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선생의 글은 이런 부분에서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대상을 공감해주는 듯 싶으면서도 멕이는 글이요.

물론, 종교도 인간의 일이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나타내게 된다. 21세기의 한국불교가 사찰음식을 중생에게 먹이는 것으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겠다 하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으로 중생이 해탈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위로의 마음을 얻는다면 의미있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뭔가 참 어색하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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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농업 사회는 한번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5000년 동안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먹을거리를 두고 요령 좋게 맛있게 조리 또는 가공을 한 경험이 없다. 제철의 신선한 식재료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 조리와 가공 방법, 이를 먹는 방식을 보면, 심란하다. 예를 들겠다. 요즘 맛있는 닭을 키우는 농가들이 참 많다. 가서 맛보자 하면, 백숙 아니면 닭도리탕이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조리하고 이를 상에 올린다. 닭을 여러 부위로 나누고 그 부위에 따라 조리 방법을 달리하여 다양한 맛을 즐기게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조리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국뽕 맞은 님께는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런 부분에 무릎팍을 탁 치고 '아하!' 합니다. 황교익 선생님의 글에서는 맛도 향도 느끼기 어렵지만, 꺼끌꺼끌한 식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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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는 두 가지 형태로 극단화될 수 있다. 한 형태는 덴마크와 스웨덴처럼 종교가 문화로 용해되어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의 전통이 문화 전통과 관습으로 살아 있는 경우이다. 또 다른 형태는 종교가 자본주의로 용해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종교의 융합, 발터 벤야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아우라’ 상실의 시대에서 발견한 법칙이다.˝

그러고 보니 더이상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이 제게는 없는 것 같아요. 아우라 상실의 시대, 신성이 없는 시대는 그만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도 없어지는 시대가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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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은 모두에게 이익이 가도록 조정한다는게 헛소리 라는걸 이제 잘 알잖아요.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해져서는 안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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