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동그라미를 여러 크기 여러 색깔로 그려준 뒤 생각나는 것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네 살 아이라 그런지 상상에도 폭이 넓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딴엔 열심히, 타이어와 멜론, 접시를 떠올렸다. 거기에 내가 아이스크림도 만들고 계란프라이도 만들어주니 제 딴에는 신기하여 박수까지 쳤다. 내가 처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상그림책인 '문제가 생겼어요'를 만났을 때 그 기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단순한 자국에 상상을 하는 힘,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작가의 능력에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 째 상상 그림책 '학교 가는 길'이 또 한 번 나를 만족시켰다. 판형은 전작보다 좀 더 작아졌고 표지에 음각으로 파인 발자국들은 좀더 사랑스러워졌다.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인 표지는 전작보다 더 큰 점수를 줄만 했다. 위의 그림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교 가는 길에 아이는 다양한 장소를 지나고 다양한 대상을 만난다. 학교 가는 길에서 아이가 만나는 길은 늘상 우리가 만나는 일이기도 한데, 그것이 발자국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 없다. 그런데 막상 발자국을 확장하여 그려보니 어쩜 이리 딱 들어맞는지 신기하면서도 친근했다. 족적(足跡)이라는 말이라던가 이력(履歷)이라는 말이 떠올라 괜시리 철학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깊이는 아니지만 아주 잠시. 학교 가는 길에 거친 나의 모든 발자취들이 개인적으로 본다면 역사라고 볼 수도 있을테니 그 사이 만난 대상과 지난 장소 그리고 떠올린 생각들은 모두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까 하여 무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량 역시 일반적인 그림책에 비해 많아, 상상을 위한 상상이라기 보다는 더 많은 상상을 가진 자의 상상 촉매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엔 어떤 자국이 그녀를 그리고 나를, 내 아이를 상상하게 할 것인가. 역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