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 노명우 선생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을 인용하여 캡쳐한 것과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캡쳐 사진)
이 글을 읽다, 최인훈 선생의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 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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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 명동은 전쟁 때 부숴진 대로였다. ‘실존주의’가 처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땐데 말하자면 실존주의적인 거리였다. 푸짐하게 부숴진 거리가 이 지역에 있는 어느 다방에서나 창밖으로 내다보였다. 어느 사람도 별반 영혼이나 빵이거나 간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긴말 접고 ‘不毛’ ‘廢墟’ ‘渴症’ 이런 따위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구보씨 느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금의 이, 외국에 가본 일도 없는 구보씨조차 그닥 겁나지도 않게 쓸데없이 되살아난 이 거리보다는 그때의 허물어진 터가 훨씬 건강하였다. 그 허물어진 터에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개화기 이래 명동이라는 이 땅뙈기를 덮어온 껍질이 한 번 부서지고, 맨살이, 이 땅의 벌거숭이 얼굴이 싱싱하게 드러나 있었다. 폐허는 미未개발지와는 다르다. 미개발지는 그저 물질일 뿐이지만 폐허는 사람 손이 간 땅이다. 그러면서 평지에 덕지덕지 분칠한 손때 묻은 땅이 아닌, 말하자면 지령地靈의 살결과 엉킨 채로 있는 땅이다. 지령은 무너져내린 벽돌 틈으로 수시로 들락거렸다. 지령은 낯가림 않는 평등의 신이다. 지령은 거드름도 없는 소박한 신이다. 모든 폐허는 이름 없는 한 신의 제단이다. 그러길래 프랑스의 폐허에서 외쳐진 실존주의라는 넋두리가 여기서도 대뜸 통했던 것이다. 실지로 그때 ‘몽파르나스’라는 것도 여기 있었다. 몽파르나스에 가면 늘 시의 무당들이 마른 명태 안주를 찢으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지령은 이 자리 저 자리로 다니면서 한 잔씩 얻어 마신다. 그의 임하심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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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는 최인훈의 지령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폐허가 되고 다시 재건을 하면서 폐허가 되던 때의 희생은 잊혀지는 모습을 본 최인훈 선생이 자신만의 어투로 `역사의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