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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보는 나의 세계 ㅣ 도마뱀 청소년 1
가시자키 아카네 지음, 인자 옮김, 사카이 사네 일러스트 / 작은코도마뱀 / 2024년 7월
평점 :




문득 초등학교 6학년 때
수련회에서 했던 한 활동이 생각난다.
각자 손수건 하나씩을 준비해와서
손수건으로 눈을 가려서 묶고는
한 줄로 서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선생님의 안내와 목소리를 들으며
수련회장을 끼고 있는 숲길을 한 바퀴 걷는 것.
분명 낮에 활동을 하며 몇 번이고 걸었던 길이고,
평탄하고 짧았던 숲길 한 바퀴가
단지 눈을 가렸다는 하나의 이유로
어찌나 무섭게 느껴졌던지
친구의 어깨에 올린 두 손은 어느덧 축축해지고
작은 돌부리 하나에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선생님의 소리가 멀어지면 혼자 대열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휩쓸리기도 했다.
앞에 가는 친구의 걸음이 너무 빨라지면
따라오는 나머지 사람들이 길을 잃기에
시간이 갈수록 걸음을 천천히 늦추며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걷다가 발에 걸리는 게 있으면 뒤에 오는 친구에게
'여기 앞에 돌부리 있는 것 같아, 조심해.'
하고 얘기해 주며 걸음을 이어갔다.
장난처럼 시작해
비명을 지르고 깔깔거리던 우리들은
어느덧 진지하고 조용하게 서로에게 닿아있는
손의 움직임과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활동을 마칠 수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두려움에 울기도 했고
누군가는 '이런 거 왜 하는 거예요?' 물으며
재미없다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기에 '공포체험'이라 부르며
그저 재미를 위한 활동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시각장애인이 매일 겪는
눈이 아닌, 손으로 만져야 보이는 세계를
직접 체험해 보면서 무언가 느끼길 바랐던
선생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은 내가 했던 활동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 장애 청소년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후타바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자기 일은 최대한 스스로 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흰지팡이 사용법을 배워
그 뒤로는 집 근처 편의점에 혼자 가거나
버스도 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낯선 사람에게
눈도 안 보이면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폭언을 들은 뒤
예전처럼 밖에 나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혼자서 돌아다닐 용기가 사라져버린다.
후타바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로
돌아가버린 것 같은 기분에 슬퍼진다.
태어났을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던 후타바와 달리
후천적으로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타스쿠.
그런 타스쿠에게 후타바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알려준 소중한 친구였다.
항상 후타바가 먼저 걸었던 길을
조금 늦게 따라가고 있었던 타스쿠는
사고 이후 후타바가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자
지금까지 따라가던 길잡이이자 등대를 잃어버린 듯,
어디를 향해 어떤 식으로 걸어가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로 후타바와 타스쿠는
세상에 나서지 못한 채
스스로를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게 된다.
'나 같은 사람은 이대로
집에만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혼자 나갔다가 나쁜 일을 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가득한 생각에 빠져
상처받고 주저앉아 버리게 된다.
그대로 멈추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있던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앞을 향해
다시 용기 있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집 안에만 머물던 후타바는 엄마의 추천으로
'함께 걷고 달리는 모임'을 시작하고
거기에서 다른 시각 장애인과 이를 돕는
다른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자신에게 폭언을 퍼부은 '눈이 보이는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를 치유해나간다.
그런 치유는 시각 장애인 마라톤 대회
참여라는 도전으로 이어져,
세상의 빛 속으로 조금씩 나오는 준비를
하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타스쿠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장한다.
후타바가 없는 학교생활에 낯섦과
두려움으로 외면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두려움을 떨치고 그동안 시도할 생각조차 없었던
흰지팡이를 들고 걷는 연습을 통해
힘겹지만 한 걸음씩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일련의 사건에 흔들리며
사실 세상은 장애와 비장애라는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노력이
'눈이 보이는 세계'를 침범하려는
욕심인 걸까 물음표를 던지고 상심하던 그들에게
따스한 손길로 다시 용기 있는 발걸음을
이끌어주는 모임의 사람들,
그 누구보다 이들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려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선생님의 가르침,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지만 서로에게
버팀목이자 힘이 되어주는 우정 아래,
아이들은 자신의 장애를 바로 마주할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 성장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사실은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수업을 듣고,
유튜브 채널을 구독해 듣고,
(그들조차 '본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친구들끼리 편의점에 몰려가
과자를 사 먹기도 하는 평범한 일상,
장애가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을 준비하며
매일을 고민하고 배우며 자라는 모습은
장애와 비장애에 관계없이 똑같기만 한데
우리의 편견으로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규정지어 놓고
제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을
들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이 내디딘 한 걸음은 물론
대단하고 거창하며 멋진 무언가는 아니다.
그저 그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기존의 테두리에서 단 하나의 발자국을 떼는
작지만 평범한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상심하고 무너지며 작아지는 날들 속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다시금 반짝이는 희망을 찾아,
때때로 생각지 못했던 길을 찾아내기도 하는
그들의 치열한 매일이 쌓이면
그 시간들이 쌓여 놀랍고 대단한 성장으로
성큼 아이들을 자라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길에서 마주하는 흰지팡이의 시각장애인을 보며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구나' 정도만 생각했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의 시간을 거쳐
홀로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걷고
신호등을 건너고 지하철 표를 사고
원하는 장소에 이동하게 되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시각 장애인에게 안내를 할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고
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살짝 팔꿈치를 터치하거나 팔을 내어주고,
뒤에서 밀거나 임의로 끌어당기지 않고
때로 길에서 만났을 때 음성 안내가 없는 곳이라면
신호등의 신호를 알려주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새로운 정보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우리에게 당연한 듯 내딛는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노력과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라도 그들이 세상을 향해 내딛는 걸음에
조금이나마 박수와 응원을 보낼 수 있도록
때로 헤맬 때 따스한 손길과 눈빛으로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장애와 비장애 같은 선은 그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는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는
후타바와 타스쿠, 친구들의 외침은
눈이 보이는 우리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전혀 다른 존재라 단정 지었던 생각에
과연 서로 닮은 부분은 없는지,
조금은 비슷하거나 똑같지는 않은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답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의미 있는 독서가 되었다.
이제서야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손으로 보는 세계'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