 올바른 편에 있고 또한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쟁에서 언제나 올바른 편에 있다는 건 다소 편리하지 않은가? 무한한 우주 속 수십억 년 동안 존재해온 행성에서 모든 것에 대해 옳을 가능성은 분명 희박하다. 안 그런가? 이건 약간의 우연의 일치인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실로 생각해보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믿기 어려운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우리 자신의 부조리성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주장할 수 없다. 십대 이후로 죽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하기보다는 틀린 걸 인정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게 더 미덕 있는 행동이다.

339~340p.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자기성찰이 또 다른 형태의 구조적 억압, 개인들이 불평등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기계발에만 집중하도록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우선 우리 삶의 체제를 감당하고 유지하며 운영하지 못하면 가족, 공동체, 대의, 또는 운동은 쓸데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먼저 장악해야 하는 생산수단으로, 그런 다음에야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은 저항을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 부패,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모든 필요한 조치에 병행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비슷한 정도로 철저히 검토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구실이 아니라 21세기의 급진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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