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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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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도서 중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었고, 읽고 난 뒤엔 역시 위화라는 말과 함께 기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낸 것도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면서, 울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너절한 슬픔 때문에 운 게 아니라, 헤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이들이 헤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울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 안에는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도 없으며, 사랑하고 서로 그리워하는 감정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인위적이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자연스러운 일처럼,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인물들이 이승에서 가지고 있던 응어리는 어느 순간 모두 사라져있다.

 

 

  리씨가 떠나가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장강은 그가 안식의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 채고, 뼈만 남은 손으로 그의 뼈만 남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그러자 리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바둑이 아직 안 끝났잖아.” -276p.

 

 

  장강과 리는 이승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히려 나빴다고 할 수 있다. 리가 장강을 찔러 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장면에서는 리와 장강이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는 애틋한 친구처럼 보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때의 미운 감정들이 모두 소용없게 돼버리는 걸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이 소설 속과 같다면, 죽는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7일>에는 허튼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 양페이가 빈의관을 가면서 본 교통사고도, 빈의관에서 만났던 파란색 옷의 남자도, 탄가네 이야기도, 여자로 분장하고 매춘했던 리씨와 장강이 만났던 일도 결국엔 다 필요한 일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위화는 그 사건 속에 숨어있던 이야기들을 나중에 다시 풀어냈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죽음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예로, 아래의 13p에 대한 이야기는 253p에 가서 자세하게 언급된다.

 

 

  나는 멍하니 선 채 203번 버스를 기다렸다. 느닷없이 자동차 여러 대가 연이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짙은 안개가 눈에 스며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들이 연이어 충돌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안개를 뚫고 내 옆을 스치더니 숨 쉬는 소리 쪽으로 돌진했다. 소리들이 끓어오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폭발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버스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야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으니 203번 버스가 오지 않겠구나,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p.

 

 

  “안개가 아주 짙은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이 나요.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요.”

  문득 나의 첫째 날, 셋집을 떠날 때 안개 속을 거닐던 게 생각났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 차 여러 대가 연쇄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량 한 대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어서 비명 소리가 물 끓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혹시 버스 정류장 팻말 옆에 서 있었어요?”

  내가 묻자 그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네, 거기에 서 있었어요.” -253p.

 

 

  위화는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먼저 보여 주고, 그 사건을 통해 어떤 인물이 죽었고, 그 인물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나중에 밝히는 방식으로 많은 인물을 제시하고 풀어냈지만, 이야기가 흐트러지거나 산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체 구성이 치밀하고 촘촘하게 짜여있다고 불 수 있다. 위화는 소설 속에 일어나는 모든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죽음에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도록 했다. 저승에서 만난 인물들과 양페이는 이승에서 이미 마주쳤던 사이였다. 위화는 이 치밀한 구성을 통해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말하고 있었다.

 

  비현실과 현실의 동시성에 대해서도 나는 주목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있을 법하게 그려놓다 보니, 우리는 <제 7일>의 세계가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현실이었다면 빈의관에 가는 건 산 사람들이지만, <제 7일>에서는 죽은 자들이 직접 빈의관으로 간다. 게다가 해골들이 장기를 두고 있으며, 사고로 망가진 얼굴을 몇 번의 손놀림으로 재정비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어떻게 보면 죽음 이후의 세계 자체가 가장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위화는 여기다 현실의 이야기를 슬쩍 집어넣는다. 바로 아이폰4S와 중국판 SNS인 QQ공간의 등장이다. 사후세계에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비현실과 현실의 동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죽고 나서 재산이나 명성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기존 작품 속 저승에서는 이승에서의 재정 상태나 명예 같은 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 7일> 속에서는 살아 있을 때 모습이 저승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로써 소설 안에서는 비현실(저승)과 현실(부익부 빈익빈)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제 7일>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양페이와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리칭, 하오 아저씨와 리 아줌마 등등. 나는 모든 인물들에게 애정을 느꼈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이 인물들을 통해서 나는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나처럼 어느 인물 하나 허투루 흘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 위화도 글을 쓰는 내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제 7일>을 읽고 나니, 위화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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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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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적나라해서,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을 아사이 료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버린 것 같아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게 무엇이었는지는 소설 뒤표지에도 나와 있었다. 누군가를 비웃어 놓은 SNS, 이중성, 외로움 등등.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뜨끔해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내 마음이 불편했다는 건 아사이 료가 그만큼 현실을 잘 그려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옮긴이의 글’에서 옮긴이가 사용한 호러 소설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진심으로 이 이야기는 호러 소설에 가까웠다. SNS에서 안에서 우리는 행복한 척, 즐거운 척, 매사에 열심인 척을 하고 있었지만, 완벽하게 속여내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관통하는 소설이 나오는 것도 막지 못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트위터를 하고, 취업한 친구를 바라보는지, 아사이 료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호러에 가까웠다.

 

 

  트위터와 취업은 모두 내게 해당되는 이야기여서 소설의 내용이 흥미로웠다. 이십대 초반의 내 또래라면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공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옛날부터 있었던 걸 보면, 굳이 이십 대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취업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그 가운데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본인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했지만, 가까운 친구나 같이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가 먼저 취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정말 순도 백퍼센트의 마음으로 그 친구를 축하해줄 수 있을까?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하더라도, 그 진심에는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가 약간 섞여있을 거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타로가 간 총문서원이 평판이 어떤지 알아본 다쿠토나, 미즈키가 입사한 다이니치 통신 에어리직 블랙이라고 찾아본 리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그런 걸 알아본다고 해서 고타로와 미즈키의 입사가 취소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입장을 바꿔서 고타로나 미즈키가 입사를 못하고 있었다면, 다쿠토나 리카가 입사한 곳이 어떤 평판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쯤은 찾아보지 않았을까? 회사의 평판이 좋지 않다거나 그저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조금은 고소해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이야기였지만, 우리나라에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일단 나부터 해당되는 이야기여서 그런 듯 했다. 일본에는 트위터를 하는 취업준비생이 있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그건 저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아사이 료는 잘 풀어내다 못해, 날카롭고도 정확하게 그려냈다. 거기엔 아사이 료가 89년생이라는 것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었다. 같이 있으면서도 트위터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 실시간으로 내가 있는 상황을 SNS에 올리는 것, 누군가 내 글을 리트윗해 주거나 관심글로 지정해 주는 게 기분 좋다는 것,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SNS에 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 트위터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줄곧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카는 언제 이런 사진을 찍어서 보정까지 해 트위터에 올린 것일까. -77p.

  리카도 다카요시도 좀 전까지 같은 장소에 있었으면서 굳이 다른 기계로 다른 얘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88p.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트위터에도, 페이스북에도, 메일에도, 그 어디에도 쓰지 않는다. 정말로 호소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데에 쓰고 답장을 받는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60p.

 

 

  한편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 아사이 료가 어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나는 아사이 료가 인생에서 풍파를 많이 겪은 노인처럼 느껴졌다.

  역시 상상력이 없는 인간은 고역이다. -81p.

  다카요시에게 “진심으로 부탁할게!”하고 손을 모으는 고타로는 역시 피에로가 될 줄 아는 어른이구나, 생각했다. -111p.

  아무것도 아니지만, 앞으로는 이제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내 이름은 바뀌지 않는구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금의 나인 채로잖아. 앞으로 줄곧. -254p.

 

 

  소설을 다 읽은 뒤에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고, 디테일해서 나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릴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꾸미고 지어내는 사람들. 상대에게 질투가 나지만, 아닌 척 하고 있다가 뒤에서 이중성을 보이는 사람들. 외롭지만 더 외롭지 않기 위해 티를 내지 않는 사람들. 취업에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 이건 내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의 모습이기도 했으며, 실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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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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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기 전, 나는 책의 뒤표지부터 살펴보는 습관이 있다. 일종의 가늠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개의 심장>이 유럽 최초의 개인간, 샤리꼬프에 대한 내용이란 걸 알게 되었다. 우선, 러시아 문학에 문외한인 나 자신에 대해 반성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나의 배경지식이 너무나도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만의 감상을 앞세우기로 했다. 어쨌든 가늠의 결과, 나는 샤릭(개)이 샤리꼬프(개인간)로 거듭나는 그 과정에 대해 다뤄진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샤리꼬프가 된 ‘그 이후’에 대한 것이었으며, 샤리꼬프가 필립 필리뽀비치의 부속물로써 순순히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샤리꼬프는 정말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쩌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서, 거주증을 요구하는 등의 사회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나는 소설을 읽어 보기 전에 샤리꼬프가 한낱 괴물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소설이 쓰인 1920년대에 비하자면, 나는 지금 첨단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샤리꼬프에 대한 단상은 그 당시를 살아가던 미하일 불가꼬프의 것에 반 푼어치도 따라가지 못했다. 또한, 끌림 추군낀의 뇌를 샤릭에게 이식하자, 외모 또한 끌림 추군낀의 것으로 변해간다는 발상도 나는 해본 적이 없었다.

 

 「아빠, 아빠는 왜 그렇게 나를 심하게 학대하고 그러세요?」

  갑자기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필립 필리뽀비치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안경을 번쩍거리며 들었다 놓았다.

 「누가 당신 <아빠>란 말이야? 이게 무슨 허물없이 구는 태도야? 난 다시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나를 부를 때는 이름과 부칭을 존중해서 부르도록!」

  그의 입에서 갑자기 불손한 표현들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란 말이 그렇게 당신한텐 무익하고 쓸모 없단 말이야!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ㅡ133p

 

  이 장면에서 나는 묘한 공포심을 느꼈다. 문득, 샤리꼬프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마 필립 필리뽀비치와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 같다. 필립 필리뽀비치가 샤리꼬프를 탄생시키긴 했지만, 그를 마음대로 할 순 없었다. 샤리꼬프는 하나의 독립된 인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샤릭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개로 대할 수도 없었다. 개와 완전한 인간 사이에서의 간극, 샤릭(혹은 샤리꼬프)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거기다 자신을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 있냐고 되묻는 샤리꼬프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샤릭의 의사 같은 건 애초에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 필리뽀비치에게 있어 샤리꼬프는 어떤 존재였을까?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까? 만약 샤리꼬프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필립 필리뽀비치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었다면, 그래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그때엔 ‘아빠’라는 말을 허락해주었을까? 이런 점에서 나는 묘한 혼돈을 느끼기도 했다. 어찌됐든, 우리는 개를 낳을 수 없고, 낳아본 적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낳을 수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돼!」

  갑자기 개가 큰 소리로 외치며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ㅡ223p

 

  이 장면에서 나는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개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샤릭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어쩌면 완전한 샤릭이 아닐지도 몰랐다. 샤리꼬프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샤릭.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샤릭과 샤리꼬프 중에 어떤 것으로 부르는 게 옳을까? 어떻게 부르던 간에, 그 이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샤리꼬프로 살아가던 샤릭은 결국 개로 돌아가고 만다. 샤릭을 마음대로 샤리꼬프로 만들었던 것처럼, 샤리꼬프를 다시 샤릭으로 되돌릴 때에도 그의 의사는 명백히 무시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샤리꼬프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탓할 수는 없었다.

 

 

 

  소설을 전부 읽고 나니 호접지몽이 떠올랐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샤릭은 자신이 샤리꼬프로 살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샤릭이 샤리꼬프인지, 샤리꼬프가 샤릭인지, 어느 쪽이 어떤 쪽을 지배하고 있는 건지, 주체는 누구인지, 감당할 수 없는 물음들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내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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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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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리베르탱고

―구병모,『파과』를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리베르탱고가 듣고 싶어졌다. 평소에 이런 종류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즈음 나는 리베르탱고에 꽂혀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리베르탱고였을까. 그럴 듯한 이유를 댈 순 없지만, 감상을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리베르탱고를 듣고 있다. 스페인어로 자유를 뜻하는 단어인 ‘Libertad’에 'tango'를 합친 단어가 리베르탱고이니 해석하자면 아마 ‘자유의 탱고’쯤 되지 않을까. 어쩌면 네일아트를 받은 조각의 오른손에서 나는 자유를 엿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라진 왼쪽 손목에서 본 것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파과’가 편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려하다 못해 과하다는 느낌의 문장들에 나는 쉽사리 책장을 넘길 수 없었고, 똑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기 일쑤였다. 파과를 다 읽은 지금에도 차라리 문장이 매끄러웠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떤 문장은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늘어져 있었고, 솔직히 많이 불편했다. 거기다 비문과 오문도 곳곳에 보여서, 한 번에 뜻을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파과’가 좋았다. 문장만으로 ‘파과’를 판단하기엔 그 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장의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보다는 ‘파과’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8월의 주목 신간을 써야했을 때, 나는 ‘파과’를 가장 먼저 목록에 올려두었다. 60대 현역 여자 킬러의 이야기라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곁가지처럼 펼쳐져 있을 주변 인물들과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강 박사와의 이야기, 투우의 어릴 적 이야기, 무용에 관한 이야기, 당숙 집에서의 이야기, 류와 조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어느 것 하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을 끼워놓은 게 아닌가 싶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음으로 실보다는 득에 가까운 게 아닐까? 거기다 흐름이 끊기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엔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높은 밀도가 느껴진다. 특히 강씨 아버지를 고통 없이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조각 자신이 낳았던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고통 없이 죽이고 싶었다는 생각으로 번지고, ‘그러니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까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영원한 주류는 없다. 조각만 봐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무리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까지 온전하게 막을 수는 없다. 물론, 흐름을 더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흐른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늙음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파과’를 읽고 나서 그 생각은 더 단단하게 내 속에 자리 잡았다. 늙음은 죄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젊은 날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벌이 아니었다. 방역업자로서는 늙음이 치명적일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키우는 늙은 개에게 도망갈 길을 가르치고, 파지 줍는 노인들 돕기 위해 자신의 목표물을 놓치는 조각에게 나는 연민이 들었다. 게다가 조각이 자신의 신체적인 노화에 초조해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냥 모든 걸 다 내려두고 치킨집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다른 사람을 피도 눈물도 없이 죽이는 조각에게 드는 연민이라니, 아이러니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조각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편에 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각이 방역을 하는 장면이 나올 때에도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냐는 둥, 조각의 어린 시절이 조각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둥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무리가 아쉽다는 생각과 동시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강 박사의 딸이 어떻게 구해졌고, 강 박사가 조각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등등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실은 남은 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그렇게 얘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투우가 완전히 눈을 감은 다음에야 그가 누구였는지 떠올린 조각이었지만, 글쎄, 너무 구구절절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이 부분만큼은 조금 헷갈린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각이 기억해냈다는 걸 투우가 알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란 생각 정도는 든다. 그렇지만 조각이 박카스 할머니로 오해받고,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방역업자로서의 모습을 지운 채 살아가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에 이상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소설에 너무 몰입해서 드는 마음이겠지만, 이렇게 몰입하는 것도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구병모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파과(破果)와 파과(破瓜)에 관한 감상은 글쎄?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든다. 그냥 전자의 파과 홀로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구병모 자신도 대출혈 자폭 서비스라 말하는 것을 보니, 같은 발음의 두 단어로 장난을 치는 것에 대해 큰 자신감이 들지는 않나 보다. 판잣집에서 미군을 해치우고 나온 조각에게는 두 번째 단어가 어울리겠지만, 갱년기는 훨씬 오래 전에 지났을 조각에게는 좀, 그렇지 않을까? 어쨌든 흠집이 난 과실이라는 뜻의 파과와 조각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완벽하게 일치했다. 흠집이 난 과실도 처음부터 흠집이 나있진 않았을 것이고, 파과도 처음부터 늙어있었던 게 아니니 말이다.

 

  감상을 마무리하는 지금에도 나는 리베르탱고를 듣고 있다. 만약에 파과가 영화로 나오게 된다면 마지막 장면엔 리베르탱고가 좋을 것 같다. 또한, 조각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 ‘피도 눈도 없이’에 나온 배우 이혜영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그냥 개인적인 견해이니, ‘그냥 그렇다고’란 말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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