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예술 ; 새로운 예술의 이미지.  

 - 수유너머 채운쌤 강의 후기 -




들뢰즈라는 철학자 그 만의 언어로 얘기하는 사람. 우리가 인습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닌 자기 개념을 창조해서 쓰는 사람. 그 뜻이 정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의 수많은 저작과 개념 사유를 적어도 이해했다 치자면 10년은 걸린다고 한다. 무슨 공부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지금은 나는 아주 건방지다. 들뢰즈 내가 맘먹으면 이해할 수 있어... 근데 그걸 10년이나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해봤다. 하지만 적어도 그 언어와 사유를 이해하는데는 그만큼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왜 들뢰즈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나의 정보나 상식,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실은 여기저기 들었던 모든 것이 투입되고 단순히 산출한다. 이것이 기계? 사실 내 생각이라고 해봤자... 그건 내 생각이 아니다. 그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남의 것,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응축된 것일 수 있다. 말하고 있는 지금도 나의 생각은 별로 없고, 기억날 듯 말듯한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들뢰즈처럼 천재도 아니고, 천재의 산물을 이해하기 위해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 들뢰즈는 기존의 물음과 지식을 해체한다. 해체 위에서 다시 생산하는 철학. 어제 강의는 이런 차원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구나,,, 아 나도 공부해보고 싶다.. 들뢰즈. 이런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게 했고, 그런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중간에 포기하기 없기. 글쓰는 것이 그냥 나오는 대로 줄줄쓰면 쉽지만, 내 진정성을 살려서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 쓰는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할 말이 없어서 대화가 끊기는 그 어색함을 우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나의 자판을 두들기다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아니 더 깊은 생각을 하다가 포기해 버리는 그 지점. 그 지점이 나의 시작일거다. 어렴풋이 나를 넘어서는 지점을 알것같다. 생각이 막 미친듯이 휘몰아치다가 어지러워서 그냥 가볍게 가는 지점. 쉬운 길이다. 근데 이런 나를 극복해야 나는 성장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자. 피하지 말자....




우리의 대화 토론을 들뢰즈는 혐오한다. 각자가 자기의 상식안에서 주고받는 지루한 대화, 자기가 가진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그 정보를 근거로 삼아서 주고받는 것을. 왜? 들뢰즈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새롭게 발생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는다.

 들뢰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우리의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런 전제들을 부정하고 뺏는 데서 시작한다. 비철학적이라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이런 이미지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이는 곳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철학은 차라리, “침울하게 하는 데 이용된다. 아무도 침울하게 하지 않고, 아무도 언짢게 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 철학의 폭력성.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나역시 나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든 것에서부터 내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갖은 문제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 대한 무한 긍정. 철학은 마주침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의 문제를 얘기한다. 내가 만나는 문제와 고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대한 문제다. 나를 깨고 나가는 지점들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아픈 것이다. 덜 아프기 위해 아픈 것을 에둘러 가는 나의 비겁함...이여.

 예술역시 감각을 불편하게 하는 잔혹성. 폭력성이 본질이라고 한다. 그냥 자연을 재현한 것들, 모사한 것들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럼... 베이컨의 그림같이 존재를 찢는 것들은 그야말로 폭력적이다. 그 폭력앞에서 우리는 매우 불편하다. 익숙치 않는 것의 이물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유는 보다 불온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지배적 이미지를 뒤흔들 수 있을까? 어떻게 사유는 사유의 풀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국부적인 곳에서조차, 가장자리에서조차, 지각불가능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의 임부는 주어진 개념을 갈고 닦는 게 아니라,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이용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배우기를 나의 피를 바꾸고 신체를 바꾸면 사유도 바뀐다고 했다. 내 생활의 장을 바꾸면 바뀐다. 내 생활의 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생활하는 공간? 아마도 내가 가진 모든 관계속의 망들이다. 내가 조직한 나의 관계들의 망 속에서 변화해야 한다. 여기를 떠난다고 내가 바뀌진 않는다는 것. 사상마련. 현재 이 자리에서 변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하자.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사유해 보아야한다. 가만히 들여다 보자.. 지금 내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나의 감정들을 어떻게 수습하고 사는지. 미뤄온 감정들을 다시 꺼내보자. 내 안의 치양지말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승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버리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다는 앎이 끝나는 극한의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생사를 건 외침이다. 그래서 사유는 늘 역설이다. 표준적인 언어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게 되는 것는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을 때 깨달음은 오지않는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릴 때 깨달음은 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버릴까? 무엇을 마주침에 자동적으로 떠오른 것을 의식적으로 버리고, 한번 느껴보기. 모른다,생각하고 아니, 나를 아예 버릴 때, 내가 가진 지식을 버릴 때, 그런 척말고 나를 내려놓을 때, 그 분이 오신다는....?

없는 방식으로 사유하기. 공부하는데 생사를 걸어라 . 내 앎을 버리는 것. 노력밖에 없다.

글을 쓸 수 없는 지점. 기존의 언어로는 한마디도 쓸수없는. 그래서 들뢰는 자기언어대로 썼다... (이대목에서 충격!)

들죄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에게서 새롭고 독자적인 어떤 것을 끄집어낸다. 그들이 말한 것을 다시 말하는 대신, 그들이 보여주거나 말하지 않는 것,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과 작품속에 충분히 암시된 것을 말한다. 철학사가 철학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또 다른 철학인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지는 사유의 독단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철학을 창조하는 행위로 만든다. 철학은 반성이나 관조, 혹은 소통이 아니다. 반성은 모델을 전제하고, 관조는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전제하면, 소통은 합의와 이해를 전제한다.

 철학이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차라기 폭력이다. ; 우리가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이, 즉 그와 동시에 우리로부터 나라고 말 살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가는 무한 운동의 폭력이 가해져야...한다.

창조란, 어떤 폭력에 의한 사유활동의 발생이다. 창조로서의 사유는 삶을 무한 긍정하면서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 낸다. 진리가 아니라 삶을 .

사유하기 위해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고귀한 진리들이 살아 있고 깨어나는 곳인 극단적 장소들, 극단적 시간들로 가야한다.

예술은 진지를 사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우리가 진리로 죽는 것을 막기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예쑬가의 의지란 진리에의 의지가 아니라, 사기치고 유호가는 거짓의 힘이며, 속이려는 의지이다. 다른 세계에 대한 유혹, 혹은 감각에 가해지는 폭력,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미리 주어지지 않은 이 지대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미리 주어진 것에 의해 구성되는것이 아님.




철학<과> 예술 ; 이중-훔침, 이중-배움.




들뢰즈의 밥딜런-되기. 들뢰즈가 밥 딜런의 연주와 마주치는 순간, 들뢰지가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과 밥딜런이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되기는 이중의 문제이다. 내가 공명하는 순간에 나와 타자가 같이 변한다.

이것과 저것의 마주침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안는 그 사이<과>이다. 즉 마주침이란 사건 자체이다. 마주침들은 그렇게 예고 없이,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우리를 흔들고, 변화시킨다.

함께 느끼기, 그들이 그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것처럼, 그들와 함께 느끼기. 우리는 지나가면서 그들의 영혼과 살의 진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영혼의 초월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 내부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길위의 나그네이다. 언제 어디서든 다른 것들을 만날 수 있고, 다른 진동을 훔칠 수 있고, 다른 것으로 생성될 수 있는 길위의 나그네....

고집스럽게 저택을 피하고, 길위에 서서 간다. 길위에서 나는 다른 영혼들의 진동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생성된다. 길은 계속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독자적인 영역이지만 마주치면서 독자적인 영역이 개발된다.

사유는 행위다라는 말은 사유가 특정한 실천을 동반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사유는 동일성을 지닌 내가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좀 전과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다. 즉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고 나의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생각은 두뇌의 자국을 남길뿐 아니라 길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

사유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이며, 머무르기가 아니라 걷기이다. 사유는 집을 짓지 않는다. 쉬지않고 걷는다. 걷는 과정에서 마주침을 경험하고, 새로운 마주침을 조직하며, 마주침들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넘고 사유의 역량을 확장한다. 사유가 행위라는 것은 걷고 마주치는 사유의 능력을 의미한다.




내가 마주쳤을 때 느끼는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나는 지금 무엇을 만났을 때 내방식으로 쉽게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기존의 나의 상식에 기대의 이해하려는 노력 다름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자.




들뢰즈의 텍스는 매우 역동적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개념을 입중하기 위해 그들을 예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들뢰는 그들을 통해 개념을 만들어낸다.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무엇에 관해 반성하는 초라한 철학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철하가. 그래서 그는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폭력적인마주침을 찾아 움직인다.  요는 이웃 분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운동을 만들어내야 한다.

존재는 관계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 관계 자치는 항의 외부지만 그 외는 항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조건이다. 철학도, 과학도, 예술도 그것들이 놓인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즉 어떻게 각각의 영역 바깥과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상이한 배치를 갖는다. 비예술, 비과학, 비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부, 주름이다. 뒤샹, 앤디워홀, 존케이지... 이들은 외부를 통해 예술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예쑬의 경계를 넘는다. 각 활동이 자신의 도주선을 발생시키는 곳에서 철학은 생산된다. 그러므로 철학을 하기 위해선, 철학을 벗어나야 한다.

예술, 철학, 과학의 공통점이 있다면, 마주침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확대하고, 사이에서 생각되르 수없는것을 생각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




무엇을 사유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나는 사유에 대한 그동안의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어떻게 내던져야 할 지 느끼게 해 준 수업이였다. 들뢰즈의 그의 독특하고 어려운 철학을 그래도 내가 알아들을 정도로 쉽게 설명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한번 써보니까 좀 더 이해가 간다. 역시 노력해야돼.

철학이 폭력적  이여야한다. 예술의 본질은 잔혹하다는 것. 이 말이 나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폭력이란 말과 철학이 조우했을 때 나는 낯선 이 조우에 불편함을 느끼고 폭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부딪히는 것으로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나를 넘어서는 것은 이렇게 낯설고, 폭력적이여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버리고 부딪쳐야한다. 기존의 것들에다 덧붙이지 말고 자기를 버리고 만났을 때 존재의 변용이 올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여준 철학자가 아닐까 싶다. 기존의 개념과 학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언어로 얘기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얘기는 자. 자기의 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언어를 창조한 자라고 생각이 든다.

글쓰기나 사유하기나 저택에서 할 수가없다. 더 이상을 글을 쓸 수 없는 그 지점, 사유의 극한 그 지점에서 길 위에서 우리는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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