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가 "의미의 우리" 이 말을 쓴 건 <문학노트> 2권에 포함된 에세이 "참여"에서. (*같은 글이 다른 번역으로 오른쪽 책 <미학과 정치>에 실렸던 것 같은데 확인해보고 싶지만 집에 있는 책이 어제부터 지금까지 찾아지지 않고, 알라딘이나 아마존이나 책 목차를 볼 수가 없다. 루카치를 반박하는 글 "강요된 화해"는 분명 둘 다에 실렸다. "강요된 화해" "참여" 아도르노의 글은 이렇게 두 개가 저 책에 실렸다. 아니다 하나만 실렸다, 이게 확인이 안되니 확인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님에도 계속 더 하고 싶어지고..... 오후에 집에 오면 샅샅이 또 찾아보기로). 


사르트르에게 문학이 참여일 수 있는 건 문학이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미를 다룬다." 


이렇게 말하고 반박을 시작한다. 반박하는 아도르노에 따르면: 작가는 의미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쓰는 어떤 어휘도, 그것이 작품에 쓰임으로써 작품 바깥에서 소통의 언어일 때 가졌던 의미 전부를 박탈당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 변화도 겪지 않는 게 아니다. 어휘가 작품 안에서 갖게 될 변화한 의미, 그리고 그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작품 바깥에서 가졌던 의미의 잔재. 예술적 계기와 비-예술적 계기.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이 작품의 형식 법칙을 구성한다. 


이 반박의 문장들이, 이게 번역의 문제일까. 아도르노식 복잡한 문장의 어딘가가 훼손된 것같다..... 느끼게 하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문장들이긴 하다. 작은 훼손을 견디지 못할 문장이면 좋은 문장이냐? : 이런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름. 작은 훼손도 견디지 못할수록 좋은 문장이구나 당연히. 어떤 훼손도 하지 말아야 할 문장.  


어쨌든 저 제목의 문장은: "구속을 찬미하는 이들이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을 심오하다 여길 것이다. 이들은 언어가 의미의 우리를 흔들고, 언어가 의미로부터 갖는 거리를 통해 작정하고 의미의 실증적 행세에 거역하는 텍스트를 참을성있게 듣지 못할 것이다." 


 아도르노를 번역해 본 모두가 이랬겠지.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다: "Those who sing the praises of binding ties will be more likely to find Sartre's No Exit profound than to listen patiently to a text in which language rattles the cage of meaning and through its distance from meaning rebels from the outset against a positive assumption of meaning." 


모더니즘 언어 실험의 핵심, 그 의의를 더 잘 말하기도 쉽지 않을 한 문장이며, 

책을 얼마나 더 느리게 읽을 수 있나. 천천히 읽어야만 하나. 읽기의 어휘당 속도에서 내 책이 가장 느린 책이다. 이런 걸 놓고 모더니즘 작가들은 경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길 쓰려던 포스트. 


오직 천천히만 (아주 아주 천천히만) 읽을 수 있는 책. 아무나 쓸 수 있는 책이 아닌 책. 

이제 나가야 하니, 다음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 다시 더 잘 실패...;;;;;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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