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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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4월, 인도네시아 반다제도의 한 건물에서 램프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네덜란드 관리 송크는 그것을 공격 신호라고 판단했고, 며칠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섬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에서만 자라는 향신료, 육두구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아미타브 고시의 《육두구의 저주》는 이 학살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묻는다. 400년 전 작은 섬에서 벌어진 이 일이 오늘날 기후 위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반다제도의 학살은 단순한 과거사의 폭력이 아니다. 그 순간부터 땅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두구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화산도, 숲도, 사람도 자원이었고, 원주민을 쫓아내고 노예를 데려와 육두구 농장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고시는 이런 방식의 땅 개조를 '테라포밍'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인간이 화성을 개조하는 공상과학 개념이지만,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미 400년 전부터 지구를 그렇게 다루고 있었다. 


그 폭력은 지금도 형태만 바꿔 계속되고 있다. 고시는 기후 위기를 '또 다른 이름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16~17세기에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죽인 건 총이 아니라 질병과 환경 파괴였듯, 지금도 기후 재난은 가난한 나라와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닥친다. 하지만 그 피해는 여전히 '불운'이나 '자연재해'라는 말로 가려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시는 땅과 나무, 동물에 다시 귀 기울이는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감각을 아직 간직한 사람들, 토착민이나 자연과 가까이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하지만 그는 이것이 낭만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안다. 환경을 명분으로 가난한 사람을 배제하는 일도, 신비주의로 포장된 차별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진짜 생태적 접근은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땅의 고통과 사람의 고통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도 많은 것을 '자원'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다. 고시는 그 당연함을 다시 묻는다. 400년 전 반다제도에서 시작된 질문을, 지금 우리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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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태도의 차이 -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유미진 옮김 / 클로츠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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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생각이 너무 앞서가 버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생각에는 사실만큼의 무게가 있다.

그런 무게 있는 생각들을 가불하듯 미리 앞당겨 갖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매순간 홀가분하게 사실과 마주하고 싶을 따름이다."


철학자가 쓴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줄 몰랐다.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오히려 무거운 생각들을 앞당겨 갖지 말라고 한다. 






이 책의 조언들은 역설적이다.


비우고 싶으면 먼저 채워보라고.

금욕하고 싶으면 먼저 탐닉해보라고.

가진 적도 없이 버리려 하면

마음이 텅 비는 게 아니라 헐게 된다는 말이 묘하게 와닿았다. 




저자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성격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은 만능 점토처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유연함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나를 지키겠다고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수록,

오히려 거대한 가능성 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셈이라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느라,

실패를 피하느라

정작 내 인생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매순간 홀가분하게 사실과 마주하고 싶다면,


이 책의 47개 문장이

의외로 긴 여운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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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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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저녁, 레스토랑 티백 꼬리표에 한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괴테 연구가 도이치는 평생 괴테를 연구했지만 이 문장을 본 적이 없다. 괴테가 정말 이 말을 했을까?


도이치는 괴테 전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사전을 검색하고, 동료들에게 묻고, 밤마다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유학 시절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이 말은 한때 도이치에게 청춘의 주문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주에 가깝다. 자신이 평생 쌓아온 학문은 그저 괴테의 덧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명언을 찾는 과정에서 도이치는 뜻밖의 진실과 마주한다. 그 문장은 여러 명언 사이트를 거쳐 티백 회사에 도착했고, 그 뿌리는 독일로 이어진다. 가족과 함께 간 독일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스즈키 유이가 쓴 이 소설은 평범한 순간들로 채워진다. 가족과 홍차를 마시고, 고양이가 울고,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들. 명언을 찾는 과정은 이런 일상 속에서 천천히 펼쳐진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괴테와 티백, 학문과 일상, 아버지와 딸, 스승과 제자, 꿈과 현실. 서로 다른 것들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채 하나의 이야기 안에 들어온다.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드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면, 이 소설은 사랑을 통해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모든 것은 이어져 있고,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그 연결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 말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로 만드느냐는 것을.


문장에 기대어 버텨 본 사람에게, 특히 더 닿을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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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코딩 유어 도그 - 과학으로 반려견을 해석하다
미국수의행동학회 지음, 이우장 옮김 / 페티앙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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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개에게는 새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 《디코딩 유어 도그》는 이 말이 틀렸다고 말한다. 열두 살 최몽구를 키우는 나는 이 문장 앞에서 멈췄다. 노령견이라는 이유로, 이미 늦었다는 생각으로, 나는 몽구의 분리불안을 그저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건 몽구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나를 위한 회피였을지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몽구가 보였다. "개는 항상 학습하고 있다. 우리가 특별히 뭔가를 가르치지 않을 때도." 이 문장이 가장 뼈아팠다. 몽구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12년 동안 배워왔다. 내가 바빠서 대충 반응할 때, 산책을 미룰 때, 함께 있어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몽구는 그 모든 순간을 학습했을 것이다.


노령견 챕터를 읽으며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인지기능장애 증후군, 밤낮이 바뀐 일과, 점점 늘어나는 불안과 초조함. 이 책은 노령견에게 일어나는 행동 증상은 보통 건강 문제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몽구의 행동을 단순히 나이 탓으로 치부하고 넘어간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게, 실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였을까.


"오로지 개에게만 관심을 쏟을 시간을 매일 조금씩 갖는다." 몇 분이 될 수도 있고 몇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온전히 개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라고 책은 말한다. 나는 몽구와 함께 있으면서도 정말로 몽구에게만 있었던 적이 얼마나 될까. 몽구의 외로움은 내가 집을 비운 시간이 아니라,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보던 그 시간들에서 왔을지 모른다. 




책이 반복해서 말하는 건 책임의 방향이다. 완벽한 개는 없고, 모든 임무를 잘해내는 개도 없다. 개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그것이 보호자의 의무다. 개가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시점에 마땅히 해야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는 우리를 화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눈, 귀, 꼬리, 몸으로 우리에게 말하려 할 뿐이다. 


나는 정말 몽구의 행복을 생각했나. 아니면 내 편의를 몽구의 이름으로 포장했나. 열두 살 최몽구.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는 항상 학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아직 배울 수 있다. 몽구를 제대로 보는 법을.


반려견과 함께 산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개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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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고노스케 길을 열다 - 경영의 신이 운명을 개척해온 영원불멸의 원칙 마스터스 5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김정환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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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소닉을 세운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121편의 짧은 수필. 잠언에 가까운 글들 속에서 그는 매일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마쓰시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아홉 살에 집을 나와 일을 시작했고, 병약한 몸으로 평생을 버텼다. 그가 쓴 "길을 열려면 일단 걸어야 한다"는 문장은 그래서 가볍지 않다. 걷는 것이 곧 사는 것이었던 사람의 언어다.


흥미로운 건, 이 책이 개인의 성공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되, 그것을 누구에게나 닿는 언어로 바꿔놓았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길이 있다"는 말은 특별함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비교를 멈추라는 뜻이다. 남의 길을 부러워하며 서 있지 말고, 지금 여기서 자기 발로 걸으라는 것. 결국 중요한 건 화려한 결과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태도와 선택이다.


책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마쓰시타는 거창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한다. 인사를 나누는 일,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 끝까지 궁리하는 습관. 이 평범한 것들이 쌓여 길이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1968년 첫 출간 이후 일본에서만 57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경제 호황기에도, 버블 붕괴 이후에도, 잃어버린 30년에도 읽혔다는 건 이 책이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을 열다》는 마쓰시타 사상의 출발점이다.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경영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그의 철학이 여기서 시작된다. 거창한 비전보다 일상의 성실함을, 결과보다 과정을 말하는 책. 불확실한 시기에 내 길의 방향을 다시 점검해보고 싶다면, 이 책부터 천천히 걸어가듯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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