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 ..건강 검진 결과는 점괘와 비슷하다. 물론 과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보면 둘은 양극단에 있지만, ‘나에 대한 것이 쓰여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같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가장 잘 알 테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종잇조각에 쓰여 있는 것 같아서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도 정말 똑같다.
58p. ..여행에서 돈을 쓴다는 건 뭐랄까, 그보다는 조금 더 생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파는 차 한 잔 값이 얼마인지, 싸구려 식당의 밥값이 얼마인지,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 여행했던 나는 지금도 이집트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피라미드 돌의 감촉, 드넓은 궁전에 비친 햇살,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 안의 뿌옇게 먼지 낀 모습 같은 건 기억나지만, 돈의 감촉이 빠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곳이 어디 먼 곳으로만 느껴진다.
85p. ..그런데 가방이라는 건 들려고 보니 정말 까다로운 물건이다. 들고 싶은 가방과 쓸모 있는 가방은 다르다. 쓸모 있는 가방과 들기 편한 가방은 다르다. 옷에 어울리는 가방과 어울리지 않는 가방은 다르다. 장소에 맞는 가방과 옷에 어울리는 가방은 다르다. 가방의 가격과 수납력은 다르다. ..정말이지 가방이란 녀석은 규칙성이 없고 제각각이다. 그리고 제각각이라서 나를 고민에 빠트린다.
109p. ..나는 우리 대부분은 매우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바쁘다고 말해도,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어서 심심해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달에 스물여덟 건의 원고 마감을 앞두고 있어서, 시간이 없네, 마감 못 지킬 거 같은데, 하고 말하는 나 또한 본질적으로는 한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가함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한가하고 따분하고 할 일이 없다는 건 치명적이다. 내가 내 자리에 있어야 할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걸 두려워한다.
110~111p. ..휴대폰은 텅 빈 방을 연상시킨다. 개성도 없고, 창도 인기척도 없는 휑한 방. 그렇게 아무것도 없음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우리는 자신만의 가구를 들이고, 소품을 고르고, 취향에 맞는 분위기로 꾸민 다음, 방문을 쾅 닫는다. 자기만의 방에서 우리는 혼자가 된다. 그 방은 창문도 없고 밖으로 연결되는 도구도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한동안은 마음이 편하다.
165~166p. ..그때, 나는 내 급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화내기 전에, 다른 누군가가 내 화를 뛰어넘을 만한 기세로 먼저 화를 내주면 되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의 심리와 같다. 술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빨리 술에 취하면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는데, 그것과 비슷한 거다.
183~184p. ..내가 나에게 행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역할을 교대할 수 있었던 것.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것을 나도 엄마에게 해줄 수 있었고, 엄마가 내게 허용했던 것을 나도 엄마에게 허용할 수 있었던 것. 내 안에 실패의 낙인으로 찍힌 그 숙소, 일인당 9800엔짜리 일본식 서양식 절충형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그 일박 여행이 내 기억 속에서 신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192~193p. ..이십 대 내내 나와는 정반대로 장식품에 돈을 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확실히 나보다 더 센스 있게 장식품을 고를 것이다. 이십 대의 돈이 그 사람의 토대를 이룬다는 건 그런 말이다. 영화를 줄기차게 본 사람은 남보다 확실히 영화를 잘 알 것이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은 사람은 미각에 확실히 자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썼으니 그 대상물이 몸에 스며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돈이란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액세서리나 영화, 미식에 비하면,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그야말로 무위한 것이다. 센스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미각이 풍부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무위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구해주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때때로 실감한다. ..삼십 대가 되고 나서, 마음이 좀 편해졌구나, 하고 종종 생각한다. 마흔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려면 어때,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이 ‘아무려면 어때‘라는 기분이야말로 이십 대 시절의 그 무위한 것들이 만들어낸 기분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