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쇼와 시절의 역사는 지난날의 가치관으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더미 속에 틀어박혀 지내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역사다. 표면적으로는 산업과 생활이 근대화되고 사회 전체가 윤택해졌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그 변화를 낯설어한다. 소설 『순례』는 그 변화의 속살을 그렸다. 예전의 가치관을 지켜온 사람은 잘못한 일도 없는데 기이한 눈초리를 받는 존재로 변해버린 풍경을 보여준 것이다.

..원래 유럽적인 의미의 이상적인 ‘개인‘이란 얼굴과 이름을 모두 유지하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개인이 그런 형태로 출현한 적이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 에도 시대(1603~1867년) 이전에는 무사나 지주 같은 계급에게만 성이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이름 없는 기타 인간‘일 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후의 역사란 ‘이름 없는 기타‘였던 사람들이 이름을 획득하고, 그들이 이름을 가진 구성원으로서 가족과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런 공동체는 전후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었다. 그러다 공동체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그 대안으로 개성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이 탄생한 것인데, 이때 사람들이 과거처럼 다시 이름을 상실했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돈의 최대 특징은 교환가치만 있을 뿐 사용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사회는 돈의 특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유동성 선호 현상에 지배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언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교환 가능한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다.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그런 인재란 전 세계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언어를 교환할 수 있는 천부적 유동성을 가진 인재이며, 화폐와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글로벌화는 돈을 만능시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원하는 동물이다.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익명이기를 원하는 바람, 또 한편으로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바람이 그것이다. 인간은 얼굴을 원한다. 그것도 강렬하게 말이다.
..하지만 소비사회에서는 판매 중인 물건만을 원해야 한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땅, 즉 조국에 적어도 한쪽 발은 담가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쪽 발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지점에 두고 다른 한쪽 발로 인생의 폭을 넓혀야 한다. 평온과 충족감은 확고한 토대 위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토대가 사라지면 불안해지고, 불안감을 해소하려 탐욕을 부리거나 금전 숭배자가 될 위험이 높다.

..지금 PB상품은 일본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편의점, 슈퍼마켓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거대 소매점은 소매업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강력한 소비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물량을 사들이는 구매력을 휘둘러 매입가격을 터무니없이 후려칠 수있다. 그렇게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매입한 물품을 PB 상표를 붙여 매장에 내놓으면 일반 소비자들은 싼 가격에 이끌려 그 물건을 구입한다. 이런 소비 행위는 지역의 산업과 경제를 파괴하는 데 가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근대화란 오로지 쾌적함을 찾아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었다. 쾌적함이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요로 다케시 교수는 말했다. 원래는 더워졌다 추워졌다 해야 정상인데 인간은 석유를 펑펑 태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인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소비에 대한 욕망은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생활 속에서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이다. 소비욕은 상품 더미 속을 오갈 때 커지고 불규칙한 생활, 스트레스로 가득 찬 업무, 그리고 삐거덕대는 인간관계를 메우려 할 때 더욱 자극을 받아 커진다. 현대인의 과잉 소비는 과잉 스트레스에서 오는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대상행동(substitute behavio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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