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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김이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일단 놀랐다. 국내작가의 환상문학이 단편집으로 묶여 나올 정도가 되었다는 것,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했다는 것에. 우리의 환상문학도 알게 모르게 발전하고 있던 것이다. 척박한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의 작가와 출판사가 얼마나 대단한 도전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의 발걸음은 언젠가 제대로 평가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작품성이 고르지는 않다. 감탄하며 읽은 것도 있고, 읽기 민망할 정도의 작품도 있었다. 가장 앞에 실린 [미소녀 대통령]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한 작품이다. 문근영 대통령, 다코다 패닝 경호원을 등장시킨 용기는 가상하지만, 평행우주개념 같은 설정과 스토리 전개가 진부하다. 또한 착취당하는 소녀, 착취하는 어른이란 대립구조를 통해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낸 부분도 투박한 서술때문에 우습게 되어 버렸다. 마지막 부분(p.26이하)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도 거슬렸다.
[크레바스 보험사]와 [마산 앞바다]도 별로였다. [크레바스 보험사]의 문제는 거친 문장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했던 영현은 그런 사건 속에서 찰나의 죽음을 선사하는 위험 요소가 세상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몸서리치도록 명확하게 깨달았다.'(p.38)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알겠지만, 답답하고 늘어진다. 전체 문장이 그렇다. '원래 스타일이 그렇거든?'이라고 한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작가 10명의 문체를 한번에 접하기 때문에 쉽게 비교된다. [마산 앞바다]의 경우 느낌은 괜찮지만 이야기가 어수선하고 임팩트도 약하다.
[문신] 미야베 미유키의 <브레이브 스토리>, <이코 안개의 성>, 쓰네카와 고타로의 <야시>와 비슷한 느낌이다. 환상적인 분위기도 잘 살렸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밋밋하다고나 할까. [월리엄 준 씨의 보고서]는 괜찮았다. 세계 아동문학의 거장 '머랫W.E.프라이러리'의 갑작스런 죽음과 담당 편집자 월리엄의 모험(?)이 축인데, 플롯이 살아있고 흥미진진하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반전이다. 너무나 통속적이고 뻔한 반전이라 차라리 없는게 나았다.
[할머니 나무]와 [몽중몽]에 대해선 코멘트 하지 않겠다. 기억에 남는게 없다.
[서로 가다], [초록연필], [콘도르 날개] 이 세 작품은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의 최고 명작이다. 짧은 분량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서로 가다]의 배경은 쿠빌라이 칸이 몽골대제국을 건설하던 시기이다. 서쪽에 있다던 어머니의 고향과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그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일대기가 핵심이다. 역사물의 묘미와 종교적 향취까지 만끽할 수 있는 멋진 작품.
[초록연필] 세계적으로 희귀한 명품연필 'LAPIZ VERDE'(초록연필)을 둘러싸고 직장동료 양홍과 은경이 벌어는 에피소드, 'LAPIZ VERDE'를 만든 루까스 베르데의 일대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이질적인 두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조화되는데다, 루까스 베르데의 삶이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읽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하지만 양홍과 은경의 플러스펜 100개 실험(p.210)은 옥의 티다. 안에다 칩을 심고 이동상황을 모니터링한다니…평범한 직장인이 저런 게 가능할 거 같은가? 황당한 군더더기.
[콘도르 날개] 기대하지 않고 읽다 놀란 작품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은 심야 케이블TV에서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란 제목의 3류 영화를 본다. 이후 그의 삶은 저 영화의 장면과 묘하게 엉키며 뒤죽박죽이 된다. 도대체 남자에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저 이상한 제목의 영화는 뭐란 말인가?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