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읽기 - 03

앞서 책을 개관하라고 했는데, 이제 드디어 책을 열고 본문을 읽어볼 시간이 왔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뭘까요? 사람에 따라, 책의 종류에 따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뭔가 알고 싶어서겠지요.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가령,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 시간 떼우기를 목적으로 읽는 잡지든 궁극적으로는 책을 읽음으로 뭔가 알고 싶어서 일 겁니다. 그것이 지식이 되었든, 감동이 되었든 책을 펼쳤을 때 우리는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잘 읽었다 소리가 나올까?
- 사람과 사귀듯 책과 사귀라!

얼마전 서재 모임이 있었어요. 저도 마태님 덕분에 맛좋은 갈비를 먹고 돌아왔습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습관처럼 되어 버린 제 버릇인데, 저는 종종 사람을 책에 비유합니다. 얼굴은 표지이고, 그 사람의 몸매는 책등, 몸피는 책 두께란 식으로 접근해가게 되더군요. 처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할 때 표지가 주는 인상, 자기 소개를 간략히 하는 것은 프롤로그를 읽는 것이죠. 자꾸만 사람을 읽어 버릇하게 됩니다. 대개 인사가 끝난 뒤의 처음 대화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질문이죠. 책도 매일반일 겁니다. 본문을 펼치기 전에 개관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죠. 만약 개관을 하고 난 뒤에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이미 그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별로 땡기지 않는 내용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죠. 대충 훑어보면서 관찰하게 되잖아요. 누군가 타인과 나누는 그 사람의 대화를 엿듣거나, 눈빛을 보거나 앉은 자세를 보거나 남의 이야기에 대꾸하는 그의 태도를 보거나 기타 등등 책이 그러하듯 사람 역시 가만 있어도 우리에게 여러가지 정보들을 이미 내보이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책 역시 개관해보았을 때 첫번째 질문거리가 생겨나지 않으면 별로 재미없는 책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한 번 보고 모르듯 책 역시 본문 중간중간에 뜻밖의 질문거리들, 나를 놀라게 할 만한 것들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죠.

그렇게 어떤 질문을 던졌을때, 책이 혹은 책의 저자가 어떻게 응답을 보내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독서(본문읽기)입니다. 많은 질문거리들을 던져주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싣고 있는 책이 좋은 책인 건 당연한 거겠지요. 한 번 만나보고나니 더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 사람을 두 번 만나게 되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정말 대화 자체를 녹음했다가 다시 들어보고 싶을 만큼 말도 잘하고, 내 안에서 내가 어떻게 이런 말들을 숨겨놓았지 싶을 만큼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상대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대화 중간에 "녹음 좀 할께요."라며 녹음기를 꺼내놓을 수 없지만, 책은 그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제 녹음기는 샤프 펜슬과 포스트 잇입니다. 저는 회사 책상 앞에 그리고, 집의 침대 머리맡에(요새는 주로 침대에서 로마인처럼 누워 책을 본답니다. 제겐 최고의 쾌락이죠.), 그리고 집 책상 앞에, 거실에 어디에나 포스트잇과 샤프 한 자루씩을 비치해두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읽는 책, 집에서 읽는 책, 거실에서 읽는 책, 서재에서 읽는 책, 침대에서 읽는 책이 다 다르고, 그곳에 쌓여 있는 책도 다르죠.

책을 읽다가 주저없이 질문을 던지고, 의문점에 포스트잇, 적절한 응답을 찾았을 때 포스트 잇, 대화의 핵심적인 부분에 포스트 잇을 붙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포스트 잇이 많이 붙어 있을 수록 좋은 책이겠지요. 처음 읽을 때는 대개 포스트 잇만 사용합니다. 샤프 펜슬을 이용하지 않는 까닭은 포스트 잇은 언제라도 상처없이 떼어낼 수 있지만, 샤프 펜슬로 그은 밑줄은 계속 남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면 샤프 펜슬은 언제 사용하는가? 두번째 읽을 때 씁니다. 어떤 상대를 만나서 처음 대화를 나눕니다. 아, 그날 분위기도 좋고, 밖에는 비도 내리고, 커피 한 잔은 왜 이리도 향기로운지... 제 아무리 속지말자. 조명빨, 화장빨을 외쳐도 두 번 만나고, 세 번 만나면서 살펴보니 분위기도 영 아니고, 한 두마디 하고 나니 소재거리도 없고, 게다가 유머 감각은 왜 그리 꽝인지, 게다가 지지정당도 다르고, 정치 성향은 물론이요. 종교적인 견해 차까지... 이런 다음부턴 피해다녀야 겠는 걸...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멋모르고 읽을 때는 아, 정말 대단해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책이었는데... 이상하게 밤새워 쓴 연애편지를 아침에 읽을 때는 왜 이리 겸연쩍은지 감동에 감동을 거듭하며 포스트 잇 붙여논 책들을 다시 읽으며 하나하나 붙였던 포스트잇을 다시 떼어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동이 식었거나 아니면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때 들어야 하는 것이 샤프 펜슬입니다. 앞서 책을 한 번 만 읽고 다 읽었다고 하지 말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읽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등장하는 늙은 연인들이 아니니까. 자꾸만 보면서 흠도 찾게 되고, 장점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좋은 구절이라 전부 밑줄을 치는 건 책을 너무 혹사시키는 거죠. 그러니 포스트잇을 붙인 페이지 중에서도 핵심적인 단어 혹은 문장을 찾아 그곳에만 밑줄을 칩니다.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는 것이죠. 이 문장 하나에만 밑줄을 치지만 읽을 땐 이 문단 혹은 이 장을 전부 다시 읽어본다란 약속을 하는 거죠.

대개의 책들은 이 정도 하면 잘 읽은 겁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한 번 보고, 두 번 봐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보면 볼수록 끌리고,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뭔가 새로운 것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새록새록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정말.... 보물창고죠. 결혼만 안 했다면 어떻게 집에 데려가서 밤새 얘기라도 하고 싶은 그런 상대들이 있는 거죠. 그런 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책은 대접을 잘 해줘야 합니다. 우선 책 싸는 비닐을 가져다 정성껏 포장을 합니다.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갈 채비를 하는 거죠. 맘에 드는 상대방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분위기, 칭찬, 선물.... 책에도 그렇지요. 우선 가까이 두어야 할 책이라면 비닐 포장 정도는 해주세요. 환경을 생각한다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접해줘야 하는 책도 있는 법이죠. 가령, 라면만 사줘도 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탕수육은 먹여줘야 하는 이도 있는 법이니까요. 좋아할 수록 잘 해줘야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한 진리입니다. 그렇게 장기전으로 가야 하는 책을 읽는 방법은 공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 경우엔 노트나 수첩을 가지고 다닙니다. 평소에 제 머리속을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순간엔 그야말로 멍청이 그 자체죠. 저는 제 아무리 절친한 친구의 핸펀 번호, 생일도 기억 못합니다. 그런 걸 기억하는데 원래부터 재능이 없었던 데다가 이름을 기억하는 일만으로 벅찰 때가 많거든요. 그리고 그런 걸 저 대신에 기억해주는 존재들이 있지요. 가령, 그 친구 전화번호는 핸펀에 내장된 메모리가 해줄 거고, 수첩도 그렇고, 생일은 달력이 기억해주니까. 저는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눌 생일을 기억 못한 적도 있습니다. 연애 할 때.... 몰라도 손 들라. 그리고 눈치껏 맞추라.

"개관하기 -> 포스트 잇 -> 밑줄 긋기"까지 왔습니다.
그 다음엔 뭐가 남았을까요?
그건 다음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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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추천부터 하구.

stella.K 2004-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재밌어요. 저를 책에 비유하자면 어떤 책일지 궁금하군요.^^

_ 2004-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덕분에 제 독서생활에 많은 반성을 합니다.
책읽기에 대해 일러주신 3개 모두 퍼가겠습니다. ^^

바람구두 2004-09-1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추천.... 바람구두는 추천에 목마르답니다. 흐흐.
글구 버드나무님은 방명록에 글 좀 남겨주세요. 흐흐.

▶◀소굼 2004-09-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퍼가고 추천;

urblue 2004-09-1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 칭찬, 선물... 살짝 웃음이 나오네요.

바람구두 2004-09-1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시방 절 떠보시는 거지요? 안 넘어가요. 흐흐.
버드나무님/ 반성은 필요없어요. 실천만 하실 수 있다면.
소굼님/ 저는 즐찾하겠습니다.
urblue님/ 이런 urblue님을 꼬시는 중이었는데, 수법이 들통나버렸군요.

갈대 2004-09-1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분위기, 칭찬, 선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니 이 어찌된 일일까요? 으음...
포스트잇 + 샤프(저는 연필로 하렵니다), 이제 좀 지저분하게 봐야겠습니다.

하이드 2004-09-1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끝까지 피지도 않고 깨끗하게 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었는데요,
공병호씨 책 읽고, 마음이 혹해서, 막 줄긋고, 포스트 잇, 형광펜, 접고, 메모도 하고, 등등 나달나달하게 책을 봤지요. 마음이 별로 안 좋더군요. -_-a 네. 저 A 형이요.
요즘은 그저, 메모할 부분 귀퉁이 접는 정도 책날개를 이용해서, 어디까지 읽었나 표시하기 정도입니다.
알라딘 서재를 시작하고 요즘 든 가장 좋은 습관은 책 읽고, 간단하게나마 리뷰를 한다는 점이죠.

2004-09-16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16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1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4-09-1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보다니? 저가 유부남 아저씨 떠서 뭐할라구요? 그래도 구두님은 신뢰할만한 분이니 무슨 책 같다고 하면, 저의 이미지 업그레이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흐흐.

2004-09-16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09-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편도 기대됩니다.

도서관여행자 2004-09-1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포스트잇을 써요... ^^

바람구두 2004-09-18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스리브리스님! 아유, 오랜만이셔요. 포스트잇... 그것 없었으면 책 읽는 게... 좀 지저분했겠지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