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 

서점만 가면 널리고 널린게 여행기지만, 유재현의 여행기는 분명 그 중 빛나는 군계일학 중 하나다. 낯선 풍경이나 신기한 유물, 에피소드에 매몰되지 않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조밀하게 읽어내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그만의 색깔은 일정한 독자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고, "유재현 온더로드"라는 이름의 시리즈물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 시리즈의 네번째 결과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쿠바를 담은 <느린 희망>에 이어 두번째 읽는 그의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럽다. 정작 그 자신은 길 위에서 길을 잃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네팔, 그리고 티벳, 홍콩까지. 그가 둘러본 아시아의 오늘은 여전히 참담하다. 독재 정권의 폭압이나 자본의 전횡, 아니면 전제 군주의 전근대적 폭력까지, 아시아의 민중들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는 저들 기득권층의 폭정 아래 질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짚어내는 저자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다. 이 날선 목소리가 10여년간 뒷걸음질 친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목도하면서 그가 느끼는 절망과 아픔 때문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하지만.

난 도대체 이 여행의 목적을 모르겠다. 부제로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책 속에선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 나라에 도착했다라는 간략한 서술 이후, 이내 정치적 상황이라던가 역사적 배경과 같은 설명으로 건너뛰어 버린다. 이 설명들이 유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들은 책상머리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지식들 아닌가. 저자가 그 나라까지 굳이 찾아가서 생색내며 쓸 필요는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오히려 여행기라는 틀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감", 말 그대로 "현장"의 당사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어떤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는지 아닐까.

물론 현장의 이야기도 일부 실리긴 한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는 다분히 고압적,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빈민운동을 하는 말레이지아의 청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하자 "당신, 공산당이야?"(말로 한 건 아니지만 생각으로) 라며 선을 긋는가 하면, 미얀마 정부가 싸이클론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장 활동가를 외세에나 의존하려고 하는 무력한 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요컨데, 저자에겐 현장의 움직임보다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본인의 판단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는 이도 저도 못마땅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그 실체조차 모호한, 그래서 편리한, "민중"이라는 이름을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정부의 도움을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았어요. (...) 전신주의 전선은 언제 가설될지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쓰러진 전신주를 세웠어요. 뭐랄까. 그건 마치 코뮌을 보는 것과 같았단 말이지요."
그는 그 현장에서 민중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했다. (...) 그러나 늦지 않게 그가 느꼈던 그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싸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미얀마의 민중들이 홀로 분투하는 까닭은 코뮌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미얀마의 군사정부가 복구에 힘을 쏟기는 커녕, 국제사회의 원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저자는 양비론을 들고 나선다. 군사정부도 나쁘지만, 원조를 시발점으로 개방을 강요하는 서방 국가들의 과거 전례가 군사정부가 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 자체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당장 생사의 기로에 선 민중들에게 구호물자가 더 시급한지, 서방의 원죄를 묻는 것이 더 시급한지는 분명한 일 아닌가. 원론이나 읊다가 생뚱맞은 민중예찬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무책임함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그리고 우리가 제 아무리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해도, 우리가 그 민주주의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사회의 진보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만이 담보할 수 있고, 담보해야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어깨를 걸고 연대하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게 우선이 아닐까. 의견이 다르고 전망이 다른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역설적으로 저자가 처음 방문했다는 네팔의 이야기는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유익했는데, 그것은 저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혹 저자는 그동안 보아 온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쿠바에서의 낯설음과 놀라움이, 그리고 그 경험 앞에서 저자가 보였던 깊은 사색이 그립다.

ps. 좋았던 책보다 나빴던 책 리뷰 쓰는게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성격이 나빠지고 있나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eople of the Book
- Geraldine Brooks 지음 / Penguin Group USA / ★★★★ 

춘천 북쪽 용화산 기슭 근처에 고탄이라는 동네가 있다. 집안 선산이 있는 곳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명절 때마다 꼭 가게 되는 곳이다. (그러고보니,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쯤 벌초하러 갔겠구나) 예전에는 춘천에서 이 곳으로 가려면 춘천댐 근처까지 올라가서 물길을 따라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기억이 잘 안 난다) 지내리를 통해 고개을 넘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생겼다. 이 고갯마루 무렵에서 뒤를 돌아보면, 산등성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물길을 따라 자리잡은 작은 마을들과 논밭들.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의 풍경이다. 

이 풍경 자체가 내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 풍경을 볼 때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마 수천년전 춘천 부근에 터를 잡았다는 고대국가 맥국(貊國)에 대한 이야기가 상상력을 불어넣은게 아닐까 싶다. 수천년 전에도 누군가가 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경이롭게 한다. 기껏해야 50~100년 사는 인간의 삶이 쌓이고 쌓여 수천년의 강을 이룬다. 누군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의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오늘의 나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 강물은 나를 지나쳐 또 수천년을 흐를 것이다. 그것이 역사책에는 담기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역사 아닐까.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이들 하나하나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할 방법은 없다. 큰 사건이나 업적이 없는 이상 개인의 삶은 역사학의 시야 밖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마을 제방의 저 돌을 쌓았고, 누군가는 우물을 파 시원한 물을 퍼올릴 수 있게 하였고, 또 누군가는 나무를 심어 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과거의 그들을 기억하는 출발점은 바로 그 간접의 증거들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상상력의 벽돌을 쌓아올려 모두가 볼 수 있는 작은 사원을 짓는 것이 문학의 몫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People of the Book>은 책보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사라예보 하가다(Sarajevo Haggadah)"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소재이지만, 작가가 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 것은 이 작은 책 한 권에 얽힌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다. 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작은 힌트들(곤충 날개, 얼룩, 흰 머리카락 등)은 각각 이 책이 거쳐간 인물과 시대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이어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땅의 오래되고 낯선 인물들의 모습을 우리 앞에 그려 놓는다. 하지만 이 이국적 풍광과 인물들 속에서 느껴지는건 이질감이 아닌 동질감과 공감이다. 슬픔과 기쁨, 분노와 용서, 탐욕과 박애.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우리는 모두 이토록 인간적이지 않았는가. 

책의 중심 소재가 된 "사라예보 하가다"는 실존하는 책이다. 하가다(Haggadah)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의 첫날밤(Passover Seder) 자식들에게 유대인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용되는 경전이다. 보통의 하가다는 간결하고 검소하게 만들어지는데 비해 사라예보 하가다는 매우 화려한 그림과 장정을 사용해 예외적인 사례로 더 큰 문화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예외성 때문은 아니다. 2차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을 거치며 이 책은 여러번 파괴될 위기를 넘겼는데, 그 때 이 유대교 경전을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무슬림이었다. 오늘날의 종교간 갈등(을 표방한 헤게모니 다툼)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종교적 관용의 실례는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소설로 재구성되면서 어쩐지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초점이 무슬림이 아닌 유대인에 맞춰지면서 목숨을 걸고 책을 구해낸 무슬림의 이야기는 곁가지로 밀리고 있는 탓이다. 신앙은 그 속성상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독선을 어느 정도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믿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독선을 넘어선 관용이 더욱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무슬림들에겐 그게 너무 쉽다.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백설공주를 도와주는 착한 일곱 난장이처럼 말이다. 그러니 결국 주인공은 유대인이라고 읽는건 그저 내 편견일까? 게다가 주인공인 한나가 알고보니 유대인 핏줄이었다는 내용까지 접하고나면 슬슬 짜증까지 밀려온다. 내가 보기엔 굳이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유대인이라는 핏줄에 집착하는거지? 

개인적으로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소재는 과감히 덜어내는 것이 좋은 작가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작가로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지 몰라도, 독자에겐 과잉으로 느껴질 뿐이니까. 작가의 전작들을 접해보지 못해서 이 작가의 일반적인 성향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까지는 딱히 들지 않는다. 좋았던만큼이나 실망도 남는 책이다. 

ps. 원서읽기에 대한 첨언 : 단어나 문장 등이 전체적으로 무난한 수준이니 원서로 읽어도 크게 부담은 없겠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굳이 원서로 읽을만한 이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중간중간 히브리어가 영역되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좀 귀찮기도 하다. 국내 번역본의 번역이 얼만큼 잘 빠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왠만하면 번역본으로 읽는게 무난할 듯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르몽드 세계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 / 권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건 대학 때 [언론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교수님은 한국 언론이 전하는 외신 보도가 몇몇 소수의 통신사에 지나치고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균형감 있는 국제 감각을 원한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을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추천하셨다. 물론 언론학 전공도 아닌 이공계 학생이 매달 일정액을 내면서까지 굳이 구독을 했을리는 만무했으니(-_-;), 교수님의 추천은 그저 추천으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대신, 그 기억 덕에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 책을 구해 보았으니, 교수님의 추천도 그냥 헛수고는 아니셨다고 마음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세계는 넓다. 그리고 넓은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이슈들이 지구촌 여기저기에 산적해 있다. 재밌는 것은, 한중일과 서유럽, 미국과 연관된 이슈들은 대개 익숙한 반면, 그 외의 지역 문제들은 대부분 생소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접하는 외신의 출처가 한정된 탓이다. 꼭 어떤 "주장"만이 서구 중심주의인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창 자체가 이미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창에 비친 풍경이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더라도, 한정된 주제와 한정된 지식만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한 때 식물에서 뽑아내는 바이오 디젤이 화석 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재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오 디젤 생산이 옥수수 등의 가격을 상승시켜 제3세계의 기아를 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관점에서는 정당한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부당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이슈들을 폭넓게 접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일방적 소스만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눈 양쪽에 차단막을 세워 한 곳만을 보고 뛰게 만든 경주마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서구 중심적 시각과 사고를 체득하며 살 뿐이다.

프랑스 <르몽드> 지의 국제문제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펴 낸 이 책은, 다른 시각에서 세계의 구석구석을 한번씩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물론 이들 역시 또 다른 서구 언론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적어도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각각의 이슈를 길게 다루지는 않지만, 주간지답게 요점을 꼭꼭 짚어내기 때문에 전반적인 개요로는 손색이 없다. 넉넉한 판형 속에 담긴 자료도 충실하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잘 도표화해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 등에서 참고 자료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읽다보면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너무 늦은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최대 2006년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는데, 책이 국내 출간된 것은 2009년이니 어떤 이슈들은 이미 과거의 사안이 되어 시의성을 잃은 경우도 많다. 현재 진행형의 이슈들도 2006년 이후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힌트가 없어 일일히 찾아봐야만 한다.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 간략히라도 정리해 줬으면 어땠을까. 물론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라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같이 게으른 독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별점 한 개를 깍는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월권행위라면 할 말은 없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1 Space Fantasia
-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 

이름을 처음 들어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그의 다른 작품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를 봤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작가를 따로 기억해 두지는 않았었는데, 그림체나 내용 등이 일본 작가라기보다는 미국 작가의 것처럼 보였기에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이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의 그 작가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이 작품집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SF 팬들 사이에서는 레전드 급으로 칭송받는 작가였나보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건 아니겠지만, 2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정식 완역본"의 형태로 "굳이" 재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대는 가질만하지 않을까. 그게 이 3권의 (만화)책이 태평양을 "굳이" 건너 내 손까지 들어오게된 까닭이다.

<2001 Space Fantasia> 라는 제목은 <2001 Space Odyssey>와 <천일야화>를 합쳐놓은 것이다. 아서 클락의 소설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2001 Space Odyssey>를 차용한 것은 이 작품 전체가 SF 고전들에 대한 오마주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뜻한다. 형식면에서는 긴 서사를 매일밤의 이야기 단위로 들려주는 <천일야화>를 빌려왔다. 그렇게, 전체 3권, 20개의 밤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대략 4세기에 걸친 인류의 우주 진출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처음 두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현재의 과학기술을 넘어선 상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하나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없다.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는 "과학적" 상상력 위에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얹은 덕이다.

태양계의 형성을 밀턴의 <실낙원>에 등치시킨 [죽음의 별] 에피소드는 작가가 이 두 요소를 어떻게 절묘하게 조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물질과 반물질, 그리고 그들 간의 소멸 등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이다. 하지만 반물질의 덩어리인 마왕성을 상정하여 태양과 대비시키고, 이를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싸움인 <실낙원>으로 연결시켜 미지의 우주를 마주한 인간의 두려움으로까지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게다가, 이 반물질을 통해 인간이 외우주로 뻗어 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설정은 선악과의 비유로 연결되면서 탁월한 복선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 내고 있지 않은가. 과학적 상상력이 정통 SF 로서의 품격을 책임져 준다면, 장르를 넘어선 보편성을 확보해 주는건 바로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진 내러티브의 힘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에피소드에 치중하는 면이 있지만(뒤로 갈수록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비슷해진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의 우주 도전을 다룬 한 편의 장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서사의 결말이 일종의 실패로 끝난다는 점이다. 작품 후반의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주로 인간이 외우주에 정착하려다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데, 많은 경우 고작 1~200년의 경험으로는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그럭저럭 "무난한" 환경의 거점 하나 찾는게 불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 "역사"의 부재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다른 SF 작품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로 뛰쳐 나갔지만,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상상해보라. 이 무한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줄 존재 없이 그저 혼자만의 힘으로 좌충우돌 전진하기란 얼마나 고된 일이겠는가. 한 개인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도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영화 <Contact> 에서처럼 아버지 같은 자상한 존재이건, 아니면 인간 따위 하며 비웃음을 날릴 시크한 외계인이건, 다른 지적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의 우주 진출의 결과가 아닌 선결조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주는 언제나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비록 지금의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이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물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주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여전히 광대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렇게도 작고 약할 뿐이니까. 이 작은 인간의 정신이 더 크고 거대한 무엇을 꿈꾸는것, 그것이 상상력의 힘 아니었는가. 이 작품을 보라. 과학이 열어젖힌 지평 너머로 새로운 상상력이 꿈틀댄다. 그 상상력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락
- 존 쿳시 지음 /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 

존 쿳시를 읽을 때면 난 김훈을 떠올린다. 담담하면서도 간결한 서술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굳이 수컷 냄새를 감추려 들지 않는 남성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두 작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다. 스타일만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도 묘하게 닮아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의 모습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의 모습이 겹치고, 이 작품 <추락>이 그리는 삶의 치욕(이 책의 원제목은 [Disgrace], "치욕"이다)은 <남한산성>의 그것과 닮았다. 전혀 다른 역사와 환경에 속한, 지구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두 나라에서 이렇게 닮은 꼴의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허나, 쿳시에게는 김훈의 세계가 지닌 단단함이 없다. 김훈의 단단함은 그가 지닌 자기 확신의 결과다. 제 몫의 밥벌이는 하고 살아왔다는 자긍심, 세상 모든 이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노동하며 그 삶을 이어온 인간의 생(生)은 그의 세계가 지닌 최후의 긍정이다. 시련은 인물들의 현재를 허물지만, 생 자체에 대한 긍정은 그 해체의 끝에 굳건히 버티어 선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다. 하지만 쿳시에게는 존재 자체가 긍정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지만 그 해체의 끝은 가늠하기 어렵다. 바닥을 모르는 추락. 그래서, 쿳시의 세계는 훨씬 위태롭고 또 불온하다.

쿳시의 이와 같은 태도는 시니시즘(Cynicism)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일부 사전에서는 시니시즘을 “견유주의[犬儒主義]”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인 견유학파(Cynics)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대의 시니시즘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현대의 시니시즘은 주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따라서, 그 사회의 한 구성원인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서구 문명의 오늘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이들 시니시스트들의 가장 주된 문제의식 중 하나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하더라도 스스로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통렬한 반성 없이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쿳시가 이와 같은 시니시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17세기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이주민)의 정착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는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행한 온갖 폭력들로 점철되어 왔다. 비록 쿳시 본인이 이러한 폭력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백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득권을 향유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회의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김훈과는 달리, 그저 살아있다는 것, 존재 자체는 그에게는 도저히 그 자체로 선(善)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1990년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와 함께 시작된 백인 지배의 종식은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집권으로 일단 그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오랜 차별의 결과 형성된 흑백 사회 간의 적대감과 기득권의 불균형, 빈부격차는 여전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흑인들이 오랜 기간 지녀온 분노와 박탈감들이 정치적 자유의 획득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곳곳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쿳시와 같은 백인 지식인들을 딜레마에 처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백인들이 지닌 기득권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흑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야말로 이 작품 <추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문제의식이다. 주인공인 루리 교수와 그의 딸 루시는 일단의 흑인들에게 공격당하고, 루시는 그들에게 겁탈까지 당한다. 응당 어느 아버지든 그랬을 방식으로 루리 교수는 분노하고 범인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하지만, 놀라운 것은 루시의 반응이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했다. 하지만, 분노하고 보복하는 대신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윤간의 결과 생겨난 아이를 낳기로 하고, 공격의 배후에 있었던게 아닐까 싶은 이웃 페트로스가 그녀를 첩으로 들여 보호하겠다고 하는 제안조차,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체념은 아니다. 그녀는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선택이 가진 불가피성을 옹호한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 뿐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 그래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지금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그리고 그 패배감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아야 할 거에요.(p.242)

 

이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 땅에 터를 내리고 몇 세대를 이어온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땅의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잃고, 심지어 흑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폭력에 노출되더라도, 그들 역시 떠날 곳 없이 이 땅에 묶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시는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굴종이라고?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프리카를 강제로 점령한 서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점령을 벗어날 무렵, 보호를 명분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서구인들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이 그 치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 그것이 아프리카의 역사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루리 교수는 이 아프리카의 역사 앞에 무엇을 해 왔던가?

시를 통해 정신의 쾌락을, 그리고 여자를 통해 육신의 쾌락을 누리며 기득권 속에 안락하게 살아가던 루리 교수가 추락한 곳은 바로 그 아프리카의 맨바닥이다. 그 추락의 과정은 한없이 나약하고 위선적인 지식인의 맨살을 드러낸다. 욕망조차 억제하지 못했으면서 사람들에게는 허세를 부리고, 정작 날것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으면서 경찰을 들먹이며 복수와 처벌에 목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렇게 쿳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 내린다. 명백한 불의 앞에서조차, 자신에겐 정의를 외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듯이. 결국 루리 교수도 싸움을 포기하고 침묵한다. 대신, 스스로를 죄수로 삼아 오지의 동물보호센터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돕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기를 택한 것은 일종의 속죄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제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오욕의 역사 속 아프리카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세상 뒤집어질 것처럼 분노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추락은 치욕이었지만, 치욕 이후의 삶은 그저 또 다른 삶인 까닭도 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오페라를 작곡하고, 개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만, 거창한 의미에의 강박이 없다면 이를 굳이 "실패한" 삶이라 이름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또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ps.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도,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없었을까 하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ㅇㅇㅊ 2011-11-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들렀는데, 소설에 대한 평이 정말로 인상깊습니다. 스토리의 요체를 제대로 짚은 좋은 글인 듯합니다.

turnleft 2011-11-22 03:47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