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르친다는 것
월리엄 에어스  홍한별 / 양철북 / 288쪽
(2014. 1. 17.)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조지 오웰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네 가지 제시했다.
  첫째, "순수한 이기주의. 똑똑해 비이고, 인구에 회지되고, 죽은뒤에도 기억되고, 어릴 때 날 무시했던 어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
  둘째, "미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과, 언어의 적절한 배열에서 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소리와 소리가 겹쳐질 때 나는 효과, 잘 쓴 산문의 견고함과 잘 쓴 이야기의 리듬이 주는 즐거움.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느끼는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
  셋째,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진정한 사실을 발견해 후대가 쓸 수 있게 남겨두고 싶은 욕망."
  넷째,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최대한 넓은 의미로 썼을 때이다.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밀고 나가고 어떤 사회를 추구해야 하느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고자 하는 욕망."

  조지 오웰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다. 평화로운 때라면 장식적이거나 묘사적이기만 한 책을 썼을 테고 나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때이다 보니 나는 일종의 선동가가 되어가고 있다."
(p. 6)

 

 

  민주주의가 특별한 사회질서라면 그 구체적 특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주사회의 교육이 전체주의나 군주제 사회의 교육과 다른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간단하고 명료한 답이 있다. 전체주의는 복종과 순응, 위계질서, 명령과 통제를 요구한다. 군주제는 충성을 요구한다. 반면 민주주의는 자아를 실현하며 동시에 공통의 정치 및 경제 생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자유민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일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사회적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 마땅히 투쟁해야 하고, 각 개인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불분명성과 불완전성, 변화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는 공동생활의 한 형태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기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은 민주적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다.
  민주사회이 교사로서 우리는 관료주의적으로 돌아가는 기계 안의 톱니바퀴나 비인간적 시스템 안의 부속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이들의 성정을 돌보고 지원하는, 유연성과 자율성을 지닌 윤리적 행위자로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교사들은 사려 깊음과 돌봄의 본보기가 되고, 문제 해결과 의사 결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연관관계를 만들어나가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것, 뜻밖의 것, 새로운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p. 13)

 
  교육에 대한 지원은 점점 사라지고 민주적 이상에 걸맞지 않은 말들이 난무한다.학교는 시장처럼 이윤에 따라 움직어야 한다. 원하지 않는 아이는 처분 가능하다. 아이들은 소비자이자 노동자로 만들어질 원료에 불과하다 등. 우리는 이와는 다른 기준을 세워야 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차원적인 인간이며, 심장과 정신, 영혼을 지닌 사람이고, 생산적 성장과 학습이 이루어지러면 반드시 필요한 희망, 꿈, 갈망,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 이것이 교직의 지적·윤리적 핵심이고 이런 위기의 시기에 규합하고 확장해야 할 기준이다.
(p. 18)

 

  가르친다는 것이 미리 계획한 교육과정을 바로 전달하는 것이라거나 정리되고 적혀 있는 대로 정보를 전하는 것이라거나, 교사는 사무원 노릇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상이다. 가르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더 생생한 것이다. 더 많은 고통과 갈등, 기쁨과 지적 활동, 불분명성과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많은 판단과 에너지, 열렬함을 요구한다. 가르치는 일은 끝이 없다.
(p. 33)
 
 
  교육은 투쟁의 장이자 희망의 장이다. 세계를 새로이 보면 우리가 만들어온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지식이고 경험인가를 고민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투쟁의 장이다. 또 우리는 미래, 앞날, 새로운 것의 도래를 향해 손짓하기 때문에 희망의 장이기도 하다. 교육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에 참여하고 삶을 넓히며 변화시킬 것인가를 묻는 장이며, 우리가 우리 꿈을 마주하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추구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고 가능하면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리다. 교육은 근본적이고 영원한 인간의 질문이 때로는 절제된 형태로 때로는 격렬하게,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장이다. 어떤 것이 공정하고 공평한가,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의무를 갖나, 등의 문제다. 교사는 권위에 저항하고 질문을 확장하고 새로운 질문을 재기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무감하게 만드는 현대의 굴레로부터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p. 232)
 


  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되어야 할 것을 향해 가르치는 윤리적 과업이다. 어머니들과 같이 걷고, 바다의 소리를 담아, 사랑이라는 넓은 세계를 탐험한다. 도덕적 체계와 지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유리함과 불리함, 특권과 억압이 존재하는 물질적 현실을 접하고 이해하는 것도 포함한다.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신중하면서도 활기차게, 때로 분개한 채로 한데 모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학생들과 교사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의식이 행동으로 연결되는 이런 시점에, 가르침은 자유를 부르는 일이 된다.
(p. 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 다이앤 K. 오스본(편) / 박중서 / 갈라파고스 / 464쪽
(2014. 1. 10.)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고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녀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11)

 

 

  단테는 연옥을 통과해 나오면서 그곳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죄를 기억 밖으로 씻겨 나가게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강물을 마셨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심지어 죄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59)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스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나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나는 융을 읽었고, 그의 사고 체계가 근본적으로 슈펭글러의 사고 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버무리기 시작했다.
(88)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 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젋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페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그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보겠는걸. 아, 내 예술을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92)

 

 

 

  조이스의 소설에서처럼, 그리고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처럼, 진보의 열쇠는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강조하는 것에 놓여 있다. 조이스의 소설 속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하고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에 빠져 나가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p. 108)

 

 

  죽음과 낳음은
  동시에 다가온다.

  오직 탄생 - 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 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서, 사회의 내부에서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팔링게네시아)'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p. 144)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대무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이다."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서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여러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떤 구체화된 상징에 있다고 여겨질 경우, 명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된다. 이상적인 명상의 기능은 구체화된 답변을 초월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p. 223)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다.
(p. 304)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p. 380)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 383)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이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 - 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p. 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