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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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병권선생님의 민주주의 근거없음, 아르케 없음은 정신분석의 '대타자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를 다수라고 한다면 그 척도에서 먼 것이 소수일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정체, 그 척도가 수가 많음의 다수라면 그 다수에 배제된 소수들의 힘, 잠재력은 셀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소수와) 다만 교섭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변용 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역량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량이 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소수자는 단 한 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된다 해도 셀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고 했다." 소수성이 어째서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막연한 의문에 실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얼마 전 책을 버렸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민주화에 대한 미묘한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프랑스혁명을 긍정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와 더불어 대중의 노예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도 전반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추켜올리면서도, 점차 자율성을 잃고 중앙권력에 예속되어 가는 미국 시민들을 우려하며 글을 맺는다.
(중략) 그는 평등을 부인했다기 보다 평등-예속 짝을 부인했던 것이고, 이것을 평등-자유(자율)의 짝으로 바꾸려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의 권위 아래서 평등하지만 아주 무기력하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개인을, 평등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는 공동의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P35

앞서 나는 민주주의의 ‘아르케없음‘으로부터 민주주의가 통치자, 지배자의 권력이 아니라 ‘데모스의 힘‘이라고 주장했고, 민주주의란 고유의 근거를 갖는 정체가 아니라 ‘근거없음‘의 정체라고 주장했다. 즉, 민주주의 정체를 규정하는 특정한 근거(원리, 척도, 기준)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것이 비판에 직면한 곳에서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다. 즉 정체를 그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 민주화라는 것이다.. - P37

따라서 민주화의 성패는 체제의 ‘이행‘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장 많이 주도한 사람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앉았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민주화가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의 집권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때 민주화 세력이었고 그 정부가 민주정부를 자칭한다고 해서 민주화투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 민주주의를 특정한 아르케, 특정한 정부, 특정한 세력과 동일시 한느 사람들에게는 민주정부에 대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다.. - P37

민주주의를 좌우 엘리트들이 벌이는 대중 획득 게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물론 정책과 제도의 영역은 중요하다. 민주주가 바로 그것들은 아니지마, 민주주의는 또한 그것들과 관계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 이는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는 특정한 역사적 정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투쟁이 역사적 형식을 취하는 이유다. - P38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형상 없음‘은 데모스가 무엇보다 다양한 형상들의 번역가능하고 소통가능하며 연대가능한 집합적 신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근거를 공유하지 않고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동의 삶을 구축할 수 있는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란 이처럼 자격이나 조건, 척도를 넘어 다양한 존재들이 연대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부여된 형상을 넘어 공동의 삶, 연대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 P39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는 다수자의 통치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시사한 것처럼 나는 민주주의를 다수성의 획득과 동일시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다수성이란 수적인 의미는 아니다. 들뢰지와 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다수성과 소수성은 일차적 수적인 구분이라기보다 척도 공리에 따른 구분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 그것이 신분이든, 재산이든, 지식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그 척도에 의해서 다수성과 소수성이 규정된다.....반면 소수성ㅇ은 그 척도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먼가에 따라 규정된다고 하 ㄹ수 있다. - P40

그런데 민주주의 아르케가 ‘아르케 없음‘이고, 데모스의 형상이 ‘형상없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소수성의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수성과 소수성이 숫자가 아니라 척도(아르케)의 문제라고 했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숫자가 척도의 역할을 한다면 그때는 숫자도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떤 정체가 ‘수‘를 척도로 삼는다면 그곳에서 민주화 투쟁은 수라는 척도의 싸움이 될 것이다. 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한느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경우 통념에 맞선 소수적 투쟁이야말로 민주화 투쟁에 합당한 이름이지, 다수 의견을 이유로 그것을 제압하는게 민주주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어느 논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핵심이 "정당들이 특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도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 - P41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근거 아래서 근거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심연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것을 배제할 권위를 갖지 않는다. 거기서 모든 것들은 원초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거기서는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한 삶이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우위를 차지할 근거가 없다. 우리는 다만 교섭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변용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역량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량이 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소수자는 단 한 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된다 해도 셀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고 했다. ....‘민주주의 힘을 세려 하지 말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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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철학자들
구도 겐타 지음, 이정민 옮김 / 에디투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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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생각의 구멍들을 메꿀 수 있었다. 라캉과 데카르트, 칸트, 헤겔, 소크라테스... 라캉은 고정된 해석에서 정신분석적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오랜만에 한권의 책을 완독했다. 다시 이는 독서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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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백상현 지음 / 뮈톨로기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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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나이가 은유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욕망의 유래와 무의식에 관하여 쓴 정신분석가의 소설.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글쓰기‘에서 촉발되었다. 새로운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마저 감염시킨다. ‘새로운 인생‘이 나에게도 사건이 되길.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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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

참고문헌:  조엘도르 에크리독해 1부 8.9.장                             

 조엘 도르가 에크리독해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언어학과 무의식의 형성물'이다. 라깡은 소쉬르의 언어학의 구조를 참조하여 무의식을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의식 이전에 언어가 선행함을 전제한다. 언어구조 속에서 의미는 효과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와 함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이 언어의 구조(압축과 전치와 은유와 환유와의 관계)와 같다고 본 라깡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었다는 언명을 한다.

우리는 꿈을 꾸면 해몽을 한다. 해몽은 일대일 대응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일종의 신화적 해석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꿈을 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탐사다.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수사를 사용하여 꿈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꿈의 정확한 해석은 어렵다. 사후적으로 꿈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 ‘타자의 담화’이고 우리는 ‘타자의 담화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꿈의 담화에서 누락된 것을 예상함으로써 우리의 실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백한 무의미

 “라깡은 우리로 하여금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99P)

환유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꿈내용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꿈을 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일까? 이번 발제문을 쓰면서 나는 ‘명백한 무의미’에서 앞 뒤 문장의 문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관적으로 생각했을때 ‘명백한 무의미’라는 것은 ‘nonsense’ ‘말이 안된다’라는 의미다. 꿈은 말도 안되는 일이 굉장히 합리적인 일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전 꿈에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도 물에서 숨을 쉴수가 있지.” 마치 내가 깜박 잊은 것처럼 말했다. 이렇게 꿈의 비합리적인 사태는 환유적 구성에 의해 일어난다. 환유는 대상과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꿈이 은유한 것인지 환유를 한 것인지 분석을 통해 할 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텍스트에서 환유에 관해 다룬 것은 꿈에 드러난 내용이 숨겨진 것의 대리표상이라는 점과 동시에 가치의 전도가 있다는 것이다. 가치의 전도는 중요한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부차적인 것은 중요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도출된 무의식의 형성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꿈은 무의식이 해석한 심리적 현실이다. 그런데 무의식이 의미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변장하는 것은 왜일까? 무의식의 형성물들은 은유와 환유과정을 통해 왜 은폐하고자 하는 것일까? 무의식의 논리가 숨겨놓은 비밀, 진실, 진리의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그 무의식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를 우회시켜 타자의 담화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거세된 주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함일까? 성충동을 억압하려는 유치한 시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무의식의 형성물이 중요하다면 ‘환상의 횡단’의 자료로서 중요할 뿐이지 않을까.

 기표의 우위

 은유는 '기표의 대체'라고 말한다. 기표를 대체한다는 것과 기표의 전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조엘 도르가 예를 들고 있는 '정신분석'이라는 기표를 살펴보자.

만약 '정신분석은 페스트다.' 라는 문장에서 페스트라는 기표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와 결합하면서 페스트라는 개념(기의)는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페스트는 유사성으로 묶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감염될 수 있고, 이질적이라는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임의성, 자의성의 증거이자 기표의 우위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럼 환유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신분석을 한다' 라는 문장은 '쇼파를 갖는다'(정신분석으로 한다는 비유 인 듯하다)라는 문장으로 쓰인다면, 쇼파는 정신분석상담실에서 일부분이지만 정신분석 행위를 대리하여 쓰일 수 있다. 그렇지만 페스트처럼 페스트라는 개념이 삭제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분석이라는 기표에 새로운 기의도 아닌 단지 대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유는 인접하다는 이유로 기표를 명칭을 대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기표의 우위가 증명된다.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역시 기표의 우위를 의미하는데, 편지는 곧 기표다. 편지의 위치에 따라 주체는 맡은 역할이 달라진다. 편지의 내용보다 그 편지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 인물들의 행동의 범위는 제한된다. 여왕과 대신, 그리고 셜록 편지의 주인은 바뀌면서 여왕의 역할은 이제 대신이 맡게 된다. 주체는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언어행위의 기표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라깡은 비유다.

또 다른 은유의 예를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꿈에 나왔던 ‘논문’이라는 기표의 숨겨진 내용은 ‘프로이트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일방적 성격’과 ‘프로이트 자신의 공상의 높은 가치’에서 연상된 기표로 은유에 해당한다.

또 다른 사례도 제시되는데, 프로필레 + 아밀렌 (재료가 서로 유사한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기표의 대체) = 프로필렌 (명백한 내용) / 유사성의 결합(숨겨진내용)이다.

 환유는 반복이다

 이와 달리 환유의 과정은 명칭이 단순히 바뀐 것, 이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예시는 ‘오케스트라의 구리는 금관악기’와 같은 것이다.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에 의해 두 용어가 결합된 것이고, 그 인접관계 때문에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이 환유적 구성 속에는 두 개의 기표가 계속 존재하므로 쫓겨난 기표의 의미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위에 존재함으로써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기호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따라서 환유 역시 ‘기표가 지배하는 기의 그물에 대한 기표의 자율성, 기표의 우위 증명’ 한다. 환유는 기표와 기의 분리선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명백한 무의미’이다. 은유가 정신분석이란 기표를 페스트라는 기표로 대체했을 때 페스트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를 가지지만, ‘쇼파를 갖는다’라는 환유에서 쇼파는 정신분석이라는 기의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쇼파 그 자체의 기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다.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할 뿐이지, 쇼파와 정신분석의 개념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언어수사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환유이다. 환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하여 이 텍스트에서도 계속 환유하여 설명하지 않는가? 꿈에서 전치현상이 환유인 것은 꿈의 재료들이 인접관계에 있는 기표사슬에 의해 전개되고, 그 인접 관계는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교환될 수 있는 기표들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꿈에서 환유가 어려운 이유는 숨겨진 인접성에 의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재료의 사슬 때문에 의미의 저항성이 나타나고, 꿈 작업은 이 사슬들을 검토하고 분해하는 환유적 과정 전체를 검토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욕망의 수준에서 환유는 끊임없이 대상을 갈아 치우는 것을 뜻한다. 잉여향유의 끝없는 나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은 은유인가 환유인가? 존재의 증상은 개별적이라는 점에 은유이지만 증상의 전개 양상은 환유가 아닌가? 잉여향유로서의 증상의 환유는 반복일 수 밖에 없다. 다시 앞의 꿈으로 돌아가면, 꿈 속에서 짧은 시간에 대상은 바뀌었지만 증상은 반복되었다. 그런 무의식의 형성물들을 전의식을 끌고 와서는 ‘증상의 반복’이라는 기표를 사용하여 증상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 속에 놓여있다. ‘이제 나만의 forta’를 놔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의식적 고통이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존재의 실감이 커서인가? 증상(향락)을 놓지를 못한다.

아니에르노는 자신의 증상을 이용하여 글을 썼다. 나는 증상을 이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실패한 것일까? 무엇에 대하여???

 기표사슬의 주인되기

 조엘 도르는 은유적 과정이 의미의 생산자로 보았다. 기표와 기의가 임의적 결합, 기표의 자율성에 의해 기의가 발생하는 한 의미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기표는 무의미 속에 홀로 놓여있다가 다른 기표가 연쇄되면서 의미가 발생하는데, 이는 무의미 속에서 의미가 생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표의 그물망을 지배하는 것은 기표사슬이고, 기표사슬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타자, 상징계일 것이다. 기표사슬은 구성원리는 은유이며, 의미는 기표사슬 속에서 일관성을 이끌어 내며 생긴다. 기표사슬의 일관성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팔루스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체가 은유되었다고 해도 주체는 자유로운 기표의 연쇄로 새로운 은유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장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농담

 농담은 의미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팔루스를 비튼다. 거기서 쾌락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재담은 은유적 압축과 환유적 전치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압축은 생략을 이끌면서 유사한 특성을 가진 대체 형성물을 창조한다. 예를 들어, ‘가족장자’는 ‘백만장자’와 ‘친근한 가족적인’을 결합하였다. 전치의 예는 ‘아주 재미있었던 결혼 베일’이라는 내담자의 말실수이다. 신혼여행을 이렇게 표현했던 내담자는 숨겨진 사고는 신혼여행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베일은 북아프리카 여자들의 베일을 뜻하는데, 신혼여행대상에 인접한 베일을 사용하였으나, 베일은 성적굴욕을 의미하고 있어, 신혼의 베일은 신혼여행의 유감스러운 경험을 나타낸다. 재담의 기술은 전치를 사용하여 “사고 과정의 우회, 원초적 주제에 대한 심리적 강조를 다른 주제로 전치하는 것”으로 환유적 방법으로 무의식의 형성물, 말실수 등을 만든다. 즉 말실수를 통해 무의식적 형성물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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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
니콜라 플루리 지음, 임창석 옮김 / 에디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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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jouissance) 

쾌락과 고통을 넘는 것. 인간의 각각 개별적이고 특이적 형태.  존재 방식의 규정. 인간은 향락하는 양태임 

말하는 존재의 향락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향락한다. 기표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표행위를 통해 향락하는 것. 그러므로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셍톰(sinthome) 

신체라는 사건으로서 향락 

환상의 횡단 이후 잔여물. 무의식의 실재화. 분석이 종료되어도 남는 것. 

증상은 향락의 측면이 있다. 

시니피앙적 증상에서 셍톰으로 

"셍톰은 무의식의 생성물이 아니라" " 분석 최후의 시점에서 생겨난 증상의 잔여물"이다. 

"셍톰은 암호화된 의미 작용이 아니라 머리없이 욕동[향락]하는 양태이다. " 

증상은 욕망을 대상을 목표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를 욕망하기" "욕망에 개방"되어야 한다.  

"분석은 주체가 치유 불능이라는 점과 그의 셍톰을 이끌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상당히 치명적인 반복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파손된 리비도의 일부가 또다시 회복되고, 혹은 또다시 욕망(대타자의욕망)에 동일화하게 되면,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하며 일상에 몰두할 것이다." 

현실계(실재계) 

현실계는 말해질 수 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후기라깡의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라깡은 후기에 들어 실재계를 강조했는데, 실재계는 의미를 넘어선 '신체가 향락하는 지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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