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한다는 것의 끝은 자기만의 스타일, 자기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역시 나의 스타일을 갖고 싶어서  이렇게 공부하고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나의 시선을 갖는 다는 것이 독선처럼 느껴졌었는데, 자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험과 사유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어떤 시선을 가져야한다는 강박은 아닐거이다. 지금에 자기 스타일, 시선이라고 믿는 것은 남의 것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언제 나일 수가 있는가말이다. 암튼 자기스타일이라고 만들어지는 것도 처음에는 모방과 계속된 연습일 것이다.

오늘의 강의주제는 타자론이였다.


타자라고 하면 그저 나외의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타자는 나의 생각을 벗어나는 존재, 내가 예상한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존재를 흔드는 미지의 가능성의 존재다. 스스로 낯설게 느껴질 때 그것 역시 나 자신이 타자로 다가올 때이다. 그런 타자를 우리는 최대한 읽어내려고 하고 그리고 그 예상대로 타자가 움직여질 때 그것은 더이상 타자라고 할 수 없다. 오래된 친구, 부모, 자식 등등 그들은 타자라기 보다 나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런 타자를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과거의 존재,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을 의식을 자아를 발견하고 타자는 우리의 미래로서 가능성의 세계로 펼쳐지는 것이다.




질문. 내가 과거의 존재로서 타자를 만나고 타자를 만남으로서 과거의 나를 벗어버린다고 했다. 그럼 마주쳐도 나의 과거가 타자의 미래보다 바람직하다면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변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럼 사랑하지만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말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차원의 문제인가. 서로의 다양성, 즉 타자성을 인정하고 사랑하면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일부만 서로 나누어 갖는다고 할때 그것은 진정한 러브는 아닌 것일까...

과거의 나를 버릴 정도로 강렬한 타자의 마주침은 어려운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할때 차이보다 공통점이 많은 대상을 찾지 않는가?

꼭 그것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책과 강의 들으면서 낯설은 경험을 하는 것이  내가 공부를 계속 하게 만드는  매력을 느끼는 건가 부다.




타자론. 

타자는 나의 삶의 규칙이 다른 것. 나를 벗어나는 것.







버클리는 경험론자다. 버클리는 “지각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방금 보았던 문뒤의 세계가 과연 조금 아까 내가 본 그 광경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을까?

버클리는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이 누군가 그대로 지켜봐 주는 이가 있어 인간은 불신의 위험이 있으므로 우리의 불확실한 세계를 절대타자, 즉 신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신이 내가 지각한 세계를 그대로 보존해 준다는 것.

 비자발적 기억. 우리가 마주쳤다고 했을때 그것은 비의도적 일 때, 나를 수동적으로 열리게 만든다. 버클리의 지각은 마주침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마주침~ 그 사람의 존재가 마치 숨어있다가 나를 완전히 동요시키는 존재. 그것을 거부하지 못할 때 그것을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타자를  절대타자가 아닌 가능성의 세계로서 상대적 타자라고 했다.

타자와 만남에서 우리는 큰 차이를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만나려고 할 때 발생된다. 이 경우 나는 과거 자신이 살았던 안정된 세계를 자각하면, 동시에 타자를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으로 직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변한다면 그것은 내가 타자와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배치를 실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세계이다.. 만약 타자가 없다면  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매몰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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